우리는 가끔 '처음'을 잊는다

넘어진 그자리 #7

by 손성호

"믿으실 지 모르겠지만, 스피커 때문에 시험을 망쳤어요."


"스피커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경은 몸을 앞으로 내 밀었다. 강의 중에 수도 없이 했던 얘기지만, 미경 앞에서 꺼내는 아픈 얘기는 태경의 마음을 다시 짓누르고 있었다.


"1교시 언어영역 시험지를 받고 문제를 풀고 있던 중,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천둥번개 비슷한 소리가 교실 안을 울렸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스피커에서 나던 소리더군요. 교실 앞의 양 끝에 설치된 두 개의 스피커가 찢어져 있었어요."


"스피커가 찢어져 있었다고요? 스피커 앞에 있는 천 말씀하시는 거죠? 그게 왜요?"


"나중에 안 얘기지만, 제가 시험본 곳이 공고였는데 성적 때문에 수능을 치르지 못하는 데에 열등감을 느낀 한 공고생이 전날 칼로 스피커를 찢어놓았다고 하더라고요. 수능 당일 아침까지 그걸 아무도 눈치 못 챘구요."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죠? 그러면? 듣기 평가는 완전 망치셨겠네요? 소리가 제대로 날 리 없었을 테니까요?"


"맞아요. 그래서 1교시가 끝나기 전 수험생 반 정도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어요. 12년을 준비해 하루에 평가받는 수능시험인데, 첫 시간에 그런 일을 겪는다는 것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가져오기 충분했죠. 저도 나가고 싶었으니까요."


"그랬겠네요. 그래서 본부 차원에서 어떤 조치는 없었나요? 그래도 이건 본부측의 엄연한 실수잖아요?"


"사고 상황이 접수됐으니 동요하지 말고 시험에 응하라고 지시는 내려왔죠. 하지만 저희 교실에 있는 수험생들은 이미 요즘 말로 멘붕 상태였고 교실은 아수라장이었죠. 그리고 결국, 이에 대한 조치는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았어요."


"어떻게 아무런 조치가 없을 수가 있죠? 말도 안돼요!"


"그렇죠. 말이 안 되죠. 같은 교실에 있던 많은 수험생들과 부모들이 항의를 한 걸로 아는데 결과적으로 아무런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은 걸로 기억해요. 뭐 사실, 당시 기억은 참담했던 것 밖에는 남은 게 없네요."


"당연히 시험은 망치셨겠네요.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정상적인 시험을 치렀겠어요?"


"네, 보통 듣기평가는 언어나 외국어 합쳐서 한 문제 틀릴까 말까 했는데, 한 문제 밖에 못 맞혔으니 말이죠. 게다가 다른 과목들도 어떻게 시험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니 성적이 제대로 나올 수는 없었죠. 그게 제가 지방 국립대를 가게 된 계기입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네요. 제가 지금 듣는 데도 화가 솟구치는데 강사님은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말씀하실 수 있으세요?"


마치 자신의 일인 것 마냥 씩씩대는 미경을 보고 있자니 태경은 미소가 지어졌다.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위로가 되기도 하지만, 누군가 나를 위해 화를 내는 모습도 그 못지 않은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100권의 책리뷰, 100명의 인터뷰, 100개의 칼럼


인터뷰나 칼럼은 도저히 지금의 자신이 쓸 수 없는 전문적인 콘텐츠였다. 그나마 도전해 볼 만한 것이 책리뷰였다. 다행이 최근 책을 읽기 시작했고 책 읽는 재미에 서서히 빠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블로그에 책리뷰를 올리기 시작했다.


부족하지만 빈 블로그에 자신의 글들이 하나하나 채워가는 기분이 나름 뿌듯했다. 한 달 정도 지나자 주객이 전도된 듯 싶었다. 블로그에 책리뷰를 쓰고자 책을 읽는 건지, 책이 읽고 싶어서 읽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렇게 거의 석 달을 매일 책리뷰를 썼다. 물론 책도 매일 한 권 이상 읽었다. 책만 읽을 때보다 블로그에 책리뷰를 쓰기 시작하자 더 많은 책을 읽게 되었다. 단순히 생각하면, 책만 읽을 때가 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더 많은 책을 읽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


3개월이 지나자 각종 출판사에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새로 나온 책의 리뷰를 부탁하며 책을 보내줬고 소정의 원고료도 보내주었다. 돈을 주고 사서 읽던 책들을 이제는 돈을 받으며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아~ 이게 300프로젝트의 힘, 아니 글쓰기의 힘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지내던 어느 날, 태경에게 이상한 권태기가 왔다.


'내가 책리뷰를 왜 쓰고 있지?'


점점 그의 책리뷰는 출판사 또는 저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왜곡되고 있었다. 읽고 싶지 않던 책을 읽고도 원고료를 받기 위해 그럴 듯한 리뷰를 써내고 있었다. 리뷰의 형식도 점점 기계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목차, 저자소개, 책 속의 몇 구절, 느낌 몇 줄


여느 책리뷰나 다를 바 없는 책리뷰들이 자신의 블로그에 쌓인다는 것에 거부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 마음이 들자 점점 책리뷰를 쓰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무언가 조치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