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의 건축
프리드리히 2세는 상당히 큰 땅의 군주였다. 신성로마제국은 현대로 치면 독일지역이니까 독일 주변 땅만 해도 상당하지만 프리드리히는 거기에 더해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까지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이 잦았던 중세였기 때문에 프리드리히는 6차 십자군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영토 방어를 위해 많은 성과 건물들을 건축해야 했다. 이탈리아 남부에만 적어도 100개 이상의 건축들이 프리드리히가 수리를 지시했거나 직접 지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와중에 교회는 단 한개만 건축했으니 프리드리히도 참 못말리는 남자다.
그런데 그가 지었던 여러 건축 중에 지금까지도 정확히 목적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한 건축이 하나 있다. 바로 카스텔 델 몬테Castel del Monte(산위의 성이라는 뜻)다. 이탈리아 남부의 풀리아 지역에 해발 539m의 언덕 꼭대기에 지어진 이 성은 일반적인 방어용 성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이상하다. 우선 성을 물로 둘러싸 적군의 침입 막는 해자와 해자를 건너는 도개교가 없고 중세의 핵심 전력이었던 기사Knight들을 위한 마굿간도 없다. 게다가 도심에서 꽤 멀리 떨어진 시골길에 있으니 지리적 위치도 방어용으로는 맞지않는다. 그렇다면 혹시 방어용 성이 아니라 프리드리히의 개인 별장 같은 것이었을까? 그런데 별장이라고 하기에는 방은 있지만 주방이 없어서 오래 생활할 수가 없다. 13세기에 잠시 감옥으로 사용된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감옥이나 수용소로 설계했다고 보기에는 장식이 너무 화려하고 깨끗하다. 오히려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딸 비올란타를 이곳에서 결혼시키기도 했다. 그렇다면 알쏭달쏭한 이 건물을 프리드리히는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 지은 것일까.
이 성을 더 미스터리하게 만드는 점은 건물 전체에 알수없는 상징들이 숨어 있다는 점이다. 우선 이 건물의 출입구는 동쪽으로 나 있는데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과 추분에 해가 뜨는 위치에 정확히 입구가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일년에 두번있는 춘분과 추분에 이 건물에 방문하면 멋진 해뜨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건물은 몇가지 숫자들과 연관되어있는데 3, 5, 8이다. 특히 8과 관련된 상징이 많은데, 위에 보이는 것처럼 8각형의 안 뜰을 중심으로 외부는 8개의 탑이 세워져 있고 그 탑들도 모두 8각형이다. 그리고 내부는 2개의 층으로 되어있는데 1층과 2층에는 각각 8개의 방이 있고 방의 모양도 8각형이다. 심지어는 내부의 세면대도, 창문을 장식하는 기둥도 8각형이다.
워낙 괴짜같았던 프리드리히라고는 하지만 그는 왜 이렇게 8에 집착했을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중세에 8각형은 원과 가까운 형태로 세상과 신을 이어주는 통로로 생각했다고 한다. 지구가 정사각형이라면 하늘은 원이고 그 중간적 상징이 8각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천문학이나 점성술의 의식과 관련된 건물이었을까? 프리드리히는 실제로 점성술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유명하니까 그럴 가망성도 있다.
그 외에도 건물의 8각형 안뜰에는 딱 3개의 입구와 창문만 있는데 8각형이면 4개나 2개를 넣는게 대칭이 맞으니까 창문과 문을 굳이 3개만 만든 것은 이상하다. 그리고 굴뚝도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모든 탑에 있는게 아니라 5개에만 만들어져 있고 건물 아래의 물을 보관하는 곳도 5개다.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지만 결과적으로 말하면 아무도 이 건물의 목적을 알지 못한다. 다만 이 와중에도 프리드리히는 매 사육장으로 추정되는 방과 새를 키울 수 있는 지붕을 건물 안에 구비해 두었으니 그가 변함없는 매 덕후 였다는 것 만큼은 확실할 뿐이다.
숫자에 숨겨진 세상의 비밀
그런데 프리드리히가 카스텔 델 몬테에 숫자 3, 5, 8의 상징들을 숨겨놓은 이유는 한가지 추정이 가능하다. 이 숫자들이 '피보나치 수열'속의 숫자들이라는 것인데 프리드리히는 실제로 피보나치 수열로 유명했던 레오나르도 피보나치Leonardo Fibonacci와 친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는 한때 피사를 제국의 동맹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피사에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프리드리히는 피보나치를 만나게 된다. 피보나치는 중동에서 아라비아 숫자의 개념을 수입해 유럽에 처음으로 소개한 수학자이기도 하다. 피보나치가 이때 소개한 0의 개념덕분에 이후 유럽의 수학은 눈부신 속도로 발전하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아랍 사람들이 사용하는 수학을 기독교인들이 사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의 책 <산술론Liber abbaci>은 절판되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가 그런 기독교측의 의견을 신경쓸 사람이 아니었다. 프리드리히는 그를 만나고 그의 수학실력에 감명받아 그의 책 <산술론>을 복간시켰고 그가 평생 수학 연구에만 몰두할수 있도록 연금을 주었다고 한다. 피보나치 또한 이런 황제의 후원에 대한 보답으로 <제곱수에 관한 책Liber Quadratorum>이라는 수학책을 써서 프리드리히 2세 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1, 1, 2, 3, 5, 8, 13, 21, 34, 55, 89, 144, 233, 377, 610, 987
위는 '피보나치 수열'의 숫자들이다. 퍼즐 풀기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위 숫자들 사이의 규칙을 발견해 보길 바란다.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피보나치 수열의 규칙은 매우 간단하다. 1부터 시작하여 앞의 숫자를 계속 더하면서 나아가는 것이다. 1과 1을 더해 2가되고, 다시 1과 2를 더하면 3이되고, 다시 2와 3을 더하면 5가 되고, 다시 3과 5를 더하면 8이 되는 식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자연 속에서 심심치 않게 이 수열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붓꽃의 꽃잎은 3장, 철쭉은 5장, 코스모스의 꽃잎은 8장이고, 금잔화는 13장, 치커리 꽃은 21장, 데이지꽃은 34장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꽃잎의 숫자를 세어보면 이상하게도 이 피보나치 수열을 따르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리고 해바라기 씨앗을 보면 빽빽하게 차있는 씨앗들이 어떤 규칙에 따라 정렬되어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한쪽으로 21줄, 그리고 반대쪽으로 34줄의 씨앗이 교차되어 나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교차 패턴을 가진 솔방울의 경우도 보통 8개의 줄과 13개의 줄이 서로 교차하면서 나타나는데 이 숫자들은 모두는 피보나치 수열속의 숫자들이다.
그리고 피보나치 수열을 2차원으로 확장해서 각각 한 변이 1, 1, 2, 3, 5, 8, 13, 21인 정사각형을 그린 다음 곡선으로 연결하면 왼쪽과 같은 등각 나선이 되는데 이 등각 나선 형태는 조개껍데기에서도 비슷하게 발견되고 더 큰 관점에서보면 거대한 태풍이나 허리케인의 눈, 심지어는 우주의 거대한 은하 구조에서도 똑같이 발견된다.
이쯤되면 신이 숫자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말이 진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든 프리드리히는 피사를 방문하는 동안 피보나치가 설명하는 이 숫자들에 상당히 매료 되었을 것이다. 그가 건축한 카스텔 델 몬테에 숫자에 관한 여러 수수께끼를 심어 놓은것은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니콜라 피사노, 르네상스 조각의 시작
카스텔 델 몬테를 포함한 프리드리히의 수많은 건축 현장에는 당시 남부 이탈리아에 있던 조각가들이 불려와 일했다. 당시는 조각가와 건축가가 따로 분리되어있지 않던 시절이었으니까 조각가들은 건축의 설계와 시공까지도 도맡아 하기도 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와 함께 일했던 조각가 중에는 니콜라 피사노Nicola Pisano라는 젊은 조각가가 있었다. 피사 출신이라는 의미로 '피사노Pisano'라는 별명이 붙은 이 조각가는 바로 미술사에서 르네상스 조각의 시작을 연 것으로 알려진 조각가다.
조르조 바사리의 기록에 따르면 니콜라 피사노는 프리드리히가 교황 호노리우스 3세와 투닥거리던 시절 황제의 대관식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니콜라 피사노의 정확한 나이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프리드리히가 대관식을 받았던 1220년 쯤에는 아마 니콜라가 아직 한참 어린 나이였을텐데도 대관식에까지 참여했다는 것을 보면 아마 프리드리히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 어린 조각가 였던 모양이다. 니콜라는 이후 프리드리히와 함께 돌아다니며 나폴리로 가서 제국의 재판소가 있던 카스텔 디 카포아나Castel Capuano를 확장공사 하는 일을 돕기도 했고, 카스텔 델우오보Castel dell'Uovo라는 나폴리 해안가의 방어용 성을 개축하기도 했다. 황제 가까이에서 여러가지 일들을 도운것이다.
니콜라는 최고 권력자였던 프리드리히의 옆에 있으면서 그의 취향에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프리드리히의 특이한 취향 중 하나는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같은 '고대 로마 황제'를 따라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18세기의 계몽 철학자 볼테르는 신성로마제국을 두고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적이지도 않고 제국도 아니었다'며 비꼬았지만 프리드리히는 어쨌든 자신이 '로마 제국의 황제'의 후예라고 생각했다.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유별떤다고 생각했을수도 있겠지만 프리드리히는 1228년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드 동맹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굳이 고대 로마 스타일의 개선식을 열었고 거기서 스스로를 '두 번째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로 선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금화에 자신의 옆 얼굴을 새겨 넣어서 발행하기도 했는데 이는 고대 로마 황제들이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 썼던 방법을 따라한 것이다.
황제가 이토록 고대 로마 황제처럼 행동하고 싶어 했으니, 그 밑에서 일하던 예술가들 또한 고대 로마예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이탈리아는 과거 로마 제국의 본토였던 만큼 로마시대의 건축물과 조각품들을 충분히 발견할 수 있었는데 프리드리히는 사람들을 동원해 이런 유물들을 발굴하도록 했고 예술가들은 이를 보고 연습하면서 기술을 발전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 어렸던 니콜라 피사노도 아마 프리드리히의 곁에서 그리스 로마의 예술들을 보고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오른쪽은 니콜라 피사노가 초창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여인의 두상이다. 물론 아직은 부족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왼쪽의 중세 조각과 비교해 보면 확연한 차이가 있다. 르네상스 예술이 처음으로 떡잎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피사 세례당 설교단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죽었다. 사인은 이질이었다고 하는데 6차 십자군이 끝나고도 끊임없는 제국 내의 권력 싸움과 계속된 교황과의 갈등으로 하루도 평온할 날이 없던 황제였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수도사복을 입고 평화롭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고 한다.
황제가 죽고 그의 밑에서 일하던 남부 이탈리아의 조각가들은 흩어졌는데 이때 니콜라 피사노는 이탈리아 중부로 이동했다. 말하자면 '르네상스의 씨앗'을 들고 위쪽으로 올라간 것이다. 이때 니콜라가 선택한 도시가 바로 피사였다. 그의 별명으로 '피사노'가 붙은 것은 아마 이 시기쯤 부터였을 것이다. 니콜라는 1245년에서 1250년 그 사이 어느 시점 쯤에 피사에 도착했는데 그는 피사에서 가족과 함께 정착하게 된다.
1255년, 니콜라 피사노는 피사 세례당으로부터 세례당을 위한 설교단을 제작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피사 세례당은 피사의 사탑과 피사의 대성당과 함께있는 피사를 상징하는 건물중 하나였다. 그런 중요한 건물 내부의 설교단을 제작해 달라는 의뢰를 받은것이니 니콜라에게는 큰 의뢰였다. 니콜라는 중요한 의뢰였던 만큼 자신이 프리드리히 밑에 있을때 공부한 조각 실력을 최대한 발휘해 설교단을 제작했다. 위의 사진이 그렇게 해서 완성된 <피사 세례당의 설교단>이다.
이 설교단은 앞으로 등장할 르네상스의 조각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니콜라는 중세 스타일의 조각이 아닌 그리스 로마 스타일을 적용해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설교단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니콜라는 우선 설교단을 4각형이 아닌 6각형으로 기획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6각형의 설교단은 뒤쪽 입구를 제외하면 5개의 벽면을 만들 수 있고, 이 벽면에 자신이 원하는 다섯 장면을 부조로 장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다섯개의 장면은 다음과 같다.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동방 박사들의 예배
성전에서의 봉헌
십자가 처형
최후의 심판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죽음과 부활까지 연결된 '예수의 생애'에 관한 하나의 스토리를 구성한 것이다. 설교단은 사제들이 올라가서 설교하는 곳이니까 요즘으로 치면 강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니콜라는 설교단을 그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예술품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아마 니콜라의 설교단을 처음 본 당시 사제들은 상당히 놀랐을 것이다. 늘 봐왔던 딱딱한 네모형태의 설교단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파노라마가 구현된 완벽한 '예술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설교단이 이렇게 수준높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해 보지 못했을것이다. 아마 사제들은 이렇게 멋진 설교단에서 설교할 때마다 기분이 우쭐해지지 않았을까. 다만 성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러 갔던 사람들은 니콜라의 부조가 무슨 내용인지 감상하느라 사제들의 설교는 흘려들었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스토리가 있는 부조는 아마 그가 프리드리히 밑에 있을 때 공부했던 로마시대의 부조들을 참조했을 것이다. 로마시대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을 서사적 부조를 만들곤 했는데, 왼쪽은 서기 2세기에 로마 5현제 중 한명이었던 트라야누스가 동방 다키아 원정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트라야누스 기둥>의 부조다. <트라야누스의 기둥>을 보면 트라야누스의 원정 내용을 마치 만화처럼 연결된 스토리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니콜라는 이 부조들처럼 '예수의 생애 스토리가 있는 부조'를 설교단에 구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니콜라가 보여준 또다른 혁신은 이 설교단을 장식하는 한 조각상 안에 숨어있다. 바로 설교단 왼쪽 아래 기둥에 위에 있는 남자의 누드 조각상 <강인함>이다. 설교단을 주문했던 피사 세례당의 사제들은 한편 걱정도 있었을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목사님이 설교하는 강단에 성기가 그대로 달린 남성의 누드상이라니. 그런데 이 단순해보이는 남자 조각상은 중세의 조각과 르네상스의 조각을 가르는 기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인체를 이토록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시도가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니콜라가 만든 이 나체의 남자는 누구일까. 후보 중 한명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헤라클레스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헤라클레스는 네메아의 사자를 곤봉으로 때려잡았다고 하는데 위 조각 주변을 보면 사자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자세도 그리스 로마 조각의 전형적인 자세인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짝다리를 짚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남자 누드, 사자, 콘트라포스토 이 세가지를 조합해보면 헤라클레스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 남자가 정말 헤라클레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무래도 설교단이니까 성경속의 인물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사자와 관련된 인물이 두 명 있다. 맨손으로 사자를 때려눕힌 것으로 알려진 이스라엘의 전사 삼손과 사자굴에서도 살아 남은 것으로 알려진 선지자 다니엘이다. 개인적으로는 근육질에 벗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아무래도 선지자 다니엘 보다는 장사였던 삼손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이 또한 확실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헤라클레스와 다니엘, 삼손 셋 중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니콜라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을 참조해서 이 조각을 만들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니콜라의 표현력이나 기술을 보면 아직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는 딱딱한 고딕 조각에서 벗어나 최초로 인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 중세의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미술'에서 벗어나 살아 있고 구체적인 '인간적인 미술'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주의, 고딕에서 르네상스로
그렇다며 중세의 '초월적인 미술'에서 '인간적인 미술'로 넘어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그리고 왜 중세의 조각가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처럼 인체를 사실적으로 조각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기독교 중심이었던 중세의 예술가들의 관심은 '자연'이 아닌 '천국'에 있었다. 때문에 인체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위는 알비의 성 세실리아 대성당의 루드 스크린Rood screeb(평신도석과 제단을 가르는 막)이다. 삐쭉삐쭉한 화려한 이 추상적인 느낌의 장식들은 인체든 자연속의 그 무엇이든, 무언가를 똑같이 묘사하려고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저 화려한 장식들은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일까?
"우리의 마음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은 천상의 위계에 대한 깊은 고민과 비물질적인 것의 재현...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의 반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 위僞 디오니시우스 <천상의 위계> 1장, 3절 중에서
중세의 철학자 위僞 디오니시우스는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반영'이라고 생각했다. 이 땅의 아름다움은 결국 천국에서 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당장 눈에 보기 아름다운 인체를 묘사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즉 저 높은 '천상의 세계'를 표현해야 한다. 위의 화려한 루드 스크린도 그런 '천상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천국을 눈으로 본적이 없으니 묘사할 방법은 없다. 대신 인간의 상상력을 동원해 정확히 규정할 수 없는 화려한 장식으로 표현해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의 예술가들의 관심은 '천국'이 아닌 '인간과 자연'에 있었다. 아름다운 인체, 사실적 표현, 비율, 이 모든 것은 이 땅의 자연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표현하려는 것이다. 이것을 자연주의Naturalism이라고 한다.
니콜라가 <강인함>에서 헤라클레스같은 남성의 누드를 통해 인체를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이 그리스 로마의 자연주의적 사고방식을 다시 깨우려고 한 것이다. 자연주의는 앞으로 앞으로 등장할 르네상스 예술가들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작동할 것이다. 자연이 가진 아름다움을 인간의 뇌로 발견하고 인간의 손으로 최대한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예술가가 해야할 일이라는 것이다.
시에나 대성당의 설교단
6년 후, 니콜라는 자신처럼 조각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아들 조반니 피사노Giovanni Pisano와 제자들과 함께 시에나로 이사했다. 니콜라의 설교단에 관한 소문이 피사의 이웃 도시인 시에나까지 벌써 퍼졌는지, 시에나 대성당에서도 니콜라에게 피사 세례당의 설교단과 비슷한 아름다운 설교단을 조각해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점은 대성당과 니콜라가 계약할 때 작성한 계약서에는 '반드시 카라라 지역에서 생산된 대리석을 써야한다'는 규정을 심어 놓았다는 것이다. 당시 지중해의 여러 도시들은 대부분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아마 시에나 대성당 측에서는 번영하는 도시의 풍요로움을 최고급 대리석을 사용하는것으로 자랑하려고 했던게 아닐까 싶다.
니콜라는 시에나 대성당측에서 원하는 대로 피사 세례당의 설교단보다 훨씬 크고 화려한 디자인의 설교단을 구상했다. 우선 피사 설교단의 6각형이 아닌 8각형으로 기획했는데, 8각형으로 제작하면 7장면의 부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8각형 구조의 기본 디자인은 아마 카스텔 델 몬데에서 영감을 받았던게 아닐까 싶은데 단순히 8각형으로 구조를 만든것 뿐 아니라 카스텔 델 몬테처럼 기둥도 전부 8각형으로 디자인했기 때문이다.
니콜라는 피사 설교단과 마찬가지로 입구를 제외한 나머지 7개의 벽면에 부조를 조각했는데, 이번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관한 7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다만 7개의 주제 중 4개를 예수의 탄생을 다루고 있는데 기독교의 중요한 주제인 메시아의 탄생을 주 테마로 잡고 나머지 3개는 메시아의 역할을 보여주고 있다.
1. 수태고지와 탄생
2. 동방박사의 여행
3. 이집트로의 도피
4. 어린이들의 학살
5.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히심
6. 축복받은 자들과 최후의 심판
7. 저주받은 자들과 최후의 심판
시에나의 설교단은 피사 설교단보다 표현한는 방식도 더 사실적으로 발전했다. 위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보면 얼굴이 어깨보다 아래로 처져있어 정말 고통스러워 하는 듯 보이는데 니콜라는 인간의 몸이 실제로 십자가에 달렸다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 상당한 해부학적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왼쪽 아래에 거의 실신하듯 슬퍼하는 여인이 보이는데 그녀는 성모 마리아다. 성모 마리아의 경우도 아들의 죽음에 관한 슬픔과 충격 때문에 몸이 왼쪽으로 기울고 낙심한듯 팔이 자연스럽게 쳐져있는 것을 상당히 자연스럽게 표현했다는 것을 알 수있다. 지금 시점에서는 별거 아닌듯 보여도 당시에는 이런 스타일의 조각이 없었다. 때문에 니콜라는 성모 마리아를 이렇게 표현하기 위해 아마 여러번의 스케치와 모형 제작을 거쳐야 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설교단을 볼 때는 7개의 부조가 눈에 들어오지만, 니콜라 피사노는 그 사이를 메우는 7개의 조각상에도 상당한 신경을 썼다. 이 조각상들은 주로 각 패널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예를들어 중앙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오른쪽 기둥에는 복음서를 든 전도자가 있는데 이는 중앙의 부조를 부연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마태복음 28:19-20
성경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 복음 전도를 명했다. 니콜라는 이를 예수의 죽음과 오른쪽의 전도자 조각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시켰다. 말하자면 니콜라는 각 장면들을 부드럽게 연결하는 의미로 중간 기둥의 조각들을 활용한 것이다.
니콜라는 피사의 설교단보다 더 뛰어난 설교단을 시에나에 완성했다. 훨씬 더 인체를 자연스럽게 표현한 것 뿐 아니라 전체적인 구성도 더 자연스럽게 발전한 것이다.
피사에서 피렌체로
니콜라가 제작한 두개의 설교단은 르네상스 조각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라고 평할 수 있다. 르네상스 전성기에 비하면 아직 은 부족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지만, 니콜라는 중세의 예술을 탈피해 처음으로 자연주의 스타일의 조각을 만들기 시작했다. 르네상스의 첫줄을 써내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시에나의 설교단을 완성한 후, 니콜라의 제자들은 헤어져서 새로운 르네상스 스타일을 북 이탈리아 전역에 퍼뜨리게 된다. 니콜라 자신과 그의 아들 조반니는 피사에 남아 주로 피사와 시에나에서 활동했지만, 라포Lapo di Ricevuto는 볼료나로, 그리고 아르놀포Arnolfo di Cambio는 피렌체로 가서 각자 활동을 시작했다. 이렇게 르네상스 조각은 이탈리아 북부를 중심으로 천천히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니콜라가 피사 공화국에 처음으로 정착한 것은 이후 르네상스 발전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피사 공화국은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옆에 붙어있는 인천과 비슷하다. 내륙도시인 서울 옆에 항구도시 인천이 있는 것처럼 내륙 도시인 피렌체 옆에 연결된 항구도시가 바로 피사이기 때문이다. 피사에서 꽃피우기 시작한 르네상스는 이후 도로를 타고 올라가 피렌체로 자연스럽게 퍼지게 된다. 그래서 앞으로 르네상스는 피렌체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르네상스 조각의 시작이 니콜라 부터라면 르네상스 회화의 시작은 지오토부터다. 지오토는 피렌체의 화가였다. 조각 뿐 아니라 회화에서도 르네상스의 문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