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가는 십자군의 시대
프리드리히 2세가 죽은 이후 십자군 원정은 어떻게 진행 됐을까. 십자군의 마지막을 이은건 역사에 '성왕'으로 불렸던 루이 9세Louis IX였다. 그는 중세의 어떤 군주보다 신실한 기독교인 군주였기에 사람들이 성왕Saint이라고 불렀지만 그가 이끈 7차와 8차 두번에 걸친 십자군은 아무런 성과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7차 십자군 때는 이슬람에 포위당해 루이 9세 본인이 이슬람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돈을 주고 풀려나는 수모를 당해야 했고, 1270년 마지막으로 일으킨 8차 십자군 때는 루이 9세가 행군 도중에 병으로 쓰러져 버렸다. 병으로 쓰러진 성왕 루이 9세는 무슨 불행인지 결국 병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아랍인들의 땅에서 사망했다.
"예루살렘으로.. 예루살렘으로.."
이것이 죽음을 앞둔 성왕 루이 9세의 마지막 유언이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을 끝으로 더 이상 십자군 원정은 일어나지 않았다. 8차동안 이어진 십자군 원정중에 그 누구보다 십자군에 진심이었던 성왕의 죽음이 십자군의 마지막이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할 것이다. 한 때는 온 유럽이 열광했던 십자군이었지만 이제 유럽인들은 남의 집 불구경하듯 더 이상 십자군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200여년 가까이 이어져 왔던 십자군의 마지막은 어쩐지 초라했다고 해야할까. 그렇게 뜨거웠던 한 시대도 저물어 갔다.
초원 위의 양치기 소년
성왕 루이 9세가 죽고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276년, 피렌체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베스피냐노 마을의 언덕에는 어느 소년이 양을 치고 있었다. 체구는 또래에 비해 작았지만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밝은 성격 덕에 누구에게나 사랑받던 소년, 그의 이름은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였다. 아버지는 아직 어렸지만 또래들에 비해 유난히 똑똑했던 지오토에게 믿고 양치는 일을 맡겨놓았다.
지오토는 이탈리아 북부의 초원에서 양 떼들을 이곳 저곳으로 이끌며 자연을 친구 삼아 지냈다. 푸른 하늘 밑의 초원과 시원한 들바람, 세상은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렇게 초원에서 양 떼를 돌보던 지오토는 한 가지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양들이 열심히 풀을 뜯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나무 숯을 연필 삼아 바위에 양들을 그리는 일이다. 양들의 복실복실한 몸통과 가늘고 곧게 내려간 다리로 차분하게 걷는 모습을 보며 지오토는 다시 한번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그렇게 지오토는 처음으로 신이 창조한 자연을 자신의 손을 통해 그림으로 재창조하는 기쁨을 알게 된다.
어떤 우연이었는지 당시 부흥하는 도시 피렌체의 최고의 화가였던 치마부에가 베스피냐노의 초원을 지나가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초원 위 바위에 무언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본 치마부에는 가까이 가서 보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누가 그렸는지 바위에 그려진 양들을 너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런 시골에 이렇게 재능 있는 사람이 있다고? 치마부에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느 소년이 양을 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치마부에는 꼬맹이에게 다가가 저 그림을 누가 그렸냐고 물어보았다. 지오토는 자신이 그렸다고 대답했다.
치마부에가 혹시 그림을 배웠냐고 물어보자 아직 양치기 소년에 불과했던 지오토는 수줍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치마부에는 지오토에게 집으로 안내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길로 지오토의 아버지를 찾아간 치마부에는 이 아이를 자신이 피렌체로 데려가도 괜찮겠느냐고 물었다. 견습생부터 시작해서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으면 분명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을것이라고 설득한 것이다. 지오토의 아버지는 치마부에의 명성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지오토는 치마부에를 따라 피렌체로 출발하게 된다. 지중해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였던 피렌체에 도착한 지오토. 서양 미술사에서 '회화의 역사'가 처음으로 시작되는 장면이다.
천재들이 가장 존경하는 천재
르네상스 예술가하면 보통 르네상스의 3대 천재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그리고 라파엘로 이렇게 3명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 르네상스의 3대 천재들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화가가 한 명 있는데 바로 양치기 소년이었던 지오토 디 본도네다. 천재들이 존경하는 천재라고 해야 할까. 지오토가 이토록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가 르네상스 회화를 처음으로 창조한 예술가였기 때문이다. 니콜라 피사노가 르네상스 조각을 개척했다면 지오토는 르네상스의 회화를 부활시킨 가장 중요한 초기 개척자중 한명이었다.
"화가들이 자연에게 진 빚은 피렌체 화가 지오토에게도 진 빚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뛰어난 회화를 그리기 위한 방법들은 전쟁의 폐허로 인해 오랜 세월 묻혀 있었는데, 그는 혼자서, 오로지 신의 은총으로 악한 상태에 빠진 것을 되살려 선한 상태로 되돌렸기 때문이다."
위는 앞으로 자주 이름이 등장하게 될 르네상스의 예술가이자 최초의 미술사가이기도 한 조르조 바사리의 지오토에 대한 평가다. 그리고 데카메론Decameron를 집필한 르네상스의 대표 시인 보카치오는 지오토를 다음과 같이 평하기도 했다.
"그는 수세기동안 땅에 묻혀있던 예술을 밝은 빛으로 끌어왔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미술에 관심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라도 지오토의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3대 천재의 이름은 기억하지만 어쩐지 지오토라는 이름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는 지오토가 '최초'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원래 초기 개척자보다는 이를 대중적으로 확장시킨 사람들을 더 쉽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빌게이츠와 스티브 잡스의 이름은 기억하지만 최초의 컴퓨터 개발자였던 찰스 배비지Charles Babbage의 이름은 거의 알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위의 두 사람의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오토는 회화의 창시자다. 중세 미술의 문을 닫고 근대 미술로 가는 문을 열었던 '최초의 천재'였던 것이다.
환영의 탄생
그렇다면 지오토의 예술은 과거의 중세의 예술과 어떻게 달랐을까. 중세의 그림과 지오토의 그림을 한번 비교해 보자. 위 두 그림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열 두 제자의 '최후의 만찬'을 그린 그림이다. 둘 사이에는 중요한 변화가 숨어 있다.
우선 중세 시대 사람의 눈으로 한번 지오토의 그림을 바라보자. 물론 지오토의 그림은 그냥 보기에도 중세의 그림보다는 잘 그렸다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그보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 상당히 충격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중 절반이 뒤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포장마차에 앉아서 쓸쓸하게 술을 마시는 아저씨의 뒷모습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뒷모습을 구분할 수 있을까? 반면 그 위 중세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을 보면 모든 제자들이 정면을 보고 있다. 지오토 이전의 거의 모든화가는 이렇게 정면을 그리는 것이 당연했는데, '최후의 만찬'은 열두 제자와 예수를 소개하는 초상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어느 화가가 만약 대통령의 초상화를 뒷모습으로 그린다면 어떨까? 아마 세상에 어떻게 저런 무식한 화가가 있느냐고 비판받을 것이다.
그런데 지오토는 제자들의 절반을 뒷모습으로 그려놓았다. 심지어 왼쪽의 사도는 아예 뒷통수만 그려놓았다. 이렇게 그린 지오토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지오토는 관객들이 그림을 보면서 '실제의 상황'을 느끼길 원했다. 마치 우리가 현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열두 제자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몇 발자국 뒤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이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며 만찬을 함께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직접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이를 미술에서는 '환영Illusion'이라고 한다. '환영'이란 쉽게 표현하면 '가짜를 진짜처럼 인식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사과 그림이라고하면, 이는 그저 사과의 그림일 뿐이지만 우리는 그림을 통해 진짜의 사과를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가짜의 그림'을 통해 '진짜의 현실'을 인식하는 과정이 '환영'이다.
지오토는 양들이 풀 뜯는 모습을 나무 숯으로 바위에 그대로 그렸을 때의 기쁨을 기억하고 있었다. 바위 위에 숯으로 양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그리며 '환영'을 창조했던 지오토는,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모습을 벽화 위에 재현해 마치 진짜인 듯 느껴지는 '환영'을 창조하려고 했던 것이다.
옛날의 방식
그렇다면 지오토 이전의 중세의 예술가들은 왜 지오토 처럼 그리지 못했을까? 이는 중세 특유의 사고방식 때문인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 중세의 그림을 고대 이집트의 회화와 한번 비교해 보자.
왼쪽 고대 이집트의 벽화를 보면 각 대상의 크기가 다르게 그려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집트인들이 인물들의 크기를 다르게 그린 이유는 쉽게 추정할 수 있는데 대상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한 것이다. 왕이나 귀족은 크게 그리고 평민이나 노예계층은 작게 그리는 식이다.
이번에는 중세의 그림을 한번 살펴보자. 오른쪽은 초원위를 뛰놀던 지오토를 피렌체로 데려왔던 그의 스승 치마부에의 그림이다. 기독교 중심이었던 중세에서 가장 높은 존재는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모 마리아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서도 가장 크게 그려진 인물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였고, 양 옆의 천사들을 작게, 그리고 아래의 예레미야, 아브라함, 다윗, 이사야 같은 성경속의 인물들도 성모보다 훨씬 작게 그려져 있다. 성모 마리아가 현실에서 저 정도의 비율로 크다면 아마 '거인녀'라고 해야겠지만 중세의 사람들은 현실적인 크기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이집트 시대와 유럽의 중세는 분명 시대도 다르고 문화와 민족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데 이상하게도 비슷한 방식으로 그린 셈이다. 이들은 사이에는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중세의 기독교와 이집트 시대의 공통점은 모두 '내세'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천국과 지옥', 즉 죽음 이후의 세계다. 그리고 이집트에서도 '사후세계'를 중시하는데, 이집트의 상징이 미이라와 거대 무덤 피라미드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두 시대 모두 공통적으로 내세를 중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내세를 중시하는 시대의 사람들은 보통 현실세계에 별로 관심이 없다. 예술은 항상 그 시대를 반영하기 때문에 이집트와 중세의 기독교의 예술가들은 모두 그림을 사실적으로 그리는데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대신 내세를 중시했던 만큼 미술이 점점 추상화 되고 상징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럼 다시 지오토의 그림으로 돌아와 보자. 지오토는 곧 피렌체에서 명성을 얻기 시작해 1305년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의 내부를 장식할 프레스코화를 완성하게 된다. 위는 그렇게 기획된 총 37개의 프레스코화 중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제자들과 마리아가 슬퍼하는 상황을 그린 <비탄> 이다. 우선 지오토의 그림에는 예수와 다른 인물들이 모두 같은 크기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지오토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지오토는 성경을 직접 읽고 고민하면서 등장인물들은 누구이며, 그들이 지금 어떤 마음상태일지 까지 고민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성모 마리아의 안타까운듯한 손짓과 비통한 표정, 그리고 슬픔을 참으며 뒤에서 지켜보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당시의 실제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느껴지는 듯 하다.
지오토가 대단한 이유는 지금까지 서양 미술사에는 이런 그림이 등장한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이 지금까지 봐왔던 성화는 무표정하고 뻣뻣하게 앉아있는 성모마리아와 그 옆의 딱딱한 느낌의 예수 그리스도였다. 중세의 예술가들은 그림을 지오토 처럼 그릴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도 못했다. 때문에 당시의 유럽인들에게 지오토의 그림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을 것이다. 죽어가는 예수 그리스도와 슬프게 울고 있는 성모 마리아를 내가 직접 목격하는 듯한 감상, 마치 영화를 처음 보는 원시인들 처럼 현실과 그림 속 상황이 분리되지 않는 '환영'을 느꼈던 것이다.
지오토는 이렇게 중세의 미술을 깨고 근대 미술로 가는 첫 길을 열었다. 지오토의 그림은 순식간에 피렌체에 소문나기 시작했다. 설교로만 듣던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직접 눈앞에서 보여주는 엄청난 화가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지오토의 그림을 보기위해 예배당으로 몰려들었다.
소문
피렌체에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대단한 예술을 하는 예술가가 등장했다는 소문은 곧 로마에도 퍼지게 되었다. 누구보다 많은 예술가들을 만나봤던 교황 베네딕토 11세는 자신의 눈으로 지오토의 그림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피렌체로 사절을 보내서 지오토의 그림을 한장 구해오라고 지시했다.
피렌체에 도착한 사절은 지오토를 찾아가 그림 그린 거 있으면 한 장 내와보라고 말했다. 십자군의 계속된 실패로 체면이 말이 아닌 교황이라도 여전히 중세 교황의 권위는 '태양'에 가까웠다. 그런 교황의 사절이었으니 아마 상당히 거만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지오토는 어릴적 부터 밝고 재기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전혀 기가 죽지 않은 지오토는 그림을 꺼내오는 대신 붓을 집더니 그 자리에서 빨간색 잉크를 묻혀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의 손을 따라 붓이 움직이자 경이로울 만큼 완벽한 형태의 원이 탄생했다. 마치 컴퍼스를 대고 그린 것처럼 완벽한 형태의 원이 나타났던 것이다. 지오토는 그 빨간색 원 그림을 사절에게 내어 주었다. 사절은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지오토가 준 그림을 그대로 들고 로마로 돌아갔다.
지오토의 그림실력이 어떠한지 궁금해하며 한참을 기다렸던 교황. 그런대 교황은 그림을 보자마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은 성모 마리아나 예수 그리스도 같은 멋진 그림을 기대했는데 무슨 빨간 동그라미라니, 교황은 사절에게 지오토가 왜 이런 그림을 보냈는지 물어보자 사절은 지오토가 컴퍼스도 없이 한번에 둥근 원을 그렸다고 대답했다. 많은 예술가들을 만나봤던 교황은 지오토가 보통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지오토의 자신감이 교황에게 그대로 전달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이탈리아에는 한 가지 속담이 생겨났다고 한다.
"저 사람은 지오토의 원보다 둥근 사람이다"
이 속담은 보통 사람들보다 너무 과하게 원만한 사람을 놀릴 때 쓰는 속담이라고 한다. 모가 나지 않고 둥글 둥글한 성격의 사람을 우리나라에서 '원만圓滿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지오토의 사소한 행동이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속담으로 만들어 질 만큼 당시 지오토의 천재성은 인기가 있었다.
교황은 지오토를 재빨리 로마로 불러들여 성 베드로 대성당의 후면을 장식할 프레스코 벽화를 주문했다. 지오토는 이후 6년동안 로마에 머무르며 프레스코를 완성시켰다. 다만 아쉽게도 지금은 성 베드로 성당에 그려진 그의 벽화를 볼 수 없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16세기에 교황 식스토 4세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축 되었기 때문에 지오토의 벽화는 모두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이후에도 지오토는 교황청으로 부터 많은 의뢰를 받으며 명성을 쌓아 나갔다.
콤플렉스
지오토의 천재성에 관한 소문을 들었던 사람 중에는 <신곡>으로 유명한 단테도 있었다. 시인이었던 단테는 화가 지오토와 함께 르네상스 문화의 시작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단테는 지오토가 <비탄>을 그렸던 이탈리아의 파도바에 있는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지오토가 벽화를 그릴 때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지오토가 작업하는 현장을 방문해 보니 지오토가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와중에 왠 어린아이들이 지오토의 발 밑에서 뛰어놀고 있었다고 한다. 이 아이들은 모두 지오토의 자식들이었다. 지오토는 일찍부터 리체부타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4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두었다. 지오토는 예술을 창작하는 것 뿐 아니라 사람을 창작하는데도 열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단테는 지오토가 상당한 미남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니 당연히 꽃 같은 미남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오토는 체구도 작았고 외모도 전혀 미남이라고 할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면전에 대고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어째서 자식들은 이렇게 평범하게 생겼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다소 무례할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항상 재치가 넘쳤던 지오토는
"나는 낮에는 그림을 만들고 밤에만 아기를 만들거든요."
라고 웃으며 대답했다고 한다. 무례한 질문에도 유쾌하게 답변하며 넘기는 지오토의 자신감을 보고 단테는 아마 그가 멋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던 모양이다. 이후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는데 단테는 나중에 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 자신의 서사시 <신곡>에 지오토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오 인간의 힘이여! 가장 푸르른 때조차 얼마나 그 영광은 공허한지. 아둔한 나이에는 이루지 못하리.
치마부에는 신에게 회화를 평정했습니다라고 고했지만 이제 그 외침은 지오토의 것입니다.
치마부에의 이름은 일식처럼 가리웠습니다.'
-단테의 '신곡', 칸토 11, 91~95줄
단테가 신곡을 썼을때 쯤이면 이미 지오토의 스승 치마부에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만약 치마부에가 이 글을 봤다면 천국에서라도 상당히 기분 나빠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이다. 단테는 지오토와 그의 스승 치마부에를 비교하는 것으로 그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한편 지오토가 아름다운 예술을 창작하는 것에 몰두했던 이유는 어쩌면 그의 볼품없는 외모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조르조 바사리는 '피렌체에서 지오토보다 못생긴 남자는 찾기 힘들다'고 기록 했다. 위 초상화는 지오토 사후 200년 뒤에 그려진 지오토의 추상화인데, 아무래도 후대의 예술가들도 단테가 생각했던 것처럼 지오토 정도의 천재 예술가라면 당연히 상당한 미남일 것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천재들은 의외로 추남인 경우가 많았다. 르네상스의 최고 정점이자 인류사 최고의 예술가로 평가받는 미켈란젤로도 추남으로 유명했으니까. 콤플렉스는 때때로 인간을 더 빛나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동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스타 예술가의 탄생
지오토가 실제로 재치가 넘치는 사람이었던 것 만큼 그의 이야기들에는 어쩐지 유쾌함이 뭍어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술가의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즐겁게 회자되는 것 자체가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스타 예술가의 탄생, 이 또한 지오토가 바꾼 변화다. 중세까지만 해도 예술가는 그저 봉제사나 가죽세공사, 아니면 대장장이와 다를 바 없었다. 그냥 기술이 뛰어난 사람 일 뿐 사회적으로 대접받을 만큼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요즘도 어느 봉제사가 기가 막히게 바느질을 잘한다고 하면 방송사에서 찾아갈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봉제사를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큼 위대한 인물이라고 말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지오토가 창조해 낸 '환영'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모양이다. 피렌체 사람들은 지오토라는 '스타 예술가'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졌고, 다른 마을 사람을 만나면 '우리 마을에 지오토라는 엄청난 화가가 있다'며 자랑을 하곤 했다고 한다. 요즘 사람들도 어느 연예인이 자신과 같은 동네 출신이면 자랑하기도 하는데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지오토는 볼품없는 외모에도 아름다운 예술을 만드는 '반전의 스토리'까지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스타 예술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고 해야할까.
역사는 항상 소수의 천재들에 의해 이끌려가기 마련이다. 조각의 니콜라 피사노 이후 회화쪽에서는 천재 지오토의 탄생하면서 르네상스의 예술은 활짝 피어날 준비를 마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