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어가는 십자군의 열기, 식어가는 중세
엉망진창이었던 4차 십자군은 허무하게 끝나버렸지만 당시 교황이었던 호노리우스 3세는 다시 5차 십자군을 일으키게 된다. 성도는 여전히 이슬람의 손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번에는 유럽의 왕들과 귀족들이 교황의 부름에도 좀처럼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영국왕과 프랑스왕 모두 자신의 영토를 지키느라 어쩔 수 없다고 핑계를 댔는데, 사실 십자군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본인들이 나서지 않았으면 교황도 강요할 방법은 없었다. 결국 교황은 브리엔이라는 귀족을 앞세워 겨우 소규모로 5차 십자군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오히려 이슬람인들에게 붙잡혔다가 목숨만 겨우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4차 십자군 이후 어쩐지 점점 시들어가는 십자군 원정이었다.
하지만 4차와 5차 원정의 실패 이후에도 여전히 '성도 탈환'의 꿈을 버리지 못한 교황은 다시 한번 6차 십자군을 계획하게 된다. 교황이 6차 십자군을 이끌 지휘관으로 눈여겨보고 있던 인물은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젊은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2세였다.
그런데 이 프리드리히 2세는 역사에서 '최초의 르네상스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최초의 르네상스인은 당연히 예술가나 사상가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황제였던 것이다. 어떻게 예술가나 학자가 아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최초의 르네상스인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일까.
6차 십자군
교황이 6차 십자군의 총지휘관으로 프리드리히를 지목한 것에는 사실 이유가 있었다. 우선 프리드리히는 본인이 과거에 십자군 원정을 떠나겠다고 서약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당시 프리드리히는 교황에게 협조적일 필요가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핏줄로만 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잇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적통이었지만 아버지가 죽고 나서 반대세력이 등장하면서 아직 완전히 황제 자리를 굳히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의 지지를 받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이런 전후 사정을 알고 있던 교황은 프리드리히에게 제안했다. 만약 6차 십자군을 조직해서 원정을 떠나 준다면 내가 직접 황제 대관식을 치러주겠노라고.
교황과 젊은 황제의 거래는 성사되었다. 1220년, 교황은 약속대로 대관식을 치러주었고 새롭게 즉위한 프리드리히 2세는 그 대가로 원정을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는 어쩐 일인지 십자군 원정을 계속 미루게 된다. 그는 교황이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를 재촉할 때마다 계속 편지를 보내서 병력을 더 모아야 한다, 대관식을 치렀다 해도 여전히 국내 정세가 불안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계속 원정을 미루었던 것이다. 그 속마음 까지야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프리드리히는 내심 십자군 원정이 가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도 중세를 살아가는 신앙인이었을 텐데 왜 십자군 원정 가기를 꺼려했던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잠시 후 살펴보기로 하고 일단 그렇게 원정을 미루기를 자그마치 7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7년 동안 시간을 질질 끄는 사이에 십자군이 출발하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던 교황 호노리우스 3세가 그만 죽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의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었지만 아마 프리드리히가 뭉그적거리는 것에 울화통이 터지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 vs 그레고리우스 9세
그다음으로 선출된 교황은 그레고리우스 9세였다. 그런데 이 교황은 전임 교황과 달리 불처럼 뜨거운 성격으로 유명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다짜고짜 선임 교황과의 약속을 지키라며 프리드리히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교황이 가진 최고의 카드는 '파문'이었는데 더 이상 십자군을 미루면 파문해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이번에는 프리드리히도 눈치가 보였는지 드디어 십자군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1227년 8월, 성모승천일 15일을 출발날짜로 잡은 프리드리히는 6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무슨 우연인지 원정길에 오르자마자 갑자기 병사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8월의 더운 날씨 때문이었던 모양인데 프리드리히 자신도 병이 옮았는지 몸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프리드리히는 일단 회군하기로 결정한다. 근데 문제는 프리드리히의 태도였다. 그는 몸을 회복한다는 핑계로 나폴리에 있는 온천에 가서 뜨끈하게 몸을 지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은 격노했다. 7년을 질질 끌어놓고 겨우 출발한다더니, 이제는 건방지게 온천에서 뜨끈하게 몸이나 지지고 있다고? 교황은 프리드리히가 십자군 원정이 가기 싫어 꾀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전임 교황시절 7년이나 끌었던 전적이 있으니 그렇게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다혈질 교황이 그저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프리드리히를 '파문'에 처해 버렸다는 것이다.
파문
파문은 기독교 사회였던 중세에 교황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이었다. 파문은 간단히 말하면 한 인간을 기독교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시키는 것이다. 지금에야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지만 기독교가 모든 것이었던 중세에서 이 처분은 사실상 '사회적 사망'을 선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으로 비교한다면 대통령을 '국적 박탈'하는 것과 비슷한다고 해야 할까. 역사에는 '카노사의 굴욕'으로 알려진 유명한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107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가 교황에 의해 파문을 당하자 1월의 추운 겨울날 허름한 옷 한 벌 입고 3일 동안 교황에게 싹싹 빌면서 파문을 풀어달라고 요청한 사건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럽 최고의 권력자인 황제가, 정복도 아닌 누더기 같은 옷 한 벌 입고 추운 겨울날 손을 불어가며 교황에게 빌다니 그만큼 중세의 파문은 세속권력의 정점인 황제조차 두려워하는 처분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한 세기 반이 지나긴 했지만 여전히 세상은 기독교 중심의 시대였다. 그런데 프리드리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파문을 당하자마자 교황에게 맨발로 찾아가 싹싹 빈 게 아니라 교황에게 편지를 한 장보 냈다.
'유소년 시절의 나를 도와준 게 로마 교황이라 했는데 내가 유소년기를 보낸 시칠리아는 교황이 철저히 무관심했던 곳이라 제후들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시칠리아 왕국 전체가 무정부 상태로 변했습니다. 또 내가 성인이 되는 과정이나 성인이 된 뒤에도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작센공 오토(반대세력)에 준 사람이 바로 로마 교황이 아니었습니까. 이래도 내가 지금의 지위에 오른 것이 교황 덕분입니까, 아니면 힘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내게 조력을 아끼지 않았던 이탈리아와 독일의 제후 덕분입니까?'
편지의 내용을 보면 프리드리히는 감히 교황에게 대들고 있었다. 교황은 처음 겪어보는 일에 황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병사들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자신들의 황제가 파문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병사들이 동요할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뢰했던 그리스도의 대리인이자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께서 우리에게 이처럼 사악하고 불합리하게 행동하시며, 우리에 대한 증오를 일으키기 위해 그토록 헌신하는 것처럼 보일 때, 무고한 우리에 대한 이런 사나운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 누구인들 마음이 괴롭지 않으며, 그 누구인들 놀라지 않겠는가?'
그런데 내용이 심상치 않다. 병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아무리 억울해도 그렇지 감히 교황을 두고 '사악하고 불합리하게 행동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확실히 중세의 평범한 군주들과는 어딘가 생각하는 게 달랐던 사람이었다.
두 번째 파문
교황은 황당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유럽의 왕과 제후들은 교황의 파문 소리만 나오면 벌벌 떨었는데 이 젊은 황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뒤 교황청에서 또 한 번의 파문 공고가 올라왔다. 프리드리히를 '재 파문'한다는 공고였다. 이미 파문당한 몸, 한번 더 파문당한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건 없지만 교황은 '건방진 편지'에 대한 벌로 재 파문을 내린 것이다. 교황은 그렇게 하면 혹시라도 프리드리히가 정신 차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두 번째 파문에도 역시 프리드리히 2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번의 파문을 당한 프리드리히는 사실상 십자군을 떠날 명분도 사라지게 되어 버렸다. 십자군은 교황의 명에 의해 떠나는 것인데 교황으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리드리히는 그냥 혼자서 6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버렸다. 완전히 자기 멋대로인 프리드리히였다. 교황은 다시 한번 황당했을 것이다. 그의 생각에 두 번씩이나 파문을 당했으면 당연히 먼저 자기에게 찾아와서 무릎 꿇고 빌고 파문을 푼 다음에 교황의 축복을 받고 십자군을 떠나야 순서가 맞는 것인데, 프리드리히는 교황을 무시한 채 그냥 혼자 십자군 원정을 떠나버린 것이다. 가뜩이나 성격이 불같았던 교황은 아마 뒷목이 아파오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프리드리히 2세는 병사들과 함께 중동으로 가는 배에 올라섰다. 그렇게 6차 십자군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중동 땅에 도착한 황제 프리드리히는 지금까지의 십자군이 보여줬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체스 게임
예루살렘 위쪽에 위치한 항구 도시 야파, 지휘관의 천막에는 6차 십자군의 최고 지도자 프리드리히 2세와 이슬람의 사신 파라딘이 마주 보고 있었다. 양 세력을 대변하는 두 인물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일단 서로의 전력이라도 탐색해보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었다. 이 둘은 체스를 두고 있었다. 여전히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은 하루가 멀다 하고 서로 으르렁 거리는 상태였지만, 이 프리드리히의 천막 안만큼은 훈훈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게다가 농담을 섞어가며 여유롭게 진행된 둘의 대화는 독일어가 아닌 아랍어로 진행되었다. 어릴 적부터 공부를 좋아했던 프리드리히는 6개 국어에 능통했는데 아랍어 또한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프리드리히가 아무리 아랍어를 잘 구사한다 한들 그는 일개 병사가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6차 십자군의 총지휘관이었다. 그런 위치의 인물이 적군의 언어인 아랍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전혀 격에 맞는 태도가 아니다. 기독교 측 입장에서 보면 프리드리히는 지금 '사악한 종족들'이 쓰는 언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둘은 체스를 두면서 현재 십자군과 이슬람의 상황에 관한 대화도 나누었다. 6차 십자군 원정의 핵심 쟁점은 여전히 성도 예루살렘이었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아마 이렇게 주장했을 것이다. '나도 안타깝지만 우리 측 기독교인들의 생각이 너무 완고하다, 기독교 측 사람들은 신의 아들 그리스도가 부활한 예루살렘을 반드시 기독교인들이 통치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데, 아마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손에 있는 한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은 계속 올 것이고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이슬람을 대표하는 사신 파라딘은 이에 맞서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무함마드가 예루살렘에서도 천사를 만났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곳은 우리에게 성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우리 입장에서 예루살렘은 1차 십자군 전까지만 해도 분명 이슬람이 통치중이었는데 십자군이 와서 빼앗은 것 아니냐, 우리도 그냥 빼앗길 수만은 없다.'
르네상스인의 탄생
체스게임은 누가 이겼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후 본격적으로 프리드리히와 이슬람의 술탄은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 과정에서 나온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선 성도 예루살렘은 앞으로 기독교인과 이슬람이 공동 통치하기로 한다. 프리드리히를 명목상으로 예루살렘의 왕으로 이름만 걸어놓고 실제 통치는 이슬람에게 맡겨두는 방식이다. 요즘으로 치면 '바지 사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불완전한 통치방식이지만 어쨌든 기독교 측이 명목상으로라도 통치하게 됐으니 '성지 탈환'은 표면적으로는 성공한 셈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은 최초의 십자군 지휘관이었다. 그의 관심은 아마 '성지 탈환'에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불완전한 통치방식이라도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고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면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물론 단순한 협약 가지고 예루살렘에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일단 그 길을 열어 놓으려고 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예루살렘에 다시 평화가 찾아오게 된다.
하지만 이 회담의 결과를 들은 교황은 격분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교황이 그토록 염원하던 '성도 탈환'을 프리드리히가 협상을 통해 다시 이루어 준 것이지만 교황의 생각에 '사악한 종족들'이 차지하고 있는 성도는 칼을 통해 쟁취해야 하는 것이지 협상을 통해 얻어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런 교황의 생각을 프리드리히 또한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교황의 명을 어기고 인간 대 인간으로 '멸망시켜야 할 사악한 종족'과의 공존을 시도했다. 중세에 교황의 명령은 곧 신의 명령이었다. 그런 신의 명령을 어긴 중세인, 바로 최초의 르네상스인이 탄생한 것이다.
교황의 반격
분노한 교황은 이번에는 직접 나서기로 결정했다. 다만 그의 분노는 이슬람 쪽이 아니라 프리드리히 쪽으로 직접 향했다. 화가 있는 대로 난 교황은 5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지휘관 브리엔을 다시 불러와 프리드리히의 본토 신성로마제국을 공격하도록 했다. 명분은 확실했다. 감히 교황의 명령에 불응하고, '멸망시켜야 할 사악한 종족'들과 계약을 맺은 프리드리히 2세를 파멸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프리드리히도 당황했다. 자신은 아직 예루살렘에 있는데 본토를 공격당했으니 손 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브리엔이 본토 공격을 시작하자 영주들은 속속들이 성문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유럽에서 교황의 권위는 막강했기 때문에 영주들도 감히 교황을 등에 업은 군대와는 싸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중동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프리드리히는 불필요한 전쟁은 피했지만 전쟁을 못하는 무능한 황제는 결코 아니었다. 프리드리히가 돌아오자마자 브리엔은 줄행랑을 치며 도망쳐버렸고 교황의 군대는 그대로 해체되어 버리고 말았다. 군사력이 없는 늙은 교황은 홀로 남아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화해의 키스
그렇게 고국으로 돌아온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영토를 공격한 교황에게 복수했을까? 프리드리히는 오히려 화병으로 몸져누워있을 교황에게 계속 사람을 보내 화해의 뜻을 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분노가 켭켭이 쌓여있는 교황은 당연히 프리드리히의 사신을 문전박대해 버렸다. 그럼에도 프리드리히는 마치 고집 센 노인을 달래는 간호사라도 된 것처럼 계속 사람을 보내 화를 달래려고 했다. 쉽게 화가 풀리지 않는 교황이었지만 그래도 1년쯤 계속 사람을 보내자 점점 교황의 화가 누그러들고 있다는 소식이 프리드리히에게로 들려왔다.
교황의 마음이 어느 정도 풀어졌다고 판단한 프리드리히는 직접 만나기로 한다. 결국 프리드리히가 교황의 거처에 직접 찾아가 교황의 건강은 어떠하신지 '확인'하는 방식으로 둘의 화해는 진행되었다. 아무래도 서로 눈을 마주치기 어색한 사이였겠지만 두 사람은 교황의 거처에서 만나 서로 어깨를 끌어안고 '화해의 키스'를 나누었다. 이후 교황과 황제는 만찬을 나누었고 당연히 두 번의 파문은 모두 철회되었다.
인간사의 현실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장면이다. 그토록 앙숙 같았던 사이지만 힘의 추가 한쪽으로 확실히 기울자 결국 감싸 안고 '키스'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으니까. 교황은 프리드리히와 어깨를 감싸 안고 키스할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늙은 나이에 굴욕적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래도 골치 아픈 놈이랑 화해했으니 그것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어쨌든 이슬람뿐 아니라 교황과도 화해를 나눈 프리드리히 2세였다.
열린 사람
신의 명령에 저항한 최초의 르네상스인 프리드리히 2세, 그는 어떻게 꽉 막혀있는 중세에 이런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의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한 가지 힌트를 찾을 수 있다. 그는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도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의 남쪽 섬 시칠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이 시칠리아 섬은 이슬람이 파죽지세로 몰아치던 9세기에 이슬람에 의해 정복당했다가 11세기에 다시 기독교인들에 의해 해방된 섬이다. 때문에 프리드리히가 시칠리아에서 자랄 때만 해도 여전히 많은 이슬람의 유적과 문화, 그리고 아직 시칠리아를 떠나지 못한 이슬람인들이 남아있었다. 프리드리히가 아랍어에 능통했던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일 텐데 코 흘리던 어린 시절 왕궁을 나와 마을을 돌아다니던 프리드리히는 아랍인 친구들과 흙장난을 치며 자연스럽게 아랍어를 배웠을 것이다.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 덕에 프리드리히는 이슬람인들에 대한 편견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자신과 함께 자란 그 아랍 소년들은 결코 '멸망시켜야 할 사악한 종족'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이며, 다만 우리와 다른 종교와 문화 가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그의 인문학적 소양이다. 프리드리히는 어릴 적부터 유독 책을 좋아하는 소년으로 유명했다.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파괴했을 때, 콘스탄티노플의 예술품들과 함께 많은 수의 그리스 로마의 책들과 아랍의 책들도 같이 유럽으로 건너왔다. 프리드리히가 책에 관심을 가질 나이가 되었을 쯤에는 아마 이 책들이 유럽에 많이 풀려있었을 것이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프리드리히에게 이 책들은 마치 금은보화가 쌓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는 이 책들을 통해 중세적 사고의 한계를 일찍부터 벗어나 그리스 로마의 '인본주의'적 사고 또한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인문학적 소양
인문학에 대한 프리드리히의 관심은 그의 여러 행적에서 드러난다. 프리드리히에 관한 재미있는 사실 중 하나는 그가 '새를 이용한 사냥기술'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작성했다는 것이다. 그의 일생을 관통한 취미생활은 매사냥이었는데, 매사냥에 관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일종의 '과학 서적'을 발행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위의 조각처럼 프리드리히를 묘사하는 그림이나 조각에서는 항상 매가 함께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국정과 전쟁으로 바쁜 황제가 어떻게 그런 짬을 내서 책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들 성경을 연구하며 신의 뜻에 관해 궁금해하던 그 시절에 마치 혼자 대학생 졸업반이라도 되는 듯 열심히 논문을 썼다는 것이 재미있다.
진위에 관한 논쟁은 있지만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지적인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 실험 중 하나는 '영혼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관찰하기'였다. 그는 사람이 죽을 때를 맞춰 잘 관찰하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죽을 때가 다 된 죄수를 통에 가두어 놓고 통 위쪽에 작은 구멍을 뚫어 놓았다. 죄수가 죽으면 위쪽의 작은 구멍으로 영혼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또 다른 실험은 인간에게 언어를 가르치지 않으면 어떤 말을 쓸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만약 갓 태어난 아이에게 말을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면 혹시 아담과 하와가 쓰던 '고대 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터무니없는 생각이지만, 중세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아마 궁금증이 폭발할만한 흥미로운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프리드리히는 혼자 과학, 수학 문제를 연구하다가 답이 안 나오면 당시 유럽이나 중동의 학자들에게 답을 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중세의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할 때, 프리드리히는 특이하게도 이렇게 혼자 학문을 연구했던 황제였다. 이래 저래 프리드리히 2세는 최초의 르네상스인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충돌 속에서 탄생한 최초의 르네상스인
중세인들에게는 괴짜처럼 보였을 '최초의 르네상스인' 프리드리히 2세의 등장은 그저 우연이었을까. 기록에 따르면 프리드리히는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졌고 나이를 먹고서는 대머리가 되었다고 하니까 아마 평범한 북유럽 백인 아저씨의 모습을 떠올리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전형적인 백인이었음에도 그는 어린 시절 같은 피부색의 친구가 아닌 갈색 피부의 이슬람 소년들과 흙장난을 치며 자랄 수 있었고 청소년 시절에는 성경이 아닌 그리스 로마의 책들을 읽으며 생각의 폭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의 탄생은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세상의 모습이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십자군 전쟁을 통해 기독교인들과 이슬람인들은 서로 강렬하게 충돌했지만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양쪽 세계가 충돌하면서 나타난 세상의 균열, 그 속에서 탄생한 인간이 바로 프리드리히 2세였다. 프리드리히는 중세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십자군의 지휘관이기도 했고, 동시에 인본주의의 시작을 상징하는 최초의 르네상스인이기도 하다. 급변하는 시대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라고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