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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Feb 25. 2024

회화의 창시자, 지오토 디 본도네

초원 위의 양치기 소년

1270년, 8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프랑스의 성왕 루이 9세가 행군도중 병으로 죽습니다. 그 누구보다 십자군에 진심이었고 신실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성왕Saint'으로 불렸던 루이 9세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십자군 원정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허무했던 마지막이라고 해야 할까요. 한때는 온 유럽이 열광했을 만큼 십자군의 인기는 대단했지만, 이제 유럽 사람들은 남의 집 불구경하듯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뜨거웠던 한 시대는 저물어 갑니다. 그리고 십자군의 폐허 위에서 르네상스의 새싹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276년입니다. 피렌체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베스피냐노 마을의 언덕에서 어느 소년이 양을 치고 있습니다. 체구는 또래에 비해 작았지만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밝은 성격 덕에 누구에게나 사랑받던 소년, 그의 이름은 지오토입니다. 아버지는 아직 어리지만 유난히 똑똑했던 지오토에게 양치는 일을 맡겨놓았습니다.

지오토는 이탈리아 북부의 초원에서 양 떼들을 이곳저곳으로 이끌며 자연을 친구 삼아 지내고 있습니다. 푸른 하늘 밑의 초원 그리고 시원한 들바람, 신이 창조한 자연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렇게 초원에서 양 떼를 돌보던 지오토는 최근 한 가지 취미가 생겼습니다. 양들이 열심히 풀을 뜯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나무 숯을 연필 삼아 바위에 양들을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양들의 복실복실한 몸통과 가늘게 내려간 다리로 차분하게 걷는 모습을 보며 지오토는 다시 한번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합니다. 그렇게 지오토는 처음으로 신이 창조한 자연을 자신이 '재창조'하는 기쁨을 알게 됩니다. 

어떤 우연이었는지 당대 피렌체의 최고의 화가였던 치마부에가 베스피냐노의 초원을 지나가는 일이 있었습니다. 초원 위 바위에 무언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본 치마부에는 가까이 가서 보았다가 깜짝 놀랍니다. 누가 그렸는지 양들을 너무 잘 그린것입니다. 아니 이런 시골에 이렇게 재능 있는 사람이 있다고? 치마부에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느 소년이 양을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치마부에는 꼬맹이에게 다가가 저 그림을 누가 그렸냐고 물어봅니다. 지오토는 자신이 그렸다고 대답합니다. 


"꼬마야 너 혹시 그림을 어디서 좀 배워봤니?"


아직 어린 양치기에 불과했던 지오토는 수줍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치마부에는 지오토에게 집으로 안내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 길로 지오토의 아버지를 찾아간 치마부에는 아이를 자신과 함께 피렌체로 데려갈 수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견습생부터 시작해서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으면 분명 훌륭한 예술가가 될 것이라고 설득한 것이죠. 지오토의 아버지는 치마부에의 명성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지오토는 피렌체로 출발합니다. 지중해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치고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였던 피렌체에 도착한 지오토. 서양 미술사에서 '회화의 역사'가 처음으로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지오토 '일곱 개의 덕목:믿음' 프레스코 벽화, 1306


천재들이 가장 존경하는 천재

보통 르네상스의 천재들을 이야기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그리고 라파엘로 이렇게 3명을 말합니다. 여기에 보티첼리까지 더해서 '르네상스의 4대 천재'라고 하기도 하죠. 근현대 미술사까지 포함시켜 봐도 이들만큼 뛰어난 예술을 창조한 예술가들은 찾기 어렵습니다. 이들의 미술사의 '전설'이라고 할만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이 르네상스의 '전설'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화가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양치기 소년이었던 지오토 디 본도네입니다. 천재들의 천재라고 해야 할까요.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지오토는 르네상스 예술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회화'라는 장르를 처음으로 창시한 예술가이기도 했습니다. 4명의 천재들의 입장에서 지오토 디 본도네가 없었다면 자신들도 없었을 테니 존경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미술에 관심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라도 지오토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미술의 오해란 항상 그렇게 발생하곤 하지만, 지오토의 작품들은 눈에 보기에는 그저 소박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오토의 그림이 소박해 보이는 이유는 그가 '회화의 처음'이었기 때문에 아직 테크닉까지는 발전시킬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오토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중세의 미술'을 깨고 '근대 미술'로 가는 문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산 마르코 성당의 모자이크 '최후의 만찬' 13세기


지오토 '최후의 만찬', 프레스코 벽화, 1304~1306 사이


환영의 탄생

그렇다면 지오토의 예술은 과거의 예술과 어떻게 달랐을까요. 중세의 그림과 지오토의 그림을 한번 비교해 보겠습니다. 위 두 그림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열 두 제자의 '최후의 만찬'을 그린 그림입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중요한 변화가 숨어 있습니다.

우선 당시 시대 사람의 눈으로 지오토의 그림을 바라보겠습니다. 지오토의 그림은 중세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그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중 절반이 뒤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포장마차에 앉아서 쓸쓸하게 술을 마시는 아저씨의 뒷모습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뒷모습을 구분할 수 있을까요? 위 중세의 그림을 보면 모든 제자들이 정면을 보고 있는데 과거에는 이렇게 그리는 방식이 당연했습니다. 현대로 치면 어느 화가가 대통령의 초상화를 뒷모습으로 그린다면 어떨까요? 아마 세상에 어떻게 저런 무식한 화가가 있느냐고 비판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오토는 제자들의 절반을 뒷모습으로 그려놓았습니다. 지오토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지오토는 관객들이 그림을 보면서 '실제의 상황'을 느끼길 원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가까이 서서 예수 그리스도와 열두 제자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며 만찬을 함께하는 현장을 직접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죠.

이것을 어려운 말로 '환영'이라고 합니다. '환영'이란 쉽게 표현하면 '가짜를 진짜처럼 인식하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사과 그림'이라고하면, 이는 그저 그림일 뿐이지만 우리는 그림을 통해 '진짜의 사과'를 인식합니다. 이것이 '환영'입니다.

지오토는 양들이 풀 뜯는 모습을 바위에 그대로 재현했을때의 기쁨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오토는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모습을 벽 위에 재현해 마치 진짜인 듯 느껴지는 '환영'을 창조하려고 한 것이죠. 






기원전 14세기의 이집트 벽화 / 치마부에 '신성한 삼위일체 마에스타' 패널에 템페라, 1288-1292


옛날에는 왜 이렇게 그렸지?

그렇다면 지오토 이전의 중세의 예술가들은 왜 이렇게 사실적으로 그리지 않았을까요? 중세의 그림을 고대 이집트의 회화와 한번 비교해 보겠습니다. 

왼쪽 고대 이집트의 벽화를 보면 각 대상의 크기가 다르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집트인들은 왜 등장인물들의 크기를 다르게 그렸을까요? 쉽게 상상할 수 있지만 대상의 계급을 반영한 것입니다. 왕이나 귀족은 크게 그리고 평민이나 노예계층은 작게 그리는 것이죠.

이번에는 중세의 그림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오른쪽은 지오토의 스승 치마부에의 그림입니다. 중세에 가장 높은 존재는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모 마리아입니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서도 가장 크게 그려진 인물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였고, 아래의 예레미야, 아브라함, 다윗, 이사야같은 성경속의 인물들은 성모보다 훨씬 작게 그려져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현실에서 저 정도의 비율로 크다면 아마 거인이라고 해야겠지만 중세의 사람들은 현실적인 크기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집트와 중세는 분명 역사적 시기도 다르고 민족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데 이상하게도 비슷한 방식으로 그린 셈입니다. 이들은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요?

중세의 기독교와 이집트시대의 공통점은 모두 '내세'를 중시한다는 점입니다.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천국과 지옥'입니다. 이집트에서도 '사후세계'를 중시하는데, 이집트의 상징이 미이라와 피라미드인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모두 내세를 중시하는 것이죠.

이렇게 내세를 중시하는 세계관에서는 현실세계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 사회의 생각은 예술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예술가들도 그림을 사실적으로 그리는데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죠. 내세를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대신 미술이 점점 추상화 되고 상징화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지오토 '비탄Lamentation' 스크로베니 성당, 프레스코 벽화, 1305


그럼 다시 지오토의 그림으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위 그림 '비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제자들과 마리아가 슬퍼하는 상황을 그린것입니다. 우선 지오토의 그림에는 예수와 다른 인물들이 모두 같은 크기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오토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지오토는 성경을 직접 읽고 고민하면서 등장인물들은 누구이며, 그들이 지금 어떤 마음상태일지 까지 고민하면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안타까운듯한 손짓과 비통한 표정, 그리고 슬픔을 참으며 뒤에서 지켜보는 제자들의 모습에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지금까지 서양 미술사에는 이런 그림이 등장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유럽인들이 지금까지 봐왔던 성화는 무표정하고 뻣뻣하게 앉아있는 성모마리아와 로보트처럼 딱딱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중세의 회화에서는 현실성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그런 유럽인들에게 지오토의 그림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습니다. 죽어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슬프게 울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내가 직접 목격하는 듯한 감상, 마치 처음 영화를 보는 원시인들 처럼 현실과 그림 속 상황이 구분되지 않는 '환영'을 느꼈던 것이죠.   

지오토는 이렇게 중세의 미술을 깨고 근대 미술로 가는 첫 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지오토의 그림은 순식간에 피렌체에 소문나게 됩니다. 설교로만 듣던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직접 눈앞에서 보여주는 엄청난 화가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너도 나도 지오토의 그림을 보기위해 몰려들었던 것이죠. 


소문

피렌체에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대단한 예술을 하는 놈이 등장했다는 소문은 곧 로마에도 퍼지게 됩니다. 누구보다 예술가들을 많이 만나봤던 교황 베네딕토 11세는 자신의 눈으로 지오토의 그림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절을 피렌체로 보내서 지오토의 그림을 한장 구해오라고 지시합니다.

피렌체에 도착한 사절은 지오토를 찾아가 그림 그린 거 한 장 있으면 내와보라고 말합니다. 교황이 직접 보낸 사절이었으니 지오토는 기가 죽을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오토는 원래부터 밝고 재기가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지오토는 팬을 하나 집더니 그 자리에서 빨간색 잉크를 묻혀 동그라미를 그렸습니다. 그의 손을 따라 펜이 움직이자 경이로울 만큼 완벽한 형태의 원이 탄생합니다. 마치 컴퍼스를 대고 그린 것처럼 완벽한 형태의 원이었던 것이죠. 지오토는 그 빨간색 원 그림을 사절에게 내어 줍니다. 사절은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요구대로 지오토가 그림을 주기는 했으니까 그 그림을 그대로 들고 로마로 돌아갑니다.

궁금함에 한참 지오토의 그림을 기다리던 교황. 그런대 교황은 그림을 보자마자 황당합니다. 아니 성모 마리아나 예수 그리스도 같은 멋진 그림을 기대했는데 무슨 빨강 동그라미라니. 교황은 사절에게 지오토 이놈 혹시 교황청에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 거냐고 물어보자 사절은 대답합니다.


"지오토는 컴퍼스 없이 빨간 원을 그리던데요."


교황은 지오토가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곧장 알아차립니다. 중세의 비잔틴 회화를 그리던 동시대의 예술가들과는 차원이 다른 예술가였던 것이죠. 이 사건 이후 이탈리아에는 한 가지 속담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저 사람은 지오토의 원보다 둥근 사람이다"


이 속담은 보통 사람들보다 너무 과하게 원만한 사람을 놀릴 때 쓰는 속담이라고 합니다. 원래 교황과 지오토의 사건과는 상관이 없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지오토의 행동이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속담이 될 만큼 지오토의 천재성은 인기가 있었던 것이죠. 


작자미상, 나중에 상상으로 그려진 지오토의 초상화, 패널에 템페라, 1490~1550 사이 


콤플렉스

지오토의 소문을 들었던 사람 중에는 '신곡'으로 유명한 단테도 있었습니다. 시인이었던 단테는 화가 지오토와 함께 르네상스의 출발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합니다. 단테는 지오토가 이탈리아의 파도바에 있는 스크로베니 예배당에서 벽화를 그릴 때 방문했다고 합니다. 지오토를 방문해 보니 지오토가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와중에 왠 어린아이들이 지오토의 발 밑에서 뛰어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지오토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지오토는 일찍부터 리체부타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4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두었습니다. 지오토는 예술뿐 아니라 사람을 창작하는데도 열심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단테는 지오토가 상당한 미남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당연히 꽃 같은 미남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지오토는 체구도 작았고 전혀 미남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면전에 대고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어째서 자식들은 이렇게 평범하게 생겼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다소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항상 재치가 넘쳤던 지오토는 


"나는 낮에는 그림을 만들고 밤에는 아기를 만들거든요."


라고 웃으며 대답했다고 합니다. 무례한 질문에도 유쾌하게 답변하는 지오토의 자신감에 단테는 아마 감동했던 모양입니다. 이후 두 사람은 이후 실제로 친구가 되었는데 단테는 인류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 자신의 서사시 '신곡'에 지오토를 등장시키기도 했습니다.


'오 인간의 힘이여! 가장 푸르른 때조차 얼마나 영광은 공허한지. 아둔한 나이에는 이루지 못하리.

치마부에는 신에게 회화를 평정했습니다라고 고했지만 이제 그 외침은 지오토의 것입니다. 

치마부에의 이름은 일식처럼 가리웠습니다.'


-단테의 '신곡' 중에서, 칸토 11, 91~95줄


지오토가 아름다운 예술을 창작하는 것에 몰두되었던 이유는 어쩌면 그가 볼품없는 외모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을 기록했던 조르조 바사리는 '피렌체에서 지오토보다 못생긴 남자는 찾기 힘들다고' 표현하기도 했으니까요. 위 초상화는 지오토 사후 200년 뒤에 그려진 지오토의 추상화인데, 아무래도 후대의 예술가들은 지오토 정도의 천재라면 당연히 상당한 미남일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천재들은 의외로 추남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르네상스의 최고 정점이자 인류사 최고의 예술가로 평가받는 미켈란젤로도 추남으로 유명했으니까요. 어쩌면 콤플렉스야말로 한 인간을 더 빛나게 만드는 연료가 되는것은 아닐까요.  


스타 예술가의 탄생

지오토의 이야기들을 듣고 있으면 어쩐지 유쾌한 기분이 들지만, 이렇게 예술가의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의 회자되는 것 자체가 전에 없던 일입니다. 스타 예술가의 탄생. 이 또한 지오토가 바꾼 변화입니다. 중세 사람들에게 예술가는 봉제사나 가죽세공사, 아니면 대장장이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냥 기술이 뛰어난 사람 일 뿐 사회적으로 대접받을 만큼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죠. 요즘도 어느 봉제사가 기가 막히게 바느질을 잘한다면 '세상에 이런 일이'같은 TV 프로에 잠깐 나올 수는 있겠지만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큼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런데 지오토가 창조해 낸 '환영'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감동을 주었던 모양입니다. 피렌체 사람들은 지오토라는 '스타 예술가'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졌고, 다른 마을 사람을 만나면 '우리 마을에 지오토라는 엄청난 화가가 있다'며 자랑을 하곤 했습니다. 요즘 사람들도 뛰어난 연예인이 자신과 같은 동네 출신이면 자랑하는 경우가 있으니 이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거기에 더해 지오토는 볼품없는 외모에도 아름다운 예술을 만드는 '반전의 스토리'까지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유쾌함까지, '스타 예술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역사는 소수의 천재들에 의해 이끌려가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천재 지오토의 탄생과 함께 르네상스는 활짝 피어날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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