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어나는 르네상스의 불씨
십자군 전쟁은 역사에서 가장 종교색이 강한 전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정반대의 인본주의 르네상스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면 십자군 전쟁의 무엇이 르네상스를 탄생시키게 된 것일까?
8차에 걸친 십자군 전쟁 기간 중 처음으로 르네상스의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4차 십자군 때였다. 재미있는 점은 4차 십자군은 8차에 걸친 전체 십자군 원정 중에서 최악으로 알려진, 기독교인들 스스로도 부끄러워할 만큼 엉망진창인 십자군이었다는 것이다. 엉망진창이었던 4차 십자군에서 어떻게 르네상스의 불씨가 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4차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
4차 십자군이 엉망진창으로 진행된 이유는 무역국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십자군 원정은 주로 프랑스와 영국, 독일 같은 서유럽의 내륙국들이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4차에서는 특이하게도 베네치아 공화국이 합류했던 것이다. 베네치아가 4차 십자군 합류하게 된 이유는 십자군 측이 배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초기 십자군들은 육로를 이용해 중동을 침략했지만 경험이 쌓이면서 중동의 사막을 가로지를 경우 이슬람의 습격의 위험이 크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때문에 3차 십자군 이후 십자군들은 배를 통해 이동하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4차 십자군도 마찬가지로 대규모 선단을 필요로 했는데 마침 베네치아는 지중해의 항구도시 중에서 배 건조능력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십자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면 '장사꾼의 나라'였던 베네치아가 순수한 목적의 '종교 전쟁'에 합류하게 된 것이 결국 나중에 화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어쨌든 당시 베네치아 공국의 도제(베네치아의 최고 지도자 호칭) 단돌로는 교황의 요청에 따라 4차 십자군을 위한 대규모의 선단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 동안 베네치아는 모든 국력을 동원해 배들을 만들어 4차 십자군에 합류하게 된다.
돈 문제
1202년, 당시 교황이었던 인노켄티우스 3세의 명에 따라 유럽의 제후들과 기사들은 배가 있는 베네치아로 속속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번쩍거리는 새 갑옷으로 무장한 유럽의 기사들, 그리고 그 앞에 총 200척에 달하는 최고급 선단이 지중해의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떠 있는 풍경은 아마 이슬람 사람들이 봐도 아름답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4차 십자군은 모든 떠날 준비를 마쳤다. 베네치아의 수장이었던 단돌로도 항해를 돕기 위해 본인이 직접 배에 승선해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최고급 선단을 구축해 놓고 출발하려고 보니 문제가 하나 생겼다. 바로 돈 문제였다. 원래 계획은 베네치아 측에서 자비로 대규모 선단을 미리 만들어 놓으면 4차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한 제후들이 돈을 모아 와서 나중에 베네치아에게 지불하는 것이었다. 일종의 '후불제'였던 셈이다. 그런데 막상 유럽에서 온 제후들이 돈을 모아보니 액수가 부족했다. 돈을 얼마 못 가져온 제후들도 있었고 아예 개인 사정 때문에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은 제후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있는 돈을 다 긁어서 모았지만 베네치아에게 지불해야 할 비용 중 절반도 채워지지 않았다.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입장이었던 단돌로는 입장이 난처해졌다. 베네치아는 국력을 총 동원해서 지난 1년간 배를 다 만들어놨는데 갑자기 4차 십자군 지휘부 측에서 돈이 없다고 나왔기 때문이다. 결국 단돌로는 출정 거부를 선언했다. 허겁지겁 교황이 중재를 시도했지만 아무리 교황이 말해도 단돌로는 듣지 않았다. 장사꾼의 나라로 유명한 베네치아 사람들은 아무리 '신의 대리인'인 교황이 부탁한다고 해도 돈 문제에서 만큼은 손해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비극의 시작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4차 십자군은 돈 때문에 출발도 하지 못한 채 베네치아 항구에 한동안 발이 묶여있어야 했다. 아마 번쩍번쩍 빛나는 갑옷을 입은 화려한 십자군의 기사들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항구에 도란도란 모여 앉아 있었을 것이다. 이때 눈치를 보던 단돌로가 한 가지를 제안한다. 가까운 곳에 '자라'라는 도시가 있는데 이 도시 사람들은 전부터 우리 베네치아의 무역을 계속 방해해 왔다, 그러니까 십자군이 자라를 정복해서 베네치아에 넘겨준다면 모자란 뱃값의 절반을 탕감해 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이는 사실 상당히 난처한 제안이었다. 빚의 절반이나 탕감해 준다고 했으니 구미가 당기기는 했겠지만 자라는 분명 같은 '기독교인들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십자군은 어디까지나 이슬람을 공격하고 성도를 탈환하기 위해 모인 신성한 군대였다. 그런데 그런 십자군에게 같은 기독교인들의 도시를 공격하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요구였다. 하지만 한편으론 전 유럽에서 모인 십자군 기사들이 돈이 없어서 출발조차 못해보고 항구에 앉아 있으니 고민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을 것이다.
고민 끝에 4차 십자군의 수뇌부는 결국 '자라'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작은 도시니까 그 정도는 신께서 눈감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해서 성도를 탈환하기 위해 결성된 신의 군대는 같은 기독교인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4차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게 된다. 곧 십자군은 어렵지 않게 자라 정복에 성공하게 된다. 하지만 전쟁 과정에서 자라에 살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같은 기독교인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엉망진창 원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문제는 이 엉망진창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편지
자라 정복은 성공했지만 여전히 4차 십자군은 뱃값을 전부 지불하지 못했다. 여우 같은 베네치아의 단돌로는 자라를 정복해 주면 분명 '절반'만 탕감해 준다고 말했지 '전부'를 탕감해 준다고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우연인지 필연인지 편지 한 장이 십자군 수뇌부로 도착했다.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황태자 알렉시오스로부터 온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지금 삼촌이 반란을 일으켜서 우리 아버지의 왕위를 빼앗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끔찍하게도 두 눈이 뽑힌 채로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 있다, 십자군이 얼른 와서 반란을 진압해 주고 반역자 삼촌을 무찔러 달라, 그리고 적통 황제인 우리 아버지를 구출해 달라, 마침 십자군이 돈이 없어서 딱하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만약 반란을 진압해 준다면 우리 동로마제국에서는 뱃값 전부를 지불해 주겠다, 그리고 그 뱃값의 두 배가 넘는 20만 마르크 금화를 추가로 보상으로 주겠으며 거기에 더해 십자군에 참여할 병력과 말도 제공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십자군 수뇌부는 다시 한번 혼란에 빠지게 된다. 자라 점령 때는 눈 딱 감고 한번 나쁜 짓을 한 느낌이었지만 이번에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자라는 작은 기독교 도시였지만 콘스탄티노플은 동쪽에서 가장 큰 기독교인들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1차 십자군 때도 십자군 최종 집결지가 바로 콘스탄티노플이었을 만큼 이 도시는 기독교인들에게 상징적이 도시였다. 그런데 '신의 군대'가 동쪽에서 가장 큰 '신의 도시'를 공격한다니, 기독교인이라면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십자군 수뇌부는 이번에는 자라 때와는 달리 내부에서 상당한 의견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일부 십자군 기사들은 화를 내며 아예 짐을 싸서 고향으로 돌아가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십자군 수뇌부 입장에서는 여전히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베네치아에게 진 빚이 여전히 절반이나 남아있는데 그 돈을 갚을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 돈 때문에 여전히 4차 십자군은 본격적인 출발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렇게 십자군들이 고민하는 와중에, 다시 한번 베네치아의 단돌로가 꼬리를 흔들며 나섰다. 우리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격에 찬성이다, 비록 기독교인들의 도시이기는 하지만 반란군 진압이라는 분명한 대의명분이 있고, 무엇보다 나도 빨리 십자군을 떠나고 싶은데 그깟 빚 때문에 지금 우리 신성한 십자군들이 떠나지도 못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빨리 동로마제국의 황제와 황태자를 구출하고 돈도 받고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단돌로가 진심으로 십자군 원정을 빨리 떠나 '성도 탈환'을 이루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빚쟁이의 사탕발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당시 50대 50으로 팽팽했던 찬반 의견은 단돌로의 개입으로 추가 급격하게 기울게 된다. 결국 4차 십자군은 동쪽에서 가장 큰 기독교의 도시, 지금 까지 이슬람의 공격에도 꿋꿋하게 버텨왔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콘스탄티노플 대 약탈
콘스탄티노플은 4세기에 최초 도시를 세웠을 때 로마인들이 야만족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방어용 목적으로 세운 도시였다. 그리고 규모도 동쪽에서는 가장 큰 도시였으니 십자군의 역량을 총 동원한다고 해도 결코 쉽게 점령할 수 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때문에 십자군들이 총공격을 시작했음에도 콘스탄티노플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공방전은 10개월에 걸쳐 지루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끈질긴 십자군의 공격 끝에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악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10개월에 걸친 공방전에서 서로 죽고 죽이다 보니 십자군 병사들의 마음속에는 콘스탄티노플 방어군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처음에 십자군에게 편지를 보냈던 황태자 알렉시오스와 지하에 갇혀있던 황제는 전쟁 중에 암살을 당해버렸다. 십자군 입장에서는 그토록 고생하며 싸웠지만 정작 계약의 당사자가 죽어버렸으니, 20만 마르크 금화를 과연 받을 수 있을까 초조한 마음까지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상황이 겹치면서 십자군들은 폭주하기 시작했다. 십자군 병사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같은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악랄한 복수와 약탈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미 복수심과 돈에 눈이 돌아간 십자군 수뇌부와 병사들은 교황의 파문의 위협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이 약탈에 대한 한 역사가의 기록이 있다.
"3일 동안 그들은 고대 야만족들조차 깜짝 놀랄 만큼 엄청난 규모의 살인, 강간, 약탈, 파괴를 자행했습니다. 십자군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은 고대와 비잔틴 미술을 전시하는 박물관이자 약탈의 백화점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나마 베네치아 인들은 약탈한 예술품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대부분을 보존했지만, 다른 십자군들은 무차별적으로 예술품들을 파괴했습니다. 그들이 파괴를 하지 않을 때는 잠시 기분전환을 위해 포도주를 마시거나, 수녀들을 강간하거나, 성직자들을 살해할 때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기야 소피아 성당의 은 성상과 이콘화, 성서를 파괴하고, 교회의 성스러운 그릇에 포도주를 마시면서 같이 놀던 창녀를 교회 대주교의 권좌에 앉히고 놀았습니다. 수세기에 걸쳐있던 서쪽 기독교인들과 동쪽 기독교인들의 갈등은 콘스탄티노플의 정복, 그리고 끔찍한 학살로 인해 그 정점을 찍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 살던 기독교도들은 한탄할 뿐이었습니다. 차라리 이슬람인들이 도시를 점령했다면 이토록 잔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
차라리 이슬람인에게 당하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울분을 토하는 마지막 문장이 인상 깊다. 십자군이 이때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한 총금액은 약 90만 마르크 금화에 이른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받은 금액은 단돌로를 중심으로 한 베네치아 인들이 15만 마르크를 받았고, 십자군은 5만 마르크였다. 그리고 나머지 수십만 마르크의 금화는 아마도 십자군 병사들이 약탈하면서 챙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약탈을 마친 4차 십자군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같은 기독교인들을 살해하고 약탈하고 돈도 두둑하게 챙긴 십자군들은 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스스로도 부끄러웠는지 먼지처럼 흩어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4차 십자군은 십자군 역사상 최악의 원정이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르네상스의 불씨
이렇게 4차 십자군과 콘스탄티노플의 끔찍한 파괴와 약탈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서양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도시 파괴의 사례로 남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규모의 약탈과 파괴의 과정에서 르네상스의 불씨가 피어났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우선 콘스탄티노플에 잠자고 있던 수많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예술품들이 십자군에 의해 약탈되어 서방으로 이동하게 된다. 콘스탄티노플은 동방에서도 가장 역사가 깊은 대 도시였던 만큼 많은 양의 그리스 로마 예술품들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때 약탈되어 서쪽으로 이동되었던 작품 중 하나가 바로 로마제국 시기에 콘스탄티노플 대 경기장을 장식하던 <승리의 마차Triumphal Quadriga>다. 이 작품은 지금도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에 가면 성당의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복제품을 볼 수 있다. 아마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약탈되어 넘어온 고대의 그리스 로마의 예술품들을 처음 보면서 우리 선조들이 이런 것도 만들었었나 하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딱딱한 중세의 예술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높은 수준의 예술품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예술품들이 바로 이후 르네상스 예술의 씨앗이 된다.
또 한 가지는 콘스탄티노플이 파괴되면서 당시 도시 안에 살던 많은 지식인들이 대거 서방으로 피난을 넘어오게 되었다는 점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넘어온 지식인들 중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지식과 철학을 공부한 지식인들이 많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만큼 여전히 로마적 사고방식을 가진 지식인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들이 서쪽으로 대거 넘어오게 되면서 기독교 세계관에 갇혀있던 유럽 사람들의 생각을 조금씩 깨우게 된다. 1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고대 로마의 인본주의가 다시 조금씩 서유럽에 이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1204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플이 파괴되던 그날, 악랄하게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살해하던 4차 십자군의 병사들은 자신들이 르네상스의 불씨를 피울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신성한 신의 군대 소속이라는 것도 잊은 채 그저 약탈, 강간, 폭력을 통한 순간의 쾌락을 즐겼을 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행위가 르네상스의 불씨가 되어버렸다. 역사가 매번 이런 식으로 흘러가니 인간사를 '우연의 연속'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역사적 필연'으로 봐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것 아닐까. 어쨌든 르네상스의 불꽃은 이렇게 콘스탄티노플의 폐허 위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