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진 그자리 #9
현석은 가볍게 비틀거렸다. 어렵게 잡은 택시에 몸을 던지듯 탄 현석은 취한 중에도 주먹을 불끈 쥐며 태경에게 화이팅을 외쳤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어오느라 오랜 시간을 못 봤지만 단 한 번 만남에 추억을 온전히 소환하고, 조건 없이 응원해 줄 수 있는 그런 친구, 현석이 있어 태경은 흐뭇했다.
간경화 판정 이후로, 그리고 강사가 된 후로 술 마실 일이 거의 없던 태경에게 오늘은 새삼 새로운 날처럼 느껴졌다. 문득 다른 친구들도 생각나는 그런 밤이었다.
잘 지내?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어.
새벽 한 시가 넘은 시간인데 무슨 용기에서인지 태경은 어디엔가 전화를 걸었다. 영진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 한 하숙집에서 처음 만났던 친구, 다른 이들에게는 무뚝뚝하지만 태경과 있을 때만은 수다쟁이었던 친구다.
너 덕분에 힘들게 아주 잘 살고 있다.
사실, 영진은 태경이 강사가 되기 전 사업을 할 때 함께 일을 한 적이 있다. 법대 출신에 누구보다 똑똑하고 냉철한 판단력까지 갖춘 영진이었기에 태경은 자신이 벌인 사업에 영진이 함께 하길 원했다. 태경이 갑자기 아파서 그만두었지만 영진은 아직 그 업체에서 묵묵히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담처럼 태경에게 던진 첫 마디였다.
사실, 영진은 대학 졸업 즈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친구들 뿐만 아니라 선후배 그 누구도 영진의 합격에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영진은 결국 시험을 포기하고 말았다. 시험이 문제가 아니라 건강의 문제였다.
운동을 유독 싫어하던 영진은 걷는 모습이 조금 어색했다. 태경을 포함한 친구들은 그것이 단지 하체가 조금 부실해서겠거니 하며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선천적 유전선 말초신경 폐쇄 증후군(?)
생전 듣지도 못한 병명이었다. 태경도 나중에 들은 이야기다. 영진이 길을 가다 갑자기 쓰러진 적이 있는데 그 때 병원에서 들은 병명이었다고 한다. 사실 정확한 병명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완치될 수 없다는 것. 시간이 지날수록 손끝과 발끝 쪽의 근육이 점점 없어지는 병이라는 것만 뇌리에 박혔을 뿐이다. 그래서 영진은 합격해도 일할 수 없는 공무원의 길을 포기했다.
그렇게 집에만 살던 영진이었기에 태경은 항상 마음이 쓰였었다. 그래서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영진을 불렀다. 현장에서 일을 하긴 힘들지만, 회계나 사무 업무는 영진만한 적격자가 없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월급을 넉넉히 주진 못했지만 기대대로 영진은 자신의 일을 200% 해냈다. 그 중에 설계까지 배우면서 현장에서 더욱 더 필요한 인재로 거듭났다.
태경이 떠난 지금, 영진은 과장님이 되었다. 태경이 운영하던 업체가 갑(甲)사에 통합이 되면서 스카웃 되고 역시 거기에서도 능력을 발휘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영진보다 먼저 입사해 오랫동안 일을 해온 다른 직원들보다 더 인정받는 인재가 되었다.
너 때문에 고생은 하고 있지만 술은 한 잔 살게, 놀러와라
무심한 듯 던진 한 마디지만, 현석에게 느낀 그 감정 이상의 그 무엇이 느껴졌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이들만 있으면 얼마든지 버텨나갈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강사님은 어떻게 그 많은 어려움들을 겪으면서도 무너지지 않고 이겨내셨나요?
지금은 자주 듣는 질문이지만 처음 강의를 하고 이 질문을 들었을 때는 답을 하지 못했었다. 그 상황을 살아내기에도 정신없었기 때문이었다. 영진과 통화를 끝낸 지금 문득 그 답이 생각났다. 내가 잘 견뎌낸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누군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다짐했다. 나도 그런 누군가가 될 수 있도록 따뜻하게 곁에 있어야겠다고. 쌀쌀한 새벽 바람이 스쳐간 태경의 볼 위에, 이내 다시 바알갛게 따스한 온기가 채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