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도시, 로마로
1403년, 아직 17살의 청소년이었던 도나텔로는 들뜬 마음으로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9살 많은 형 브루넬레스키가 함께 로마로 여행을 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브루넬레스키는 로마 건축을 연구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었지만 어린 동생이었던 도나텔로가 조각을 공부하도록 돕고 싶은 마음도 컸을 것이다. 나이 차이는 있었어도 둘은 '단짝'이라고 불러도 좋을만큼 사이가 좋았다. 도나텔로는 소문으로만 듣던 영원의 도시 로마를 여행한다는 마음에 여러날을 밤잠을 설치며 준비했을 것이다.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들뜬 마음으로 로마로 출발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막상 로마에 도착해서 보니 로마는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로마는 더 이상 빛나는 '영원의 도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끼와 잡초로 뒤덮인 거대한 건물의 폐허들, 벽에는 비바람에 갈려나가 해독할 수 없는 글자들로 가득할 뿐이었고 로마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콜로세움조차 앙상한 뼈대만 남아 있었다. 콜로세움은 중세를 지나는 동안 쓸만한 외벽 자재들은 사람들이 모두 떼어갔고 장식들은 파괴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을씨년스러운 로마는 그저 '영원의 도시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로마의 슬럼화 현상은 당시의 인구를 봐도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로마에 갔을 15세기 초에는 약 3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전성기 시절의 로마에는 100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살기도 했으니 격세지감이라고 해야 할까. 로마의 시민들은 특히 흑사병이 몰아친 이후 인구가 더 줄어들었고 여전히 가난에 시달리며 황폐한 유적지들 사이에서 방랑자들처럼 살고 있었다.
도나텔로는 실망했다. 특히 조각을 공부하려고 했던 도나텔로는 아름다운 고대의 조각들이 넘쳐나는 화려한 도시를 상상했지만 실제로는 부서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조각의 파편들만 굴러다닐 뿐이었던 것이다.
유물사냥꾼이냐 역술인이냐
그런데 이건 로마에 살던 시민들의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이들이 보기에는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도 '황폐해'보이는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브루넬레스키는 콩쿨에서 기베르티에게 패배한 이후 돈이 없었기 때문에 가지고 있던 작은 농장을 팔아서 겨우 로마로 온 것이었다. 그리고 도나텔로는 아직은 어린 견습생에 불과했으니 돈이 있었을리 없었다. 아마 로마에 간다고 나름 차려입은 새옷도 가는 동안 많이 더러워져 있었을 것이다. 비행기가 없던 시절의 여행은 그 자체로 몇 주가 걸리는 고행에 가깝기 때문이다.
로마 시민들은 이 두 사람을 불쾌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행색이 거지꼴인 이 두 사람은 마치 폐허 속의 원숭이들처럼 부서진 로마 건물의 잔해들을 이리저리 뛰어다닐 뿐이었다. 그러다가 뭐라도 발견하면 바나나를 발견한 원숭이처럼 기뻐하곤 했으니 마을 사람들은 이들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 이 두 사람을 '유물 사냥꾼 듀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 둘이 로마 폐허에서 동전들을 발견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인데 실제로 두 사람은 로마의 유적을 찾기 위해 땅을 파다가 운좋게 메달들이 가득 든 꽃병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메달들을 팔아서 한동안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가뜩이나 어려운 재정상태에서 왔던 듀오에게 이 메달들은 가뭄에 단비같았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마을 사람들이 이 둘을 유물사냥꾼이라고 생각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마 젊은 사람들이 딱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매일 같이 유물 사이를 뛰어다니는 두 사람은 계속 땅을 파기는 했지만 메달 사건 뒤로는 뭔가를 시장에 내다 팔지 않았다. 대신 이 두 사람은 모두 계속 뭘 끄적끄적 적기도 하고 뭔가를 그리기도 했다. 그제야 마을 사람들은 이 둘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다시 한번 추측할 수 있었다.
'아, 이 둘은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젊은 역술인들이구나!'
둘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뭔가를 자꾸 그리고 적고 하는 모습이 마치 땅의 신비한 기운을 찾아서 연구를 하는, 우리나라로 치면 '풍수지리 역술가'처럼 보였던 것이다. 서양에서 웬 풍수지리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시 서양에서도 Geomancy라는 지리에 관련된 역술이 있었다.
물론 우리는 이 두 사람이 풍수지리 역술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 로마의 시민들은 행색이 추레한 이 두 사람이 향후 피렌체를 상징하는 <브루넬레스키의 돔>과 르네상스 조각의 전성기를 알리는 <성 게오르기우스 상>을 완성할 위대한 예술가들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전히 풍부한 식탁
사람들의 시선이 어떠하든 브루넬레스키는 건축을, 그리고 도나텔로는 고대의 조각을, 각자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연구했다. 비록 폐허 더미의 로마였지만 그럼에도 로마에는 여전히 도나텔로가 먹을 것이 넘쳐났다. 땅에서 파낸 로마의 조각들은 도나텔로 입장에게는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고귀한 '교과서'였기 때문이다.
고작 땅에서 파낸 조각의 파편들이 왜 그토록 중요했는지를 이해하려면 르네상스 초기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니콜라 피사노 이후 조각가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조각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는 아직 르네상스가 전성기에 도달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도나텔로가 로마에 가서 땅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땅을 파서 나온 고대의 조각들에서 그리스 로마의 예술가들은 어떤 포즈의 조각을 만들었는지, 어떻게 근육을 묘사했는지, 또는 어떤 주제를 다루었는지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위는 로마 바티칸의 벨레데레 궁에 전시되어있어 <벨레데레 토르소>라고 부르는 로마시대의 출토된 조각이다. 비록 다 부서져 온전한 형태를 알아 볼 수는 없지만 자연스러운 몸의 뒤틀림, 살이 접힌부분의 묘사, 그리고 허벅지의 근육 등을 보면 14세기의 피렌체 조각가들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도나텔로는 이런것들을 배우려고 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로마 유학'은 절대로 헛되지 않았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을 연구하고 돌아가서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완성할 수 있었고, 도나텔로 또한 로마 여행 이후 드디어 르네상스 조각다운 조각을 완성할 수 있었다. 어쩌면 다소 무모해 보이기도 하는 두 사람의 로마 여행이 없었다면 르네상스 예술의 발전은 적어도 반세기는 뒤쳐졌을지도 모른다.
다시 피렌체로
얼마 뒤 도나텔로는 피렌체로 돌아왔고 조각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다만 아직 어렸던 도나텔로는 독립 예술가로 활동하기 전에 우선 기베르티의 공방에 들어갔다. 청동문 콩쿨에서 브루넬레스키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던 바로 그 기베르티다. 그의 공방에서 피렌체 세례당 청동문 제작을 도우며 돈도 벌고 기술도 더 익혔던 것이다. 하지만 도나텔로는 자타공인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던 기베르티 밑에서 일하면서도 기베르티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로마를 여행하면서 봤던 고대 조각들의 그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언젠가는 피렌체의 조각에 실현시키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도나텔로부터를 르네상스 조각의 전성기의 시작이라고 보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도나텔로는 당시 피렌체에 활동하던 르네상스 초기의 조각가들을 한차원 뛰어 넘는 새로운 조각을 창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조각 전성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작품은 바로 도나텔로의 대표작이기도 한 <성 게오르기우스Georgius >다.
드래곤 슬레이어Dragon Slayer 게오르기우스
도나텔로가 만들었던 <성 게오르기우스>는 사실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한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영어로는 성 죠지George, 프랑스어로는 성 조르주Georges 등 여러 가지 발음으로 불리는 이 기사는 서브 컬처에 등장하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판타지 소설나 게임 등을 보면 성에 갖힌 공주를 어느 용사가 드래곤으로 부터 구해내는 이야기를 자주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일본의 게임 슈퍼마리오는 '쿠퍼'라는 용이 사는 성에 '데이지'라는 공주가 갇혀있고 이를 용감한 기사가 구해온다는 설정이다. 물론 게임인 슈퍼마리오에서 '용감한 기사'는 '배관공'으로 대체되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스토리 라인은 바로 성 게오르기우스의 이야기에서 넘어온 것이다.
이 이야기는 4세기에 실존했던 어느 기사의 이야기다. 기독교 박해가 한참이던 시절, 리비아의 실레네라는 도시는 어느 드래곤에게 점령당해 있었다. 보통 드래곤하면 입으로 불을 뿜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이 드래곤은 입으로 독으로 된 숨결을 뿜는 드래곤이었다고 한다. 드래곤은 왕에게 하루에 양 두 마리씩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독을 내뿜어 성과 마을 전체를 파괴시키겠다며 협박했던 것이다. 왕은 처음에는 양을 바쳤지만 양이 점점 떨어져가기 시작했다. 드래곤에게 사정을 말하자 드래곤은 양 한 마리와 사람 한 명을 같이 바치라고 요구했다다. 그래서 왕은 어쩔 수 없이 제비 뽑기로 희생될 사람을 선택하기로 한다.
그런데 왕이 제비 뽑기를 했는데 하필이면 자신의 딸 공주가 다음 희생 제물로 뽑히게 되었다.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쳐야했던 왕은 고뇌에 빠졌다. 이때 용사 게오르기우스가 등장한다. 우연히 이 지역을 지나가다가 딱한 소식을 전해 들은 게오르기우스는 자신이 드래곤을 무찔러주겠다고 왕에게 제안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을 걸었는데 만약 내가 드래곤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해낸다면 이 왕국과 마을 사람들은 모두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왕은 공주를 구하기 위해 이에 동의하기로 했다.
얼마 후 공주를 제물로 바치는 행렬에 몰래 숨어든 게오르기우스는 드래곤에게 가까이 갔다. 게오르기우스는 숨을 죽이고 기회를 엿보다가 드래곤이 입을 벌려 공주를 먹으려고 하는 순간 기다란 창을 드래곤의 입에 그대로 찔러 넣었다. 그리고는 괴로워하는 드래곤의 목을 칼로 내려쳤다. 이때 드래곤을 죽인 칼이 게임에도 가끔 등장하는 명검 아스칼론Ascalon이다. 왕은 너무 기쁜 나머지 기사에게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고 했지만 용사는 하나님과 교회를 잘 섬기고 성직자들을 존경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말을 멋지게 남기고는 그대로 뒤돌아서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물론 드래곤이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이야기는 아니다. 성 게오르기우스는 실존인물이기는 하지만 역사에는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순교당했던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 순교자 게오르기우스의 이야기가 어떤 고대의 용 전승과 결합하면서 '드래곤 슬레이어'이야기로 변형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게오르기우스의 이야기는 아마 다소 지루한 삶을 살았던 중세인들에게는 엄청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오르산미켈레 교회
도나텔로가 조각한 <성 게오르기우스>는 피렌체의 중심에 있는 오르산미켈레 교회의 외벽을 장식할 조각으로 제작되었다. 오르산미켈레 교회는 피렌체의 상인들과 수공업자 길드들을 위해 봉헌된 교회인데 이 교회는 특이하게도 사각 형태의 건물 외벽에 좌우로 4개, 앞뒤로 3개씩 총 14개의 조각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래서 피렌체의 길드들은 위에 보이는 것처럼 이 14개의 공간을 각자 한개씩 맡아 각 길드의 수호성인 조각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 길드 중에는 '검과 방어구 길드Arte dei Corazzai e Spadai'가 있었는데 이들은 무기 길드인 만큼 용을 무찌른 용감한 기사였던 성 게오르기우스를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수호 성인으로 삼고 있었다. 바로 이 길드에서 도나텔로에게 성 게오르기우스의 조각을 의뢰했던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14개의 길드들이 경쟁적으로 참여하는 바람에 우리는 당시의 여러 조각가들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 놓고 비교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장하는 도시 피렌체의 활기 넘치는 길드들은 각자 최고의 조각가들을 섭외하기 위해 노력했다. 요즘으로치면 기업이 프로축구팀을 후원하는 것처럼 어느 길드의 후원을 받은 예술가가 더 뛰어난 조각을 완성하느냐가 일종의 경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도나텔로에게는 자신의 진짜 실력을 보여줄 좋은 기회였다. 마침 여기에는 친한 형 부르넬레스키를 꺾으며 승승장구하던 기베르티도 참여했다. 기베르티가 제작했던 조각은 <성 마태>였습니다.
고딕에서 르네상스로
도나텔로와 기베르티의 작품을 한번 비교해 보자. 왼쪽은 도나텔로가 만든 <성 게오르기우스>의 얼굴이고 오른쪽은 기베르티가 만든 <성 마태>의 얼굴이다. 기베르티의 작품도 물론 뛰어나지만, 얼굴의 묘사를 비교해 보면 도저히 같은 시대의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도나텔로는 다른 차원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따. 아마 기베르티도 한참 후배였던 도나텔로가 이정도까지 만들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도나텔로가 표현한 <성 게오르기우스>의 얼굴은 찡그리고 있는 표정이 마치 진짜 살아있는 사람을 보는 듯 하기 때문이다. 반면 기베르티 본인의 작품은 어딘가 모르게 뻣뻣해 보이기도 한다.
두 사람의 차이는 단순히 '재능'의 차이라고 해야할까? 이는 '재능'이 아닌 '생각'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도나텔로는 로마에서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조각가들은 자연이 가진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미술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이는 니콜라의 조각에서도 나타났던 자연주의Naturalism다. 반면 기베르티가 만든 오른쪽 성 마태를 보면 수염 양쪽이 돌돌말린 대칭으로 표현되어 있다. 수염을 왁스로 고정시키지 않고서야 저렇게 억지로 대칭일 수는 없을텐데 당시까지만 해도 미술이 일정부분 '도식화'되어있는 것이다. 중세 특유의 엄숙한 분위기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도나텔로는 이것을 깨려고 했던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도나텔로가 지오토처럼 조각에 '환영'을 창조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게오르기우스가 땅 위에 단단하게 서서 방패를 들고 오른쪽을 노려보는 모습은 마치 드래곤의 목구멍을 노려보고 있는 듯 하다. 도나텔로는 <성 게오르기우스>를 그저 사실적으로 만들기만 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게오르기우스가 지금 진짜 드래곤과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듯한 긴장감, 진짜처럼 느껴지는 가짜, 즉 '환영'을 조각에도 구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기베르티는 명실상부 피렌체 최고의 조각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도나텔로는 이미 그보다 한 발짝 더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브루넬레스키와 함께했던 도나텔로의 로마 유학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는 로마의 땅에서 파낸 유물들에서 남들이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왔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성 게오르기우스는 항상 '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이 보통이다. 용의 입에 찔러 넣은 무기가 창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세 조각에서 창을 들고 있는 기사가 있다면 성 게오르기우스라고 보면 거의 틀리지 않다. 그런데 도나텔로는 이상하게도 창이 아니라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아마도 주문자였던 길드가 '창'이 아닌 '검과 갑옷 길드'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신들이 취급하지 않는 창을 쥐고 있으면 아무래도 홍보효과가 없을 테니 방패를 들게 한 것이다. 그래서 도나텔로는 대신 창을 꼬나쥐고 있는 게오르기우스의 모습을 아래 부조로 '설명'해 놓았다. 도나텔로 입장에서는 고육지책이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방패를 들고 있는 게오르기우스의 모습이 마치 결의에 차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처럼 보여서 오히려 결과적으로는 더 좋았다는 생각이다.
언더독Underdog, 다비드(다윗)
도나텔로의 또 다른 대표작 중 하나는 <다비드(다윗)>상 이다. 이 작품은 조반니의 아들이자 메디치 가문의 새로운 수장이었던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의 의뢰로 제작된 것이다. 코시모는 그의 아버지 조반니가 예술을 통해 시민들에게 영감을 주고 싶어 했던 것처럼 자신도 예술을 통해 시민들에게 영감을 주고 싶어 했다. 그런데 코시모는 왜 굳이 '다윗'을 의뢰한 것일까?
성경에서 다윗은 전형적인 언더독Underdog(강자를 상대하는 약자)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성경에 따르면 작은 소년에 불과했던 다윗은 물맷돌을 힘차게 던져서 거인 골리앗의 머리에 명중시키는 것으로 그를 쓰러뜨렸다고 한다. 당시 피렌체는 정치적으로 보면 다윗처럼 '강자를 상대하는 약자'의 위치에 있었다. 피렌체는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신흥 도시국가이기는 했지만 규모면에서는 밀라노나 베네치아에 비해서는 아직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주변국의 끊임없이 견제가 있었는데 피렌체의 시민들은 지금껏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전쟁을 계속 치러야 했다. 그렇게 항상 강자들 사이에서 긴장을 놓지 않고 버텨야 했던 피렌체 시민들에게 코시모는 언더독의 상징 '다윗'을 통해 용기를 심어 주고자 했던 것이다. 나중에 미켈란젤로도 다윗을 만들게 되는데 그도 역시 마찬가지의 의미다.
그런데 이 작품을 처음 본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도나텔로의 대표작이자 언더독의 상징인 다윗이라고는 하지만 도나텔로가 다윗을 너무 연약하게 표현한 것이 아닐까? 게다가 예쁜 모자까지 쓰고 있으니 '용기 있는 소년 다윗' 이라기보다는 '예쁜 몸매를 가진 미소년 다윗'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우선 도나텔로가 이렇게 '나약한 다윗'으로 만든 표면적인 이유는 실제로 성경에 다윗에 대해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골리앗은 얼굴이 불그스름하고 예쁜 이 꼬마 소년을 보더니" -사무엘상 17:41~42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렇게 나약한 소년이 거인 골리앗을 이겼다는 것은 그 자체로 교훈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릴 때 다윗은 자신의 나약한 육체를 의지한 것이 아니라 '신의 도움'에 의지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 교훈이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골리앗)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 사무엘상 17:45
그러니까 다윗을 나약한 미소년으로 표현한 것은 원칙으로 틀리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도나텔로의 또 다른 목적이 숨겨져 있었다. 도나텔로가 만든 다윗은 르네상스에 등장한 '최초의 독립 누드 조각상'이다.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지금껏 수많은 조각상들이 만들어졌지만 이상하게도 아직까지 독립된 누드 조각은 등장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시대의 입장에서 보면 누드 조각이 뭐가 특별한 걸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직 기독교의 교리 아래 살아가던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성경의 인물을 그렇게 성기까지 노출한 전신 누드로 표현하는 것은 상당히 과감한 시도였다.
도나텔로가 다윗을 과감하게 미소년 누드로 표현했던 것은 아마도 자신이 그리스 로마의 미술을 부활시키려 한다는 확실한 의지를 보여주려 했던게 아닐까 싶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조각들을 떠올려 보면 비너스상이든 아폴로상이든 예외없이 인체를 나체로 표현했다는것을 알 수 있다. 고대의 예술가들은 왜 인체를 꼭 벗겨서 표현하려고 했을까. 이는 고대에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중요시하는 풍토가 있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경기나 로마 콜로세움에서의 운동경기에서 선수들은 활을 쏠때나 원반을 던질때나 레슬링을 할때나 예외없이 완전한 나체로 경기를 치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승부의 목적도 있지만 육체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목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도 우리 생각에는 방구석에서 촛불 아래 매일 책만 읽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헬스 중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소크라테스는 매일같이 레슬링을 연마했던 것으로 유명하고, 플라톤도 운동으로 다져진 넓은 어깨 때문에 별명이 '넓은'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플라톤πλατύς'이었는데 이 별명이 아예 이름으로 정착되어 버린 것이니까. 그리스 로마의 사람들은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육체의 아름다움을 매우 중시했던 것이다.
도나텔로는 아마 그런 그리스 로마의 '인체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풍토를 전신 누드의 다윗을 통해 부활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는 르네상스 조각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실제로 이후 미켈란젤로를 포함한 많은 조각가들은 도나텔로가 새운 이 이정표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도나텔로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바로 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그리스 로마의 정신을 되살린 것이다. 만약 도나텔로가 이 시기에 이런 변화를 만들어 놓지 않았다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나 <천지창조>의 아담 모두 옷을 입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가타멜라타 기마상
도나텔로는 <성 게오르기우스>와 <다비드>를 완성하면서 명실상부 피렌체 최고의 조각가로 우뚝 서게 된다. 메디치의 코시모는 유독 도나텔로를 좋아했다고 하는데 도나텔로 또한 많은 작품들을 탄생시키며 이에 보답했다.
도나텔로는 여러가지의 의미에서 르네상스 조각의 이정표를 세운 사람이다. 그가 만든 기마상 또한 이후 유럽 기마상의 원형이 되었기 때문이다. 도나텔로의 뛰어난 조각 실력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지자,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그를 초청했다. 얼마전 사망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사령관 가타멜라타의 기마상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한 것이다. 이 기마상은 가타멜라타가 사망한 베네치아 옆 도시인 파도바의 산토 광장에 세워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유럽에는 제대로 된 기마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나텔로는 4차 십자군 때 유럽으로 넘어와 베네치아의 광장에 전시되어 있던 <승리의 마차>와 고대 로마시절 가장 유명한 기마상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스의 기마상>을 참조하여 가타멜라타의 기마상을 만들었다. 지금 입장에서는 평범한 기마상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는 중세 때 사실상 잊혀져 있던 기마상을 처음으로 복원한 것이기도 하다. 이후 유럽에는 수많은 왕과 장군들의 기마상이 세워지게 되는데 도나텔로가 그 기틀을 처음 만들어 놓은 셈이다.
도나텔로는 이 기마상과 다른 몇개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10년정도 베네치아와 파도바에 머무르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베네치아와 파도바의 사람들이 도나텔로의 작품에 감동하여 어떻게든 그를 도시에 붙잡아 두려고 계속 그에게 새로운 작품을 주문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보통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아마 베네치아 사람들은 도나텔로의 예술적 에너지가 좋았던 모양이다. 그가 남아있었다면 베네치아 또한 르네상스에서 '조각의 중심지'로 발전했을지도 모를일이지만 그는 결국 10년 뒤 고향 피렌체로 돌아오게 된다.
막달레나 마리아
그런데 그렇게 혁신적인 조각을 만들며 르네상스 조각의 기틀을 만들었던 도나텔로는 후반기에 접어들어 갑자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게 된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참회하는 막달레나 마리아>다. 위에 보이는 것처럼 이 작품은 15세기의 조각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파격적이다. 막달레나 마리아는 아름다운 여인이라기보다는 노숙자 같은 느낌이고 야윈 얼굴은 너무 수척해서 차라리 좀비처럼 보이기도 한다. 누더기처럼 그녀의 몸을 덮고 있는 것은 그녀의 옷이 아니라 사실은 자르지 않고 늘어져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인데 마치 불꽃처럼 거칠게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다.
이 작품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어떤 사람들은 도나텔로의 이 작품이 '최초의 표현주의'라고 말하기도 한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나 뭉크의 <절규>보다 5백 년 앞선 표현주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여인 막달레나 마리아는 젊은 시절 지었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 마리아는 사실 두명의 마리아가 섞여 있는 마리아로 추정된다. 고대 동방의 전승 중에는 성경의 마리아 말고 '이집트의 마리아Mary of Egypt'로 알려진 또 다른 마리아가 있는데 그녀는 젊은 시절 행했던 자신의 성적인 방탕함을 회개하기 위해 사막에서 고행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막달레나 마리아와 이집트의 마리아는 둘 다 이름이 마리아였기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중세 때 두 캐릭터가 섞여버린 경우가 종종 있었다. 도나텔로도 두 명의 마리아를 섞여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두 케릭터가 합쳐진 마리아라도 대부분의 경우 마리아는 일단 아름다운 여인으로 묘사되는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도나텔로는 마리아를 이렇게 거친 모습으로 한번도 없었던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했다. 이는 지금까지의 도나텔로의 스타일과도 전혀 다르다. 그가 <다비드>에서 성경속의 용감한 소년 다윗을 에로틱한 그리스의 젊은 신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처럼 항상 대상을 아름답게 이상화 시켜서 표현하는 것이 그의 특기였으니까.
그의 다른 작품인 <시에나 대성당의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다. 세례 요한은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등장하는 광야의 선지자다. 그는 광야에서 살았기 때문에 보통은 반 나체에 나무 십자가 지팡이를 들고 있는 허름한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지금껏 저렇게 거칠게 표현한 예술가는 없었다. 세례요한도 기독교의 위대한 성인 중 한명이기 때문에 당연히 고상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이 보통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도나텔로는 생애 후반기에 갑자기 전혀 다른 느낌의 조각을 만들었다. 도나텔로는 왜 말년에 갑자기 이렇게 표현적인 조각을 만들었던 것일까.
사실 도나텔로는 젊은 시절부터 그에 관한 한 가지 나쁜 소문이 있었다.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소문이다. 사실 도나텔로뿐 아니라 당시 피렌체에는 동성애가 은근하게 유행하고 있었다. 르네상스는 그리스 로마의 정신을 깨우는 것인데, 이때 같이 깨어난 것 중 하나가 바로 동성애 문화였다. 그리스 시대에는 동성애를 이성애보다 더 '고귀한 사랑'으로 보는 특이한 풍토가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런 문화도 같이 깨어나 버린 것이다.
도나텔로는 항상 '잘생긴 꽃미남' 조수들을 고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조수들 얼굴에 화장을 시키기도 했고, 어느 날은 남자 애인으로 알려진 사람이 도망가자 그를 잡으러 북부의 페라라까지 뒤집고 다녔다는 소문도 있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남자 애인을 찾기 위해 서울에서 대전까지 찾아다닌 셈이다. 그런 풍문이 아니더라도 도나텔로는 무엇보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 메디치 가문의 후원 덕분에 부족할 것 없는 삶을 살았으니 가정을 꾸릴만했는데도 여자와의 스캔들이나 결혼설도 없었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다비드>에도 도나텔로의 동성애적 성향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다비드 상은 누가 봐도 에로틱한 느낌이 숨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소년이 다리를 살짝 꼬고 오묘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애매하게 봉긋 솟아 올라와 있는 다윗의 가슴, 그리고 골리앗의 투구의 깃털이 교묘하게 다윗의 허벅지를 간지럽히고 있는 모습을 봐도 그렇다.
도나텔로는 어쩌면 말년에 자신의 동성애에 대한 죄책감을 막달라 마리아와 세례 요한에게 투영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무리 르네상스 시대라고 해도 여전히 기독교정신이 지배하고 있는 피렌체에서 동성애는 분명 '죄'였다. 막달레나 마리아의 깊은 눈을 보면 어쩐지 지친 인간의 영혼이 보이는 듯 하다. 도나텔로가 젊은 시절 자신의 조각에서 강조했던 인간의 육체적인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삶의 마지막 문턱에 서서 언젠가 자연으로 분해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고뇌하는 듯한 모습이 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도나텔로는 나이를 먹고 젊은 시절의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이렇게 처절한 느낌의 <막달레나 마리아>를 만들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질병과 육체적 쇠퇴로 인해 삶과 죽음, 죄와 인간의 회개에 대한 관심이 커졌을테니까 말이다.
반세기 일찍 시작된 르네상스 조각의 전성기
도나텔로는 르네상스 조각이 전성기로 가는 길을 열어준 예술가다. 도나텔로 덕분에 르네상스 조각의 전성기는 회화보다 일찍 나타날 수 있었다. 르네상스 회화에서 전성기의 시작을 말한다면 아마 마사초 부터라고 해야할 텐데, 도나텔로는 마사초보다 스무살 정도 형이니까 조각의 전성기는 한 세대 정도 일찍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조각이 일찍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의 '로마 여행' 덕분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고대 로마의 조각을 보고 연구하는 것으로 도나텔로는 르네상스 조각의 전성기를 회화보다 한 세대 일찍 앞당길 수 있었다.
한편 <서양 미술사>의 저자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조각이 회화보다 빨리 발전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보기도 했다. 조각은 방법적으로 회화보다는 발전시키기 훨씬 쉽다는 것이다. 도나텔로를 예로 들어본다면 그는 땅에서 파낸 그리스 로마의 조각을 교과서 삼아 연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은 그렇게 교과서로 삼을 고대의 작품이 전혀 없었다. 회화는 조각에 비해 보존력이 약하기 때문에 1천 년의 세월 동안 버티고 남아있는 고대의 그림이 사실상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조각은 모델을 앞에 세워놓고 무작정 만들어 볼 수도 있지만 회화는 원근법, 단축법같이 입체를 평면에 욱여넣는 기술을 먼저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재료의 측면에서 봐도 조각은 돌덩어리와 망치만 있으면 되지만 회화는 붓, 캔버스 천, 물감, 마감재 등 여러가지 재료의 발전도 필요했다. 그만큼 회화의 발전은 조각보다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보존상태가 엉망인 이유는 아직 다빈치조차 여전히 안정적인 물감 제작 방법을 스스로 실험 중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