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신영 May 12. 2024

피렌체의 국부, 코시모 데 메디치


코시모와 도나텔로

화난 도나텔로

피렌체의 최고 부자였던 코시모는 도나텔로를 일찌감치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예술과 인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도나텔로가 단순히 평범한 조각가가 아닌 피렌체의 미술을 유럽 최고의 수준으로 이끌어줄 천재라는 것을 알아보았던 것이죠. 그래서 코시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도나텔로를 도와주었습니다. 

한 번은 코시모가 도나텔로에게 일감 하나를 물어다 주었습니다. 제네바의 어느 부자 상인의 두상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도나텔로 입장에서는 코시모가 상류층 사람들의 일감을 가져다주는 것이야 말로 가장 도움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코시모의 부탁이기도 하니까 도나텔로는 최선을 다해 상인의 두상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비용을 지불할 때가 되자 제노바의 상인은 갑자기 상인 특유의 잡기술을 쓰기 시작합니다. 소위 '일당 후려치기'기술입니다. 도나텔로에게 말하길, 자기가 계산해 보니까 두상 만든다고 한 달 조금 더 일하신 건데 15 플로린 금화는 너무 비싼 거 아니냐, 그 정도면 하루에 0.5 플로린 금화를 받은 셈인데 일당으로 계산하면 너무 과하다는 것이죠. 현대로 치면 0.5 플로린 금화는 대략 50만 원 정도 되니까 분명 적은 금액은 아니긴 했습니다. 하지만 도나텔로는 자신의 예술을 고작 일당으로 후려치려는 제네바 상인의 태도를 받아 들일수가 없었습니다. 도나텔로는 그 자리에서 길바닥에 두상을 던져버렸고 두상은 길거리에 산산조각이 나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덧붙입니다.


"당신은 고작 콩 가격이나 깎던 버릇을 못 버린 모양인데, 이건 조각이라고요!"


도나텔로가 냉소적인 사람이긴 했지만 그래도 고객인데 정말 화가 많이 났던 모양입니다. 상인은 갑자기 난처해졌습니다. 돈을 안 주려고 했던 건 아니었고 그냥 가격을 조금 깎고 싶었던 것뿐인데 눈앞에는 이미 박살 난 두상이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큰일이었던 건 코시모와의 관계입니다. 혹시라도 화가 난 도나텔로가 코시모에게 이 일을 일러바치면 코시모와의 관계가 나빠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되면 피렌체에서의 장사에도 지장이 생길지 모를 일입니다. 순간 겁에 질린 제네바 상인은 돈을 두배로 지불할 테니 얼른 화 푸시고 다시 조각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도나텔로는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떠나버렸습니다. 

나중에 소식을 들은 코시모는 그래도 어떻게든 중재를 해 보려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미 자존심이 상한 도나텔로는 절대로 일을 맡지 않겠다고 단언합니다. 코시모는 언젠가 예술가들에 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들을 하늘의 별과 같은 영혼을 가진 비범한 천재들로 대접해야지, 짐을 싣고 다니는 짐승처럼 대해서는 안 된다니까요."


어쩌면 코시모도 속으로는 내가 그래도 피렌체 최고의 부잔데 예술가 한 명한테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마음도 들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코시모는 그렇게 예술가를 항상 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난다

사실 코시모는 예술가에게만 따듯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코시모는 피렌체 최고의 권력자임에도 시민 누구에게나 예의 바른 사람이었습니다. 시내 거리를 돌아다닐 때도 항상 수수한 복장으로 다녔고 길에서 노인이라도 마주치면 길을 우선 양보했습니다. 공직에 있을 때도 고위직 공무원들에게는 항상 예우를 갖췄고, 누군가 사업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거나 개인적인 일을 상담할 때도 항상 신중하게 경청하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코시모의 이런 예의 바른 태도는 아버지 조반니의 철저한 교육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좋은 밭에 훌륭한 품종을 심었다면 좋은 나무가 자라나기 마련입니다. 아버지 조반니는 코시모가 어릴 적부터 이미 엄청난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소박한 옷을 입고 다니도록 교육했는데 그냥 말만 한 게 아니라 아예 복장을 검사를 했다고 합니다. 조반니는 코시모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민들이 평안하도록 항상 노력해야 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도 친절해라. 법을 어긴 사람은 법으로 망할 테니 그런 일에 처음부터 휘말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내가 죽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나쁜 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도록 해라."


하지만 그렇게 어릴 적부터 자갈 없는 꽃길만을 살았을 것 같은 코시모지만, 사실 그가 피렌체 최고의 지위에 올라가게 된 것은 '광야'를 거치고 나서였습니다. 코시모는 죽을뻔한 위기를 겪고 나서야 최고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죠. 어찌 보면 코시모 죽지 않기 위해 권력을 잡았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경제에서 정치로

코시모의 첫 등장은 1414년입니다. 양아치 교황 발다사레 코사가 최후의 결전을 벌이러 콘스탄스 공의회로 떠나는 길에 동행했던 메디치 측 사람이 바로 코시모였습니다. 말을 탄 25살의 청년 코시모는 아마 아버지의 명에 따라 발다사레 코사를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영원한 교황을 꿈꾸었던 반 건달 발다사레 코사는 이 공의회에서 최종적으로 폐위되고 감방에 갇히게 됩니다. 그렇게 발다사레 코사의 인생은 여기서 끝나버리지만, 아직 젊은 청년이었던 코시모에게는 새로운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이 여행에서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귀중한 경험들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콘스탄스 공의회는 당시 유럽 최고의 이슈였던 '교황 선출'을 결정하는 자리였습니다. 때문에 교황 후보들, 신성로마제국 황제, 그리고 프랑스, 영국,  폴란드, 헝가리, 덴마크의 대사들, 29명의 추기경, 수백명의 대수도원장과 대주교들, 수많은 법학 신학 박사들, 쉽게 말해 당시 유럽을 주무르던 최고의 정치인들이 한 번에 모이는 자리였던 것이죠. 그리고 당시 공의회의 폭풍 속에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발다사레 코사였으니 그런 인물의 동행으로 온 코시모는 아마 남들보다 주목을 받았을 것입니다. 

비록 공의회의 결과는 메디치가에게 씁쓸한 결과였지만, 코시모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기회'를 얻은 것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유력자들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요. 코시모는 공의회가 끝난 뒤에도 바로 피렌체로 돌아가지 않고 2년동안 독일과 프랑스의 거의 모든 지역을 여행하며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결국 이때 쌓아 올린 인맥과 경험은 은행이 확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아직은 이탈리아에 한정되어 있던 메디치가의 은행은 이후 런던 , 피사 , 아비뇽 , 브뤼헤 , 밀라노, 독일의 뤼베크까지 전 유럽으로 확장하게 된 것이죠. 그렇게 메디치 가문은 조반니 이후 코시모 대에 이르면서 더 성장하게 됩니다. 



메디치 가문의 문장, 베키오궁과 피렌체 길거리


음해

하지만 피렌체를 주름잡던 기존의 귀족가문들의 입장에서는 평민 주제에 급성장하고 있는 메디치 가문이 영 꼴사나웠습니다. 자기들은 고작 피렌체에서 아웅다웅하고 있는 동안 어린놈의 자식이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거물들을 만나고 다녔으니까요. 게다가 진심인지 가식인지 계속 시민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친절하고 겸손한 모습이 점점 더 꼴 보기 싫었던 것이죠. 

당시 피렌체에서 영향력 있는 가문은 알비치, 스트로치, 파치 가문이었는데, 이 가문들은 피렌체에서 급성장하는 메디치 가문이 언젠가 자신들을 제치고 피렌체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코시모를 '제거'할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먼저 행동을 취하기 시작한 가문은 알비치 가문이었습니다. 알비치 가문의 수장이었던 리날도Rinaldo degli Albizzi는 우선 사람들에게 메디치 가문에 관한 이상한 소문을 내기 시작합니다. 


"코시모는 사제들의 화장실까지 메디치의 공으로 장식했다."


여기서 말하는 '공'은 메디치가문 문장의 '붉은 공'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메디치 가문이 공공 건축과 미술에 후원하면서 도시의 곳곳을 메디치 가문의 장식으로 도배하고 있는데, 이게 그냥 하는 게 아니다, 메디치 가문은 다른 나라의 왕들이 하는 것처럼 메디치 가문의 문장을 전 피렌체에 도배하고는 언젠가 자신들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소문을 냈던 것이죠. 선동은 그렇게 시작되기 마련입니다. 조반니와 코시모는 선의로 도시의 공공사업을 도운 것이고 그래도 생색은 내야하지 문양을 박은 것이었지만 이게 갑자기 독재의 표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서구권에서 '공'은 남성의 '고환'을 저속하게 부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코시모가 사제들의 화장실에까지 '코시모의 불알'을 장식했다."는 중의적 의미도 됩니다. 아마 리날도는 지저분한 농담을 섞어 메디치의 깨끗한 이미지에도 타격을 입히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리날도는 다른 귀족들도 만나고 돌아다니면서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메디치 가문이 점점 성장하고 있는데, 어쩐지 불안하다, 시민들도 메디치가문을 좋아하는데, 언젠가 우리 모두 메디치 가문에게 먹혀버릴 것이다. 리날도는 그중 과다니Guadagni 은행 가문의 베르나르도Bernardo에게 접근합니다. 베르나르도는 피렌체 공화국의 총리에 해당하는 곤팔로니에Gonfalonier of Justice에 출마하려고 했는데 빚 때문에 출마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리날도는 대신 빚을 다 갚아줄 테니 당선되면 코시모를 같이 '제거'하자고 합의합니다. 그리고 베르나르도는 곤팔로니에에 당선됩니다. 


추방

1433년, 상황을 엿보고 있던 리날도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옵니다. 피렌체에 역병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올라오자 코시모와 메디치 가문 사람들이 베로나에 있는 별장으로 잠시 피난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 없는 지금이야 말로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리날도는 재빨리 피렌체의 의회를 소집합니다. 

얼마 뒤, 시골에서 쉬고 있는 코시모에게 피렌체 정부로부터 한 장의 편지가 날아옵니다. 중요하게 논의할 일이 있으니 얼른 피렌체로 돌아오라는 것이죠. 편지를 수상하게 생각한 가족들은 코시모에게 피렌체로 가지 말라고 한사코 말렸습니다. 하지만 코시모는


"그래도 나는 정부에 순종해야 한다."


고 말하면서 피렌체로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코시모가 갖혀있던 베키오 궁전의 탑


피렌체에 도착한 코시모. 하지만 피렌체로 돌아온 코시모를 기다리는 것은 회의가 아닌 근위병들이었습니다. 항변 한번 못해보고 코시모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잡혀서 피렌체 베키오 궁전의 종탑에 있는 감옥에 갇혀 버립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음식이 들어왔습니다. 코시모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혹시 리날도가 독약을 탔을까 봐 걱정했던 것이죠. 코시모는 이미 눈이 돌아간 리날도가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리날도와 일당들은 진짜로 코시모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계속 베르나르도에게 코시모를 감옥에 가둘게 아니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죠. 하지만 메디치 가문은 워낙 시민들의 지지가 높았기 때문에 베르나르도도 차마 사형 선고까지 내리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10년 동안 메디치 가문을 도시에서 추방하기로 최종 합의합니다. 코시모는 그렇게 베네치아로 추방됩니다. 리날도는 먹잇감을 놓친 하이에나처럼 입맛을 다셨지만 별 수 없었습니다. 어쨌든 메디치 가문은 그렇게 피렌체에서 쫒겨납니다.


금의환향

알비치 가문은 메디치를 물리치고 피렌체 정부를 장악합니다. 하지만 리날도는 권모술수에는 강했지만 통치에는 무능했던 모양입니다. 코시모와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떠나자 피렌체의 경제는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메디치 가문과 함께 메디치의 자본도 함께 빠져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리날도의 정부는 세금을 올릴 수밖에 없었고 여전히 역병이 창궐중인 도시에는 점점 더 음울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리날도의 통치가 시작되고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시민들 뿐 아니라 이제는 리날도에 협조했던 귀족들마저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도까지 경제가 나빠질지는 몰랐던 것이죠. 분위기가 나빠진 것을 감지한 리날도는 오히려 더 강경하게 나가기 시작합니다. 의회에 남은 중립적인 사람들 마저 전부 없애버리고 측근들을 배치한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의회를 장악한다 한들 피렌체의 경기가 다시 좋아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시민들과 귀족들이 보기에 이렇게 상대 권력을 전부 내치고 자기 측근으로 채우는 행위자체가 오히려 독재에 더 가까워 보였습니다. 리날도는 '코시모가 왕이 되려 한다'라고 선동하고 내쫓은 것인데 오히려 본인이 더 왕같이 행동 하고 있었던 것이죠. 피렌체는 누가 뭐라해도 자랑스러운 공화국Republic이었습니다. 피렌체 시민들은 누구보다 시민중심의 공화국에 자부심이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리날도와 알비치 가문의 운명은 1434년 여름에 결정됩니다. 정치를 못했으면 싸움이라도 잘했어야 하는데, 알비치가 이끄는 피렌체 정부의 군대는 이몰라 전투에서 밀라노에 크게 패배한 것이죠. 경제도 망치고 국방도 망친 지도자에게 미래란 없습니다. 여론이 나빠지자 '친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이 조금씩 의회를 장악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이번에는 거꾸로 리날도는 소환합니다.

리날도는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자신도 코시모처럼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죠. 갈때까지 간 리날도는 군대를 일으켜 베키오 궁전을 무력으로 탈취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낌새를 이미 알아챈 의회는 그보다 한 발 앞서 병력을 소집합니다. 자칫 내전이 벌어질 상황까지 온 것이죠.

이때 교황이었던 에우제니우스 4세Eugenius IV가 중재를 시도합니다. 교황은 가능하면 피렌체에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결국 교황의 개입을 통해 알비치 가문과 그에 협력했던 사람들이 거꾸로 피렌체에서 추방되는 것으로 합의되었습니다. 그리고 거꾸로 코시모에게 내려진 추방형은 당연히 철회되었습니다. 1434년 9월 28일, 코시모 데 메디치는 그렇게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고 1년만에 피렌체로 돌아옵니다.


위선자의 정치

코시모는 분명 승리했지만 지난 1년 동안 한 가지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이러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1433년 리날도가 장악한 의회에서 추방이 아닌 사형선고를 내렸었다면? 만약 내가 별생각 없이 감옥에서 주는 음식을 날름 받아먹기라도 했었다면? 아무리 세상 어마어마한 돈을 가졌다고 해도 권력이 없으면 종이인형처럼 찢겨져버릴 수 있는 것이 정치의 현실이었던 것이죠. 

그는 살기 위해서라도 권력을 잡아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권력을 잡아야 할까요, 바로 최고 권력자인 곤팔로니에로에 출마해서 권력을 잡으면 됐을까요? 코시모는 그렇게 간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코시모가 콘팔로니에에 당선된다고 해도, 분명 어디선가 평민 출신인 자신을 무시하는 또 다른 정적들이 스멀스멀 깨어나 자신을 죽이려 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시민들도 코시모가 너무 갑자기 정치 전면에 나서면, 리날도의 선동처럼 정말로 '왕'이 되려 한다고 의심할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하지만 피렌체 시민들은 공화국에 자부심이 상당히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권력 기반인 '시민들'의 지지까지 잃게 됩니다. 코시모는 귀족이든 시민이든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질투는 물을 주면 안 되는 식물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민들과 귀족들이 자신이 가진 돈과 권력을 질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코시모는 '위선자'가 되기로 결정합니다. 위선자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입니다. 코시모는 겉으로는 권력이 없는 척을 하지만 실제로는 뒤에서는 완벽하게 모든 것을 통제하는, 이른바 '참주'가 되기로 한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학창 시절 반에서 반장선거에 직접 참여 하지는 않지만 뒤에서 반장과 반 전체의 여론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장막 뒤의 군주, '참주僭主'가 되기로 결정한 것이죠.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역시 돈이었습니다. 그는 돈으로 사람들을 매수해 지방 의회와 피렌체의 최고 의결기관인 시뇨리아에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이 선택되도록 조정했습니다. 자신은 나서지 않으면서 뒤에서 사람들을 통제한 것이죠. 물론 코시모도 현대의 총리에 해당하는 곤팔로니에에 당선된적이 있지만 30년의 통치 기간동안 고작 6개월밖에 되지 않습니다. 높은 고위직은 손사래를 치면서 안 하겠다고 했지만 뒤에서는 바쁘게 움직이면서 모든 피렌체의 정치를 조정한 것입니다. 

말이 쉽지 이런 식의 정치는 엄청난 정치력과 기술을 필요로 합니다. 시민들과 귀족들이 코시모에게 통치 받지 않는다고 믿게 만들면서 통치해야 했으니까요. 공화국을 자랑스러워하는 시민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교묘한 정치를 했던 것이죠. 교황 비오 2세는 이런 코시모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치적 문제가 생기면 모든 문제는 코시모의 집으로 모여든다. 그선택하는 사람이 의회를 움직이그가 결국 화와 전쟁을 결정한다. 그는 왕이라는 이름을 빼고는 모든 면에서 왕이었다."


코시모는 '독재'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분명히 '독재'였던, 이상한 형태의 정치 형태를 자그마치 30년이나 유지했습니다. 그 기간 중에도 수많은 반대와 분란이 있었지만, 코시모는 고도의 정치기술로 피렌체를 평화롭게 통치했습니다. 

코시모의 정치는 너무나도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그를 그저 '뛰어난 시민'으로 생각했고 그가 독재자라는 것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피렌체의 한 작가는 그를 평가할 때 "전 세계에서 '위대한 상인'으로 불렸던 코시모 데 메디치"라고 평 했는데, 이 말은 같은 시대를 살던 작가들조차도 그를 피렌체의 정치인이 아니라 그저 '돈이 엄청나게 많은 유명한 상인'정도로 인식했다는 것이죠.

거꾸로 그가 얼마나 완벽하게 피렌체를 장악했는지는 그가 죽자마자 피렌체에 폭풍 같은 혼란이 몰려왔던 것을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설명할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때까지도 그 폭풍은 휘몰아칩니다.


산 마르코 성당의 공공 도서관


인문학의 터, 도서관 기증

코시모가 이런 방식으로 피렌체를 장기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 인문학적 소양이 깊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코시모는 최고 수준의 라틴어를 구사했고 그리스 로마의 역사와 철학에 관심이 많아 학자들과 대등한 수준에서 토론 했다고 합니다. 돈 많은 인문학 덕후라고 해야 할까요. 아마 코시모는 고대에 심심치 않게 등장했던 '참주정'의 역사를 알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스의 페이시스트라토스나 로마의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같은 정치인들도 한동안 아무런 직책 없이 로마 제국을 통치하기도 했으니까요. 

1444년, 코시모가 피렌체를 통치하기 시작한 지 10년째 되는 해입니다. 코시모는 산 마르코의 수도원의 내부에 피렌체 최초의 공공 도서관을 엽니다. 이 도서관은 앞으로 피렌체에 르네상스가 더 활짝 꽃피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가 했던 것처럼 무작정 로마로 쳐들어가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의 문헌과 사본들을 모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것이죠.

무엇보다 이렇게 상류층이 도서관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기증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 로마적인 것'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귀족들은 자신들과 노예들의 차이는 단순히 신분차이가 아닌, 사회적 의무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유한 귀족들은 공공건물이나 공공 토목공사를 통해 사회에 환원하려고 했습니다. 브루넬레스키가 연구했던 판테온만 해도 로마 정치인이자 군인이었던 아그리파에 의해 기증된 건물이니까요.

도서관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건물이라는 '하드웨어'보다는 그 안의 수많은 책들, 즉 '소프트 웨어'입니다. 때문에 코시모는 공공 도서관을 완성하기 위해 학자이자 고문서 수집가였던 니콜라 니콜리에게 많은 양의 책들을 사들였습니다. 니콜라라는 사람은 고문서 수집이라는 괴짜 같은 취미 덕에 6,000 플로린 금화, 현대로 치면 60억 정도의 빚을 지고 있었는데 코시모는 그 빚을 청산 해 주는 대가로 800개 사본 컬렉션을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빚쟁이들에 의해 공중분해될 뻔한 책들을 모두 모아 공공 도서관에 기증한 것이죠. 그 이후에도 코시모는 시리아, 이집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유럽 도시로 사람을 보내 중요한 책들을 사 모으도록 했습니다. 


카레기의 빌라 메디치


그리고 1462년, 코시모는 카레기의 빌라 메디치에서 '플라톤 아카데미'를 엽니다. 코시모는 신플라톤주의자였던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를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신플라톤주의는 중세에 잊혀졌던 플라톤의 철학을 다시 공부하자는 운동입니다. 코시모는 어느 날 그에게 말합니다.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자유롭게 플라톤 철학을 연구하라고. 코시모는 마르실리오에게 집과 농장을 주어 돈 걱정 없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후원했습니다. 피렌체에 이른바 '신플라톤주의'가 꽃 피는 순간입니다. 나중에 살펴볼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도 결국 그리스 신화를 그린 것인데, 이 역시 이때 피어오른 신프라톤주의의 영향아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철저하게 이성적이기만 할 것 같은 코시모가 무엇보다 관심이 많았던 것은 플라톤의 철학에서도 신비주의 부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문학을 부활시키고자 했던 코시모가 실제로 가장 열심히 읽었던 책은 철학책이 아닌 성경이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항상 영적인 세계에 관심이 많은 동물인 듯합니다.


예술의 후원자

코시모는 활동을 시작한 후 대략 60만 플로린 금화를 문화 예술 부흥에 투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대충 계산해 봐도 6000억 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는 예술 후원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모든 후원은 나에게 최고의 만족을 주었는데 왜냐하면 이는 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 뿐 아니라 나에게도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50년간 나는 돈을 벌고 쓰기만 했는데 확실히 쓰는 게 버는 것보다는 즐거웠습니다."


돈 쓰는 거야 당연히 즐거운건데 쓸 돈이 없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쩐지 얄미운 코시모지만, 어쨌든 그는 그렇게 벌어들인 돈을 허투루 쓰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문화와 예술에 투자한 돈들은 피렌체의 문화예술에 부흥을 일으키며 지금까지 전 세계인들이 즐길 수 있는 유산으로 남아있으니까요.

사실 코시모가 이렇게 예술에 투자한 것은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출신 성분이 아예 다르면 부러움을 갖지 않지만, 같은 출신인데 성공한 사람을 보면 부러움을 넘어 질투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평민 출신이었던 코시모는 예술을 후원하는 것으로 민심을 사고 싶어 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돈들은 여러분 모두가 즐기는 예술과 공공사업에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죠. 미술이야 말로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이니까요. 

그 외에도 코시모는 통치기간 동안 여러 축제를 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람들은 무언가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위대한 사람들의 성대한 장례식, 교황 같이 유명한 사람들의 방문, 그리고 그들을 기리기 위한 행사, 행렬, 무도회, 짐승 쇼 등 대규모 공공 축제가 기획된 것은 특히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심심한 삶을 살아가던 중세의 피렌체 사람들에게 이런 멋진 '쇼'를 즐기는 것만큼 즐거운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모든 축제는 공짜였으니까요. 


변함없는 두 사람

코시모는 어느 날 도나텔로가 허술한 옷차림을 하고 다니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도나텔로는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였고 코시모의 충분한 후원도 받고 있었으니 아마 돈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도 허름하게 입고 다녔던 것이죠. 어느 축제날, 코시모는 조용히 도나텔로에게 고운 옷 한 벌과 붉은색 모자가 달린 외투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래도 축제인데 예쁘게 입고 즐기라는 코시모의 배려였습니다. 하지만 도나텔로는 며칠 입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자신이 원래 입던 대로 추레하게 입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도나텔로는 그렇게 고급스러운 붉은 외투는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이것은 도나텔로의 자격지심일 수도 있고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노동자 집안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상류층에 대한 반항심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랬는지 도나텔로는 코시모가 연결시켜 준 귀족이나 교회의 상류층 사람들을 대할 때도 불친절할 뿐 아니라 작업 기한도 마음대로 늦추었습니다. 프라토 대성당에서는 하도 도나텔로가 기한을 늦추니까 계절별로 선물까지 보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코시모를 통해서야 작품을 제시간에 좀 완성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고, 코시모는 피렌체의 바쁜 정무 와중에도 도나텔로의 문제를 해결해주느라 진땀을 빼기도 했습니다.

1454년 도나텔로가 시에나에 갔다가 피렌체로 돌아오자 코시모는 도나텔로에게 농장을 주어 남은 여생을 편안히 보내도록 배려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똑같이 늙어가는 처지였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코시모는 도나텔로를 챙겨주고 싶었던 것이죠. 도나텔로는 이제 굶어 죽는 일은 없겠다면서 기뻐했지만 기쁨은 고작 1년이 가지 않았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농사일은 신경 쓸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평생 돌을 쪼던 사람이 지붕의 비둘기 똥을 치우고 소들을 돌보고 폭풍이 왔다 가면 포도나무 가지를 정리하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없었습니다. 도나텔로는 나는 이제 지쳤다고,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낫겠다고 한탄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식을 들을 코시모는 그의 아들 피에로를 통해 도나텔로에게 농장 대신 정기적으로 그냥 돈을 주기로 결정합니다. 그제야 도나텔로는 만족했다고 합니다. 예술가에게 코시모보다 더 좋은 후원자가 과연 있을까요?



산 로렌초 성당의 코시모 데 메디치의 무덤


국부 코시모

30년간 피렌체를 지배했던 코시모에게도 결국 마지막은 찾아옵니다. 코시모는 삶이 끝날 무렵 매우 조용해졌고 때로는 몇 시간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생각만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코시모에게 당신 요즘 왜 이렇게 조용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 우리가 시골집에 갈 때 당신은 이사 준비한다고 보름 동안이나 정신없이 보냈잖소. 나도 이제 곧 이 삶에서 저 삶으로 이사 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생각할 것이 많지 않겠소?" 


코시모 다운 품격있는 위트가 묻어 나오는 말입니다. 코시모는 자신의 인생이 충분히 길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실 때 가는 것이 만족스럽다고 덧붙였습니다. 코시모는 얼마 뒤 깨끗한 옷을 갖춰 입고 산 로렌초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신부가 신앙고백을 요청 하자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직접 고백한 뒤, 지나온 삶의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구한 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열심으로 성찬을 받았습니다.

1464년 코시모는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그의 아들 피에로Piero가 이어받습니다. 코시모는 그의 장례를 조용히 치르길 바랐지만 온 도시에서 그의 장례식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시끌벅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피렌체의 최고 의결기관 시뇨리아는 피렌체에 30년간 평화를 가져다준 코시모를 기려, Pater Patriae, 조국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그에게 수여했습니다. 그렇게 국부國父 코시모는 성 로렌조San Lorenzo에 안치되었습니다.

1466년 도나텔로도 그를 따라 세상을 떠납니다. 코시모는 생전에 도나텔로가 그의 곁에 묻히도록 배려했습니다. 죽어서까지 도나텔로를 챙겨주었던 코시모였습니다. 그래서 도나텔로는 지금도 코시모와 함께 산 로렌조 대성당에 나란히 묻혀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물 사냥꾼, 도나텔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