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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Feb 17. 2024

최초의 르네상스인, 프리드리히 2세

13세기 시칠리아 금화에 표현된 프리드리히 2세, 매가 표현되어 있다


너구리 같은 영웅

십자군 전쟁은 영웅들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악귀'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싸움을 잘했던 '사자왕 리쳐드', 독일의 붉은 수염 '바르바로사', 십자군을 묵사발 냈던 이슬람의 위대한 군주 '살라딘', 문둥병에 걸린 몸으로 예루살렘을 끝까지 보호했던 '문둥이왕 보두엥 4세', 베네치아의 여우 '단돌로', 그리고 '어쎄신'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복면 쓴 중동의 암살자들. 십자군 전쟁 이야기를 찾아보다 보면 인물들 한 명 한 명이 개성이 넘쳐서 마치 잘 짜인 판타지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수많은 영웅들이 활약하던 십자군 전쟁의 시대에, 사자나 호랑이가 아닌 너구리 같았던 독특한 영웅이 한 명 등장합니다. 바로 6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프리드리히 2세입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역사에서 최초의 르네상스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최초의 르네상스인은 예술가가 아닌 군주였던 셈이죠.


체스

예루살렘의 위쪽에 위치한 해안가 도시 야파, 한 밤 중 촛불이 어두운 천막 하나를 은밀히 밝히고 있습니다. 천막 안에는 6차 십자군의 최고 지도자 프리드리히 2세, 그리고 맞은편에는 이슬람 쪽의 사신 파라딘이 앉아있습니다. 십자군 쪽과 이슬람 쪽을 각자 대변하는 두 인물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서로 다른 진영의 대표로서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신 파라딘이 혹시 암살 같은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걸까요? 

모두 아닙니다. 이 둘은 체스를 두고 있었습니다. 온 이슬람과 기독교는 서로 못 죽여서 안달이 난 상태였지만, 이 프리드리히의 천막 안만큼은 훈훈한 온기가 감돌고 있습니다. 게다가 농담을 섞어가며 여유롭게 진행된 둘의 대화는 독일어가 아닌 아랍어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6개 국어에 능통한 지식인이었는데 아랍어에도 능통했기 때문입니다. 프리드리히는 일게 병사가 아니라 황제이자 십자군의 총 지휘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직접 아랍어를 쓰며 이슬람과 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프리드리히라는 인물은 십자군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지금까지 십자군이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열린 태도를 가지고 있는 남자였습니다.

이 둘은 체스를 두면서 현재 십자군과 이슬람의 상황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여당과 야당의 정치인이 서로 바둑을 두며 대화로 정치적 타협을 찾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의견 대립도 있었겠지만 체스를 두며 서로의 생각을 듣는 이 모습은 '낭만이 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이슬람과 십자군의 핵심 쟁점 중 하나는 예루살렘의 통치권을 두고 누가 차지할 것이냐입니다. 살라딘은 죽었지만 살라딘 이후에도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슬람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아마 이렇게 주장했을 것입니다. '나도 안타깝지만 우리 측 기독교인들의 생각이 너무 완고하다, 이들은 예루살렘은 신의 아들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통치해야 마땅하다고 믿는 모양이다, 아마 예루살렘이 이슬람의 손에 있는 한 성지 탈환을 위한 원정대는 계속 올 것이고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라고요. 반대편 이슬람을 대표하는 파라딘은 '마호메트가 예루살렘에서도 천사를 만났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곳은 우리에게 성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우리 입장에서 예루살렘은 십자군 전까지만 해도 분명 이슬람이 통치중이었는데 십자군이 와서 빼앗은 것 아니냐, 우리도 그냥 빼앗길 수만은 없다.'라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각자의 입장이 있었던 것이죠.  

체스게임은 누가 이겼는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양쪽의 협상 과정에서 예루살렘은 기독교인과 이슬람이 공존하는 방식을 택하게 됩니다. 프리드리히가 명목상으로 예루살렘의 왕으로 취임하여 이름만 걸어놓고 실제 통치는 이슬람이 계속하라는 것이죠. 말 그대로 '바지 사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상한 형태지만 이 협약의 목적은 누가 이득을 보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어색하고 이상한 통치형태라도 일단 서로 죽이지 말고 평화롭게 살자는 것입니다. 물론 단순한 협약 가지고 예루살렘에 평화가 찾아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의 6차 십자군은 일단 그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술탄 알 카밀과 대화하는 프리드리히 2세, 14세기, 누오바 크로니카의 삽화


최초의 르네상스인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교황과 기독교인들은 분노했습니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너구리보다는 사자를 좋아하는 법입니다. 서양의 기독교인들은 6차 십자군을 이끌고 있는 프리드리히가 사자처럼 이슬람을 물어뜯기를 바랐는데 오히려 그들을 핥아주고 왔으니까요. 십자군이 처음 시작될 때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에서 이슬람 사람들을 두고 '멸망시켜야 할 사악한 종족'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상당히 과격한 표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중세라고 해도 교황은 어디까지나 '성직자'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목사나 신부가 어떤 특정 민족을 두고 그렇게까지 입에 독을 품고 말해도 아무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을 만큼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들과의 타협이라니요. 당했던 지난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에 도저히 마음을 열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인간은 미워하는 사람은 계속 미워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프리드리히는 그 응어리진 마음을 풀려고 했습니다. '멸망시켜야 할 종족'과의 공존을 시도한 것입니다. 교황의 명령도 무시한 채 말이죠. 신의 말을 어긴 중세인, 최초의 르네상스인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불독 교황을 괴롭히는 너구리 프리드리히

교황과 프리드리히 2세의 관계는 원래부터 으르렁 거리는 사이로 유명했습니다. 교황과 프리드리히의 이야기를 찾다 보면 마치 웃긴 콩트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불같은 성격의 교황을 너구리 같은 프리드리히가 주로 약 올리며 괴롭히는 느낌입니다. 그것도 세대를 거듭하면서 말이죠.

우선 처음에 프리드리히가 6차 십자군을 떠났던 이유는 철저하게 교황의 요구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호노리우스는 십자군을 출병시키면 그 대가로 황제 대관식을 치러주겠다고 했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는데, 당시 프리드리히는 정치적으로 불안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핏줄로 보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적통이었지만 제국 내의 권력다툼 때문에 항상 불안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교황이 대관식을 치러 주면 프리드리히는 확실히 황제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죠. 중세에 교황이 황제에게 '대관식'을 치러주는 것은 내전을 종식시킬만큼 압도적인 정치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대관식은 거행되었고 그 대가로 프리드리히는 원정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는 사실 십자군이 가기 싫었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불필요한 전쟁이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프리드리히는 십자군 원정을 차일피일 미루기 시작했습니다. 병력을 모아야 한다, 국내 정세가 아직도 불안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원정을 미루기를 자그마치 7년입니다. 그 사이 애만 태우던 교황은 죽고 맙니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었지만 아마 프리드리히가 뭉그적거리는 것에 울화통이 터지는 것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그다음 교황으로 그레고리우스 9세가 선출됩니다. 그런데 새로 선임된 교황은 '불독'같은 성격으로 유명했습니다. 앞뒤 안 가리는 화끈한 교황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레고리우스는 취임하자마자 선임 교황과의 약속을 지키라고 프리드리히를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십자군을 미루면 교황의 최고의 카드였던 '파문'에 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것이죠. 프리드리히는 결국 1227년 마지못해 어기적 어기적 기어서 6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게됩니다. 



교황에게 파문당하는 프리드리히 2세, 중세의 삽화


파문

그런데 무슨 우연인지 원정길에 오르자마자 병사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본인도 몸이 안좋았다고 하는데 프리드리히는 일단 회군하기로 결정합니다. 근데 문제는 프리드리히의 태도였습니다. 프리드리히는 몸을 회복한다는 핑계로 나폴리에 있는 온천에 가서 뜨끈하게 몸을 지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소식에 교황은 그만 이성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7년을 끌어놓고 출발한다더니 고장 온천에서 몸이나 지지고 있다고? 아픈사람이 좀 쉴수도 있는거 아닌가 싶지만, 교황은 아마 프리드리히가 아프다고 꾀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교황은 진짜로 프리드리히를 '파문'에 처해 버립니다. 파문은 쉽게 말하면 교회로부터 추방하는 것인데, 기독교 사회였던 중세에는 모든 처분 중에서 가장 무서운 처분입니다. 파문을 당하면 신자로서의 모든 권리가 정지되고 더 이상 교회와 국가의 공동체원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죠. 이론적으로는 황제가 파문을 당하면 영주들은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할 의무도 사라집니다. 쉽게 말하면 '기독교 세계로부터 철저하게 왕따'당하는 것이죠.

역사에는 '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명한 사건이 있습니다. 1077년, 십자군이 시작하기도 20여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인데, 교황이 황제 하인리히를 파문하자 황제가 추운 1월의 겨울날 허름한 옷 한 벌에 신발도 벗고 3일 동안 싹싹 빌면서 교황에게 파문을 풀어달라고 요청한 사건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가, 과장이 아니라 진짜 거렁뱅이 같은 옷 한 벌 입고 추운 겨울날 손을 호호 불어가며 싹싹 빈 것이죠. 들리는 소문에는 무릎도 꿇었다고 합니다.

파문은 중세에 그만큼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는 파문을 당하자마자 교황에게 맨발로 찾아가 싹싹 빈 게 아니라 편지를 한 장 보냅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게 뭐 있는데요?'정도입니다. 교황은 아닌 게 아니라 진짜 얼굴이 씨 벌겋게 변할 만큼 화가 났을 것입니다.


두 번째 파문

얼마 뒤 교황청에서 또 한 번 파문 공고가 올라옵니다. 프리드리히를 '재 파문'한다는 공고였습니다. 이미 파문당한 몸, 한번 더 파문당한다고 특별히 달라질 건 없지만 이는 그만큼 교황의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그렇게 두번의 파문을 당한 프리드리히는 사실상 십자군을 떠날 명분도 사라지게 됩니다. 십자군은 교황의 명령으로 떠나는 것인데 교황에 의해 파문당했으니까요.  

그런데 프리드리히는 여전히 제멋대로였습니다. 일부러 교황을 더 열받게 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프리드리히는 여기서 한 번 더 교황을 미치게 합니다. 파문을 당했음에도 혼자서 그냥 6차 십자군 원정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교황 생각에는 두 번씩이나 파문을 당했으면, 와서 싹싹 빌고, 내 마음도 풀어주고, 파문도 푼 다음에 십자군을 떠나야 순서가 맞는 것인데, 프리드리히는 그냥 교황을 무시하고 혼자 원정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반찬 투정하는 아들이 꼴 보기 싫어서 '너 밥 먹지 마'라고 소리쳤더니 밖에 나가서 혼자 떡볶이를 사 먹고 돌아오는 그런 아들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 아마 교황은 진짜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해서 떠나게 된 6차 십자군 원정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이슬람인과 체스를 두며 예루살렘 점령에 관한 합의를 이끌어 낸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루살렘을 다시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찾아왔다는 의미가 있지만 교황은 이미 예루살렘의 재탈환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화가 아예 폭발 직전까지 간 교황은 이번에는 직접 움직이기로 합니다. 전임 예루살렘 왕이었던 브리엔이라는 귀족을 시켜서 군사를 일으켜 직접 프리드리히의 영토를 공격하도록 한 것입니다. 명분은 명확했습니다. 교황에게 대적하고 '멸망시켜야 할 사악한 종족'들과 계약을 맺은 이단아 프리드리히 2세를 괴멸시켜야 한다는 것이죠. 교황의 권위는 여전히 힘이 있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영토의 영주들은 속속들이 성문을 개방하게 됩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싸움을 못해서 안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싸움을 막상 하면 잘하는 사람이었고 '교황의 대리' 브리엔도 프리드리히의 능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프리드리히가 이슬람과의 협상을 마치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자 브리엔은 줄행랑을 치며 도망쳐버렸고 교황의 군대는 그대로 해체되어 버립니다. 결국 늙은 교황은 홀로 남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그레고리우스 9세의 교령에 묘사된 모습, 13세기


여기서도 화해  

그렇게 아무 힘도 없이 늙어가는 교황을 프리드리히가 윽박지르기라도 했을까요? 프리드리히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화병으로 몸져누워있을 교황에게 계속 사람을 보내 화해의 뜻을 표합니다. 처음에는 교황이 문전박대해 버립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마치 화가 잔뜩 난 어르신을 계속 달래려고 노력하는 성실한 청년처럼, 계속해서 사람을 보내 동태를 살폈습니다. 여전히 뾰로통한 교황이었지만 1년쯤 계속 사람을 보내자 점점 교황의 화가 누그러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아무리 삐진 사람이라도 그렇게 꾸준하게 화해의 뜻을 보여주면 화가 풀리는 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교황의 마음이 어느 정도 풀어졌다고 판단한 프리드리히는 직접 만나기로 합니다. 결국 프리드리히가 교황의 거처에 직접 찾아가는 것으로 둘은 극적으로 화해합니다. 이것으로 파문은 철회되었습니다. 둘은 교황의 거처에서 연회를 나누고 만나 서로 어깨를 끌어안고 키스를 나누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어색한 장면입니다. 그토록 앙숙 같았던 사이인데 결국 감싸 안고 '키스'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으니까요. 물론 입에 키스한 것은 아니었겠지만요. 교황은 프리드리히와 어깨를 감싸안고 키스할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굴욕적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래도 골치아픈 놈이랑 화해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어쨌든 이슬람뿐 아니라 불독같았던 교황과도 화해를 나눈 프리드리히 2세입니다. 


뿔난 악마가 아니다

신의 명령에 저항한 최초의 르네상스인. 프리드리히는 모두 닫혀있는 중세에 어떻게 이렇게 홀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요? 프리드리히는 중세에 도저히 등장하지 않을 것 같은 독특한 인물이라 그런지 그에 대한 연구도 많은 편이지만, 어떤 학자들은 그가 시칠리아 섬 출신이었다는 것에서 이유를 찾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도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의 섬 시칠리아는 프리드리히 2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섬 입니다. 그런데 이 시칠리아는 이슬람 확장시절에 완전히 이슬람에 점령당했었습니다. 프리드리히 시대에는 다시 기독교인들이 재점령했기 때문에 기독교 지역이 되었지만 스페인처럼 여전히 이슬람의 유적과 문화가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 시칠리아에서는 떠나지 못한 수많은 이슬람인이 남아있었습니다. 프리드리히가 아랍어에 능통했던 것도 이 때문일 텐데 프리드리히가 어린 시절 같이 소꿉놀이를 하던 친구들 중 상당수가 아랍말을 구사했을 것입니다. 이슬람 친구들과 흙장난을 치며 자랐던 프리드리히는 이슬람인은 '뿔난 악마'가 아니라 그저 우리와 같은 '인간'일 뿐이며, 다만 우리와 다른 종교와 문화 가진 사람들일 뿐이라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체화하면서 자랐을 것입니다. 이런 어린시절을 보냈으니 일방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입장만을 생각하기 보다는 이슬람쪽의 의견도 생각할 있는 '균형잡힌 사고'를 있는 인물로 성장했다는 것이죠.


프리드리히 2세 '새를 이용한 사냥기술'의 삽화, 프리드리히 2세의 조각상, 13세기, 라우센버그 - 둘다 매와 함께 있는 모습


최초의 르네상스인 

그렇게 머리가 열려있던 탓인지 프리드리히는 학문에 대해서도 넓게 열려 있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최초의 르네상스인'이라고 할만한데, 그는 지식에 대한 갈증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6차 십자군을 갔다 오면서도 그는 여러 명의 동방 지식인들을 궁정으로 고용해서 그리스어와 아랍어로 된 책들을 번역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 중 하나는 프리드리히가 '새를 이용한 사냥기술'이라는 논문을 작성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매사냥에 관해 특히 관심이 많았는데,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일종의 '과학 서적'을 발행한 것이죠. 그래서인지 프리드리히를 묘사하는 그림이나 조각에서는 항상 귀엽게 매가 함께 있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권력다툼으로 바빠야 할 황제가 이런 일을 했다는 것도 재미있지만, 모두들 성경을 연구하며 신의 뜻에 관해 궁금해하던 중세에 홀로 공부하는 학생처럼 논문 같은 글을 썼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또 다른 일화 중 하나는 일종의 '과학 실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프리드리히는 너구리처럼 정말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큰 통을 하나 만들었는데 사람 한명이 들어갈 수 있고 길게 작은 구멍을 뚫어놓은 통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가 다 된 죄수를 통에 가두어 놓고 죽을 때 관찰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사람이 죽게 되면 영혼이 구멍을 통해 빠져나오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발칙한 생각을 했던 것이죠.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실험 중 하나는 인간에게 언어를 가르치지 않으면 어떤 말을 쓸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만약 막 태어난 아이에게 말을 전혀 가르치지 않는다면 혹시 아담과 하와가 쓰던 '고대 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터무니없는 생각이지만, 800년 전 중세라는 걸 감안해 보면 그 시대 사람들은 정말 호기심이 폭발했을만한 궁금한 실험들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말을 가르치지 않으면 아이들은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는 것 정도를 배웠겠지만요.

그 외에도 프리드리히는 혼자 과학, 수학, 물리학 문제에 연구하다가 답이 안 나오면 당시 유럽의 학자들에게 답을 물어보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중세의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할 때, 프리드리히는 특이하게도 혼자 학문을 연구했던 것이죠. 이래 저래 프리드리히 2세는 최초의 르네상스인이라고 할 만한 인물입니다.


교류 속에서 탄생한 르네상스

콘스탄티노플이 멸망했을 때가 1204년이었으니까 94년생이었던 프리드리히가 10살쯤 되었을 때입니다. 아마 프리드리히가 한참 공부할 청소년쯤 되었을 때는 파괴된 콘스탄티노플에서 피난 온 동로마 지식인들이 유럽에서 막 활동을 시작하던 때일 것입니다. 동쪽의 지식인들은 그리스 로마의 고문서들을 들고 유럽으로 건너왔는데, 아마 호기심이 넘치는 소년이었던 프리드리히는 수많은 그리스 로마의 서적들을 탐독하며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배웠을 것입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키케로같은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의 책들은 유럽에서는 자취를 감추었지만 오히려 이슬람쪽에서 아랍어로 번역되어 많이 남아 있었는데, 이슬람 사람들이 오히려 그리스 로마 철학의 가치를 깨닫고 보존해 두었던 것이죠. 아랍어를 구사할 줄 아는 프리드리히에게 수많은 아랍 고서들이 쌓여 있는 것은 아마 금은보화가 쌓여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프리드리히가 '최초의 르네상스인'으로 자랄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고 해야할까요. 

이것은 십자군 원정의 묘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십자군은 기본적으로 유럽인들이 이슬람을 공격하러 간 것이지만, 이는 어쨌든 서로 '교류'가 처음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콘스탄티노플의 파괴 이후 동쪽의 지식인들이 서쪽으로 건너오는 것도 방식은 비참하지만 어쨌든 '교류'니까요.

그리고 이슬람과의 교류도 마찬가지 입니다. 잔인하고 처절한 싸움이었지만, 유럽인들은 이슬람과 싸우면서 그들에게 배우는 지점이 있었고 타 민족에 대한 이해도 생기기 시작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도 침략자 기독교인들을 통해 배우는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신의 세계에 갇혀 살던 중세 유럽인들은 십자군을 통해 자신들의 눈을 밖으로 확장시킬 기회를 얻게 됩니다. '이불 밖'은 위험하지만 밖으로 나가야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법이니까요. 결국 르네상스는 이렇게 자기들만의 세상에 갇혀 살던 유럽인들의 눈이 세상 밖으로 확장되어 넓어지면서 발생하게 됩니다. 역사상 가장 종교적인 전쟁이었던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인간이 종교로부터 탈출하게 되는 '르네상스'가 태어났으니 아이러니 중에 아이러니라고 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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