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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May 12. 2024

피렌체의 국부, 코시모 데 메디치


코시모와 도나텔로

화난 도나텔로

조반니가 메디치 가문을 일으킨 이후 조반니의 후계자로 결정된 사람은 그의 첫째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였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예술 후원에도 열심이었는데 코시모가 눈여겨 보고 있던 예술가는 단연 도나텔로였다. 아버지보다 더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도나텔로가 피렌체의 미술을 유럽 최고의 수준으로 이끌어줄 천재라는 것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코시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도나텔로를 도와주려고 했다. 

한 번은 코시모가 도나텔로에게 일감 하나를 물어다 준 적이 있었다. 제노바의 어느 부자 상인의 실물 사이즈 두상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도나텔로 입장에서는 코시모가 상류층 사람들의 주문을 열심히 물어다주는 것이야 말로 가장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제노바의 상인은 멀리 가야하니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는데 도나텔로는 주문 받은대로 최선을 다해 제노바 상인의 두상을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 막상 비용을 지불할 때가 되자 제노바의 상인은 갑자기 상인 특유의 잡기술을 쓰기 시작했다. 소위 '일당 후려치기'기술이다. 상인은 말하길, 자기가 계산해 보니까 두상 만든다고 한 달 조금 더 일하신 건데 하루에 대략 0.5 플로린 금화를 받는 셈이니 너무 비싼거 아니냐고 주장했다. 현대로 치면 0.5 플로린 금화는 대략 50만 원 정도 되니까 분명 일당으로 적은 금액은 아니긴 했지만 도나텔로는 자신의 예술을 고작 일당으로 후려치려는 제노바 상인의 태도를 받아 들일수가 없었다. 분노한 도나텔로는 그 자리에서 길바닥에 두상을 던져버렸고 두상은 길거리에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당신은 고작 콩 가격이나 깎던 버릇을 못 버린 모양인데, 이건 조각입니다!"


상인은 갑자기 난처해졌다. 돈을 안 주려고 했던 건 아니었고 자기가 늘 하던데로 그냥 가격을 조금 깎고 싶었던 것뿐인데 눈앞에는 이미 박살 난 두상이 널브러져 있었다. 무엇보다 큰일이었던 건 코시모와의 관계였다. 이 일로 혹시라도 코시모와의 관계가 나빠지면 피렌체에서의 장사에도 지장이 생길지 모를 일이었다. 순간 겁에 질린 제네바 상인은 돈을 두배로 지불할 테니 얼른 화 푸시고 다시 조각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도나텔로는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이 일을 두고 코시모는 그래도 어떻게든 중재를 해 보려고 했지만 이미 자존심이 상한 도나텔로는 그사람의 일은 맡지 않겠다고 단언했다. 코시모는 언젠가 예술가들에 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들을 하늘의 별과 같은 영혼을 가진 비범한 천재들로 대접해야지, 짐을 싣고 다니는 짐승처럼 대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코시모도 기껏 일감을 물어다줬더니 박살을 내버리는 도나텔로가 내심 피곤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코시모는 이후에도 변치않고 도나텔로를 지원해 주었다. 그의 예술가를 대우해주려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난다

사실 코시모는 예술가에게만 따듯한 사람이 아니었다. 코시모는 피렌체 최고의 권력자임에도 시민 누구에게나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시내 거리를 돌아다닐 때도 항상 수수한 복장으로 다녔고 길에서 노인이라도 마주치면 길을 우선 양보했다. 공직에 있을 때도 고위직 공무원들에게는 항상 예우를 갖췄고, 누군가 사업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거나 개인적인 일을 상담하면 항상 신중하게 경청하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콩 심은 데 콩 난다는 속담도 있지만, 코시모의 이런 예의 바른 태도는 아버지 조반니의 철저한 교육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반니는 아들 코시모가 어릴 적부터 부자임을 티내지말고 가장 소박한 옷을 입고 다니도록 교육했는데 그냥 말만 한 게 아니라 아예 평소에도 복장 검사를 했다고 한다. 조반니는 아들 코시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시민들이 평안하도록 항상 노력해야 하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도 친절해라. 법을 어긴 사람은 법으로 망할 테니 그런 일에 처음부터 휘말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내가 죽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나쁜 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도록 해라."


그런데 이렇게만 보면 좋은 부모덕에 어릴 적부터 가시없는 꽃길만을 걸었을 것처럼 보이는 코시모지만, 사실 그가 피렌체 최고의 지위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도움 뿐 아니라 어려운 '광야'의 시절을 거치며 스스로 시련을 이겨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그냥 얻어지는 권력은 없는 법이다. 코시모는 정말로 목숨을 걸고 싸운 끝에 권력을 쟁취할 수 있었다. 


경제에서 정치로

코시모의 첫 등장은 1414년이다. 해적 교황 발다사레 코사가 최후의 선택을 받기위해 콘스탄스 공의회로 떠나는 길에 동행했던 메디치 측 사람이 바로 코시모였다. 말을 탄 25살의 청년 코시모는 아마 아버지 조반니로부터 발다사레 코사를 잘 보좌하라는 역할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유일한 교황을 꿈꾸었던 반 건달 발다사레 코사는 이 공의회에서 최종적으로 폐위되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렇게 발다사레 코사의 인생은 여기서 끝나버리지만, 아직 젊은 청년이었던 코시모에게는 새로운 시작이기도 했다. 이 여행에서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귀중한 경험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콘스탄스 공의회는 당시 유럽 최고의 이슈였던 '교황 선출'을 결정하는 자리였다. 때문에 교황 후보들, 신성로마제국 황제, 그리고 프랑스, 영국,  폴란드, 헝가리, 덴마크의 대사들, 29명의 추기경, 수백명의 대수도원장과 대주교들, 수많은 법학 신학 박사들, 쉽게 말해 당시 유럽을 주무르던 최고의 정치인들이 한 번에 모이는 자리였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공의회에서 폭풍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발다사레 코사였으니 그런 인물의 동행으로 온 코시모는 아마 남들보다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비록 이 공의회는 메디치가에게 씁쓸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지만, 코시모 입장에서는 전혀 다른 '기회'를 얻은 것이기도 했다. 수많은 유럽 최고의 유력자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코시모는 공의회가 끝난 뒤에도 바로 피렌체로 돌아가지 않고 2년동안 독일과 프랑스의 거의 모든 지역을 여행하며 사람들을 만났다. 결국 이때 쌓아 올린 인맥과 경험은 메디치 은행이 전 유럽으로 확장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아직은 피렌체 주변에 한정되어 있던 메디치의 은행은 이후 런던, 피사, 아비뇽, 브뤼헤, 밀라노, 독일의 뤼베크까지 전 유럽으로 확장하게 된다. 그렇게 메디치 가문은 조반니 이후 코시모 대에 이르면서 더 빠르게 성장하게 된다. 



메디치 가문의 문장, 베키오궁과 피렌체 길거리


음해

하지만 피렌체를 주름잡던 기존의 귀족가문들의 입장에서 보면 평민 주제에 급성장하고 있는 메디치 가문은 여러모로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자기들은 고작 피렌체에서 아웅다웅하고 있는 동안 조반니의 아들 코시모는 어린나이에 벌써 전 유럽을 돌아다니며 교황과 왕을 비롯한 유럽 최고의 거물들을 만나고 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그리고 진심인지 가식인지 메디치 가문 사람들은 연신 시민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겸손한 모습까지 보였으니 점점 더 꼴 보기 싫었던 것이다. 

불안함이 해소되지 않으면 공포로 바뀌기 마련이다. 당시 피렌체에서 영향력 있는 가문은 알비치, 스트로치, 파치 가문이었는데, 이 가문들은 피렌체에서 급성장하는 메디치 가문이 언젠가 자신들을 제치고 피렌체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들은 코시모를 제거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먼저 행동을 취한 쪽은 알비치 가문이었다. 알비치 가문의 수장이었던 리날도Rinaldo degli Albizzi는 우선 밑작업으로 사람들에게 메디치 가문에 관한 이상한 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코시모는 사제들의 화장실까지 메디치의 '공'으로 장식했다."


여기서 말하는 '공'은 메디치가문의 문장에 있는 '붉은 공'을 의미한다. 당시 메디치는 조각이나 회화 뿐 아니라 건축이나 공공 사업도 적극적으로 지원했는데 일종의 '홍보'의 의미로 가문의 문장을 새겨 넣곤 했다. 그런데 리날도는 시민들에게 소문내길, 메디치 가문이 도시의 곳곳을 가문의 장식으로 도배하고 있는 것은 다른 나라의 왕들이 왕족의 문장을 도시에 새기는 것과 비슷하다, 결국 메디치 가문은 자신들의 문장을 전 피렌체에 도배하고 나서 언젠가 왕위에 오를 것이다 라고 소문을 냈던 것이다. 선동은 보통 그렇게 시작되기 마련이다. 메디치의 조반니와 코시모는 선의로 도시의 공공사업을 추진한 것이지만 약간의 생색을 내기 위해 가문의 문양을 박은 것이 어느새 독재의 표식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서구권에서 '공'은 남성의 '고환'을 부르는 은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말은 "코시모가 사제들의 화장실에까지 '코시모의 고환'을 장식했다."는 중의적 의미도 된다. 아마 리날도는 지저분한 농담을 섞어 메디치의 깨끗한 이미지에도 타격을 입히려고 했던 모양이다. 

리날도는 시민들뿐 아니라 다른 귀족들도 만나고 다니면서 설득하기 시작했다. 지금 메디치 가문이 점점 성장하고 있는데, 어쩐지 불안하다, 시민들도 메디치가문을 그토록 좋아하니 언젠가 우리 모두 메디치 가문에게 먹혀버릴 것이다 라고 바람을 넣고 다녔다. 리날도는 그중 과다니Guadagni 은행 가문의 베르나르도Bernardo에게 접근했다. 베르나르도는 피렌체 공화국의 최고지도자에 해당하는 곤팔로니에Gonfalonier of Justice에 출마하려고 했는데 빚 때문에 출마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리날도는 빚을 내가 다 갚아줄 테니 대신 당신이 당선되면 나와 같이 코시모를 제거하자고 제안했다. 베르나르도는 고민끝에 '코시모 제거 작전'에 합류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곧 리날도는 빚을 갚아주었고 덕분에 베르나르도는 곤팔로니에에 당선될 수 있었다. 


추방

1433년, 상황을 엿보고 있던 리날도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피렌체에 역병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올라오자 코시모와 메디치 가문 사람들이 베로나에 있는 별장으로 잠시 피난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메디치 가문의 남자들이 피렌체에 없는 지금 시점이야 말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리날도는 재빨리 피렌체의 의회를 소집했다. 그리고 메디치 가문을 완전히 축출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얼마 뒤, 시골에서 쉬고 있는 코시모에게 피렌체 정부로부터 한 장의 편지가 날아왔다. 중요하게 논의할 일이 있으니 얼른 피렌체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편지를 수상하게 생각한 가족들은 코시모에게 피렌체로 일단 돌아가지 말라고 한사코 말렸다. 코시모 또한 상황이 어쩐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전해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정부에 순종해야 한다."


고 말하면서 결국 피렌체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코시모가 갖혀있던 베키오 궁전의 탑


그러나 피렌체에 도착한 코시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의회가 아닌 근위병들이었다. 항변 한번 못해보고 코시모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잡혀서 피렌체 베키오 궁전의 종탑에 있는 감옥에 갇혀 버렸다. 

코시모가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음식이 들어왔다. 코시모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음식을 먹지 않았다. 혹시 리날도가 독약을 탔을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코시모는 리날도가 그저 위협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리날도와 일당들은 진짜로 코시모를 죽이려고 했다. 리날도는 계속 곤팔로니에 베르나르도에게 코시모를 그저 감옥에 가둘게 아니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은 워낙 시민들의 지지가 높았기 때문에 베르나르도도 차마 사형 선고까지 내리지는 못했다. 대신 10년 동안 메디치 가문을 도시에서 추방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코시모는 그렇게 피렌체에서 추방되어 베네치아로 피난을 가게 된다. 이참에 코시모를 완전히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리날도는 아쉬워했지만 메디치 가문을 일단 피렌체에서 쫒아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금의환향

알비치 가문은 메디치를 물리치고 피렌체 정부를 장악했다. 하지만 리날도는 권모술수에는 강했지만 통치에는 무능했던 모양인지 코시모와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떠나자 피렌체의 경제는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메디치 가문과 함께 메디치의 자본이 피렌체에서 빠져나 간 것이 컸다. 결국 리날도는 정부의 부족한 돈을 메우기 위해 세금을 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여전히 역병이 창궐중인 피렌체 시민들의 마음을 더 우울하게 만들뿐이었다.   

리날도의 통치가 시작되고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시민들 뿐 아니라 이제는 리날도에 협조했던 귀족들마저 후회하기 시작했다. 자신들도 이 정도까지 리날도가 무능할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분위기가 나빠진 것을 감지한 리날도는 오히려 더 강경하게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의회에 남은 중립적인 사람들 마저 전부 없애버리고 측근들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는 상황을 더 악화시킬뿐이었다. 그렇게 의회를 장악한다 한들 피렌체의 경기가 다시 좋아질리도 없었을뿐더러 피렌체의 시민들과 귀족들이 보기에 의회 전체를 자기 측근으로 채우는 행위는 누가봐도 독재로 보였다. 리날도는 분명 '코시모가 왕이 되려 한다'라고 선동하고 다녔는데 오히려 본인이 더 왕같이 행동 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렌체는 누가 뭐라해도 자랑스러운 공화국이었다. 누구보다 시민중심의 공화국에 자부심이 강했던 피렌체 시민들은 누가되었든 '왕'처럼 구는 지도자는 견딜 수 없었다. 

리날도와 알비치 가문의 운명은 1434년 여름에 결정되었다. 정치를 못했으면 싸움이라도 잘했어야 하는데, 알비치가 이끄는 피렌체의 군대는 이몰라 전투에서 밀라노에 크게 패배했던 것이다. 경제도 망치고 국방도 망친 지도자에게 미래란 없는 법이다. 리날도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친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은 다시 의회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메디치 가문이 장악한 의회는 이번에는 거꾸로 리날도를 의회로 소환했다.

리날도는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1년 전에는 자신이 의회를 장악하고 코시모를 재판한 뒤 추방시켜버렸는데 이번에는 거꾸로 자신이 코시모처럼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상황이 된 것이다. 더이상 뒤가 없다고 판단한 리날도는 군대를 일으켜 베키오 궁전을 무력으로 탈취하려 했다. 하지만 낌새를 이미 알아챈 의회는 그보다 한 발 앞서 병력을 소집했다. 이제 두 세력이 강대강으로 부딪히면서 잘못하면 심각한 내전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때 교황이었던 에우제니우스 4세Eugenius IV가 중재를 시도했다. 교황은 가능하면 피렌체에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다. 결국 교황의 개입을 통해 알비치 가문과 그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거꾸로 피렌체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그리고 코시모에게 내려진 추방형은 당연히 철회되었다. 1434년 9월 28일, 코시모 데 메디치는 그렇게 추방당한지 1년만에 피렌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위선의 정치

코시모는 분명 승리했지만 지난 1년 동안 한 가지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1433년 리날도가 장악한 의회에서 추방이 아닌 사형선고를 내렸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만약 내가 감옥에서 주는 음식을 생각 없이 받아먹기라도 했었다면? 아무리 어마어마한 돈을 가졌다고 해도 정치 권력이 없으면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는 것이 메디치 가문의 한계였던 것이다.  

그는 살기 위해서라도 권력을 잡아야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권력을 잡아야 할까. 최고 권력자인 곤팔로니에로에 출마해서 당선 되면 권력을 잡는 것일까? 코시모는 그렇게 간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코시모가 콘팔로니에에 당선된다고 해도, 분명 어디선가 평민 출신인 자신을 무시하는 또 다른 귀족들이 나타나 자신을 죽이려 할지도 모를일이다. 그리고 시민들도 코시모가 너무 갑자기 정치 전면에 나서면, 리날도의 선동처럼 정말로 '왕'이 되려 한다고 의심할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피렌체 시민들은 공화국에 자부심이 상당히 강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권력 기반인 시민들의 지지까지 잃게 된다. 코시모는 다른건 몰라도 절대로 시민들의 마음은 건드리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질투는 물을 주면 안 되는 식물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시민들과 귀족들이 자신이 가진 돈과 권력을 질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코시모는 '위선자'가 되기로 결정한다. 위선자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말한다. 코시모는 겉으로는 권력이 없는 척을 하지만 실제로는 뒤에서는 모든 것을 완전히 통제하는, 이른바 '참주僭主'가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참주를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주제넘은 주인'쯤 된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이 말은 입헌군주제가 시작된 근대에 왕은 명목상의 자리만 유지하고 실질적인 나라의 통치는 의회에 맡기기 시작하면서 탄생한 말이지만, 참주는 완전히 반대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통치하되 군림하지 않는다.


코시모는 겉으로는 피렌체의 평범한 시민 중 한명으로 낮게 행동했지만 실제로는 뒤에서 피렌체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역시 돈이었다. 그는 돈으로 사람들을 매수해 지방 의회와 피렌체의 최고 의결기관인 시뇨리아에 메디치 측 사람들을 심어놓았다. 자신은 나서지 않았지만 나서는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다면 결국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코시모도 곤팔로니에에 당선된 적이 있지만 30년의 총 통치 기간동안 곤팔로니에로 활동한 기간은 고작 6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높은 고위직은 손사래를 치면서 안 하겠다고 뺐지만 뒤에서는 바쁘게 움직이면서 모든 피렌체의 정치를 조정한 것이다. 

말은 쉽지만 사실 이런 식의 정치는 엄청난 정치력과 긴장감을 필요로 한다. 시민들과 귀족들이 코시모에게 통치 받지 않는다고 굳게 믿게 만들면서도 실제로는 피렌체 전체를 통치해야 하기 때문이다교황 비오 2세는 이런 코시모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정치적 문제가 생기면 모든 문제는 코시모의 집으로 모여든다. 그선택하는 사람이 의회를 움직이그가 결국 화와 전쟁을 결정한다. 그는 왕이라는 이름을 빼고는 모든 면에서 왕이었다."


코시모는 '독재'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독재'였던, 이상한 형태의 정치 형태를 자그마치 30년이나 유지했다. 그 기간 중에도 수많은 반대와 분란이 있었지만, 코시모는 고도의 정치기술로 피렌체를 평화롭게 통치했다. 코시모의 정치는 너무나도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그를 그저 '뛰어난 시민'으로 생각했고 그가 독재자라는 것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피렌체의 한 작가는 그를 평가할 때 "전 세계에서 '위대한 상인'으로 불렸던 코시모"라고 그를 평했는데, 이 말은 같은 시대를 살던 사람들조차도 그를 피렌체의 지도자가 아니라 그저 돈 많은 상인정도로 인식했던 것이다.

거꾸로 보면 그가 얼마나 완벽하게 피렌체를 장악했는지는 그가 죽자마자 피렌체에 폭풍 같은 혼란이 몰려왔던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코시모의 사망 후 한동안 피렌체의 정계는 혼란 그 자체였고 그의 손자 로렌초가 집권하면서 겨우 안정될 수 있었으니까.


산 마르코 성당의 공공 도서관


인문학의 터, 도서관 기증

코시모가 이런 방식으로 피렌체를 장기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 인문학적 소양이 깊었고, 또 그만큼 인간에 대한 통찰 또한 깊었기 때문일 것이다. 코시모는 최고 수준의 라틴어를 구사했고 그리스 로마의 역사와 철학에 관심이 많아 학자들과 대등한 수준에서 토론 했다고 하니 아마 돈 많은 인문학 덕후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코시모는 분명 고대에 심심치 않게 등장했던 '참주정'의 역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의 페이시스트라토스나 로마의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 같은 정치인들도 한동안 아무런 직책 없이 제국을 통치하는 '참주정'을 사용했으니까. 

1444년, 코시모가 피렌체를 통치하기 시작한 지 10년째 되는 해였다. 코시모는 산 마르코의 수도원의 내부에 피렌체 최초의 공공 도서관을 열었다. 이 도서관은 피렌체 르네상스가 더 활짝 꽃피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가 했던 것처럼 무작정 로마로 쳐들어가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의 문헌과 사본들을 모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상류층이 도서관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기증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 로마적인 것'이기도 했다. 로마제국의 귀족들은 자신들과 노예들의 차이는 단순히 신분차이가 아닌, 사회적 의무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의 차이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유한 귀족들은 도서관이나 공중 목욕탕, 공공 도로등을 건설해서 사회에 환원하려고 했다. 브루넬레스키가 연구했던 판테온도 로마 제정 초기의 2인자였던 아그리파에 의해 기증된 건물이다.

도서관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건물이라는 '하드웨어'보다는 그 안의 수많은 책들, 즉 '소프트 웨어'다. 코시모는 공공 도서관을 완성하기 위해 학자이자 고문서 수집가였던 니콜라 니콜리에게 우선 많은 양의 책들을 사들였다. 니콜라 니콜리는 사람은 상당히 괴짜였던 모양인지 고문서 수집이라는 독특한 취미 덕분에 6,000 플로린 금화, 현대로 치면 60억 정도의 빚을 지고 있었다고 한다. 코시모는 그 빚을 청산 해 주는 대가로 800개 사본 컬렉션을 가져왔다. 빚쟁이들에 의해 공중분해될 뻔한 책들을 모두 모아 공공 도서관에 기증하는것으로 도서관의 '소프트웨어'를 풍요롭게 만든 것이다. 그 이후에도 코시모는 시리아, 이집트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유럽 도시로 사람을 보내 중요한 책들을 사 모으도록 했다. 


카레기의 빌라 메디치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1462년, 코시모는 피렌체 북부의 마을 카레기에 있는 메디치 가문의 빌라에서 '플라톤 아카데미'를 열었다. 코시모는 더 적극적으로 그리스 로마의 철학을 부활시키려고 한 것이다. 피렌체에 이른바 '신플라톤주의'가 꽃 피는 순간이다. 나중에 살펴볼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도 결국 그리스 신화를 그린 것인데 이때 피어오른 신플라톤주의의 열매로 볼 수 있다. 코시모는 이 일을 할 적임자로 신플라톤주의자였던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를 선택했다. 신플라톤주의는 중세에 잊혀졌던 플라톤의 철학을 다시 공부하자는 운동인데 피렌체에는 이미 그런 학자들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코시모는 어느 날 마르실리오에게 말했다. 앞으로도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테니 자유롭게 플라톤 철학을 연구하라고. 코시모는 실제로 마르실리오에게 집과 농장을 주어 돈 걱정 없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새로운 학문에 관심을 가졌던 코시모가 무엇보다 관심이 많았던 것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에서도 '신비주의' 부분이었다는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신과의 정신적인 합일을 강조하면서 현대로 치면 명상을 통해 신과의 합일에 다다를 수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코시모는 그 부분이 특히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그리고 인문학을 부활시키고자 했던 코시모가 실제로 가장 열심히 읽었던 책은 철학책이 아닌 성경이었다고 한다. 인간은 항상 모순속에 사는 재미있는 동물이다.


예술의 후원자

코시모는 본격적 활동을 시작한 후 대략 60만 플로린 금화를 문화 예술 부흥에 투자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대충 계산해 봐도 6000억 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그는 예술 후원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이 모든 후원은 나에게 최고의 만족을 주었는데 왜냐하면 이는 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 뿐 아니라 나에게도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50년간 나는 돈을 벌고 쓰기만 했는데 확실히 쓰는 게 버는 것보다는 즐거웠습니다."


돈 쓰는 거야 당연히 즐거운건데 저런말을 하는 코시모가 어쩐지 얄밉게 느껴지지만, 분명 그는 메디치가 벌어들인 돈을 허투루 쓰지는 않았다. 그가 문화와 예술에 투자한 돈들은 피렌체의 문화 예술로 꽃피며 지금까지 전 세계인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 유산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코시모가 이렇게 예술에 투자한 것에는 분명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조반니가 예술을 후원했던 것처럼, 코시모의 예술 후원 또한 시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코시모는 리날도 사건을 겪으면서 정치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확실한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더 확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마도 많은 예술과 공공 건물에 돈을 지원하는 것으로 시민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던것이 아닐까. 미술이야말로 눈에 바로 보이는 그 무엇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가장 직접적인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코시모는 통치기간 동안 여러 축제를 열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들은 무언가 보는 것을 좋아하는 법이다. 위대한 사람들의 성대한 장례식, 교황 같이 유명한 사람들의 방문, 그리고 그들을 기리기 위한 행사, 행렬, 무도회, 짐승 쇼 등 코시모가 여러 대규모 공공 축제를 기획한 것은 특히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심심한 삶을 살아가던 중세의 피렌체 사람들에게 이런 멋진 '쇼'를 즐기는 것만큼 즐거운 것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모든 축제는 코시모의 후원 덕분에 공짜였으니까. 


변함없는 두 사람

코시모는 어느 날 도나텔로가 허술한 옷차림을 하고 길을 다니는 모습을 발견했다. 도나텔로는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였고 코시모의 충분한 후원도 받고 있었으니 아마 돈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도 그는 늘상 허름하게 입고 다녔던것으로 유명하다. 어느 축제날, 코시모는 조용히 도나텔로에게 고운 옷 한 벌과 붉은색 모자가 달린 외투를 보내주었다. 그래도 축제인데 예쁘게 입고 즐기라는 코시모의 배려였다. 하지만 도나텔로는 며칠 입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다시 원래대로 자신이 입던 후줄근한 옷을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도나텔로는 그렇게 고급스러운 붉은 외투는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것은 도나텔로의 자격지심일 수도 있고 자존심일 수도 있다. 도나텔로는 사실 노동자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에 상류층과 부자들에 대한 반항심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번 돈을 천장에 끈으로 매달아 놓은 바구니에 보관했는데 일꾼들이나 친구들이 필요하면 마음대로 가져가도록 했다. 부자들이나 귀족들처럼 '저급'하게 돈에 얽메여 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는 항상 친구들과 일꾼들에게는 관대하고, 자비롭고, 예의 바르게 대했지만 반대로 귀족이나 교회의 상류층 사람들을 대할때는 불친절했다. 

그렇게 부자들을 멸시했던 도나텔로라면 사실 제일 미워했어야할 사람은 그 누구보다 피렌체 최고의 부자였던 코시모여야 했을텐데 둘의 사이는 그 누구보다 가까웠다고 하니 이를 모순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코시모의 뛰어난 인품 덕분이라고 해야할까. 그도 아니면 도나텔로는 부자임에도 같은 평민 출신에 소박한 생활태도를 유지했던 코시모에게 만큼은 마음이 열려있던 것일까.

1454년 도나텔로의 나이가 어느덧 70세가 되자 코시모는 도나텔로에게 농장을 주어 남은 여생을 편안히 보내도록 배려했다. 두 사람 모두 똑같이 늙어가는 처지였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코시모는 도나텔로를 뒤에서 챙겨주는 키다리 아저씨였던 것이다. 도나텔로는 이제 굶어 죽는 일은 없겠다면서 기뻐했지만 그 기쁨은 고작 1년도 가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농사일은 신경 쓸 일이 많았던 것이다. 평생 작품을 만들던 사람이 비둘기 똥을 치우고 가축들에게 풀을 먹이고 폭풍이 왔다 가면 엉망이 되어있는 지붕을 수리하고 포도나무 가지를 정리하는 일 따위를 제대로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도나텔로는 나는 이제 지쳤다고,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낫겠다고 한탄하기 시작했다. 소식을 들을 코시모는 그의 아들 피에로를 통해 도나텔로에게 농장 대신 정기적으로 그냥 돈을 보내주도록 만들었다. 그제서야 도나텔로는 만족했다고 한다. 매번 이런 코시모였으니 부자들이 미운 도나텔로라도 코시모 만큼은 좋아하지 않을수 없었던 것일까.



산 로렌초 성당의 코시모 데 메디치의 무덤


국부 코시모와 도나텔로의 죽음

30년간 피렌체를 지배하며 피렌체의 부흥기를 이끌었던 코시모에게도 결국 마지막은 찾아왔다. 코시모는 삶이 끝날 무렵 매우 조용해졌고 때로는 몇 시간 동안 말을 하지 않고 생각만 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코시모에게 당신 요즘 왜 이렇게 조용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여보, 우리가 시골집에 갈 때 당신은 이사 준비한다고 보름 동안이나 정신없이 보냈잖소. 나도 이제 곧 이 삶에서 저 삶으로 이사 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생각할 것이 많지 않겠소?" 


코시모 다운 통찰있는 위트가 묻어 나오는 말이다. 코시모는 자신의 인생이 충분히 길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실 때 가는 것이 만족스럽다고 덧붙였다. 코시모는 얼마 뒤 깨끗한 옷을 갖춰 입고 산 로렌초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신부가 신앙고백을 요청 하자 그는 한 마디 한 마디 직접 고백한 뒤, 지나온 삶의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구한 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열심으로 성찬을 받았다.

1464년 코시모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메디치 가문은 그의 아들 피에로Piero가 이어받았다. 코시모는 그의 장례를 조용히 치르길 바랬었지만 온 도시에서 그의 장례식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시끌벅적할 수 밖에 없는 장례식이었다. 피렌체의 최고 의결기관 시뇨리아는 피렌체에 30년의 평화와 함께 피렌체 최고의 부흥기를 가져다준 코시모에게 '조국의 아버지Pater Patriae'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그렇게 국부國父가 된 코시모는 성 로렌조San Lorenzo에 안치되었다.

1466년, 2년 뒤 도나텔로 또한 코시모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 코시모는 도나텔로가 죽으면 그의 유해가 자신과 가까이에 묻힐수 있도록 미리 손을 써 놓았다. 죽어서까지도 이렇게 도나텔로를 챙겨주었던 코시모였다. 그래서 위대한 예술가 도나텔로와 피렌체의 국부 코시모는 지금도 함께 나란히 산 로렌조 대성당에 아래에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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