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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Mar 24. 2024

 메디치 가문, 일어나다

                                                                                              

메디치의 사자,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문장

House of Medici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House of Medici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독일의 로스차일드 가문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입니다. 메디치 가문은 특별히 르네상스를 일으킨 것으로 유명합니다. 르네상스의 '예술과 인본주의'가 꽃피는 분위기는 메디치가 주도했던 것이죠. 우리가 알고 있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같은 천재들은 모두 메디치 가문의 지원을 받고 성장한 예술가들입니다. 예술과 인본주의를 사랑하는 문화를 만들어낸 메디치 가문은 어쩌면 미술사뿐 아니라 인류사 전체의 방향을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메디치 가문은 합스부르크나 로스차일드와는 질적으로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바로 귀족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그토록 유명한 유럽의 가문이라면 엄청난 귀족 가문일 것 같지만 사실 메디치 가문은 평민출신의 가문입니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북쪽의 무겔로 지역에서 출발했다고 합니다. 무겔로는 농업지역이니까 어쩌면 토스카나의 평범한 농민 집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들이 피렌체로 넘어온 시기는 12세기였습니다. 아마 중세 온난기에 도시로 몰려든 소시민들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가문'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만큼 그렇게 평범한 했던 메디치 사람들을 유럽 최고의 명문 가문으로 만들어 놓은 사람은 조반니 디 비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남자라고는 하지만 이 남자는 정말 외모도 성격도 평범함 그 자체였습니다. 평민 가문의 평범한 남자가 유럽 최고의 가문을 만들었다니, 메디치 가문은 도대체 어떻게 피렌체와 르네상스의 중심이 될 수 있었을까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


마음 따듯한 청년과 아름다운 귀족 소녀의 결혼

조반니의 이야기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조반니의 아버지는 양모가게를 운영하는 평범한 상인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피렌체는 도시 전체가 '양모 공장'이라고 해도 될 만큼 양모 사업이 팽창했으니 메디치 사람들도 그 사업에 뛰어든 것이죠. 그런데 조반니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는 대신 다른 길을 택합니다. 삼촌 비에리가 은행업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일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미 다른 4명의 형제가 있으니 자신은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조반니는 삼촌 밑에서 열심히 은행일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조반니는 외모는 볼품없었지만 성실함과 친절함으로 최선을 다해 일합니다. 

그렇게 성실하게 일하던 조반니는 곧 결혼도 합니다. 1386년, 스물여섯 살 때 베로나의 귀족이자 아름다운 용모의 소녀 피카르다 부에리와 결혼한 것이죠. 친절한 청년은 항상 주변 사람들이 결혼시키고 싶어서 난리가 나기 마련입니다. 성실한 청년을 눈여겨보고 있던 어느 고객이 피카르다를 소개해 주었던 것이죠. 그런데 피카르다가 막상 만나보니 조반니는 볼품없는 외모의 평민에 불과해습니다. 하지만 피카르다는 그런 조반니를 남편으로 선택합니다. 조반니의 인간성을 믿어본 것이죠. 피카르다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조반니는 평생 가정과 사업에만 충실한 남자였고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었습니다. 

삼촌 비에리가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은행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조반니는 은행을 인수하기로 결정합니다. 피카르다는 여러 가지 의미로 조반니에게는 보석 같은 존재였는데, 은행을 인수하는 자금 1500 플로린 금화는 피카르다가 결혼할 때 가져온 지참금으로 지불했기 때문입니다. 

조반니는 '피렌체 은행'을 열고 은행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조반니의 친절함과 정직함 덕분인지 은행은 곧 잘 되기 시작합니다. '피렌체 은행'은 피렌체 본사뿐 아니라 로마, 베니스, 나폴리로 은행업을 확장합니다.


대립교황 요한 23세(발다사레 코사)


해적 출신의 교황, 요한 23세

그럼에도 조반니는 아직 피렌체의 평범한 은행장에 불과했습니다. 피렌체에는 이미 70여개가 넘는 은행이 있었는데, 당시 은행이라는 게 지금처럼 거대한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영어에서 Bank의 어원은 Banco인데 이는 벤치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입니다. 당시의 은행업이라고 하면 고작 작은 벤치에서 거래를 하는 환전상이나 고리대금업자같은 느낌에 불과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랬던 조반니가 피렌체의 거물로 성장하던 계기는 어떤 인물과의 만남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발다싸레 코사라는 해적입니다. 단순히 해적이라고 하기에는 이 사람은 역사에 드문 정말 독특한 인물인데, 해적에서 교황까지 올라간 입지 전적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해적에서 교황까지 되었다고 하면 어떤 못난 해적이 어느 날 마음을 고쳐먹고는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더니 착한 사람으로 변화하여 교황이 되었다는 '훈훈한' 스토리를 떠올리겠지만, 이 발다사레 코사라는 사람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건달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나폴리의 귀족 출신이기는 했지만, 전혀 '귀족적인'인물이 아니었으며 형들과 함께 해적질이나 하던 남자였습니다. 당시 해적은 온갖 나쁜 짓은 다 하던 사람들이었는데 해상 강탈은 물론 노예무역, 마을 약탈 등 악당 중에 악당들이었습니다. 발다싸레 코사와 두 형제가 얼마나 악질이었는지 그의 두 형제는 해적질을 하다가 나폴리에서 붙잡혀 사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형들이 붙잡혀 사형을 당하자 발다사레 코사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지금처럼 계속 해적 일을 하다간 나도 언젠가 형들처럼 붙잡혀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발다사레 코사는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적질로 모은돈으로 볼로냐의 대학으로 가서는 민법과 교회법 법학 학위를 받습니다. 뜬금없지만 성직자가 될 준비를 시작한 것이죠. 아마 해적에서 신분세탁을 확실하게 하려면 아예 성직자 쪽으로 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때쯤 발다사레 코사는 조반니를 만나게 됩니다. 당시 확실히 로마 가톨릭의 부패가 심각했는지, 교회의 고위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발다사레 코사는 사람 좋기로 유명한 조반니의 '피렌체 은행'에 가서 12000 플로린 금화를 빌려달라고 합니다. 이 금액은 요즘으로 치면 200억 가까이 되는 어마어마한 금액입니다. 조반니가 '피렌체 은행'을 열며 출자한 돈이 10000 플로린 금화였는데 그보다 더 큰 금액을 빌려달라는 것이죠.

아마 조반니는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딱봐도 건달 같은 이 인간에게 돈을 빌려주어도 되는 할까. 그런데 조반니는 발다사레 코사에게 이 큰돈을 빌려주기로 합니다. 도박을 건 것이죠.

물론 조반니가 괜히 도박을 걸진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이 건달이 주교가 되기만 한다면 교황청과 연줄이 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반니가 비에리 삼촌에게 은행업을 배우던 시절 로마로 전근을 간 적이 있는데, 조반니는 로마에서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큰돈을 벌려면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것이죠. 조반니는 어마어마한 돈이 로마 교황청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이 발다사레 코사는 어쩌면 교황청과 연을 만들어 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발다사레 코사는 분명 야심이 넘치는 인물이었습니다. 어떤 역사학자는 그를 두고 '세속적이며, 야망있고, 교활하고, 부도덕하고, 뛰어난 싸움꾼이었지만 다만 성직자는 아닐 뿐이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조반니는 발다사레 코사를 만나 그 '세속적 야심'을 보았던 모양입니다. 그리고는 여기에 도박을 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도박은 결국 성공합니다.


야만의 시대

그렇다고 단순히 '야심'만 가지고는 교황이 되기 어려울 텐데 어떻게 해적이 교황까지 될 수 있었을까요? 우선 발다싸레 코사는 조반니에게 빌린 돈으로 어렵사리 추기경의 자리에까지 올라갑니다. 추기경이 되고 나서도 개인 사생활은 엉망이었다고 하는데, 추기경의 공관은 항상 여자들로 가득했다고 합니다. 적어도 200명에 달하는 여자들을 '유혹'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아마 지역 여자들을 불러다가 진탕 술을 마시며 끼고 놀았던 모양입니다. 취향도 독특했는지 여자들 중에는 유부녀와 과부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수녀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발다사레 코사는 단순히 사생활만 지저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해적시절의 추억을 못 잊었는지 지역 깡패들과 손을 잡고는 동네 상인들을 털고 다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코믹 영화제목으로 사용해도 될 법한, 말 그대로 '건달 추기경'이었던 것이죠.

아무리 봐도 엉망인 성직자였지만, 중세 말의 교황청은 오히려 교활한 발다사레 코사 같은 인물이 활동하기 좋은 시기였습니다. 교황청은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교황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는데, 십자군 전쟁의 실패와 흑사병등으로 교황청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지자 기존 교황에 반기를 든 소위'대립 교황'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스페인과 프랑스가 지원하는 교황과 영국과 독일이 지원하는 교황 양쪽으로 갈라져 각자 자신들이 정통성을 가진 교황이라고 우기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벌써 30년이나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혼란기야말로 발다사레 코사 같은 인물에게는 기회였습니다. 1409년, 발다사레 코사를 포함한 추기경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공의회를 열어서 누가 교황의 적통인지를 한번 회의를 통해 판단을 해 보자는 제안을 한 것이죠. 

교황들은 반발했지만 일단 수백명의 고위 성직자들이 모인 피사에서 공의회가 열립니다. 공의회의 회의 결과는 어느 교황의 손을 들어주었을까요? 결과는 두 교황은 폐위시켜 버리고 깔끔하게 새로운 교황을 뽑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알렉산더 5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됩니다. 하지만 원래 있던 두 교황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을리가 없습니다. 아니 최고 권력은 교황인 나한테 있는데 어디 추기경들 따위가 무슨 권한으로 새로운 교황을 뽑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두 교황이 퇴위를 받아들이지 못하자 교황이 한명 추가된 꼴이되어 교황은 세명으로 어나 버렸습니다. 마치 세포가 분열하듯이 자꾸자꾸 교황이 늘어난 것이죠. 


교황의 암살?

그런데 이변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새로 뽑힌 교황 알렉산더 5세가 1년도 안돼서 갑자기 죽어버리고 만 것이죠. 나이가 71세의 고령이었기 때문일까요? 사인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문제는 사망 당시 추기경이었던 발다사레 코사가 신임 교황 알렉산더 5세와 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간에는 발다사레 코사가 독살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발다사레 코사의 과거의 행적을 보면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기는 하니까요.

만약 발다사레 코사가 독살을 했다면 왜 그래야 했을까요? 정말 발다사레 코사가 독살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다음 교황으로 이상하게도 발다사레 코사가 추대됩니다. 아마 발다사레 코사가 동료 추기경들을 구워삶아 다음 교황으로 자신을 추대하도록 만든 모양입니다.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해적때 하던 가닥으로 다른 추기경들을 위협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결국 발다사레 코사는 사망한 알렉산더 5세의 후임으로 요한 23세라는 세례명으로 교황의 자리에 올라서게 됩니다. 해적질이나 하던 양반이 교황까지 되어버린 것이죠.

이렇게 교황이 된 요한 23세는 교황청 주 거래은행을 '피렌체 은행'으로 바꿉니다. 바로 조반니의 은행입니다. 아마 조반니가 돈을 빌려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조반니의 도박은 성공합니다. 도저히 교황이 될 것 같지 않던 건달에게 도박을 걸었는데 정말로 성공해 버린 것이죠. 


콘스탄츠 공의회, 울리히 폰 리첸탈의 연대기 삽화, 1460~1465

끝나지 않은 도박

그런데 이 도박은 아직 성공한 도박이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교황은 3명이 난립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조반니도 오히려 돈을 더 투자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교황이 된 발다사레 코사가 자꾸 전쟁을 벌이는 바람에 빚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지기스문트가 직접 나서게 됩니다. 다시 한번 공의회를 열어서 셋 중 누가 '진짜 교황'이 될지를 한번 더 판단해 보자는 것이죠. 요한 23세가 된 발다사레 코사 입장에서는 33%의 확률입니다. 자칫하면 공의회의 결과에 따라 교황직이 날아갈 수 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성공하기만 한다면 명실공히 유럽을 대표하는 교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발다사레 코사는 고심끝에 공의회를 열자는 제안를 받아들입니다. 발다사레 코사는 물론 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가 선출되도록 뒤에서 가장 노력해 준 것이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지기스문트가 최소한의 의리라도 있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교황이 되도록 뒤에서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죠. 

그런데 사실 발다사레 코사의 가족들은 이 공의회에 가는 것을 말렸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주변 소문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황제 지기스문트가 발다사레 코사를 배신할 것 같은 분위기라는 것이죠. 

발다사레 코사가 이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가족들은 '네가 공의회에 들어가면 일반인이 돼서 나올 가망성이 높다'며 적극적으로 말렸지만 그는 어쨌든 공의회가 열리는 콘스타츠로 가는 길에 나섭니다. 어쩌면 앞선 피사 공의회에서 자신이 선택되었으니 자신이 가장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공의회에 도착한 발다사레 코사. 그런데 의외로 분위기는 발다사레 코사에게 좋게 흘러갔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교황청에는 이탈리아인이 많았는데, 이들이 같은 이탈리아인이었던 발다사레 코사를 선호하면서 분위기가 좋게 흘러가기 시작했던 것이죠. 

하지만 인생이란 항상 계획대로 되지는 않는 법, 다른 두 교황이 반발하기 시작합니다. 스페인과 프랑스, 그리고 영국과 독일이 지원하는 다른 두 교황은 오히려 이탈리아 출신의 교황이 선출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며 극심히 반대하기 시작합니다. 

중재를 위해 공의회를 열었던 지기스문트는 입장이 난처했습니다. 중재하는 입장이란 그런 것입니다. 해결하자고 모인 건데 자칫하면 다른 국가들의 반발을 불러오고 사이도 더 나빠질 수도 있으니까요. 결국 지기스문트는 누구의 편도 들 수 없었습니다. 최종결론. 이번에도 세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새 교황을 추대하기로 결정합니다. 33% 확율의 도박은 실패한 것입니다.  


야반도주

잠시 요한 23세였던 발다사레 코사는 소식을 듣고는 우체부로 변장하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굳이 도망친 이유는 아마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던 모양인데, 실제로 지기스문트 황제는 도망친 발다사레 코사를 체포하라고 지시합니다. 아마 황제 입장에서는 교활한 발다사레 코사가 또 무슨 술수를 부리면 골치가 아프니 차라리 감옥에 가두는 것이 속 편하다고 생각했던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자신이 황제가 되도록 발다사레 코사가 도와주었던 것은 이미 잊은지 오래입니다. 이 바닥에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도망 다니던 발다사레 코사는 결국 지기스문트에 의해 붙잡힙니다. 법정 앞에 선 초라한 발다사레 코사. 법정에서 기소된 죄목은 다채롭고 화려했는데, 해적질, 강간, 남색, 살인 및 근친상간 등이었습니다. 아마 황제 지기스문트는 아예 감옥에 집어넣을 작정을 하고 지금껏 발다사레 코사가 행했던 죄라는 죄는 다 긁어모아 한번에 기소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한여름밤의 꿈은 하이델베르크의 감옥에서 끝나게 됩니다.



뜨거운 남자 조반니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일이 일어납니다. 아무도 내주지 않을 것 같았던 바다사레 코사의 보석금을 조반니가 내겠다고 한 것이죠. 보석금은 38500 길더 금화로, 현대로 치면 500억 가까이 되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이 돈은 보석금이니까 사실상 그냥 공중으로 날아가는 돈입니다. 아마 지기스문트 황제는 설마 누가 미래없는 인간을 위해 이 큰 돈을 내겠어하는 심정으로 보석금을 책정했겠지만 조반니가 내겠다고 나선 것이죠. 조반니는 아들 코시모를 시켜서 돈을 최대한 끌어모으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는 이 엄청난 금액의 돈을 내고 발다사레코사를 꺼내달라고 황제에게 요구합니다. 

이 결정은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결정이었습니다. 발다사레 코사는 누가 봐도 '끈 떨어진 인물'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봐도 다시 교황이 될 리 만무했고, 인간적으로 봐도 죄목이 너무 추악했으니 그런 사람을 구한들 평판이 좋을리도 없습니다. 그런데 조반니는 꾿꾿하게 발다사레 코사를 구출해 옵니다. 의리 중에 의리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감옥에서 걸레 같은 몸이 된 발다사레 코사를 꺼내온 조반니는 피렌체로 데려와서는 거처도 마련해 주고 잘 보살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살펴 주었음에도 추운 독일의 감옥생활이 너무 가혹했는지 발다사레 코사의 몸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졌습니다. 그리고는 불과 몇 달을 살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허무하게 죽은 발다사레를, 조반니는 9일 동안 성대하게 장례식도 치러주고 여기에 더해 다음장에서 설명할 조각가 도나텔로를 고용하여 큰돈을 주고 묘비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위 묘비에는


''전 교황 요한 23세. AD 1419년 1월 달력 11일 전, 피렌체에서 잠들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봐도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었습니다. 조반니는 무슨 생각으로 그 엄청난 돈을 날려가며 발다사레 코사를 구하려 했던 것일까요. 큰 인물은 그릇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요.


도박의 성공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엄청난 손해는 오히려 조반니와 메디치 가문을 유럽 전체에 이름을 알리는 계기로 만들어줍니다. 사람들은 '아니 그 막장이었던 발다사레 코사와 끝까지 의리를 지켜주었다고? 메디치가의 조반니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야?' 하며 궁금해 하기 시작한 것이죠. 조반니와 메디치 가문은 순식간에 '의리와 신뢰의 대명사'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믿음직함' 덕분인지 새로 뽑힌 교황 마르틴 5세는 메디치 은행을 계속 교황청의 주 거래 은행으로 유지하기로 결정합니다. 어찌 보면 새 교황입장에서는 '과거의 적이었던 교황을 도운 은행'이니 메디치 은행을 내칠 만도 하지만 아마 이런 인물이라면 안심하고 돈을 맡겨도 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이후 다른 유럽의 귀족들도 '피렌체 은행'이라면 믿고 돈 관리를 맡기게 됩니다. 

결국 조반니의 도박은 성공했습니다. 비록 발다사레 코사는 죽었지만 전 유럽에서 '신뢰의 상징'으로 떠오르면서 이후 피렌체 은행은 급속도로 성장합니다. 피렌체에서 제일가는 은행이 된 것뿐 아니라 이후 유럽에 여러 지점을 내면서 확장을 시작한 것이죠.


인간성에 대한 통찰력

점점 부가 쌓여가는 조반니였지만, 그 많은 부를 가지고도 조반니는 사치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식들에게 피렌체의 평균 노동자 계급 시민처럼 옷을 입고 행동하도록 가르쳤습니다. 겸손하지 못하고 허세를 부리면 언젠가는 피렌체의 시민들의 질투를 살 것이고, 이런 명성 따위는 하루아침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죠. 

이것은 조반니의 훌륭한 인품의 예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조반니는 인간성의 어두운 점을 꿰뚫어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같은 평민 출신인 메디치 가문이 갑자기 성공해 버리면 피렌체 시민들의 시기 질투가 언젠가는 메디치 가문을 무너뜨릴 수 도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죠. 어제까지 자신에게 웃음을 보이던 사람이 오늘 몽둥이를 든 폭도로 변해버리는 것이 인간성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메디치 가문이 예술과 인문학 부흥에 힘쓴 것도 이런 '인간성에 대한 통찰'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조반니는 부가 생기기 시작한 시점부터 예술가들을 지원하며 '예술과 인문학'을 부흥시키는데 힘썼습니다. 당시 예술은 일종의 '공공사업'의 성격도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나면 온 피렌체 시민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완성 날짜를 기다리다가 구경하러 오는 일종의 '공공 문화사업'이었던 것이죠. 조반니 스스로가 인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은 전형적인 '너드남'이기도 했지만, 조반니가 예술 부흥운동에 힘을 쏟은 것은 피렌체 시민의 환심을 사기 위한것이기도 했습니다. 평민 출신인 자신의 가문이 피렌체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려면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의 부를 대중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진짜 남자의 마지막

조반니는 1429년 6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조반니는 죽기 전에 자녀들에게 그가 평생 사랑했던 그의 아내 피카르다를 끝까지 존중하고 그녀의 합당한 명예를 빼앗지 말라고 충고했습니다. 죽을때까지 멋있는 남자라고 해야할까요. 조반니는 그의 아내를 '난니나Nannina'라는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뜻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뜻입니다. 역사는 조반니가 죽고 나서 그의 아내 피카르다가 극복할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슬픔은 그녀의 훌륭한 아들들이 충분히 위로해 주었을 것입니다. 훌륭한 아버지 아래에는 훌륭한 아들이 있는 법입니다. 조반니와 피카르다의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는 앞으로 피렌체를 명실공히 유럽 최고의 도시로 만들어 주며 '피렌체의 국부'로 불리게 될 것입니다. 

조반니는 르네상스가 꽃피울 수 있는 모든 바탕을 처음으로 구축해 놓은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조반니는 메디치 가문의 부를 예술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가문의 전통으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조반니의 후손들은 이 전통을 충실하게 따릅니다. 인간의 역사를 바꾼 르네상스의 중심에는 볼품은 없지만 진짜 남자였던 조반니의 정신이 있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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