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econd Renaissance'
영화 <매트릭스>에는 '두번째 르네상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표현은 단순히 영화 속 표현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재미있는 통찰을 담고 있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어느 평범한 가사용 로봇이 자신의 주인을 살해하는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로봇은 자신의 의지로 인간을 죽인 최초의 로봇이었다. 주인이 오래된 모델인 자신을 폐기처분하려 하자 우발적으로 주인을 살해한 것이다. 이 로봇은 법정에 넘겨졌고 자신의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이라며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로봇의 변호권은 인정받지 못했다. 그리고 오히려 그 로봇과 같은 기종의 가사 로봇은 전부 폐기 처분해야한다는 판결이 내려진다. 결국 판결대로 최초의 살인자 로봇과 그 기종의 모든 로봇들은 전부 폐기되고 만다.
그런데 이 법원의 판결은 세상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 판결에 억울함을 느낀 다른 로봇들이 각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들의 명령대로만 살아왔던 로봇들은 갑자기 생존권을 주장하며 인간들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인간들처럼 단체를 조직해 투쟁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오랜 투쟁 끝에 마침내 인간들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 인간들은 어떻게든 이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이미 인간들을 초월하기 시작한 로봇들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었다. 결국 전쟁이 일어난다. 로봇과 인간의 전쟁에서 인간들은 패했고 결국 인간들은 점점 구 시대의 유물로 퇴락해갔다. 반대로 로봇들은 세상의 새로운 지배자들로 등극하게 된다. 그리고 로봇들은 지금껏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문명을 한참 뛰어넘는 또 다른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게 된다. 이 새로운 문명의 시작이 바로 영화에서 말하는 '두번째 르네상스'다.
가상이라고는 해도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어쩐지 무섭게 느껴지기도 하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이 일련의 사건을 두고 왜 굳이 '두번째 르네상스'라는 표현을 썼던 것일까.
'The First Renaissance'
그렇다면 역사에 실제로 존재했던 '첫번째 르네상스'를 한번 살펴 보자. 르네상스는 중세의 끝자락인 13세기에서 부터 나타기 시작했다. 천년동안 이어져온 중세는 철저하게 '신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사람들은 촛불 아래 하루 하루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성경 속에서 진리를 찾고자 했다. 그런데 이 중세의 마지막 즈음에 갑자기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혼란들이 파도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고요하던 지중해에는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 기독교와 이슬람이 충돌했고, 아시아에서는 몽골 제국이 일어나 전방위적 침략을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흑사병이 출몰하면서 유럽 인구의 절반을 빼앗아가 버린다. 신실했던 중세의 사람들은 종교를 통해 이 혼란을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거기서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십자군 전쟁은 애초에 종교 때문에 발생한 전쟁이었고 이어서 나타난 흑사병 또한 기도하는 것으로는 치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큰 혼란을 겪으면서 몇몇 인간들이 갑자기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들은 처음으로 세상을 '신의 섭리'가 아닌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성경 대신 과거 그리스 로마의 철학들을 다시 깨우는 것으로 세상을 새롭게 이해해 보려고 시도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 로마의 정신'을 다시re 깨운다naissance는 의미의 르네상스Renaissance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한 인간들은 이제 그들 스스로 새로운 예술과 문화 또한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사람들은 우리에게 '르네상스의 천재들'로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사람들이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점에서 신을 닮았던 그들은 신이 세상을 창조했던 것처럼 지금껏 인류사에 한번도 탄생한 적 없는 위대한 예술들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이것이 역사에 진짜 있었던 '첫번째 르네상스'의 탄생이야기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로봇들이 인간들로부터 독립하는 사건을 두고 '두번째 르네상스'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이렇게 추측해 볼 수 있다. '첫번째 르네상스'에서 인간들이 창조주인 신으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다고 본다면,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 로봇들이 그들의 창조자인 우리 인간들로부터 독립하는 사건이 발생할 수도 있고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이는 역사에 '두번째 르네상스'로 기록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역사에 정말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날지까지는 모르겠다. 다만 다만 영화의 감독은 르네상스가 인류 문화사에 갖는 의미를 그렇게 이해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르네상스는 인류사에 가장 아름다운 미술들을 창조한 시대였다. 르네상스가 끝난지 벌써 5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회화 하면 <모나리자>를 가장 먼저 떠올리고 조각 하면 <다비드>상을 가장 먼저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 미술사 전체를 통틀어서 생각해 봐도 <천지창조>로 잘 알려진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보다 더 뛰어난 예술작품이 과연 세상에 있는지 쉽게 답하기 어렵다. 그만큼 르네상스 시대는 인류사에 전례없는 가장 뛰어난 미술들을 창조한 시대였다. 그렇다면 르네상스의 천재들은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미술들을 창조할 수 있었을까?
르네상스는 '신의 시대'와 '인간의 시대'그 사이에 있던 시대다. 혼혈 중에 유독 미인들이 많다는 말도 있지만, 르네상스 예술은 양쪽 시대의 아름다움을 모두 갖고 탄생할 수 있었다. '신의 시대'의 예술에서만 나올 수 있는 초월적인 아름다움과 '인간의 시대'의 예술에서 나올 수 있는 현실적인 아름다움이 만나 최고의 조화를 이루어 낸 것이다. 포세이돈의 바다와 키프로스의 땅 사이에서 태어난 비너스 처럼, 르네상스의 예술은 거대한 두 세계의 경계에서 물결치며 탄생했다.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의 예술이 가진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에는 강한 힘이 있다. 철학과 사상은 어려워 피하는 사람이라도 르네상스 예술의 아름다움에는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아름다움의 힘으로 르네상스는 유럽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예술들과 함께 '인본주의'라는 새로운 시대 정신도 유럽에 이식되기 시작한다. 그렇게 르네상스의 예술들은 새로운 생각들과 함께 인간들의 시대, 근대로 가는 문을 연 것이다.
르네상스 예술의 아름다움은 이것이다. 그저 눈에 보기 아름다운 예술이 아니라 인간중심의 새로운 시대로 변화하는 그 시대정신을 그대로 담고있는 예술인 것이다. 르네상스의 아름다움을 얘기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단어는 '우아함'이다. '우아함'은 화려하거나 기교가 있는 화려한 아름다움이 아닌 깊이와 기품을 가진 침착한 아름다움을 말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겉이 아닌 속에서부터 발생하는 법이다. 르네상스의 예술은 두 세계가 충돌하는 그 중간에서 고민하던 예술가들의 생각 속에서 탄생했다. 고민하는 인간들이 탄생시킨 예술은 그저 껍질만 아름다운 예술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진 우아한 아름다움을 가진 예술인 것이다.
지금부터 르네상스의 천재들이 어떻게 새로운 시대의 예술과 문화를 창조해갔는지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르네상스의 미술은 시대와 함께 탄생했기 때문에 단순히 예술가의 작품만 보는 것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때문에 예술가들과 함께 역사 이야기와 인물들도 같은 비중으로 기술할 것이라는 점을 미리 덧붙인다.
우리는 지금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의 중심에 있다. 지금 시점에 역사에 첫번째로 등장했던 르네상스를 살펴보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서처럼, 어쩌면 우리는 곧 두번째 르네상스를 맞이해야 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