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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Apr 27. 2024

유물 사냥꾼, 도나텔로

히에로니무스 콕 '로마의 콜로세움' 에칭, 1551

영원의 도시, 로마로

1403년, 아직 17살의 청소년이었던 도나텔로는 들뜬 마음으로 여행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9살 많은 동네 형이었던 브루넬레스키가 함께 로마로 여행을 가자고 했기 때문입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영원의 도시 로마라니...! 얼마 뒤 도나텔로는 형의 손을 꼭 잡고 로마로 출발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막상 로마에 도착해서 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로마는 더 이상 빛나는 '영원의 도시'가 아니었던 것이죠. 이끼와 잡초로 뒤덮인 거대한 건물의 폐허들, 벽에는 비바람에 갈려나가 해독할 수 없는 글자들로 가득할 뿐이었고 로마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콜로세움조차 앙상한 뼈대만 남아 있었습니다. 콜로세움은 중세의 천년을 지나는 동안 쓸만한 외벽 자재들은 사람들이 모두 떼어갔고 장식들은 파괴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을씨년스러운 도시는 그저 '영원의 도시의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이죠.

로마의 슬럼화 현상은 당시의 인구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로마에 갔을 15세기에는 약 3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전성기 시절의 로마에는 100만 명에 가까운 인구가 살기도 했으니 격세지감이라고 해야 할까요. 로마의 시민들은 특히 흑사병 이후 몰아친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며 황폐한 역사 유적지들 사이에서 방랑자들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도나텔로는 실망합니다. 특히 조각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던 도나텔로는 아름다운 고대의 조각들이 넘쳐나는 화려한 도시를 상상했지만 실제로는 부서져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조각 파편들만 굴러다닐 뿐이었습니다. '황폐한 고대유적 테마파크' 비슷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유물사냥꾼이냐 역술인이냐

그런데 로마에 살던 시민들의 입장도 들어봐야 합니다. 이들이 보기에는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도 '황폐해'보이는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콩쿨에서 기베르티에게 패배하고 왔으니 돈이 별로 없었고 도나텔로도 아직 어린 견습생에 불과했습니다. 아마 로마에 간다고 나름 차려입은 옷도 오는 동안 누더기가 되어있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비행기가 없을 때라 최소 몇 주가 걸리는 여행은 그 자체로 고행이었으니까요.  

로마 시민들은 이 두 사람을 불쾌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행색이 영 거지꼴인 이 두 사람은 마치 폐허 속의 원숭이들처럼 부서진 로마 건물의 잔해들을 이리저리 뛰어다닐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뭐라도 발견하면 보석이라도 발견한 원숭이마냥 기뻐하곤 했으니 마을 사람들은 왜 그러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죠. 다만 조금 모자라 보이기는 해도 나쁜 사람들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음에 이 두 사람이 '유물 사냥꾼 듀오'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 둘이 로마 폐허에서 동전들을 발견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인데 폐허를 뒤지다가 쓸만한 유물을 발견하면 팔아서 벌어서 먹고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아마 젊은 사람들이 딱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매일 같이 유물 사이를 뛰어다니는 두 원숭이는 열심히 땅을 파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뭔가를 시장에 내다 팔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이 두 사람은 모두 계속 뭘 끄적끄적 적기도 하고 뭔가를 그리기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마을 사람들은 이 둘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다시 한번 추측해 냅니다. 


'아, 이 둘은 풍수지리를 연구하는 젊은 역술인들이구나!'


둘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뭔가를 자꾸 그리고 적고 하는 모습이 마치 땅의 신비한 기운을 찾아서 연구를 하는, 우리나라로 치면 '풍수지리 역술가'처럼 보였던 것이죠. 서양에서 웬 풍수지리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서양에서도 Geomancy라는 지리에 관련된 역술이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두 사람이 풍수지리를 연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의 시민들은 행색이 추레한 두 사람이 향후 피렌체를 상징하는 '브루넬레스키의 돔'과 '성 게오르기우스 상'을 완성할 위대한 예술가들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죠.



벨레데레 토르소, 1세기로 추정, 로마 발굴

여전히 풍부한 식탁

어쨌든 두 사람은 로마에서 각자의 분야를 열심히 연구합니다. 브루넬레스키는 건축을, 그리고 도나텔로는 고대의 조각을 연구했습니다. 비록 폐허 더미의 로마였지만 그럼에도 로마에는 여전히 도나텔로가 먹을 것이 넘쳐났습니다. 땅에서 파낸 로마의 조각들은 도나텔로 입장에게는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고귀한 '교과서'였기 때문입니다. 

고작 땅에서 파낸 조각의 파편들이 왜 그토록 중요했는지를 이해하려면 15세기 초의 르네상스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당시는 아직 르네상스가 전성기에 도달하기 전이었습니다. 지오토 같은 천재 화가들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회화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원근법, 해부학조차 이론화 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니까요. 

조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조각가들도 고대 그리스 로마의 조각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도나텔로가 로마에 가서 땅을 팠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땅을 파서 나온 조각들에서 과거의 예술가들은 어떤 포즈의 조각을 만들었는지, 어떻게 근육을 묘사했는지, 조각에 어떤 상징을 사용했는지 영감을 얻고자 했던 것이죠. 요리로 비교해 본다면 한식을 연구하는 미국의 요리사가 직접 한국에 와서 김치찌개를 먹어보며 한식을 연구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두 사람의 '로마 유학'은 절대로 헛되지 않았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판테온을 연구하고 돌아가서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완성할 수 있었고, 도나텔로 또한 로마 여행 이후 르네상스 조각다운 조각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다소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두 사람의 로마 여행이 없었다면 르네상스의 예술은 그토록 아름답게 꽃피지 못했을 것입니다


도나텔로 '성 게오르기우스' 1416-17


다시 피렌체로

얼마 뒤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로 돌아옵니다. 둘 다 어려운 시기에 로마로 갔던 것이니 아마 오래 머무를 여력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후 알려진 것처럼 두 사람은 각자 공부한 그대로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브루넬레스키는 건축가로 활동하며 '브루넬레스키의 돔'을 쌓기 시작했고, 도나텔로는 조각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다만 아직 한참 어렸던 도나텔로는 독립 예술가로 활동하기 전에 우선 기베르티의 공방에 들어갑니다. 콩쿨에서 브루넬레스키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던 바로 그 기베르티입니다. 그의 공방에서 피렌체 세례당 청동문 제작을 도왔던 것이죠. 하지만 자타공인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던 기베르티 밑에서 일하면서도 도나텔로는 기베르티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로마를 여행하면서 봤던 조각의 그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로마 조각에 살아있던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언젠가는 피렌체의 조각에 실현시키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죠. 

도나텔로를 '르네상스 조각의 이정표'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도나텔로는 르네상스 초기의 예술가들과는 전혀 다른 조각을 창조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르네상스 전성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작품은 도나텔로의 성 게오르기우스Georgius 입니다. 영어로는 성 죠지George, 프랑스어로는 성 조르주Georges 등 여러 가지 발음으로 불리는 이 남자는 여전히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현대에도 조지 부시 대통령이나 조지 클루니 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베르나트 마르토렐 '성 게오르기우스' 패널에 템페라, 1434-35


드래곤 슬레이어Dragon Slayer 게오르기우스

도나텔로가 만들었던 성 게오르기우스는 사실 우리에게는 매우 익숙한 스토리의 주인공입니다. 서브 컬처에 등장하는 '용 학살자', 즉 '드래곤 슬레이어'의 원형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게임 슈퍼마리오의 기본적인 스토리는 쿠퍼라는 용이 사는 성에 공주 데이지가 갇혀있고, 이를 용감한 기사가 구해온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슈퍼마리오에서 '용감한 기사'는 '배관공'으로 대체되어 있기는 하지만요. 이 외에도 여러 게임이나 판타지 소설은 이 플롯을 그대로 따라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스토리의 원형이 바로 이 성 게오르기우스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4세기에 실존했던 어느 기사의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박해가 한참이던 시절, 리비아의 실레네라는 도시는 어느 드래곤에게 점령당해 있었습니다. 보통 드래곤하면 불을 뿜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이 드래곤은 독을 쓰는, 그러니까 포이즌 브레스Poison breath를 뿜는 드래곤이었습니다. 드래곤은 왕에게 하루에 양 두 마리씩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독을 내뿜어 마을을 파괴시키겠다는 것이죠. 왕은 처음에는 양을 바쳤지만 양이 거의 다 떨어지자 드래곤은 양 한 마리와 사람 한 명을 같이 바치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왕은 어쩔 수 없이 제비 뽑기로 희생될 사람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비 뽑기를 하던 중 하필이면 공주가 다음 희생 제물로 뽑히게 됩니다.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이때 우리의 용사 게르기오스가 등장합니다. 우연히 이 지역을 지나가다가 딱한 소식을 들은 게오르기우스는 자신이 드래곤을 무찔러주겠다고 왕에게 제안합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을 걸었는데 만약 드래곤을 무찌르고 공주를 구한다면 이 왕국과 마을 사람들은 모두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죠.  

얼마 후 공주를 제물로 바치는 행렬에 몰래 숨어든 게오르기우스는 드래곤에게 가까이 갑니다. 게오르기우스는 숨을 죽이고 기회를 엿봅니다. 드디어 드래곤이 입을 벌려 공주를 먹으려고 하는 순간, 그는 창을 드래곤의 입에 찔러 넣습니다. 그리고는 괴로워하는 드래곤의 목을 칼로 내려칩니다. 이때 드래곤을 죽인 칼이 게임에도 가끔 등장하는 명검 아스칼론Ascalon입니다. 왕은 너무 기쁜 나머지 기사에게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하나님과 교회를 잘 섬기고 성직자들을 존경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말을 남기고 멋지게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물론 드래곤이 등장하는 이 이야기는 실제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성 게오르기우스는 실존인물이기는 하지만 역사에는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순교당했던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순교자 게오르기우스의 이야기가 어떤 고대 용 전승과 결합하면서 '드래곤 슬레이어'이야기로 변형된 모양입니다. 어쨌든 판타지적 세계관에 살았던 중세인들에게는 엄청 짜릿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오르산미켈레교회, 중앙 왼쪽이 도나텔로의 성 게오르기우스

고딕에서 르네상스로

도나텔로는 성 게오르기우스 조각은 위 보이는 것처럼 피렌체의 중심에 있는 오르산미켈레 교회의 외벽을 장식할 목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의뢰자는 피렌체의 '검과 방어구 길드Arte dei Corazzai e Spadai'였습니다. 이 교회는 피렌체의 상인들과 수공업자 길드들을 위한 교회였는데, 외부 벽을 장식할 조각을 14개의 길드가 선정되었고 그중 하나가 '검과 방어구 길드'였던 것이죠. 

재미있는 점은 14개의 길드들이 경쟁적으로 참여하는 바람에 우리는 당시 여러 조각가들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 놓고 비교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각 길드들은 각자 수소문하며 최고의 조각가들을 섭외했습니다. 여기에는 도나텔로뿐 아니라 아직까지는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던 기베르티도 참여했습니다. 




왼쪽은 도나텔로가 표현한 성 게오르기우스의 얼굴이고 오른쪽은 기베르티가 만든 성 마태의 얼굴입니다. 아마 기베르티는 도나텔로의 작품을 보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기베르티의 작품도 물론 뛰어나지만, 얼굴의 묘사를 비교해 보면 도저히 같은 시대의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도나텔로의 작품은 다른 차원의 실력을 보여주었던 것이죠. 도나텔로의 성 게오르기우스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표정이 마치 진짜 살아있는 사람을 보는 듯합니다. 반면 기베르티의 작품은 어딘가 모르게 뻣뻣해 보입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단순히 '재능'의 차이일까요? 이는 '재능'이 아닌 '생각'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도나텔로는 자연이 가진 아름다움을 미술로 그대로 재 창조 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자연주의Naturalism이라고 합니다.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이 자연이 가진 아름다움을 재현하려고 했던 것처럼 도나텔로 역시 자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죠. 오른쪽 성 마태의 수염을 보면 양쪽이 대칭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수염을 왁스로 억지로 고정시키지 않고서야 저렇게 억지로 대칭일 수는 없습니다. 쉽게 말해 '부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반면 도나텔로의 성 게오르기우스는 진짜 사람이 찡그리고 서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또 한 가지는 도나텔로가 지오토처럼 조각에 '환영'을 창조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게오르기우스가 땅 위에 단단하게 서서 방패를 들고 한쪽을 노려보는 모습은 마치 드래곤의 목구멍을 노려보고 있는 듯합니다. 도나텔로는 그저 성 게오르기우스를 만들기만 해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게오르기우스가 진짜 지금 사람들 눈앞에 나타나 드래곤과 대치하고 있는 듯한 긴장감, 즉 '가짜의 현실=환영'을 구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기베르티는 명실상부 피렌체 최고의 예술가였음에도 도나텔로는 그보다 한 발짝 더 앞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브루넬레스키와 함께했던 도나텔로의 로마 유학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로마의 땅에서 파난 유물들에서 남들이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왔던 것이죠. 

여담이지만 성 게오르기우스는 항상 '창'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이 보통입니다. 용의 입에 찔러 넣은 무기가 창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도나텔로는 이상하게도 창이 아니라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아마도 주문자였던 길드가 '검과 갑옷 길드'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들이 취급하지 않는 창을 쥐고 있으면 아무래도 홍보효과가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도나텔로는 고육지책으로 창을 꼬나쥐고 있는 게오르기우스의 모습을 아래 부조로 '설명'해 놓았습니다. 다소 웃기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어찌 보면 방패를 들고 있는 게오르기우스의 모습이 마치 결의에 차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처럼 보여서 나쁘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도나텔로 '다비드 상' 1440

언더독Underdog, 다비드(다윗)

도나텔로의 또 다른 대표작 중 하나는 다비드(다윗) 상입니다. 이 작품은 다음 장에서 다룰 메디치 가문의 수장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의 의뢰로 제작된 것입니다. 코시모는 그의 아버지 조반니가 예술을 통해 시민들에게 영감을 주고 싶어 했던 것처럼 자신도 예술을 통해 시민들에게 영감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코시모는 왜 '다윗'을 의뢰한 것일까요?

성경에서 다윗은 전형적인 언더독Underdog(강자를 상대하는 약자)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작은 소년에 불과했던 다윗은 물맷돌을 힘차게 던져서 머리에 명중시키는 것으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렸다고 합니다. 사실 당시의 피렌체는 정치적으로 그런 '강자를 상대하는 약자'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피렌체는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신흥 도시국가이기는 했지만 규모면에서는 밀라노나 베네치아에 비해서는 아직 약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변국에서는 끊임없이 견제가 있었는데 피렌체의 시민들은 어쩔 수 없이 크고 작은 전쟁을 계속 치러야 했습니다. 그렇게 항상 강자들 사이에서 긴장을 놓지 않고 버텨야 했던 피렌체 시민들에게 코시모는 언더독의 상징 '다윗'을 통해 용기를 심어 주고자 했던 것이죠. 나중에 미켈란젤로도 다윗을 만들게 되는데 역시 마찬가지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처음 본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도나텔로의 대표작이자 언더독의 상징인 다윗이라고는 하지만 도나텔로가 약해도 너무 연약해 보이는 소년으로 표현하 것이 아닐까? 게다가 예쁜 모자까지 쓰고 있으니 '용기 있는 소년 대장부 다윗' 이라기보다는 '예쁜 몸매를 가진 미소년 다윗'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우선 도나텔로가 이렇게 '나약한 다윗'으로 만든 표면적인 이유는 실제로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골리앗은 얼굴이 불그스름하고 예쁜 이 꼬마 소년을 보더니" -사무엘상 17:41~42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렇게 나약한 소년이 거인 골리앗을 이겼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릴 때 다윗은 자신의 나약한 육체를 의지한 것이 아니라 '신의 능력'에 의지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 교훈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골리앗)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 사무엘상 17:45


하지만 여기에는 도나텔로의 또 다른 목적이 숨겨져 있습니다. 도나텔로가 만든 다윗은 르네상스에 등장한 '최초의 누드 조각상'입니다. 피렌체에는 지금껏 수많은 조각상들이 등장했지만 이상하게도 아직까지 독립된 누드 조각은 등장한 적이 없었던 것이죠. 지금 시대의 입장에서 보면 누드 조각이 뭐 별거인가 싶지만, 아직 기독교의 교리가 중요했던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생각해 보면 아무리 소년시절의 다윗이라도 성경의 인물을 그렇게 덜렁거리는 전신 누드로 표현하는 것은 전례 없는 과감한 시도였습니다. 

도나텔로가 다윗을 전신 누드로 표현했던 것은 아마도 로마 유학시절 그리스 로마의 조각들을 봤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체를 완전한 나체로 표현하는 것은 그리스 로마시대의 전통인데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중요시하는 풍토가 있었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리스에서 열린 올림픽 경기나 콜로세움에서의 운동경기에서도 선수들은 나체로 경기를 치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육체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이죠. 그리고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도 우리 생각에는 방구석에서 매일 책만 읽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일든 사실 상당한 '헬스 중독'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매일같이 레슬링을 연마했던 것으로 유명하고, 플라톤도 운동으로 다져진 넓은 어깨 때문에 별명으로 '넓은'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플라톤'으로 불리다가 아예 그 별명이 이름으로 정착되어 버린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도나텔로는 그런 그리스 로마의 '인체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풍토를 전신 누드의 다윗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이후 미켈란젤로를 포함한 많은 조각가들은 도나텔로가 새운 이 이정표를 따라갑니다. '인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풍토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죠. 개인적으로 도나텔로의 최고의 업적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그리스 로마의 정신을 되살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도나텔로가 아니었다면,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이나 천지창조 모두 옷을 입고 있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도나텔로 '참회하는 막달레나', 나무, 1440


도나텔로의 사생활

도나텔로는 그렇게 혁신적인 조각을 계속 창조하며 점점 피렌체 최고의 조각가로 우뚝 서게 됩니다. 메디치의 코시모 또한 도나텔로를 밀어주었고 도나텔로는 수많은 위대한 작품들을 탄생시키며 이에 보답합니다.

그런데 도나텔로는 젊은 시절부터 그에 관한 한 가지 나쁜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것이죠. 사실 도나텔로뿐 아니라 당시 피렌체에는 동성애가 은근하게 유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르네상스는 그리스 로마의 정신을 깨우는 것이 핵심인데, 이때 같이 깨어난 것 중 하나가 바로 동성애 문화였습니다. 그리스 시대에는 오히려 동성애를 이성애보다 더 '고귀한 사랑'으로 이해하는 풍토가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런 문화도 같이 깨어난 것이죠. 

도나텔로는 항상 '잘생긴 꽃미남' 조수들을 고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조수들 얼굴에 화장을 시키기도 했고, 어느 날은 남자 애인이 도망가자 그를 잡으러 북부의 페라라까지 뒤집고 다녔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거리로 보면 서울에서 대전까지 찾아다닌 셈입니다. 그런 풍문이 아니더라도 도나텔로는 무엇보다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조력 덕분에 꽤 부유한 삶을 살았으니 가정을 꾸릴만했는데도 여자와의 스캔들이나 결혼설도 없었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다비드상에도 이미 도나텔로의 동성애적 성향이 드러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비드 상은 누가 봐도 '에로틱'한 느낌이 숨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소년이 다리를 살짝 꼬고 오묘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점, 애매하게 봉긋 솟아 올라온 가슴, 그리고 골리앗의 투구의 깃털이 교묘하게 다윗의 허벅지를 간지럽히고 있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어쩌면 도나텔로는 자신의 취향을 다비드에 몰래 반영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도나텔로는 후반기에 접어들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작품을 만들게 됩니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참회하는 막달레나 마리아'입니다. 위 보이는 것처럼 이 작품은 15세기의 조각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파격적입니다. 마리아는 여자라기보다는 마른 남자의 가까운 체형으로 표현해 놓았고 얼굴은 성녀라고 하기에는 너무 수척해서 마치 좀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누더기처럼 그녀의 몸을 덮고 있는 것은 옷이 아니라 사실은 자르지 않고 늘어져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입니다. 머리카락은 마치 불꽃처럼 거칠게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나텔로의 막달레나 마리아를 '최초의 표현주의'라고도 합니다. 뭉크의 '절규'보다 5백 년이나 앞선 표현주의라는 것이죠. 정말 그렇게 말해도 될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내용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여인 막달레나 마리아는 젊은 시절 음란했던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예술가들은 보통 그녀를 건강한 젊은 여인으로 묘사했는데, 도나텔로는 그녀를 사막에서 고행을 하는듯한 절절한 모습으로 표현해 놓았습니다. 사실 도나텔로가 그녀를 이렇게 표현한 것은 두 가지 전승이 섞였던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고대 전승 중에는 '이집트의 마리아Mary of Egypt'로 알려진 또 다른 마리아가 있는데 그녀는 젊은 시절의 방탕함을 회개하기 위해 사막에서 고행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도나텔로의 작품에서 성경의 막달레나 마리아와 이집트의 마리아라는 두 캐릭터가 섞여 있다는 것이죠. 

그럼에도 도나텔로의 표현방법은 여전히 파격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5세기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특이한 방식으로 마리아를 묘사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다소 무섭게 보이기까지 하는 마리아를 피렌체 세례당의 수녀들은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았을까요. 도나텔로는 확실히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예술가중의 예술가였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작품을 도나텔로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도나텔로가 말년에 왜 갑자기 저렇게 절절하게 마리아를 조각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도나텔로라면 다비드 상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히려 더 에로틱하게 막달라 마리아를 표현하고도 남았을 테니까요. 어쩌면 도나텔로는 자신의 동성애에 대한 죄책감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투영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무리 르네상스 시대라고 해도 여전히 기독교정신이 지배하고 있는 피렌체에서 동성애는 분명 '죄'였습니다. 도나텔로는 마지막에라도 젊은 시절의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자 하는 마음이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도나텔로 '성 게오르기우스 좌대의 부조' 1416-17


반세기 일찍 시작된 르네상스 조각의 전성기

도나텔로는 르네상스 조각이 전성기로 가는 길을 열어준 예술가입니다. 도나텔로 덕분에 르네상스의 전성기는 회화가 아닌 조각에서 먼저 나타났습니다. 회화는 조각보다 약 반세기정도 늦게 꽃을 피웠는데 도나텔로와 보티첼리와의 나이 차이를 생각해 봐도 50살 이상 차이가 나니까요. 아마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의 '엉망진창 로마 여행'이 없었다면 르네상스 조각의 전성기는 한참 늦게 시작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편 이는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필연적인 예술 발전의 과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조각은 아무래도 회화보다는 발전시키기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도나텔로는 땅에서 파낸 그리스 로마의 조각을 교과서 삼아 보고 무작정 따라 해 볼 수 있었지만 동시대의 화가들은 그렇게 교과서 삼을 고대의 작품이 없었습니다. 회화는 조각에 비해 보존력이 약하기 때문에 1천 년의 세월 동안 버티고 남아있는 그림이 거의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기술적으로도 조각은 모델을 앞에 세워놓고 무작정 만들어 보면 그만이지만 회화는 원근법, 단축법같이 입체를 평면에 욱여넣는 기술을 발전시켜야 했습니다. 시간이 더 필요했던 것이죠. 게다가 물감이나 붓 같은 도구도 여전히 더 발전시켜야 했는데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보존상태가 엉망인 이유는 아직 다빈치조차 여전히 물감 제작 방법을 스스로 실험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제부터 르네상스의 전성기는 이제 시작되었습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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