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피렌체였을까
중세말의 이탈리아지역의 도시들은 독특한 정치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강한 왕을 중심으로 하나로 뭉쳐있던 프랑스나 영국, 스페인과는 달리 여러개의 도시국가들로 분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가운데 로마를 중심으로 아래는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 위쪽으로는 피렌체 공화국과 밀라노 공국이 있었고, 해안가에는 십자군 전쟁 시절 무역으로 성공한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피사 공화국, 아말피 공화국 같은 무역 도시들이 있었다. 이름에 대부분 공화국Republic이 붙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도시들은 주로 한 명의 군주가 아닌 시민들이 주권을 갖고 도시를 이끌어가는 형태였다. 공화국에도 물론 귀족들은 존재했지만 이들은 시민들과 함께 국가에 협력하며 같은 공화국의 일원으로 살아갔다.
르네상스가 유독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이렇게 도시국가들이 정치적으로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크기는 작을지라도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는 사상의 자유가 있었고, 그 자유로움 속에서 서로 경쟁하며 문화와 경제를 발전 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러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 중에서 르네상스의 중심 역할을 했던 도시는 단연 피렌체였다. 왜 다른 도시가 아니라 피렌체였을까. 피렌체는 당시 인구로 비교한다면 밀라노보다 적었고 역동성으로 비교한다면 화려한 무역 도시 베네치아나 제노바보다 못했을 텐데도 말이다. 오래 고민해 봐도 르네상스가 왜 꼭 피렌체를 중심으로 발전했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똑 부러지게 대답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저 역사는 때로 알 수 없는 이유와 운에 의해 움직인다고 말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렌체가 가진 '운'은 무엇이었을까. 한가지 확실한 점은 피렌체의 르네상스가 메디치 가문을 중심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메디치 가문은 어떤 이유에서 인지 유독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것으로 피렌체 르네상스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만약 왜 피렌체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발전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어떻게든 답해야 한다면, 피렌체의 여신은 운좋게 메디치 가문을 가질 수 있었다 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
메디치 가문House of Medici
메디치 가문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 독일의 로스차일드 가문 처럼 유럽 근세사에 이름을 남긴 가장 유명한 가문 중 하나였다. 그런데 메디치 가문이 다른 유럽의 가문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특징이 한가지 있었다. 바로 평민 가문이었다는 점이다. 그 정도로 유명한 가문이라면 당연히 귀족이나 왕족 가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메디치는 피렌체의 평범한 시민 계급 출신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기원은 피렌체 북쪽의 무겔로 지역이었다고 한다. 무겔로는 당시 농업지역이었으니까 어쩌면 중세를 살아가던 평범한 농민 집안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피렌체로 넘어온 시기는 대략 12세기였다. 시기로 보면 중세 온난기와 겹쳐있는데 아마도 중세 온난기의 인구증가로 인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든 소시민 가족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메디치가 넘어왔던 12세기의 피렌체에는 전체 8만의 인구중에 대략 2만 5천 정도가 양모 사업에 종사했다고 하니 아마 도시 전체가 거대한 '양모 공장'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피렌체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메디치 가문의 선조들은 처음에는 남들처럼 양모사업을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얼마 뒤 고향 무겔로에 많은 땅을 구매했다고 하니 양모 사업은 꽤나 성공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부가 어느정도 축척되고 나서 부터는 공직에 나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상경 성공 스토리'라고 할 수있다.
그럼에도 메디치는 14세기 중반까지는 여전히 피렌체의 이름없는 평민 가문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랬던 메디치 가문을 피랜체를 대표하는 최고의 가문으로 일으킨 사람은 조반니 디 비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였다.
마음 따듯한 청년과 아름다운 귀족 소녀의 결혼
그런데 메디치 가문을 일으킨 엄청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조반니는 외모도 성격도 평범함 그 자체였다. 다만 유독 진솔하고 착실했던 것은 확실하다. 평민 가문의 평범한 남자가 유럽 최고의 가문을 일구어냈다니, 조반니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메디치 가문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일까.
메디치 가문이 아직 양모업에 종사하던 시절, 청년시절의 조반니는 조금 다른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다른 형제들처럼 가족의 양모 사업을 물려받지 않고 로마에서 은행일을 하던 삼촌 비에리에게로 갔던 것이다. 아마 다른 가족들이 양모사업을 물려받아 잘 이끌어 갈테니 자신은 다른 일을 한번 해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조반니는 삼촌을 도와 은행 업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은행이라고 해봐야 도심에 좌판을 깔아놓고 돈을 빌려주고 받는 '환전상'정도에 불과했다. 영어 Bank의 어원은 이탈리아어 Banca인데 이는 '벤치Bench'와 뜻이 같다. 말 그대로 당시의 은행은 벤치같은 작은 탁자를 깔아놓고 돈장사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당시 시장에서 장사꾼들이 물건을 깔아놓고 파는 동안 아무것도 없이 그냥 탁자만 하나 놓고 멍하니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은행원이라는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조반니는 그렇게 삼촌 밑에서 열심히 은행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조반니는 외모는 볼품없었지만 성실함과 친절함으로 최선을 다해 일했기 때문에 금방 좋은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친절하고 성실한 청년은 항상 주변에 혼담이 오가기 마련이다. 성실한 조반니를 눈여겨보고 있던 어느 은행 고객이 그에게 한 처녀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녀는 베로나의 귀족이자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피카르다 부에리라는 소녀였다. 그런데 둘이 막상 만나보니 피카르다가 보기에 조반니는 그저 볼품없는 외모에 귀족도 아닌 평민에 불과했다. 하지만 피카르다는 그런 조반니를 남편으로 선택하게 된다. 조반니의 인간성을 한번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1386년 조반니는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 피카르다와 결혼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녀의 선택은 옳았다고 해야할 것이다. 조반니는 평생 가정과 사업에만 충실한 남자였고 일생동안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삼촌이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은행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조반니는 삼촌의 은행을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피카르다는 여러 가지 의미로 조반니에게는 보석 같은 존재였는데, 은행을 인수하는 자금 1500 플로린 금화를 피카르다가 결혼할 때 가져온 지참금으로 지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반니는 직접 '피렌체 은행'을 열고 은행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조반니의 친절함과 정직함 덕분인지 은행은 곧 잘 되기 시작했다. '피렌체 은행'은 피렌체 본사뿐 아니라 로마, 베니스, 나폴리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해적 출신의 교황, 요한 23세
그럼에도 조반니는 아직 피렌체의 평범한 은행장 중 한명에 불과했다. 당시 피렌체에는 이미 조반니의 은행 말고도 70여개가 넘는 은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랬던 조반니가 자신의 은행을 피렌체의 최고 은행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발다싸레 코사Baldassarre Cossa라는 해적을 만나면서 부터였다. 이 사람은 단순히 해적이라고 하기에는 역사에 보기힘든 독특한 경력의 인물인데, 해적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자그마치 교황까지 올라간 입지 전적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해적에서 교황까지 되었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스토리는 어떤 못된 해적이 어느날 마음을 고쳐먹고는 회개한 뒤 착한 사람으로 변화하여 좋은 교황이 되었다는 '훈훈한' 스토리다. 하지만 발다사레 코사는 전혀 그런 종류의 인물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해적스러움을 버리지 못한 남자라고 해야 할까. 나폴리의 귀족 출신이기는 했지만, 그는 귀족적인 행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인물이었다. 당시 해적은 해상 강탈은 물론 노예무역, 마을 약탈 까지 세상의 온갖 나쁜 짓은 다 하던 악당 중의 악당들이었는데 발다싸레 코사와 그의 두 형제도 그런 해적이었다. 얼마나 악질이었는지 발다싸레 코사의 두 형제는 해적질을 하다가 일찌감치 나폴리에서 붙잡혀 사형을 당했다고 한다.
형들이 붙잡혀 사형을 당하자 발다사레 코사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지금처럼 계속 해적질이나 하며 살다가는 나도 언젠가 형들처럼 붙잡혀서 죽임을 당하고 말겠구나. 발다사레 코사는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적질로 모은 돈으로 볼로냐의 대학으로 가서는 민법과 교회법 법학 학위를 받았다. 그가 교회법을 배운 이유는 확실한 '신분세탁'을 위해 성직자가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학위조차도 돈으로 산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 시점 쯤에 발다사레 코사는 메디치의 조반니를 찾아가게 된다. 당시 확실히 로마 가톨릭의 부패는 심각했는지, 교회의 고위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발다싸레 코사는 조반니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가 요구한 금엑은 자그마치 12000 플로린 금화였다. 이 금액은 요즘으로 치면 200억 가까이 되는 금액인데 조반니가 '피렌체 은행'을 열며 출자한 돈이 10000 플로린 금화였으니까 그보다 더 큰 금액을 빌려달라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 조반니의 은행도 어느정도 성장 했으니 빌려줄 돈이야 있었겠지만 조반니는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딱봐도 건달 같은 이 인간에게 이렇게 큰 돈을 빌려주어도 되는 걸까.
고민끝에 조반니는 발다사레 코사에게 이 큰 돈을 빌려주기로 결단했다. 일종의 도박을 건 셈이다. 물론 조반니도 생각없이 그냥 도박을 건 것은 아니었다. 발다사레 코사는 추기경이 되기 위해 돈을 빌려달라고 한 것인데, 만약 이 건달이 추기경이 되기만 한다면 교황청과 연줄이 닿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조반니는 로마에서 비에리 삼촌에게 은행업을 배우던 시절, 어마어마하게 큰 돈들이 로마 교황청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았다. 만약 이 건달을 통해 교황청과 연줄을 만들 수만 있다면 어쩌면 그 큰 돈들을 자신의 은행에서 관리하는 기회를 얻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발다사레 코사는 그냥 보기에도 야심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19세기의 역사학자였던 요한 피터 카르쉬는 그를 두고
'세속적이며, 야망있고, 교활하고, 부도덕하고, 뛰어난 싸움꾼이었지만 다만 성직자는 아니었다.'
라고 평했다. 조반니는 발다사레 코사를 만났을 때 아마 그의 '세속적 야심'을 보았던 모양이다. 저정도 야심이 불타는 사람이라면 방식이야 어떻든 뭐라도 하겠지, 그는 이렇게 생각했던게 아닐까.
야만의 시대
그렇지만 단순히 '야심'만 있다고 아무나 교황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해적출신이었던 그가 교황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 우선 발다싸레 코사는 조반니에게 빌린 돈으로 어렵사리 추기경의 자리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추기경이 되고 나서도 개인 사생활은 엉망이었다고 하는데, 추기경의 공관은 항상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적어도 200명에 달하는 여자들을 '유혹'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아마 지역 여자들을 불러다가 매일같이 진탕 술을 마시며 놀았던 모양이다. 취향도 독특했는데 여자들 중에는 유부녀와 과부들 뿐 아니라 심지어는 수녀들도 있었다고 한다. 발다사레 코사는 단순히 사생활만 지저분한 것이 아니었다. 해적시절 범죄의 추억을 못 잊었는지 지역 깡패들과 손을 잡고는 동네 상인들을 건드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추기경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건달에 가까운 추기경이었던 것이다.
건달같은 발다사레 코사가 돈으로 추기경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 가톨릭과 로마 교황청이 엉망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 교황청은 더 이상 십자군 시절의 권위있는 교황청이 아니었다. 특히 문제는 교황이 두명으로 불어나 있었다는 점이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와 흑사병 등으로 교황의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지자 기존 교황에 반기를 든 소위 '대립 교황'이 등장한 것이다. 유럽의 서민들은 '이건 정말 난장판 이구나'싶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보면 스페인과 프랑스가 지원하는 교황1과 영국과 독일이 지원하는 교황2 양쪽으로 갈라져 각자 자신들이 정통성을 가진 교황이라고 우기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벌써 30년이나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혼란기야말로 발다사레 코사 같은 인물에게는 오히려 기회라고 할 수 있다. 1409년, 발다사레 코사를 포함한 추기경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다사레 코사는 공의회를 열어서 누가 교황의 적통인지를 한번 회의를 통해 판단을 해 보자고 제안을 했다. 두 교황은 당연히 이에 반발했는데 공의회는 수백명의 고위 성직자들이 모인 피사에서 강행되었다. 공의회의 회의 결과는 어느 교황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결과는 두 교황 모두 폐위시켜 버리고 차라리 새로운 교황을 뽑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알렉산더 5세라는 인물이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원래 있던 두 교황이 이를 인정할 리가 없었다. 최고 권력은 교황인 자신들에게 이미 있는데 어디 추기경들 따위가 모여서 새로운 교황을 뽑느냐는 것이다. 결국 두 교황은 퇴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교황만 한명 더 추가된 꼴이되어 버렸다. 교황은 그렇게 세 명으로 불어나 버렸다. 자꾸자꾸 늘어가기만 하는 교황이었다.
교황의 암살?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이번 공의회를 통해 새로 뽑힌 세번째 교황 알렉산더 5세가 1년도 안돼서 갑자기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의 나이가 71세였다고 하니 그저 고령에 따른 자연사였을까? 사인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문제는 사망 당시 발다사레 코사가 그와 같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간에는 발다사레 코사가 신임 교황을 독살한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만약 발다사레 코사가 독살을 했다면 왜 그래야 했을까? 정말 발다사레 코사가 독살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발다사레 코사는 그 다음 교황으로 추대되었다. 아마 발다사레 코사는 동료 추기경들을 구워삶아 다음 교황으로 자신을 추대하도록 만들었던 모양이다.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면 해적 때 하던 가닥으로 다른 추기경들을 돈으로 매수하거나 폭력으로 위협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결국 발다사레 코사는 사망한 알렉산더 5세의 후임으로 '요한 23세'라는 세례명으로 교황의 자리에 올라섰다. 해적질이나 하던 몰락 귀족이 정말로 교황까지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새로 교황이 된 요한 23세는 교황청 주 거래은행을 '피렌체 은행'으로 바꿨다. 바로 메디치 조반니의 은행이다. 아마 조반니가 돈을 빌려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조반니의 도박은 일단 성공했다. 도저히 교황이 될 것 같지 않던 해적에게 도박을 걸었는데 정말로 그가 교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끝나지 않은 도박
그런데 이 도박은 아직 완벽하게 성공한 도박이 아니었다. 여전히 다른 두 교황이 난립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반니는 교황청 전담은행이 된 이후 오히려 돈을 더 투자해야 했는데, 발다사레 코사가 교황이 된 후 전쟁을 벌이면서 메디치 은행으로 부터 돈을 더 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당시 교황청이 혼란스러웠다고 한들 이렇게 교황이 3명이나 난립한 상황이 계속 지속될 수는 없었다. 결국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지기스문트가 직접 나서기로 결심했다. 다시 한번 공의회를 열어서 셋 중 누가 '진짜 교황'인지를 다시 판단해 보자는 것이다.
발다사레 코사는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자칫하면 공의회의 결과에 따라 어렵게 얻은 교황직이 날아갈 수 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만약 자신이 새로운 공의회에서 교황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유럽을 대표하는 교황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을수도 있다. 발다사레 코사 입장에서는 33%의 확률의 도박이라고 해야할까.
발다사레 코사는 고심끝에 공의회를 열자는 제안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발다사레 코사는 물론 다 생각이 있었다. 사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가 선출되도록 뒤에서 가장 노력해 준 것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황제가 최소한의 의리라도 있다면 이번에는 자신이 교황이 되도록 뒤에서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발다사레 코사의 측근과 가족들은 이 공의회에 참석하는 것을 말렸다고 한다. 가족들이 주변 소문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황제 지기스문트가 발다사레 코사를 배신할 것 같은 분위기라는 것이다. 발다사레 코사가 이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가족들은 '네가 공의회에 들어가면 일반인이 돼서 나올 가망성이 높다'며 적극적으로 말렸지만 그는 어쨌든 공의회가 열리는 콘스타츠로 가는 길에 나섰다.
공의회에 도착한 발다사레 코사. 그런데 걱정과는 달리 의외로 분위기는 발다사레 코사에게 좋게 흘러갔다고 한다. 아무래도 교황청은 로마에 있다보니 이탈리아인이 많았는데, 이들이 같은 이탈리아인이었던 발다사레 코사를 선호하면서 분위기가 좋게 흘러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항상 계획대로 되지는 않는 법, 다른 두 교황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스페인과 프랑스, 그리고 영국과 독일이 각각 지원하는 다른 두 교황은 오히려 이탈리아에서 열린다고 이탈리아 출신의 교황이 선출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며 극심히 반대하기 시작했다.
중재를 위해 공의회를 열었던 지기스문트는 입장이 난처했다. 중재하는 입장이란 그런 것이다. 해결하자고 모인 건데 자칫하면 다른 국가들의 반발을 불러오고 오히려 사이도 더 나빠질 수도 있으니까. 결국 지기스문트는 누구의 편도 들 수 없었다. 그래서 황제는 최종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렸다. 이번에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3명의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고 새 교황을 추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발다사레 코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이다. 33% 확율의 도박은 실패하고 만 것이다.
야반도주
잠시 요한 23세였다가 다시 발다사레 코사가 된 그는 이 결정 이후 우체부로 변장하고 도망쳐 버렸다. 굳이 도망친 이유는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인데, 실제로 지기스문트 황제는 도망친 발다사레 코사를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아마 황제 입장에서는 교활한 발다사레 코사가 또 무슨 술수를 부리면 골치가 아프니까 차라리 감옥에 가두는 것이 속 편하다고 생각했던지도 모른다. 물론 자신이 황제가 되도록 발다사레 코사가 뒤에서 도와주었던 것은 이미 잊은지 오래였다. 현대에도 마찬가지지만 정치의 세계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다.
그렇게 도망 다니던 발다사레 코사는 결국 지기스문트에 의해 붙잡혔다. 변장한 것 말고는 죄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그간 발다사레 코사의 행적을 보면 죄목이야 찾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법정 앞에 선 초라한 발다사레 코사에게 부여된 죄목은 다채롭고 화려했는데, 해적질, 강간, 남색, 살인 및 근친상간 등이었다. 아마 황제 지기스문트는 아예 감옥에 집어넣을 작정으로 가능한 모든 죄목을 전부 긁어모아 한번에 기소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어느 야심찬 해적의 꿈은 하이델베르크의 감옥에서 끝나게 된다.
뜨거운 남자 조반니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일이 일어났다. 발다사레 코사가 감옥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보석금을 내고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도 내주지 않을 것 같았던 바다사레 코사의 보석금을 조반니가 내겠다고 나선 것이다. 보석금은 자그마치 38500 길더 금화로, 현대로 치면 500억 가까이 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보석금은 내고나면 돌려받을 수 없으니 사실상 그냥 공중으로 날아가는 돈이다. 아마 지기스문트 황제는 설마 누가 이 미래없는 인간을 위해 큰 돈을 내겠어하는 심정으로 보석금을 책정했겠지만 뜬금없이 조반니가 내겠다고 나선 것이다. 조반니는 아들 코시모를 시켜서 돈을 최대한 끌어모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이 엄청난 금액의 돈을 모아 황제에게 내고 발다사레 코사를 꺼내달라고 요청했다.
황제 지기스문트도 황당했겠지만 황제가 아닌 그 누가 봐도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결정이었다. 발다사레 코사는 누가 봐도 '끈 떨어진 인물'이었다. 정치적으로 봐도 다시 교황이 될 리 만무했고, 인간적으로 봐도 죄목들이 강간에 남색에 너무 지저분했으니 그런 사람을 구한들 좋은 평판을 받을리도 없었다. 그런데 조반니는 묵묵히 감옥에서 발다사레 코사를 구출해서 피렌체로 데리고 돌아 왔다. 의리 중에 의리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따듯한 인간성의 발현이라고 해야할까. 그렇게 감옥에서 발다사레 코사를 꺼내온 조반니는 피렌체에 거처도 마련해 주고 잘 보살펴 주었다.
하지만 그렇게 보살펴 주었음에도 추운 독일에서의 감옥생활이 너무 가혹했는지 발다사레 코사의 몸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리고는 불과 몇 달을 살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허무하게 죽은 발다사레를, 조반니는 9일 동안 성대하게 장례식도 치러주었고 여기에 더해 조각가 도나텔로를 고용하여 큰돈을 주고 묘비도 만들어 주었다. 묘비에는
''전 교황 요한 23세. AD 1419년 1월 달력 11일 전, 피렌체에서 잠들다"
라고 기록해 주었다. 마지막 묘비 작성까지, 조반니의 행동은 누가 봐도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었다. 조반니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엄청난 돈을 공중에 날려가며 발다사레 코사를 구하려 했던 것일까.
도박의 성공
그런데 이 미련해보이는 행동이 오히려 조반니와 메디치 가문을 유럽 전체에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사람들은 '아니 그 엉망이었던 발다사레 코사에게 끝까지 의리를 지켜주었다고? 메디치가의 조반니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야?' 하며 궁금해 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반니와 메디치 가문은 순식간에 유럽전체에서 '의리와 신뢰의 대명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신뢰' 덕분인지 황제에 의해 새로 뽑힌 교황 마르틴 5세는 메디치 은행을 계속 교황청의 주 거래 은행으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어찌 보면 새 교황입장에서는 과거의 적이었던 발다사레 코사를 도운 은행이었으니 불편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조반니 같은 인물이라면 안심하고 돈을 맡겨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후 다른 유럽의 귀족들도 '피렌체 은행'이라면 믿고 돈 관리를 맡기게 된다.
결국 조반니의 도박은 성공했다. 비록 발다사레 코사는 죽었고 많은 돈을 잃었지만 전 유럽에 '신뢰의 상징'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후 피렌체 은행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교황청의 주 거래은행이 되면서 큰 돈을 관리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피렌체에서 제일가는 은행으로 성장하여 전 유럽에 여러 지점을 내면서 확장을 시작한 것이다.
메디치 가문은 이렇게 조반니를 통해 처음으로 일어서기 시작했다. 비록 평민 가문이었지만 진솔한 남자였던 조반니의 성공과 함께 이제 피렌체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가문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유럽 최고의 귀족들과 교류하면서 자연스레 정치적 영향력 또한 강해지기 시작했다.
예술후원의 시작
그런데 메디치 가문이 이렇게 성공한 이후 조반니가 보여준 주목할만한 행동이 두가지가 있다. 바로 '소박한 생활태도'를 유지한 것과 '적극적인 예술 후원'을 시작한 것이다. 두 행동은 서로 전혀 연관성이 없고 오히려 전혀 반대의 행동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조반니는 왜 이런 행동들을 한 것일까.
우선 조반니는 피렌체 전체의 경제를 좌지우지할 만큼 부가 늘어갔음에도 소박하게 옷을 입고 소박하게 먹으며 사람들이 보기에 전혀 사치를 부리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자신 뿐 아니라 자식들에게 조차 그런 생활태도를 요구했는데 피렌체의 노동자 계급 시민처럼 단촐하게 옷을 입고 행동하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아마 당시 피렌체의 길거리를 나가면 평범한 아이들과 함께 뛰놀고 있는 메디치 가문의 아이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반니는 충분한 부를 쌓았음에도 왜 그렇게까지 '소박함'을 유지 했던 것일까.
조반니의 이런 생활태도는 화려함을 싫어하는 그의 타고난 성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 그는 시민들의 질투를 경계하고 있었다. 만약 평민 출신인 메디치 가문이 성공했다고 우쭐대며 사치를 부린다면 피렌체 시민들의 시기 질투가 폭발해 메디치 가문을 적으로 돌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그가 평민 출신이었던 만큼 평민들의 생각 또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화국에서는 원래 시민들의 입김이 셀 수 밖에 없다. 실제로 피렌체에서는 시민들에 의한 소요사태가 종종 일어나곤 했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1378년 일어났떤 '촘피Ciompi의 난'이다. 이 사건은 '촘피(피렌체 양모공장의 하급 노동자)'라고 불리던 노동자들이 처우에 불만을 갖고 일으킨 반란으로 많은 시민들이 다치고 죽은 사건이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때 조반니는 18살의 청년이었으니까 폭동으로 전쟁터가 된 피렌체 거리의 모습을 조반니는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공화국에서 시민들이 지지를 얻는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생각을 이어나가보면 그가 왜 성공한 이후 열정적으로 예술을 후원했는가도 추론해 볼 수 있다. 조반니는 기베르티Ghiberti, 야코포Jacopo, 도나텔로Donatello같은 조각가들을 후원했고 건축에서는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를 선택해 후원했다. 이 외에도 조반니는 여러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앞으로 피렌체 르네상스가 부흥할 기틀을 마련하게 된다. 이 역시 예술을 사랑하는 조반니의 성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피렌체 시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예술은 일종의 '공공사업'의 성격이 있었다. 거대한 성당이나 성당 천장화와 광장의 조각들은 누구나 가서 공짜로 보고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조반니가 조각가와 건축가들을 많이 후원한 것은 이런 '광장 전시효과'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메디치 가문은 번 돈을 공공사업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는 가문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는 결과적으로 피렌체 르네상스의 부흥에 비옥한 양분을 공급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그의 '인간성에 대한 통찰'이 결과적으로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만들도록 한 것이다.
진짜 남자의 마지막
조반니는 1429년 6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조반니는 죽기 전에 자녀들에게 그가 평생 사랑했던 그의 아내 피카르다를 끝까지 존중하고 그녀의 합당한 명예를 빼앗지 말라고 충고했다. 겉은 볼품 없지만 죽을 때까지 속까지 멋있는 남자였다. 조반니는 그의 아내를 '난니나Nannina'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뜻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뜻이다. 기록에 따르면 조반니가 죽고 나서 그의 아내 피카르다는 극복할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슬픔은 그녀의 훌륭한 아들들이 충분히 위로해 주었을 것이다. 훌륭한 아버지 아래에는 훌륭한 아들들이 태어나는 법이다. 조반니와 피카르다의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는 앞으로 피렌체를 명실공히 유럽 최고의 도시로 만들며 '피렌체의 국부'로 불리게 될 것이다.
조반니는 피렌체의 르네상스가 꽃피울 수 있는 모든 바탕을 처음으로 구축해 놓은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다. 조반니는 메디치 가문의 부를 예술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가문의 전통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후 조반니의 후손들은 이 전통을 충실하게 따랐다. 인간의 역사를 바꾼 르네상스의 중심에는 볼품은 없지만 진짜 남자였던 조반니의 깊은 통찰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