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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직전의 유럽, 십자군 전쟁

by 박신영




Urban2_a.jpg <클레르몽에서 설교하는 우르바누스 2세, 14세기의 삽화>


중세의 마지막, 십자군 전쟁

중세의 종말과 르네상스의 시작은 모두 십자군 전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천년을 이어온 중세는 너무도 견고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무너질 것 같지 않았지만 십자군 전쟁의 충돌이 중세에 균열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의 주제인 르네상스 또한 십자군 전쟁의 균열 속에서 처음으로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십자군은 1095년 11월 27일 프랑스 중부의 도시 클레르몽에 있었던 교황의 연설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교황이었던 우르바누스 2세는 전 유럽의 고위 사제들과 제후들이 모인 가운데 공의회를 마치고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대중 앞에 했던 연설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가장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 모두 이미 소문을 통해 들었겠지만 이슬람인들이 우리의 형제들을 공격하여 서쪽 지중해 해안과 헬레스폰토스까지 이르는 영토를 침공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땅을 계속 점령하고 있고 일곱 번의 전투에서 모두 그리스도인들을 이겼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들을 죽이고, 납치하며, 교회를 파괴하고, 이 땅을 황폐화시키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들을 그대로 둔다면 더 많은 하나님의 신자들이 계속 공격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아니 그 누구보다 주님께서 바라십니다. 그리스도의 전령인 여러분은 병사와 기사, 가난하고 부유한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동쪽으로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돕고 그 사악한 종족을 멸망시켜야 합니다. 나는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에게 지금 말하지만, 이는 여기 있지 아니한 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내가 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께서 명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들끼리 서로 싸우던 자들은 이제는 이교도들과 맞서 싸워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입니다. 지금까지 강도였던 사람은 기사가 될 것입니다. 형제와 친척과 싸우던 자들은 이제 야만인들을 멸하는 의로운 싸움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적은 보수를 받던 용병들은 이제 영생의 보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교황의 연설에 클레르몽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귀족과 평민 계급과 상관없이 모두 다음의 구호를 외치며 뜨겁게 응답했다.


"데우스 로 불트!(신께서 그것을 바라신다!)"


신께서 그것을 바라신다, 생각해 보면 전쟁은 보통 왕의 선전포고로 시작되지만 십자군 전쟁은 다름 아닌 교황의 '설교'로 시작되었다. 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중세가 어떤 사회였는가를 충분히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신께서 바라는 전쟁은 무엇이었을까. 십자군의 시작을 연 교황의 연설의 내용은 요약하자면 '이슬람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설 이후 교황의 부름에 서유럽의 내로라하는 나라들, 프랑스와 영국, 신성로마제국(독일), 그리고 여러 제후국의 왕과 귀족들이 중동으로 병력을 보내면서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다.

물론 교황이 아무 이유 없이 이슬람을 공격하자고 했던 것은 아니다. 연설의 초반부에 나오는 것처럼 이슬람교는 7세기에 처음 등장한 이후 끊임없이 기독교인의 땅을 침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슬람 세력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후 프랑스의 국경에까지 다다라 점점 기독교인들의 목을 조여 오고 있었다. 무엇보다 문제였던 것은 이슬람인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를 강요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개종을 거부할 경우 이슬람인들은 노예로 팔아넘기거나 죽이기도 했다. 이는 종교가 삶의 전부였던 중세인들에게는 끔찍한 공포였다. 그렇게 벌써 4백 년 가까이 이슬람의 공격을 받았던 기독교인들로서는 이슬람 침략에 대한 명분은 충분히 있었던 셈이었다.

그렇다면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의 침략에 대한 복수전이라고 봐야 할까. 그런데 이후 십자군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면 또 그렇지가 않다. 교황이 내세운 목표는 바로 '성도the City of God의 회복'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도는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은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한 도시였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신성시되는 도시였다. 이슬람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이 예루살렘을 되찾는 것을 전쟁의 목표로 제시한 것이다.


"거룩한 전쟁Bellum Sacrum"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십자군 전쟁을 '거룩한 전쟁'이라고 불렀다. 시시콜콜한 복수라던가 정복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거룩한 전쟁을 일으켜 성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은 왜 복수나 정복 같은 현실적인 목표가 아닌 '성도를 되찾아야 한다'는 꿈을 좇는 듯한 목표를 내세웠던 것일까. 차라리 동쪽의 금은보화를 차지하러 가자고 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는 이렇게 추측해 볼 수 있다. 깊은 종교적 신념 속에 살았던 중세의 사람들은 그런 꿈같은 목표를 내세우지 않으면 애초에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1099_Siege_of_Jerusalem.jpg 예루살렘 성벽을 포위한 1차 십자군, 13세기 삽화


십자군과 예루살렘

그렇게 십자군 전쟁을 떠난 기독교인들은 1차 원정에서 원하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동쪽 기독교인들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한 뒤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을 시작한 십자군 원정대는 이후 3년 간의 전쟁 끝에 1099년 7월, 이슬람이 지금껏 점령하고 있었던 '성도' 예루살렘 탈환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승리한 십자군들은 자신들이 죽인 이슬람인들의 시체와 피로 가득한 예루살렘의 땅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것이 '거룩한 전쟁'의 결과였다. 신께서는 과연 기뻐하셨을까.

하지만 십자군 원정은 1차의 성공에서 끝나지 않고 이후 계속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십자군 전쟁은 총 8차에 걸쳐 200년 동안이나 진행되었다. 전쟁이 이어졌던 이유는 이슬람의 반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8차례에 걸쳐 일어난 십자군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차(1096~1099) -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시작, 예루살렘 정복 성공

2차(1147–1150) - 이슬람의 반격, 예루살렘을 다시 빼앗김

3차(1189–1192) - 사자심왕 리처드의 십자군과 살라딘의 대결

4차(1202–1204) - 콘스탄티노플 함락

5차(1217–1221) - 현지 잔존병력의 십자군

6차(1228–1229) - 프리드리히 2세의 십자군, 예루살렘 공동 통치에 합의

7차(1248–1254) - 성왕 루이 9세의 첫 번째 십자군

8차(1270) - 성왕 루이 9세의 두 번째 십자군


결국 기독교인들과 이슬람인들은 성도 예루살렘을 놓고 뺏고 빼앗기고를 반복하는 200년간의 지리한 공방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가 깨어나기 직전 중세 말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렇게 맹목적이었고 종교적이었던 십자군 전쟁의 진행 과정에서 르네상스가 깨어나고 유럽은 근대로 진입하게 된다. 십자군을 일으키는 것으로 기독교를 부흥시키고 교황의 권위를 더 막강하게 만들기를 기대했던 우르바누스 2세는 아마 십자군 전쟁이 앞으로 중세를 무너뜨리는 것도 모자라 인본주의의 르네상스를 깨울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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