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us lo vult, 신께서 그것을 바라신다
1095년 11월 27일, 프랑스 중부의 마을 클레르몽의 성당 앞에는 마을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모여있었다. 벌써 쌀쌀해지기 시작한 가을 아침 바람이 손발을 차갑게 만들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들뜬 마음이었다. 곧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마을의 광장에서 연설한다는 소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세 유럽의 민중들에게 종교는 삶의 모든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들 앞에 '신의 대리인' 교황이 나타나 연설을 한다니.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지금 왜 교황청을 떠나 클레르몽에 와 있는 것일까. 그는 지난 10일 동안 클레르몽의 성당에서 공의회를 진행 중이었다. 공의회는 유럽 전체의 고위 성직자들과 제후들이 한 곳에 모여 기독교계의 중요한 결정들을 내리는 회의를 말한다. 중세의 유럽은 철저하게 기독교 중심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기독교계에서의 중요한 결정이 내려진다는 말은 사실상 앞으로 유럽 전체가 나아가야할 방향이 정해진다는 말과 같다. 요즘으로 치면 유럽연합의 전체 의회소집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회의가 끝났는지 드디어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교황의 등장에 빼곡하게 모여있던 군중들의 이목이 순식간에 그에게 집중된다. 자신을 기다렸던 군중들을 향해 교황은 곧 연설을 시작했다. 교황의 칼날 같은 목소리가 가을의 찬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가장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 모두 이미 소문을 통해 들었겠지만 이슬람인들이 우리의 형제들을 공격하여 서쪽 지중해 해안과 헬레스폰토스까지 이르는 영토를 침공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땅을 계속 점령하고 있고 일곱 번의 전투에서 모두 그리스도인들을 이겼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형제들을 죽이고, 납치하며, 교회를 파괴하고, 이 땅을 황폐화시키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들을 그대로 둔다면 더 많은 하나님의 신자들이 계속 공격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아니 그 누구보다 주님께서 바라십니다. 그리스도의 전령인 여러분은 병사와 기사, 가난하고 부유한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동쪽으로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돕고 그 사악한 종족을 멸망시켜야 합니다. 나는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에게 지금 말하지만, 이는 여기 있지 아니한 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내가 명하는 것이 아니라 신께서 명하시는 것입니다!... 길에서나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이방인과의 전쟁에서 죽는 자는 즉시 죄 사함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교황에게 부여하신 그 능력으로 죄 사함을 내릴 것입니다. 신자들끼리 서로 싸우던 자들은 이제는 이교도들과 맞서 싸워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입니다. 지금까지 강도였던 사람은 기사가 될 것입니다. 형제와 친척과 싸우던 자들은 이제 야만인들을 멸하는 의로운 싸움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적은 보수를 받던 용병들은 이제 영생의 보상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완전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알려진 연설의 내용은 대략 위와 같다고 한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는 연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선전포고'에 가깝다. 요약하자면 '이슬람이 먼저 공격했으니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함께 이슬람을 공격하자'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아마 10일동안 이어진 공의회에서는 점점 거세지는 이슬람의 공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자는 결론을 내렸던 모양이다.
이 연설을 들은 클레르몽의 마을 사람들과 귀족들은 계급과 상관없이 모두 하나같이 뜨겁게 반응했다. 교황Pope은 아버지Papa다. 교황은 자식들에 해당하는 유럽 민중들이 왜 자신의 연설에 적극적으로 반응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렇게 점점 뜨거워지는 군중들 사이에서 누군가 다음과 같이 소리친다.
"데우스 로 불트!(신께서 그것을 바라신다!)"
이 구호는 순식간에 군중에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곧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이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처음 구호를 외쳤던 사람이 적절한 박자까지 고려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짧은 3음절의 구호는 다같이 외치기에도 좋았다. 교황은 자신이 시킨 구호는 아니었지만 이 구호가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군중의 외침이 어느 정도 잦아들었을 때쯤 그들에게 이렇게 화답했다.
"이 말은 여러분의 마음에 계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말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전쟁에서 적을 만날 때마다 외치십시오. 신께서 그것을 바라신다!"
Deus lo vult. 이 구호는 이후 십자군의 시작을 상징하는 구호가 된다. 제후들과 기사들은 나중에 십자군 원정에 가서도 한 목소리로 "Deus le volt"를 외쳤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순례자들 사이에서도 이 구호는 기독교인들 끼리 통하는 구호로 사용된다. 신께서 그것을 바라신다, 이 짧은 구호가 울려 퍼지던 남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중세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전쟁이었던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었다. 역사상 가장 종교적이었던 전쟁,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유럽을 그 종교로부터 완전히 탈출시키고 르네상스를 출발시킨 역설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십자군 직전의 유럽
지금 입장에서 보면 이슬람 침공을 연설하는 교황과 그에 열정적으로 화답하는 11세기의 유럽인들이 종교적 광기에 휩싸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당시 유럽의 상황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교황의 연설에 열광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중세 유럽의 민중들은 그 어느 때보다 이슬람의 침략으로 인해 괴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유럽 침략은 7세기부터 시작되어 벌써 4백 년 동안 진행되어 오고 있었다. 이슬람 세력은 왜 가만히 있는 중세 유럽의 서민들을 수백 년 동안이나 괴롭혀온 것일까. 이슬람의 침략은 이슬람의 창시자였던 마호메트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아라비아 사막의 도시 메카에서 태어난 마호메트는 쿠라이시라는 부족 출신의 귀족이었다. 그는 청년시절부터 진리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주기적으로 히라 산 동굴에 들어가 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수행을 하던 어느 날 한 천사를 만나게 된다. 마호메트에 따르면 이 천사는 대천사 가브리엘이었다고 한다. 가브리엘은 두려워 떨고 있는 마호메트에게 '계시'를 받아 적으라고 했는데 이때 받아 적은 계시의 내용이 이후 정리되어 이슬람의 경전 '쿠란'으로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이 '쿠란'을 바탕으로 탄생한 종교가 바로 이슬람교다. 그런데 마호메트가 받아 적은 여러 계시 중에는 범상치 않은 내용이 있었다. 바로 이슬람을 믿지 않는 불신자는 죽여도 된다는 내용이다.
"너희가 불신자를 만났을 때, 그들의 목을 쳐라." (쿠란 47:4)
쿠란에는 다른 좋은 구절도 많이 있는데 왜 이 구절이 그토록 그들에게 중요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처음 탄생한 이슬람 세력은 이 구절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종교 전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어쨌든 천사가 나타나 불신자는 죽여도 상관없다고까지 말했으니 전쟁을 망설였던 중동 사람들에게조차 충분한 명분으로 작동했을 것이다. 이슬람 신도에서 이슬람 전사로 변화한 중동의 남자들은 서쪽으로 이동하며 이슬람을 믿지 않는 기독교인의 도시들을 차례로 정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슬람의 남자들은 일단 도시를 정복한 이후 이슬람을 믿을지 말지를 선택하게 했다.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살려주었고 개종하지 않으면 그대로 죽이거나 노예로 팔았던 것이다. 죽음의 위협 앞에 이슬람을 택한 기독교인들도 적지 않았지만 종교가 인생의 모든 것이었던 중세의 민중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하기도 했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몰려오는 이슬람인들을 이렇게 표현했다.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쿠란"
이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세상의 평화와 인간의 안녕을 빌어야 할 종교인들이 한손에는 경전을 들고 있지만 다른 한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는 앞으로 일어날 십자군드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일 것이다. 어쨌든 이렇게 전도와 정복이 반반 섞여있는 이슬람의 확장은 마호메트 시절부터 시작되어 11세기 십자군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 4백 년 동안이나 진행되어 왔다. 이슬람 세력은 우선 북 아프리카 지역, 지금의 이집트, 알제리, 리비아 쪽 점령에 성공했다. 지금도 이집트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슬람 국가인 이유는 모두 이 시기에 이슬람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파죽지세로 침공을 이어나가던 이슬람은 지중해를 건너 유럽 본토까지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침략을 당한 곳은 북 아프리카에서 가장 가까웠던 이베리아 반도, 지금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역이었다. 지브롤터 해협을 건넌 이슬람 세력은 이때 정말 거짓말처럼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이슬람화 시켜버렸다. 지금은 서유럽의 중요한 두 나라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한때 이슬람 점령지역이었다고 하면 믿기 어렵겠지만 이베리아 반도는 이때부터 중세 말까지 수백년동안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 지역의 이슬람화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클래식 기타곡으로 유명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스페인 남부의 궁전이었던 알함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을 기타로 표현한 곡인데 이 궁전은 이슬람 정복 시기에 건설되어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이슬람식 궁전이다.
스페인까지 점령했다면 그 다음 차례는 당연히 인접국인 프랑스와 이탈리아다. 우리는 별일 없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프랑스와 이탈리안인들도 이제는 자기들 목 앞까지 칼이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유럽 사람들이 이슬람에 대해서 특히 공포스러워했던 것은 납치였다. 종교적인 목적으로 시작된 정복전쟁이었지만 이슬람의 남자들은 기독교 마을을 습격해서 사람들을 납치하고는 노예로 팔아버리는 것으로 상당한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슬람 전사'에서 아예 '노예 사냥꾼'으로 바뀌어버린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은 귀족, 농노 구분 없이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납치해서 팔아넘겼다. 납치한 유럽인들 중에 귀족들은 비싼 몸값을 내면 풀어주었고 여자들은 중동의 부자들에게 팔아넘겼으며 서민 남자들은 농장에 팔아서 큰 이익을 남겼다. 여자들은 그나마 중동에 팔려가는 것으로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지만, 낮은 계급의 남자들은 부상이라도 당해 쓸모가 없어지면 그냥 죽이기 일쑤였다. 어차피 교리상 '불신자들'인 기독교인들은 죽여도 상관 없었기 때문이다.
도망가야 한다
이 정도 되면 국가가 나서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중세의 봉건주의 시스템은 거대한 이슬람을 막기에는 여러기지 의미에서 역부족이었다. 중세의 유럽은 하나의 거대한 국가가 아니라 수 백개의 귀족 가문들이 서로 땅을 갈라먹고 각자의 영지를 통치하는 시스템이었는데, 이렇게 권력이 분산되어 있으니 칼리프의 통치 아래 하나로 뭉쳐서 쳐들어오는 이슬람을 막을 역량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귀족들은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그저 자기들끼리 영토 싸움 하느라 바빴을 뿐이다.
결국 중세의 서민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들은 어떻게 스스로를 방어했을까. 전투능력이 없는 서민들은 그저 도망가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중세 사람들은 등대 같은 높은 탑을 세워놓고 이슬람 노예 사냥꾼들의 침략을 감시했다. 이 탑들은 '사라센의 탑'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도 스페인과 이탈리아 남부지역의 해안가에는 이런 형태의 감시탑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해안가에 서있으니 등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슬람을 막기위한 감시탑인 것이다. 이름이 '사라센의 탑'인 이유는 당시 유럽인들은 중동 사람들을 뭉뚱그려 '사라센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침략에 대항할 목적으로 세운 건축이 요새나 성이 아니라 감시탑인 것을 보면 중세의 서민들이 침략에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알 수 있다. '사라센의 탑'이 특히 해안가에 많았던 것은 해안가 마을이 가장 취약했기 때문이다. 이슬람 노예사냥꾼들 입장에서는 내륙으로 들어가려면 말과 식량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힘들었지만 해안가 마을은 배를 타고 가서 빠르고 약탈하고 돌아가면 간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슬람의 침략은 중세를 살아가는 힘없는 민중들에게는 말 그대로 '진짜 공포'였다.
기독교의 역습
이것이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의 유럽의 상황이었다. 아마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지난 수백 년간 같은 기독교인들을 납치하고 살해한 이슬람에 대한 공포와 증오가 상당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어 왔음에도 서방세계의 군주들은 물론이고 역대 교황들 조차 지금까지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이슬람과의 '성스러운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클레르몽에서 교황의 연설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순식간에 열기로 뜨거워졌던것도 당연해 보인다. 지금껏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했던 그들에게 이제는 그래도 무언가를 해볼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준 것이니까.
다시 1095년의 늦가을의 클레르몽으로 돌아와 보자. 민중의 열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고 몇 명의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이 교황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 앞에 무릎을 꿇고 십자군에 동참할 것을 선서했다. 연설할 당시에는 귀족보다는 서민들이 더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었겠지만 사실 교황이 바라는 것은 민중들이 아닌 귀족 제후들의 참전 선언이었다. 힘없는 농민들이 괭이나 낫을 들고 모여봤자 이슬람의 훈련받은 군인 집단을 만나게 되면 도살당할 것이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교황의 바람대로 꽤 많은 제후들이 십자군 참여를 선서하게 된다. 현장에서 바로 십자군의 참여를 선서한 제후들도 있었지만 나중에 참여의사를 전달한 제후들도 많았다. 공의회에 참석했던 성직자들이 이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각 고국으로 돌아가 왕과 귀족들에게 클레르몽에서 있었던 십자군 원정 선포 소식을 전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군은 모든 유럽인들의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유럽 연합군'같은 느낌이 되어갔다.
"거룩한 전쟁Bellum sacrum"
기독교인들은 십자군 전쟁을 이렇게 불렀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십자군 원정대에게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했다. 바로 '예루살렘 정복'이다. 예루살렘은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도시인데 지금 이슬람의 통치 아래 있으니 우리 기독교인들이 거룩한 전쟁을 통해 '성도'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의 왕과 제후들은 다음 해에 출발할 목표로 1년 동안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 왕과 귀족들은 땅을 팔아 돈을 마련하기도 했고 가지고 있는 귀금속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지금껏 서민들입장에서는 한없이 이기적으로만 보였던 유럽의 귀족들이 그래도 정말 오랜만에 한 뜻이 되어 움직인 것이다.
십자군의 예루살렘 정복
이듬해 1096년 8월, 유럽 각국에서 몰려온 십자군 참여자들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했다. 콘스탄티노플은 동쪽 기독교 도시 중에서는 이슬람 세력이 아직 점령하지 못한 기독교인들의 최종 방어선 같은 도시였다. 이렇게 모인 십자군 원정대는 예루살렘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원정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아무리 열정이 가득한 십자군이라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남의 땅에 들어선 것은 상대방의 링 위에 무방비 상태로 뛰어든 것과 비슷하다. 십자군은 이슬람의 기습에 전멸할 뻔한 적도 있었고 성에 고립되어 모두 굶어 죽을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대는 3년 동안 천천히 전진하며 예루살렘으로 가는 경로에 있는 모든 이슬람의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결국 3년 간의 전쟁 끝에 1099년 7월, 십자군 원정대는 이슬람이 지금껏 점령하고 있었던 '성도' 예루살렘 점령에 성공하게 된다. 승리한 십자군들은 이슬람인들의 시체로 가득해진 예루살람의 땅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고 멀리서 소식을 들은 유럽의 민중들은 열광했다. 지금껏 수백 년간 자신들을 괴롭히던 이슬람 세력을 무찌르고, 신의 아들이 태어난 도시를 다시 기독교의 손으로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1차 십자군 원정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
신의 목소리
어느 시대에나 타 민족에 대한 침략은 있어왔지만 십자군 전쟁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독특한 전쟁이었다. 서양과 중동 양 세력은 모두 특이하게도 '종교'를 명분으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슬람인들은 기독교들의 땅을 침략할 때 '코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했고, 이에 대한 반격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 역시 '신께서 그것을 바라신다'는 종교적 구호를 가지고 시작했다. 그리고 교황이 1차 십자군 원정을 명령하면서 설정한 전쟁의 최종 목표는 이상하게도 '이슬람인에 대한 복수'가 아닌 '성도 탈환'이었다. 교황은 왜 복수나 정복같은 현실적인 목표가아닌 '성도를 되찾아야 한다'는 꿈을 쫓는 듯한 목표를 내세웠던 것일까. 이는 이렇게 추측해 볼 수 있다. 깊은 종교적 세계관 속에 살았던 중세의 사람들은 그런 꿈같은 목표를 내세우지 않으면 애초에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라고.
또 한가지 특이한 점은 새로운 전쟁을 시작한다는 결정을 왕이 아닌 기독교계의 수장인 교황이 내렸다는 점이다. 십자군 전쟁의 시작은 분명 왕의 '선전포고'가 아닌 클레르몽에서 있었던 교황의 '설교'였다. 현대로 치면 대통령이 아닌 어떤 종교 지도자가 대중 앞에서 설교하는 것으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게다가 교황의 부름에 서유럽의 내로라하는 나라들, 프랑스와 영국, 신성로마제국(독일), 그리고 여러 제후국의 왕과 귀족들이 참여했다. 근현대의 그 어떤 종교 지도자가 과연 프랑스, 영국, 독일같은 유럽의 열강들을 줄세워서 전쟁을 보낼 수 있을까.
이는 중세의 유럽이 그만큼 철저하게 '신의 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세의 유럽 땅에서 살아가던 민중들에게 교황의 목소리는 곧 '신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유럽의 왕과 귀족들은 그 목소리가 이끄는대로 목숨을 걸고 원정을 떠났다. 중세는 정말 그런 시대였다. 교황의 말 한마디가 곧 신의 명령이 되는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