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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헨리포터 Apr 03. 2021

머리로 먼저 쓰겠다는 거짓말

무릇 음식이란 단맛과 짠맛 그리고 신맛과 쓴맛이 서로 어우러지며 맛을 낸다. 각기 다른 네 가지 맛이 특별한 비율로 조화가 잘 이루어진다면 그야말로 최고의 요리가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어느 하나라도 필요 이상으로 첨가되거나 들어가지 않아야 할 그 재료나 양념이 (그날따라) 좋지 않은 감으로 인해 뿌려진다면 그 뒷일은 처치곤란이 될 수 있다. 버리자니 공들인 시간과 나의 노력이 아깝고 먹자니 누굴 위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애써 코를 막고 알약 먹듯 재빨리 삼켜야 할지 끝내 그 이유를 찾기 어렵다. 이를테면 김치의 신맛을 잡기 위해 설탕을 마구 뿌려대는데 김치의 시큼한 정도로 보면 (몇) 꼬집으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들이붓는 수준에 이르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이르러 이 김치찌개는 너무나도 달콤해져 우리가 알던 그 맛 하고는 상당한 거리감을 갖게 될 수도 있다. 물론 김치찌개의 반대 편에 서서 국물요리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된장찌개도 마찬가지다. 각종 야채를 보기 좋게 썰어 준비해놓고 된장을 풀어 펄펄 끓이기 시작한다. 분명 종갓집(?)에서 만든 된장이라는데 이건 넣고 또 넣어도 여전히 색감이 성에 차지 않는다. 된장이 필요 이상으로 들어간 탓에 어느덧 짠 국물로 변해버려 그저 건더기만 건저 먹고 끝낸 기억이 우리의 과거에는 다 있지 않나. 물론 그때는 몰랐지만 된장찌개의 색깔은 결국 고춧가루가 가미되어야 한다는 진리가 숨어 있다. 된장은 한 숟갈을 넣나 열 숟갈을 넣나 여전히 된장 색깔일 뿐이고 식당에서 보던 그 된장찌개 색깔이 되려면 결국은 고춧가루가 들어가야 한다는 비법(?)이 숨어 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때론 정형화된 레시피가 중요하기도 하다. 그 시절 우리의 어머니들이 10권으로 이루어진 요리 백과사전을 손이 가장 잘 닿을 수 있는 장소에 두며 필요할 때마다 펼쳐보던 그 학구적인 모습처럼 말이다. 요즘이라면 우리에게는 백종원 아저씨가 핸드폰 안에서 언제나 우리를 반겨주고 있기에 요리에 문외한인 사람도 따라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이르러 그럴싸한 맛을 낼 수도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요리에 있어서 만큼은 반칙도 특권도 없이 누구나 맛깔스러운 한 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그런 세상 말이다. 심지어 이 선생님(?)의 요리에는 철갑상어의 알도 트러플도 그리고 살 찌운 거위의 간처럼 특별하거나 특이한 재료마저 필요하지 않다. 동네 슈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로 이루어져 대충 따라 해도 그럴싸한 맛이 나게 의도하셨다. 심지어는 만능 양념장을 만들어두고 각종 요리에 추가하도록 가르침을 주셨기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으니 참으로 위대한 분이 아닐 수 없다. 여하튼 이분이 TV에 나온 이후로 우리는 줄곧 요리라는 그 어려운(?) 분야에 도전하며 새로운 학문에 매진하다 보니 이제는 곧잘 먹을 만한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물론 먹을만한 음식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주관적이고 우리는 서로 다른 미각을 가졌기에 획일적인 평가가 이뤄질 수도 없다. 우리는 혀의 감각을 이용해서 그 음식이 갖는 고유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입 안으로 들어온 음식을 먹기 좋게 앞니로 자르고 어금니로 잘근잘근 씹어대며 목구멍으로 삼킬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음식을 먹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그 음식을 삼키기 까지는 많은 고민이 될 수도 있다. 마치 '빈센조'에서 이태리 요리에 정통한 연기를 하는 '송중기'가 그 요리를 휴지에 감싸 뱉어 내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리 아는 음식이라도 이렇듯 일반인의 입장에서라면 직접 맛을 보기 전에는 이 음식의 정체를 낱낱이 파헤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색깔이 불그스름하다고 모든 음식이 매콤할 리 없으며 기름지고 허연 자태를 보인다 하여 느끼하다는 편견은 온당하지 않다. 국물이 많다고 하여 싱겁기만 할리도 없고 오래도록 끓여냈다 하여 모두가 깊은 풍미를 전달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같이) 전문적으로(?) 요리를 하는 사람이라면 직접 맛을 보기 전에 이미 벌써 눈으로 음식을 먼저 먹지 않나. 굳이 한 젓가락 하지 않아도 척! 보면 느낌이 착! 하고 온다는 말이다. 김이 폴폴 나는 이 요리를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면 어떤 음식일지 감을 잡을 수 있다. 숱한 요리의 시행착오에서 그리고 연륜(?)에서 이처럼 경험치(?)가 쌓인 것이다. 눈으로 먼저 맛보는 이 시간만큼은 그야말로 상당히 날카로운 눈빛과 신중한 마음으로 심사위원으로 빙의한다. 물론 어쩌다가 보기와 다른 예상외의 맛을 마주할 때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에서라면 첫 느낌 그대로 짐작 가는 그 맛이 느껴진다.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책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도 아니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며 먹기 좋게 담겨 있는 것도 아니겠지만 글의 제목이나 첫 문장이라면 독자의 입장에서는 꽤나 중요하다. 책을 워낙에 많이 읽고 글을 써본 독서계의 백종원(?) 같은 사람이라면 그저 책의 제목이나 글의 도입부만 읽고도 이 글은 어떤 맛을 보여줄지 또는 어떤 향을 풍길지 대번에 알 수 있다. 긴 시간 투자하지 않고 속독하면서 이런 글이겠거니 하고 넘겨짚으면서 읽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글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라면 이렇듯 중요한 첫 문장에 심혈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첫 문장이라는 의미는 독자와의 만남에서 글의 첫인상이기에 그 책임이 막중하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작가의 입장에서도 포문을 여는 것처럼 글의 시작이 되기에 물론 중요하다. 그 문장을 잘못 시작하면 글의 방향이 원치 않게 바뀌고 의도치 않게 변질되기도 하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제가 순간 떠올라도 쉽게 쓰기는 어렵다. 요리의 대가들이 음식을 눈으로 먼저 맛보듯이 (대단한 글쟁이는 아닐지라도) 그저 글을 쓰는 입장에서라면 펜을 잡고 종이에 써 내려가기 앞서 그리고 자판을 두들기기에 앞서 머리로 그리고 생각으로 먼저 쓰게 되는 이유다. 마치 어려서 주판알을 머릿속으로 튕기며 암산하듯 우리는 생각만으로 먼저 쓴다는 말이다.


글의 주제를 잡고 첫 문장을 생각하다 보면 어두컴컴한 방에 홀로 앉아 창작의 고통을 겪으며 툴툴댈 때도 있고 갑자기 떠오른 글감을 두고 스스로 기가 막힌다며 혼자 감탄하고 킥킥거릴 때 도 있다. 물론 그마저도 매력적인 첫 문장에서 시작하여 멋진 문단으로 엮어 낼 수 있다면 머지않아 어렵지 않게 글이 완성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그 글은 몇 줄 못 가서 더 이상 이어나가기 힘겨워질 수도 있다. 그런고로 첫 문장을 두고 심히 깊게 생각하는 일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일반인의 입장에서라면 인지상정이다.


반대의 경우에서 머리로 먼저 써보는 일이란 쓰고 지우고를 반복할 필요도 없고 생각만으로 글을 구성해 볼 수 있으니 작업의 속도가 빠르고 효율이 좋기에 장점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다소 위험한 경계와 맞닿아 있다. 생각은 책상에서 할 수도 있지만 하다 보면 소파에서 안락한 자세로 할 수도 있고 그래도 좀처럼 떠오르지 않으면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로 할 수도 있으며 그마저도 떠오르지 않으면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덮고 할 수도 있다. 분명 그렇게 글쓰기에 골몰할 때만큼은 졸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의 결연한 태도를 스스로도 엿볼 수 있다. 내 마음에 딱 들어맞을 첫 문장만 제대로 써 내려갈 수 있다면 그리고 첫 문단만 채울 수 있다면 곧바로 일어나 분명 한두 시간 안에 완성할 수 있다는 자신감 넘치는 내 모습이 상상된다. 그런고로 누워서도 여전히 생각한다. 멈출 수 없다. 하지만 잠깐만 누워서 생각하다가 아이들이 모두 곯아떨어지고 나면 일어나서 마저 마무리하면 될 것 같다는 그 생각은 곧이어 아침에 일어나서 하자는 다짐으로 어김없이 변경된다. 이 생각의 패턴이 왠지 낯설지가 않다. 분명 어려서부터 많이 해본 것 같은 의식의 흐름이다. 심지어 우리는 그 옛날 대학 입시를 코 앞으로 두고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가. 그래 놓고 또다시 이런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나태한 생각에 휩싸이다니 어딘지 모르게 속이 상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몸이 피로하다면 피로를 먼저 풀어주는 것이 순리 아니던가. 이러한 몸의 신호를 거스른다면 몸이 탈 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잠이 들려는 그 찰나라면 이렇듯 8시간의 평균 수명시간만 채우고 나면 한순간에 원기가 회복되어 벌떡 일어날 것 같았다. 물론 새벽녘에 이르러 실눈이 떠진 뒤에도 여전히 어젯밤의 굳은 의지와는 다르게 결국에는 그렇듯 몸이 천근만근이라는 점은 참으로 인간적인 면모가 아닐 수 없다. 몸이 극도로 피로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며 스스로 위안을 삼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은 우리의 일상이다. 회복을 위해서는 비타민이 필요해 보인다며 애꿎은 레모나만 먹고 있지만 그럼에도 아침에 일어나서 마저 하겠다는 그 거짓말에 또 속아 넘어간 것 같아 괜히 분하고 원통하다.


그럼에도 별 수 있나. 안 하던 짓을 하면 어딘가 좋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으레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고 넘어가자. 다만 앞으로 라면 그럴싸한 첫 문장을 머리로 먼저 쓰겠다는 집착을 이제는 내려놓고 그저 앉아서 대충이라도 써 내려가는 행동을 먼저 해보려 한다. 내용이 좀 산으로 가면 어떠한가. 그래도 자는 것보단 (뭐라도) 쓰는 게 낫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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