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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Feb 17. 2024

최초의 르네상스인, 프리드리히 2세

프리드리히 2세 '매를 이용한 사냥기술'의 삽화


식어가는 열기

엉망진창이었던 4차 십자군이 허무하게 끝나 버리고 신임 교황으로 선출된 호노리우스 3세는 다시 5차 십자군을 계획했다. 하지만 어쩐일인지 유럽의 왕들과 귀족들은 교황의 부름에도 좀처럼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영국왕과 프랑스왕 모두 자신의 영토를 지키느라 어쩔 수 없다고 핑계를 댔는데, 사실 십자군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본인들이 나서지 않았으면 교황도 강요할 방법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교황은 규모는 작지만 브리엔이라는 현장 지휘관을 앞세워 겨우 5차 십자군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하지만 무능한 지휘관이었던 브리엔은 그나마도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다 결국 북아프리카의 다미에타 항구에서 포위되어버렸다. 그리고는 이슬람과의 협상을 통해 겨우 목숨만 건져서 돌아올 수 있었다. 규모의 측면에서나 전략의 측면에서나 어쩐지 초라해 보이는 5차 십자군 이었다. 4차 십자군 이후 이제는 점점 식어가는 십자군의 분위기를 반영한다고 해야할까.   

하지만 교황들의 의욕 만큼은 세월이 가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교황들'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1차 십자군의 우르바누스 2세가 죽고 나서도 벌써 교황은 여러번 교체되었지만 이들은 마치 모두 한 사람인 것처럼 똑같이 행동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끝까지 한결같이 성도 탈환과 십자군의 성공을 바라고 있었다. 교황들은 성도 탈환이야말로 유럽 기독교 세계가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마지막 끈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다시 6차 십자군을 계획했다. 그리고 교황이 신임 지휘관으로 눈여겨 보고 있던 인물은 바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였다. 


6차 십자군

그런데 교황이 6차 십자군의 지휘관으로 지목한 프리드리히 2세는 역사에서 '최초의 르네상스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최초의 르네상스인은 당연히 예술가나 사상가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황제'였던 것이다. 어떻게 예술가나 학자가 아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최초의 르네상스인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일까.

우선 6차 십자군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살펴보자. 교황이 새로운 총 지휘관으로 프리드리히를 지목한 것에는 사실 이유가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아무래도 교황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는 정치적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는 핏줄로만 보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적통이었지만 아버지가 죽고나서도 제국 내의 권력다툼 때문에 아직 완전히 황제 자리를 굳히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중세치고는 특이하게도 일종의 '연방제'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4명의 선제후Princeps Elector(선거권을 가진 제후)들이 투표를 통해 동의해 주어야 했는데 거기에 더해 교황이 '대관식'을 치러주어야 확실히 황제의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교황은 프리드리히에게 제안했다. 만약 6차 십자군을 조직해서 원정을 떠나준다면, 직접 대관식을 치러주겠다고프리드리히 입장에서는 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받게되면 황제로서의 확실한 지위를 굳힐 수 있었다.

둘의 거래는 성사되었다. 1220년, 교황은 약속대로 대관식을 치러주었고 그렇게 새로운 황제로 즉위한 프리드리히는 그 대가로 원정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2세는 어쩐일인지 십자군 원정을 가고 싶어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도 중세를 살아가는 신앙인이었을텐데 왜 십자군 원정을 꺼려했을까. 십자군이 성공하기만 한다면 온 유럽이 그를 칭송하고 역사에 길이 남을텐데 말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잠시 후 살펴보기로 하고 일단 프리드리히는 십자군 원정을 차일피일 미루기 시작했다. 병력을 모아야 한다, 대관식을 치루었다해도 여전히 국내 정세가 불안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자그마치 7년이나 원정을 미루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7년동안 시간을 질질 끄는 사이에 애만 태우던 교황 호노리우스가 그만 죽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의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었지만 아마 프리드리히가 뭉그적거리는 것에 울화통이 터지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 vs 신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

그 다음으로 선출된 교황은 그레고리우스 9세였다. 그런데 새로 선임된 교황은 전임 교황 호노리우스와는 달리 불처럼 뜨거운 성격이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레고리우스는 취임하자마자 다짜고짜 선임 교황과의 약속을 지키라며 프리드리히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교황이 가진 최고의 카드는 '파문'이었는데 더 이상 십자군을 미루면 전임 교황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대가로 파문에 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이번에는 프리드리히도 눈치가 보였는지 1227년 8월 15일 성모승천일에 6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그런데 무슨 우연인지 원정길에 오르자마자 병사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8월의 더운 날씨 때문이었던 모양인데 프리드리히 자신도 병사들로부터 병이 옮았는지 몸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프리드리히는 일단 회군하기로 결정한다. 근데 문제는 프리드리히의 건방진 태도였다. 그는 몸을 회복한다는 핑계로 나폴리에 있는 온천에 가서 뜨끈하게 몸을 지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은 격노했다. 7년을 질질 끌어놓고 겨우 출발한다더니 이제는 고작 온천에서 몸이나 지지고 있다고? 물론 프리드리히 본인은 실제로 아프기는 했다고 하니 억울했을지 모르겠지만 교황은 프리드리히가 아픈게 아니라 십자군 원정이 가기 싫어 꾀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7년이나 끌었던 전적이 있으니 그렇게 오해하는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다혈질 교황은 전임 교황처럼 협박하는것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진짜로 프리드리히를 '파문'에 처해 버렸다는 것이다. 

파문은 기독교 사회였던 중세에 교황이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처분이다. 간단히 설명한다면 파문은 기독교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시키는 처분이다. 역사에는 '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명한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107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하인리히가 교황에 의해 파문당하자 황제가 추운 1월의 겨울날 허름한 옷 한 벌에 신발도 벗고 3일 동안 싹싹 빌면서 교황에게 파문을 풀어달라고 요청한 사건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럽 최고의 권력자인 황제가, 정복도 아닌 누더기 같은 옷 한 벌 입고 추운 겨울날 손을 불어가며 교황에게 빈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팬티만 입고 싹삭 빌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비슷할 것이다. 그만큼 중세의 파문은 황제도 옷을 벗고 무릎을 꿇게 할 수 있는 무서운 처분이었다.

그로부터 한세기 반이 지나긴했지만 여전히 중세는 기독교 중심의 시대였다. 그런데 프리드리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파문을 당하자마자 교황에게 맨발로 찾아가 싹싹 빈 게 아니라 교황에게 편지를 한장보냈다. 


'유소년 시절의 나를 도와준 게 로마 교황이라 했는데 내가 유소년기를 보낸 시칠리아는 교황이 철저히 무관심했던 곳이라 제후들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바람에 시칠리아 왕국 전체가 무정부 상태로 변했습니다. 또 내가 성인이 되는 과정이나 성인이 된 뒤에도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작센공 오토에 준 사람이 바로 로마 교황이 아니었습니까. 이래도 내가 지금의 지위에 오른것이 교황 덕분입니까, 아니면 힘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내게 조력을 아끼지 않았던 이탈리아와 독일 제후 덕분입니까?'


프리드리히가 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받음으로 확실히 황제의 자리를 굳힐 수 있었던 것은 맞지만, 대관식을 받기 전에 제후들의 확실한 지지를 받아 놓은것은 자신의 실력과 적통성 때문이었다. 적어도 프리드리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관식을 치루어준 사람, 그리고 그 대가로 십자군원정을 약속했던 사람은 모두 그레고리우스가 아니라 전임 교황이었던 호노리우스였다. 그러니까 당신이 이전 교황과의 약속을 빌미로 파문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 프리드리히는 병사들이 동요하는것이 오히려 더 걱정이었다. 그 시대의 병사들은 그저 중세를 살아가는 평범한 기독교인들이기도 했다. 자신들의 리더가 '신의 대리인'인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면 병사들이 동요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급하게 십자군 병사들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우리가 신뢰했던 그리스도의 대리인이자 성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께서 우리에게 이처럼 사악하고 불합리하게 행동하시며, 우리에 대한 증오를 일으키기 위해 그토록 헌신하는 것처럼 보일 때, 무고한 우리에 대한 이런 사나운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그 누구인들 마음이 괴롭지 않으며, 그 누구인들 놀라지 않겠는가?' 


그런데 내용이 심상치 않다. 기본적인 내용은 병사들에게 너희들도 다들 알다시피 우리가 전염병때문에 상황이 어쩔수 없었던 것 아니냐는 것인데 아무리 억울해도 그렇지 감히 교황에게 '사악하고 불합리하게 행동한다' 표현하다니, 프리드리히는 확실히 중세의 다른 군주들과는 어딘가 생각하는게 달랐던 사람이었다.


교황에게 파문당하는 프리드리히 2세, 중세의 삽화


두 번째 파문

교황은 한참 황당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모든 유럽의 왕과 제후들은 교황의 파문 소리만 나오면 벌벌 떨었는데 이 젊은 황제는 도대체 무슨생각인지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파문은 엄밀히 따지면 정치적 선언에 가깝기 때문에 실제로 실행력을 갖지는 않는다. 파문을 당한다고 해서 누가 감옥에 갇히거나 형벌을 당하는 것은 아니니까. 파문의 힘은 교황의 권위로부터 발생하는데 권위라는 것은 상대방이 무시하면 효력이 생기지 않는 법이기도 하다. 

얼마 뒤 교황청에서 또 한 번 파문 공고가 올라왔다. 프리드리히를 '재 파문'한다는 공고였다. 이미 파문을 당했으니 한번 더 파문당한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건 없지만 교황은 '건방진 편지'에 대한 벌로 재 파문을 내린 모양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한번 강조하면 혹시라도 프리드리히가 정신 차릴 것이라고 생각했던게 아닐까. 하지만 두번의 파문에도 역시 프리드리히 2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번의 파문을 당한 프리드리히는 사실상 십자군을 떠날 명분도 사라지게 되어 버렸다. 십자군은 교황의 명에 의해 떠나는것인데 교황으로부터 버림받은 셈이니까. 무엇보다 교황이 두번째 파문을 내리면서 직접 '파문당하는 자가 이끄는 군대는 십자군이 아니다'라고 아예 명문으로 못을 박아놓았다. 

그런데 프리드리히는 여전히 자기 멋대로였다. 일부러 교황을 더 열받게 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프리드리히는 두번의 파문에도 혼자서 그냥 6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버렸던 것이다. 교황 생각에는 두 번씩이나 파문을 당했으면 먼저 자기에게 찾아와서, 무릎 꿇고 싹싹 빌고, 파문을 푼 다음에 십자군을 떠나야 순서가 맞는 것인데, 프리드리히는 '신의 대리인'을 무시한채 그냥 원정을 떠나버린 것이다. 가뜩이나 성격이 불같았던 교황은 아마 혈압이 치솟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해서 프리드리히 2세는 마침내 6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게 된다. 프리드리히는 우선 예루살렘 위쪽에 있는 항구도시 아코에 도착했다. 아코는 예루살렘이 살라딘에게 넘어간 후 기독교측의 근거지 역할을 하던 도시였다. 그런데 중동땅에 발을 디딘 황제 프리드리히는 지금까지의 십자군이 보여줬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체스 게임

이슬람이 점령중인 예루살렘과 프리드리히가 도착한 아코의 중간쯤에 위치한 해안가 도시 야파, 도시 안의 한 천막에는 촛불이 어두운 실내를 은밀히 밝히고 있었다. 그 안에는 6차 십자군의 최고 지도자 프리드리히 2세와 맞은편에는 이슬람 쪽의 사신 파라딘이 앉아있었다. 십자군과 이슬람을 각각 대변하는 두 인물은 마주 앉아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일단 서로의 전력을 탐색해보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었다. 이 둘은 체스를 두고 있었다. 온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 세력은 하루가 멀다하고 서로 으르렁 거리는 상태였지만, 이 프리드리히의 천막 안만큼은 훈훈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게다가 농담을 섞어가며 여유롭게 진행된 둘의 대화는 독일어가 아닌 아랍어로 진행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6개 국어에 능통한 지식인이었는데 아랍어 또한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프리드리히가 아무리 아랍어를 잘 구사한다 한들 그는 일개 병사가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6차 십자군의 총 지휘관이다. 그런 위치의 인물이 적군의 언어인 아랍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전혀 격에 맞는 태도가 아니다. 게다가 기독교측 입장에서 보면 프리드리히는 지금 '사악한 종족들'이 쓰는 언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분명 지금까지 십자군 세력이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새로운 태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둘은 체스를 두면서 현재 십자군과 이슬람의 상황에 관한 대화도 나누었다.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의견 대립도 있었겠지만 체스를 두며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둘의 모습은 요즘에도 좀처럼 볼 수 없는 열린 정치의 모습니다. 차라리 '낭만적인 정치'라고 해야할까.

6차 십자군 원정의 핵심 쟁점은 여전히 성도 예루살렘을 기독교의 손으로 돌려놓는 것이었다.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아마 이렇게 주장했을 것이다. '나도 안타깝지만 우리 측 기독교인들의 생각이 너무 완고하다, 기독교 측 사람들은 예루살렘은 신의 아들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에 반드시 기독교인들이 통치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데, 아마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손에 있는 한 성지 탈환을 위한 원정대는 계속 올 것이고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이슬람을 대표하는 사신 파라딘은 이에 맞서서 '마호메트가 예루살렘에서도 천사를 만났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곳은 우리에게 성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우리 입장에서 예루살렘은 1차 십자군 전까지만 해도 분명 이슬람이 통치중이었는데 십자군이 와서 빼앗은 것 아니냐, 우리도 그냥 빼앗길 수만은 없다.'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술탄 알 카밀과 대화하는 프리드리히 2세, 14세기, 누오바 크로니카의 삽화


르네상스인의 탄생

체스게임은 누가 이겼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프리드리히와 이슬람 술탄 알 카밀과의 협상 과정에서 나온 결과는 이렇다. 성도 예루살렘을 기독교인과 이슬람이 공동통치하자고 결정한 것이다. 프리드리히가 명목상으로 예루살렘의 왕으로 이름만 걸어놓고 실제 통치는 이슬람에게 맡겨두는 방식이다. 요즘으로 치면 '바지 사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통치방식이지만 프리드리히 2세의 관심은 어쩌면 성지 탈환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어색하고 이상한 통치형태라도 일단 서로 죽이지 말고 평화롭게 살아보자는 것이다. 물론 단순한 협약 가지고 예루살렘에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일단 그 길을 열어 놓으려고 했다.

이 협약으로 명목상으로나마 예루살렘은 다시 기독교측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긴 역사에서는 '잠시'라고 말할 수 밖에 없겠지만 이후 몇십년간은 중동에 평화가 찾아오게 된다. 

그런데 기독교측 반응은 전혀 기대와 달랐다. 1차 십자군 때 부터 그렇게 염원하던 '성도 탈환'을 프리드리히가 결국 다시 한번 이룬 것이지만 이 소식을 들은 교황과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오히려 분노했던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프리드리히가 사자처럼 달려들어 날카롭게 이슬람을 쓰러뜨리고 멋지게 성도를 탈환해주길 바랐는데 오히려 가서 그들을 핥아주고 온 꼴이 되었으니까. 십자군이 처음 시작될 때 우르바누스 2세는 이슬람 사람들을 두고 '멸망시켜야 할 사악한 종족'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이후 기독교인들은 지금까지 100여 년이 넘는 시간동안 벌서 5차례나 십자군을 더 보내며 싸움을 이어왔는데 이제와서 그들과의 타협이라니, 교황과 기독교인들은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기독교인들의 생각을 프리드리히 또한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양쪽의 응어리진 마음을 풀 교황의 명도 무시한 채 '멸망시켜야 할 사악한 종족'과의 공존을 시도했다. 신의 말을 어긴 중세인, 바로 최초의 르네상스인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분노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직접 나서기로 결정했다. 내 파문들도 모두 무시하더니, 자기 맘대로 십자군 원정을 떠나가서는, '멸망시켜야할 사악한 종족'과 타협을 했다고?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프리드리히의 행동들은 일관성있는 태도로 보이지만 교황이 보기에 모든것이 자기 멋대로인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화가 있는대로 난 교황은 5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무능한 지휘관 브리엔을 다시 불러와 직접 프리드리히의 영토를 공격하도록 했다. 명분은 확실했다. 아무리 황제라 한들 감히 '신의 대리인'인 나의 명령에 불응하고, '멸망시켜야 할 사악한 종족'들과 계약을 맺은 이단아 프리드리히 2세를 파멸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프리드리히도 당황했다. 어쨌든 자신은 아직 예루살렘에 있는데 본토를 공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브리엔이 본토 공격을 시작하자 영주들은 속속들이 성문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유럽에서 교황의 권위는 강한 힘이 있었기 때문에 영주들은 감히 교황의 군대와 싸울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십자군 전쟁 자체를 하기 싫어했을 뿐 전쟁을 못하는 무능한 황제는 결코 아니었다. 무엇보다 교황의 대리로 군사를 일으킨 브리엔은 이미 80으르 바라보는 고령의 나이였으니 프리드리히를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그래서 프리드리히가 이슬람과의 협상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자 브리엔은 줄행랑을 치며 도망쳐버렸다. 그리고 교황의 군대는 그대로 해체되어 버리고 말았다. 군사력이 없는 늙은 교황은 홀로 남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당장 고혈압이 심근경색으로 진행되어도 이상할게 없는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교령집에 묘사된 그레고리우스 9세의 모습, 13세기


여기서도 화해  

그렇다면 고국으로 돌아온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영토를 공격한 교황에게 복수 했을까? 프리드리히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화병으로 몸져 누워있을 교황에게 계속 사람을 보내 화해의 뜻을 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분노가 켭켭이 쌓여있는 교황은 당연히 프리드리히의 사신을 문전박대 해 버렸다. 그럼에도 프리드리히는 마치 고집쎈 노인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간호사처럼 계속해서 사람을 보내 동태를 살폈다. 쉽게 화가 풀리지 않은 교황이었지만 1년쯤 계속 사람을 보내자 점점 교황의 화가 누그러들고 있다는 소식이 프리드리히에게로 들려왔다.  

교황의 마음이 어느 정도 풀어졌다고 판단한 프리드리히는 직접 만나기로 한다. 결국 프리드리히가 교황의 거처에 직접 찾아가 몸이 건강하신지 '확인'하는 방식으로 둘의 화해는 진행되었다. 이후 교황과 황제는 만찬을 나누고 두번의 파문은 모두 철회되었다. 둘은 교황의 거처에서 연회를 나누고 만나 서로 어깨를 끌어안고 '화해의 키스'를 나누었다. 

인간사의 현실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장면이다. 그토록 앙숙 같았던 사이지만 힘의 추가 한쪽으로 확실히 기울자 결국 감싸 안고 '키스'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으니까. 교황은 프리드리히와 어깨를 감싸안고 키스할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늙은 나이에 굴욕적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래도 골치아픈 놈이랑 화해했으니 그것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어쨌든 이슬람뿐 아니라 고집불통 교황과도 화해를 나눈 프리드리히 2세였다. 


열린 사람

신의 명령에 저항한 최초의 르네상스인 프리드리히. 그는 꽉 막혀있는 중세에 어떻게 이렇게 홀로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프리드리히는 중세에 등장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독특한 인물이라 그에 대한 연구도 많은 편이지만, 그의 '열린 태도'는 그가 시칠리아 섬 출신이었다는 것에서 하나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도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의 섬 시칠리아는 프리드리히 2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섬이다. 그런데 이 시칠리아는 이슬람이 파죽지세로 몰아치던 그 시기에 한동안 정복당했다가 11세기에 다시 기독교인들에 의해 해방된 섬이다. 때문에 여전히 많은 이슬람의 유적과 문화, 그리고 아직 시칠리아를 떠나지 못한 이슬람인들이 남아있었다. 프리드리히가 아랍어에 능통했던 이유도 이 때문인데 프리드리히는 어릴적 쉴새없이 돌아다니는 스타일이었다. 아마 코흘리던 시절의 어린 프리드리히는 왕궁을 나와 아랍인 친구들과 흙장난을 치며 자연스럽게 아랍어를 배우지 않았을까. 

이런 어린시절의 경험 덕에 프리드리히는 이슬람인들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나와 함께 자란 그 아랍 소년들은 결코 '멸망시켜야 할 사악한 종족'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인간이며, 다만 우리와는 다른 종교와 문화 가진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의 조각상, 13세기, 라우센버그


인문학 덕후

그가 열린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또다른 이유는 그가 일찍부터 인본주의, 즉 '인간 중심의 사고'에 눈을 떴다는 점이다.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파괴하고 많은 학자들이 유럽으로 피난왔을 때 이들은 많은 수의 그리스 로마의 책들과 아랍의 책들도 같이 들고 건너왔다. 특히 아랍인들은 그리스 철학의 진가를 알고 있었기에 아랍어로 번역해둔 경우가 많았다. 아마 프리드리히가 책에 관심을 가질 쯤 되었을 때는 시중에 많은 그리스어와 아랍어 서적이 풀려있었을 것이다. 그리스어와 아랍어를 모두 구사할 줄 아는 프리드리히에게 이 책들은 마치 금은보화가 쌓여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프리드리히는 이 책들을 통해 중세적 사고의 한계를 일찍부터 벗어나 그리스 로마의 '인본주의'적 사고 또한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인문학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 프리드리히는 나중에 나폴리 대학을 세웠는데 이는 역사상 최초의 공립대학이다. 그리고 나중에 6차 십자군 원정을 갔다 오는 길에 여러 동방의 지식인들을 데려와서 궁정에 고용한 후 그리스와 아랍어 책들의 번역하도록 주문하기도 했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 때문인지 프리드리히는 학자처럼 스스로 무언가를 연구하기도 했다. 프리드리히에 관한 재미있는 사실은 그가 '새를 이용한 사냥기술'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작성했다는 것이다. 그는 매사냥에 관해 특히 관심이 많았는데,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일종의 '과학 서적'을 발행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프리드리히를 묘사하는 그림이나 조각에서는 항상  매가 함께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국정으로 바쁜 황제가 어떻게 그런 짬을 내서 책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두들 성경을 연구하며 신의 뜻에 관해 궁금해하던 그 시절에 마치 혼자 대학생 졸업반이라도 되는 듯 열심히 논문을 썼다는 것이 재미있다.

진위에 관한 논쟁은 있지만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지적인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과학 실험 비슷한 것을 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실험 중 하나는 '영혼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관찰하기' 였다. 그는 사람이 죽을 때를 맞춰 잘 관찰하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큰 통을 하나 만들었는데 사람 한명이 들어갈 수 있고 위쪽에 길게 작은 구멍을 뚫어놓은 통이었다. 그리고 죽을 때가 다 된 죄수를 통에 가두어 놓고 죽을 때까지 관찰했다. 

또 다른 실험은 인간에게 언어를 가르치지 않으면 어떤 말을 쓸까 하는 것이었다. 그는 만약 갓 태어난 아이에게 말을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면 혹시 아담과 하와가 쓰던 '고대 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터무니없는 생각이지만, 중세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아마 궁금증이 폭발하는 흥미로운 질문이었을 것이다. 다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는데 인간은 말을 가르치지 않으면 아예 언어 자체를 구사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우는 것으로 끝났다.

그 외에도 프리드리히는 혼자 과학, 수학, 물리학 문제를 연구하다가 답이 안 나오면 당시 유럽이나 중동의 학자들에게 답을 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중세의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할 때, 프리드리히는 특이하게도 이렇게 혼자 학문을 연구했던 황제였다. 이래 저래 프리드리히 2세는 최초의 르네상스인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교류 속에서 탄생한 르네상스 

중세인들에게는 '괴짜'처럼 보였을 프리드리히 2세의 등장은 그저 우연이었을까. 역사에 따르면 프리드리히는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졌고 나이를 먹고서는 대머리가 되었다고 하니까 아마 전형적인 북유럽 백인 아저씨의 모습을 떠올리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백인인 그가 어린시절 같은 백인이 아닌 짙은 갈색 피부의 이슬람 소년들과 함께 흙장난을 치며 자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가 어린시절 점점 잊혀져가던 그리스 로마의 지식들을 배울 기회가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모두 서양과 중동의 문명 충돌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슬람이 성전을 외치며 유럽을 침략한 것이나 유럽이 십자군을 일으켜 이슬람을 침략한것이나 양쪽 모두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 끔찍한 전쟁인 것은 매한가지지만, 한편 이 침략은 서로 다른 두 문화가 만나도록 만들었다. 전쟁이라는 극도로 적대적인 상황 속에서도 교류는 생기기 마련이다. 그들은 서로 만나 싸우면서도 한편 세상을 보는 눈 또한 넓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천년동안 신의 세계에 완전히 갇혀 살던 중세의 유럽인들은 십자군 전쟁을 통해 자신들의 눈을 밖으로 확장시킬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르네상스는 이렇게 자기들만의 세상에 갇혀 살던 유럽인들의 눈이 밖으로 확장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보면 6차 십자군 원정의 총 지휘관이었던 프리드리히가 최초의 르네상스인이 된 것은 완전한 아이러니임과 동시에 완전한 필연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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