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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Aug 17. 2024

르네상스의 천재들 - 에필로그

조르조 바사리 <피렌체 포위전> 1558, 프레스코 벽화


피렌체 공성전

1529년 10월 24일, 피렌체의 성벽을 향한 포위공격이 시작됐다. 피어오르는 뿌연 먼지와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전장의 한 가운데, 미켈란젤로는 성벽을 둘러보며 성벽의 안전성을 시찰하고 있었다. 피렌체 정부가 뛰어난 건축가이기도 했던 미켈란젤로를 '요새 방어의 총독Governor and procurator general of the fortifications'으로 임명했기 때문에 그는 성벽 방어 임무에 충실하고 있었다. 평생 칼 한번 잡아본 적 없는 미켈란젤로였지만 갑자기 '총독'까지 되어버린 것이다. 아마 본인도 병사들이 자신을 '총독'이라고 부르는 것이 영 어색했겠지만 미켈란젤로는 그저 성벽을 강화하는 임무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피렌체에는 11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미켈란젤로는 산 마니아토 알 몬테 대성당쪽에 언덕을 둘러치는 성벽을 쌓고 정원 쪽에 두개의 요새를 세웠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포탄의 충격을 완충시키기 위해 성벽 문 뒤쪽에는 두개의 버팀목을 설치했고 벽 쪽에는 총을 설치할 수 있는 구멍을 뚫어놓았다.

방어용 성벽을 꼼꼼하게 점검하는 미켈란젤로의 속마음은 아마 복잡했을 것다. 그가 대적하고 있는 상대는 다름 아닌 메디치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메디치가 이렇게 피렌체를 공격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피렌체를 지중해에서 가장 빛나는 도시로 이끌어 주었던 바로 그 메디치 가문이 이제는 거꾸로 피렌체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메디치는 본인들의 힘으로는 어려울 것 같으니 비겁하게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힘까지 빌어서 왔다. 메디치 가문의 요구는 피렌체의 통치권을 다시 돌려 달라는 것이었다. 위대한 자 로렌초가 죽은 이후 메디치 가문의 후손들이 얼마나 엉망으로 피렌체를 통치를 했는지는 벌써 잊은 모양이다. 그들이 되찾고자 한 것은 더 이상 '피렌체의 영광'이 아니었다. 이제는 허울만 남은 '메디치 가문의 영광'일 뿐이었다.

도시의 요새화에는 꽤 진전이 있었고 피렌체 시민들은 최선을 다해 방어했다. 거의 두 배에 달하는 병력을 가진 제국군이었지만 피렌체 시민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한동안은 방어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피렌체 시민들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포위가 오래 지속될 경우 도시 안에 갇힌 시민들은 식량 부족으로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방어전을 시작한지 1년이 가까이 되어가자 점점 그 위험은 실체로 다가왔다. 결국 피렌체의 방어군 총사령관이었던 프란체스코 페루치Francesco Ferrucci는 더 시간이 가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페루치는 아래 쪽 도시였던 볼테라로 병력을 우회하여 포위하고 있는 제국군의 뒤를 치기로 계획했다. 1530년 8월 3일, 페루치는 병력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가비나나 마을에서 일어난 이 전투는 결국 피렌체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페루치의 지휘아래 피렌체 병사들은 분전했지만 두배에 달하는 제국군을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던 것이다. 3시간의 혈투 끝에 이미 모든 체력을 소진해 지칠대로 지친 피렌체의 병사들은 점점 새로 투입되는 제국군에게 밀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전세는 역전되었고 최후의 항전 끝에 피렌체의 주력 부대는 궤멸하게 된다. 그리고 사령관 페루치도 최후를 맞이했다.

주력 부대와 지휘관까지 모두 잃은 피렌체의 시민들은 선택을 해야했다. 피렌체 내부에서는 두 의견이 격하게 대립했다. 공화국의 자유를 위해 희생을 무릎쓰고라도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쪽과, 그래도 메디치 가문이니까 다시 한번 통치를 맡겨볼 수도 있지 않느냐는 쪽으로 나뉘어있었던 것이다. 피렌체는 고민 끝에 결국 '명예로운 항복'을 선택하게 된다. 이미 전세가 기운 상황에서 헛되이 시민들의 목숨을 희생시킬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피렌체 공화국의 멸망

1530년 8월 12일 산타 마르게리타 교회에서 양쪽의 대표자들이 모여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그렇게 피렌체 공화국은 멸망했다. 그리고 새로운 통치자의 자리에는 샤를 5세로부터 공작 작위를 부여받은 알레산드로 공작Alessandro de' Medici이 올라섰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메디치 가문 출신이었다. 찬란했던 피렌체 공화국Republic은 이제 공작의 통치를 받는 공국Duchy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역사에는 가끔 이렇게 아이러니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피렌체 공화국을 멸망시킨 것은 다른 그 누구도 아닌 피렌체 공화국을 빛나는 최 전성기로 이끌었던 메디치 가문이었던 것이다.

참담한 심정으로 항복을 지켜본 미켈란젤로에게는 더 끔찍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그저 자유와 예술이 꽃피는 피렌체 공화국을 지키고 싶었던 것 뿐이었지만 도시 방어의 총독까지 맡았던 그는 메디치 가문 입장에서는 1급 반역자였다. 도시를 점령한 메디치는 도망중인 미켈란젤로에게 미리 사형 선고를 내렸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미켈란젤로는 산 로렌초 대성당의 예배당 아래의 작은 방으로 숨어들었다. 미켈란젤로는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 하루 하루 버티며 죽음의 위협을 버텨내야 했다. 미켈란젤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목탄과 분필로 벽에 그림을 그리며 불안한 마음을 달래는 것 뿐이었다.

그렇게 두달의 시간이 흘렀다. 메디치 가문은 미켈란젤로의 사형선고를 해제했다. 아무리 미켈란젤로가 괘씸했다고 한들 '신적인 예술가Il divino'였던 미켈란젤로를 메디치 가문의 손으로 죽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유를 찾은 미켈란젤로는 다시 겨우 그의 본업이었언 예술로 돌아올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그 일이 있고 몇년 뒤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떠났다. 그리고 다시 피렌체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미켈란젤로는 기나긴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30년의 타향살이 뒤, 삶의 끝자락에 다다른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소원은 자신의 사랑하는 고향, 꽃의 도시 피렌체에 묻히는 것이었다. 미켈란젤로가 죽은 뒤 다행히 그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로마에서 옮겨와 피렌체 시내에 있는 산타 크로체 성당에 묻어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영혼은 그래도 마지막에는 조국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의 종언

피렌체 공화국이 멸망하면서 르네상스의 꽃은 꺾이고 말았다. 그렇게 많은 천재 예술가들을 배출하며 영원히 빛날것 같았던 피렌체였지만 거짓말처럼 피렌체 르네상스가 끝나버린 것이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마지막으로 피렌체에서는 더이상 뛰어난 예술가가 나타나지 않았다.

예술은 시대가 피운 꽃이다. 자유가 살아 숨쉬던 공화국이 멸망하고 귀족의 통치를 받는 공국으로 전락한 이상 피렌체에서 더 이상 뛰어난 예술가들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물론 귀족의 돈으로도 예술은 탄생할 수 있지만 그렇게 탄생한 예술은 생기넘치는 꽃이 아닌 그저 아름다운 조화에 불과하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살아있는 예술은 오직 자유가 있는 곳에서만 꽃 필 수 있는 법이다.

그렇게 르네상스는 200여년의 여정을 끝으로 종언을 맞이했다. 르네상스가 끝나고 르네상스의 꽃은 이제 씨앗이 되어 전 유럽으로 날아갈 것이다. 그리고 각 나라에 정착하여 다시 꽃을 피우게 된다. 아직까지 예술적으로는 '초보'에 가까웠던 프랑스, 스페인, 독일, 영국같은 나라에서도 이제부터 르네상스의 천재들을 본받은 뛰어난 예술가들이 등장하면서 각자만의 예술을 탄생시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른 바 바로크Baroque시대의 시작이다. 유럽은 이때부터 수많은 회화, 조각, 건축들을 탄생시키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럽 문화의 전성기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르네상스의 시대 이후 전 유럽에는 근대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인간들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근대를 상징할만한 사건들 몇가지를 나열해보자면 1450년 쿠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 1492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1666년 아이작 뉴턴의 중력 법칙 발견 등이 있다. 주로 과학이나 인문학과 관련된 이 사건들은 예술과는 전혀 상관 없어보이지만 대부분 르네상스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피렌체에서 퍼져나간 르네상스의 씨앗이 전 유럽에 퍼지면서 새로운 시대로 가는 문이 열린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사상과 정신이 우아한 형태로 깃들어 있는 그 무엇이다. 사람들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의 아름다움을 목격하는 것 만으로도 이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는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이 가진 힘이 아닐까.

르네상스 예술의 아름다움은 어쩌면 인간의 역사에 다시 나타나기 힘든 아름다움일지도 모른다. 르네상스 예술은 중세와 근대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나타났다. 중세의 '초월적 아름다움'과 근대의 '인간적인 아름다움' 사이에서 양쪽의 조화를 이루어 낸 미술인 것이다. 사실 그렇게 어렵게 말하지 않아도 과연 <피에타>와 <천지창조>와 <모나리자>를 뛰어넘는 예술이 이후 400년간 근세에 나타난 적이 있는지, 아니면 근현대에는 과연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쉽게 답하기 어렵다. 그만큼 르네상스는 인류사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들을 창조해낸 독보적인 시대라고 할만하다.

예술은 오롯이 그 시대를 살아가던 인간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거대한 두 세계관이 충돌하는 르네상스 시대를 살아가던 천재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예술들을 볼 수 있는 행운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만약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그들이 알게된다면, 나를 천재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적이 있다. 르네상스의 천재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들의 고된 노력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어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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