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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Jun 07. 2024

곰 같은 천재, 마사초

The 27 Club

역사에는 가끔씩 알 수 없는 우연이 나타나곤 한다. 예술계쪽에서 유독 27세에 요절하는 천재 예술가들이 많았다는 이상한 우연이 있는 것이다. 지미 헨드릭스, 커트 코베인, 에이미 와인하우스, 장 미셀 바스키아 같은 예술가들은 하늘의 별처럼 빛나다가 모두 27세라는 나이에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샤이니라는 그룹의 종현이 27세에 생을 마감하여 많은 팬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 적이 있었다. 이들의 사인은 자살, 의문사, 병사 다양하지만 이상하게도 모두 같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른바 '27세 클럽'이다. 

물론 '27세 클럽'의 탄생은 그저 우연일 것이다. 다만 이들은 모두 삶에서 모든 것이 가장 뜨거울 나이에 자신의 삶을 예술에 쏟아부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어쩌면 이들은 남들이 평생에 걸쳐 사용하는 에너지를 젊은 시절 너무 급격하게 예술에 불태웠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자신을 불태워 주변을 눈부시게 밝힌 다음 재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 것이다. 

르네상스의 천재들 가운데도 27살에 사망한 예술가가 있었다. 그는 바로 원근법을 최초로 회화에 구현한 천재 화가, 마사초Masaccio다. 르네상스의 천재들은 대부분 칠순을 넘어 팔순까지 장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마사초는 안타깝게도 일찍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의 짦은 생애동안 도나텔로가 르네상스 조각의 전성기를 열었던 것 처럼 르네상스회화의 전성길을 열어놓는 업적을 이루었다.


브랑카시 예배당 벽화에 그려진 자화상, 1427

불꽃같은 예술가

마사초는 정말 불꽃처럼 자신을 불태워 예술에 쏟아부었다. 마사초는 따지고 보면 고작 6년 정도밖에 활동하지 않았는데 그런 업적을 이룬 것이다. 지금 시대라도 6년 활동이면 상당히 짧다고 해야 할 텐데, 당시에는 프레스코 벽화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몇 년이 걸리기도 하던 시대였다. 때문에 천재라고는 하지만 마사초는 실제로 고작 몇 개의 회화와 벽화를 남긴 것이 전부다. 그럼에도 그 몇 개의 작품으로 이후 르네상스 회화 전체의 방향을 바꾸었으니 천재는 천재다.

마사초의 본명은 토마소Tommaso di Ser Giovanni di Simone고 마사초는 별명인데 그의 별명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마사초는 '서투른' 또는 '뚱뚱한'을 의미하는 '마소Maso'에다가 ccio를 붙여서 약간 놀리듯 만든 별명이라고 한다. 의역한다면 '덤벙이'나 '덩치' 쯤 될까요. 뛰어난 예술가인 그에게 이런 별명이 붙은 이유는 그가 예술 밖에 모르는 곰 같은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 물정은 전혀모르는 남자였다. 조르조 바사리는 그를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항상 딴 데 정신이 팔려있고 부주의한 사람이었는데, 예술에 모든 마음과 의지가 고정되어 있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한 관심이나 걱정거리가 전혀 없었고, 심지어 옷차림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빚진 사람에게서도 돈을 받는데 신경쓰지 않았으며 오직 궁지에 몰렸을 때만 받으려 했습니다."


그는 도나텔로처럼 옷을 허술하게 입고다녔다. 그리고 마사초는 그나마 짧은 인생을 살면서도 매우 가난하게 살았는데 돈에 대해 신경 쓸 시간에 차라리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가 죽기 한 해 전인 1427년의 피렌체의 재산 등록부를 살펴보면 마사초는 자기 소유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친구 화가 한 명에게는 120리라, 다른 화가에게는 6 플로린의 빚을 지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요즘으로 치면 7백만 원 정도의 돈이다. 미술사에 큰 업적을 남긴 위대한 화가지만 고작 7백만 원 빚을 갚을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빚 때문에 그의 옷 몇 벌마저 '사자와 젖소Lion and the Cow'라는 전당포에 저당 잡혀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마사초를 두고 '덩치'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이유를 알 듯하다. 예술밖에 모르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그저 곰같은 우직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마사초, 산 지오베날레 삼부제단화(San Giovenale Triptych), 나무에 템페라, 1422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를 만나다

마사초는 로렌초Bicci di Lorenzo라는 화가 밑에서 도제 교육을 받고 1422년 21세 때 길드Arte de' Medici e Speziali에 등록하여 독립 예술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지오토가 혁신을 일으키며 르네상스 회화의 문을 연지 벌써 1세기가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피렌체 회화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지오토의 방식을 그대로 반복하거나 살짝 변화시키는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위에 보이는 것처럼 마사초의 초기 작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마사초는 언제 혁신을 일으켰던 것일까. 마사초 인생 최고의 행운은 피렌체에서 르네상스의 선배 예술가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를 만나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자기들처럼 '예술에 미친 종자'였던 마사초를 금방 알아보았다. 그리고는 그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했다. 네가 진짜 제대로 된 예술을 하려면 로마를 꼭 가봐야 한다고. 

그래서 마사초는 이들의 말을 듣고 1423년 잠시 로마로 여행을 떠났다. 마사초의 예술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이 시점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마사초가 여행했던 로마에는 그가 본받을 만한 로마의 회화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조각과 달리 회화는 보존력이 약하기 때문에 이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머릿속이 예술로만 가득했던 마사초는 왜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가 로마로 여행하라고 했는지를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미술, 즉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던 고대 예술가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길 바랬던 것이다. 이때부터 마사초는 지금 껏 배웠던 딱딱한 양식을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자연을 모방하기로 결심했다. 도나텔로가 조각에서 자연주의Naturalism를 실현하려 했던 것처럼 마사초는 그림에서도 자연주의를 실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브랑카시 예배당

1425년 따듯한 봄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쯤, 마사치오는 브랑카시 예배당Brancacci Chapel으로 갔다. 마사치오보다 나이가 18살이나 많은 형이었던 마솔리노Masolino가 자신을 불렀기 때문이다. 마솔리노는 마사초를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은 같은 길드에서 만나 지금까지 계속 친한 사이로 지내왔다. 마사초는 아직 20대 초반이었고 마솔리노는 벌써 40대에 접어들은 나이였지만 둘은 나이 차이에도 꽤나 마음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둘을 주변 사람들이 따로 부르는 특이한 별명도 있었는데, "일 확실히 하는 유명한 듀오Duo preciso e noto"였다. 둘은 친해지면서 부터 공동작업을 몇번 했는데 아마 주문자의 마음에 쏙 들게 일처리를 확실하게 했던 모양이다. 아마 사회경험이 많은 마솔리노는 예술밖에 모르는 '서투른' 동생이었던 마사초를 잘 이끌어주지 않았을까.

이번에도 마솔리노의 주도로 둘은 공동작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마솔리노는 브랑카시 가문의 부탁으로 브랑카시 가족 예배당의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사실 벽화 작업은 이미 작년부터 시작했지만 겨울에는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기가 어렵기 때문에 잠시 쉬었다가 봄이 되면 마사초를 불러 같이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도착한 마사초는 마솔리노와 함께 작업을 시작했다. 둘은 양쪽 벽을 나누어 왼쪽 벽은 마사초가, 그리고 오른쪽 벽은 형 마솔리노가 맡아서 서 프레스코 벽화를 그렸다. 그런데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한참 같이 작업하던 마솔리노는 갑자기 다른 일 때문에 헝가리로 가야 했다. 그렇게 형을 떠나보낸 마사초는 혼자 남아 열심히 벽화를 그리게 된다.



마솔리노, 아담과 하와, 1425 / 마사초, 아담과 하와, 1427


이때 마사초가 그린 그림을 보면 그가 로마에서 무엇을 느끼고 왔는지를 알 수 있다. 마침 마솔리노와 마사초는 둘다 '아담과 하와'를 주제로 그렸는데, 덕분에 두 사람의 그림을 비교해 보면 자연스럽게 마사초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됬다. 왼쪽은 마솔리노가 그린 <뱀에게 유혹당하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오른쪽은 마사초가 그린 <추방당하는 아담과 하와>다. 

우선 왼쪽 그림을 보면 마솔리노의 그림은 특별히 흠 잡을 데 없이 깔끔해 보인다. 인체 표현이나 색감, 명암 모두에서 40대에 접어든 마솔리노의 노련함이 엿보인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서 있는 자세를 보면 어딘가 모르게 뻣뻣해 보이기도 한다. 이 '뻣뻣한' 스타일은 앞서 도나텔로와 기베르티의 조각을 비교해봐도 느낄 수 있는데, 당시 종교를 주제로 한 예술에서는 당연한 방식이었다. 여전히 성경의 인물을 그릴때는 최대한 '신성한'느낌이 들도록 표현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불상에서 볼 수 있는 경직된 표정과 자세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반면 마사초의 그림을 보면 '서투른' 마사초답게 약간 너저분한 느낌은 들지만, 마솔리노와는 다르게 아담과 하와를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해 놓았다. 마치 동네를 걷다가 마주칠 수 있는 평범한 아줌마와 아저씨의 모습을 보는 듯한 것이다. 하와의 표정을 보면 그녀는 세상을 잃은 듯 엉엉 울고 있고 그 와중에도 자신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며 터덜 터덜 걷고 있다. 그리고 남편 아담은 모든 것은 내 책임이라고 말하는 듯 몸을 숙이고 체념한 얼굴을 감싸며 울고 있다. 정말 두 사람이 우리 옆에 있다면 "다 끝났어..."라고 말하며 한탄하지 않을까. 

두 사람은 분명 같은 성경의 인물을 그렸지만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그렸다. 마솔리노는 아직 중세적 느낌이 남아있는 '신성한 성경 인물'을 그리려고 했다면 마사초는 아담과 하와를 신성한 인물이 아닌 우리와 같은 땀냄새나는 인간의 레벨에서 그리려고 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아담과 하와처럼 지상 천국이었던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입장이라면 아마 저렇게 슬퍼했을테니까. 


예술가의 여주인 자연

마사초의 이런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훗날 마사초에 대해 평가했던 말을 들어보자.


"피렌체의 토마소, 마사초로도 알려진 그의 완벽한 작품을 보고 있으면, 예술의 여주인인 자연을 통해 양분을 얻지 않는 다른 예술가들의 노력이 얼마나 헛된지를 보게 된다."


여기서 다빈치가 말하는 '자연을 통해 양분을 얻지 않는 다른 예술가들'은 자연을 직접 연구하지 않고 양식으로 굳어진 전통을 따르는 평범한 예술가들을 말한다. 다빈치는 진짜 위대한 예술가들은 주변 친구들의 손재주가 아니라 예술의 진정한 어머니인 '자연'을 모방하는 예술가들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다빈치는 지오토가 위대했던 이유도, 마사초가 위대했던 이유도, 그리고 자신이 누구보다 열심히 자연을 관찰했던 이유도 모두 완벽한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동료를 모방하는 예술가들은 옆으로 걸을 수밖에 없지만 자연을 모방하는 예술가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원근법의 본격적인 시작

마사초가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에게 또 다른 한 가지를 배운 것이 있다. 바로 선 원근법이다. 브루넬레스키는 로마를 여행할 때 유적의 폐허를 스케치하다 우연히 선 원근법의 원리를 발견했다. 스케치를 하다 보니 모든 풍경은 멀어지면서 결국 한 점에 모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이를 그리드에 이미지를 그려낸 적이 있다고 한다. 정확히 어떤 그림이었는지는 남아있지 않지만 아마 위와 비슷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위에 그림에서처럼 세상에 있는 모든 대상들은 멀리 갈수록 작아지다 결국 한 점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것을 사라지는 점, '소실점Vanishing point'라고 한다. 이렇게 선을 그어놓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선 원근법의 기본 원리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는 회화보다는 꽃의 성모 마리아 성당의 돔을 건축하는데 몰두 중이었다. 때문에 자신이 발견한 선 원근법을 구체적으로 회화에 적용시킬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사초는 이 원리를 풀어서 자신의 그림에 처음으로 적용시키기 시작했다. 


마사초,  공물 돈The Tribute Money, 1425-1428


위는 마사초가 브랑카시 예배당에 <아담과 하와>에 이어서 그린 벽화다. 그림의 내용을 먼저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베드로가 세금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다. 중앙의 장면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헌금을 내는데 국가에 세금을 내야 하느냐고 묻자 예수께서 그래도 세금을 내야 한다고 답하는 상황이고, 왼쪽 장면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낚시를 하라고 하자 베드로가 물고기를 낚고 물고기 입에서 은전을 꺼내는 장면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 장면은 베드로가 그렇게 찾은 은전으로 세리에게 세금을 납부하고 있는 모습이다. 마사초는 이 성경의 이야기 세 가지 장면을 한 화면에 분할해서 표현했는데 당시의 벽화는 이렇게 여러 가지 내용을 하나의 벽화 안에 동시에 그리기도 했다. 이 연결된 이야기의 주인공은 베드로인데 모두 회색 머리에 파란 옷에 노란 천을 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사초는 이 그림에서 정확히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소실점을 위치시켰다. 그리고 소실점을 중심으로 연결점을 밖으로 그어보면 오른쪽의 건물들이 선의 연장선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사초는 이렇게 처음으로 선 원근법을 본격적으로 회화에 적용시키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마사초는 원근법을 그저 활용한 정도에 그쳤지만 그의 새로운 시도가 빛을 발한건 바로 다음 작품인 <삼위일체>다. 


마사초, 삼위일체Trinity, 1426-28

삼위일체Trinity

마사초의 대표작이기도 한 <삼위일체>는 마사초가 브랑카시 성당 벽화를 마치고 얼마 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그린 벽화다. 그림의 내용은 제목 그대로 성 삼위일체, 즉 대좌 위에 하느님이 앉아계시고(성부) 그 아래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계시며(성자)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하얀 비둘기(성령)를 표현하여 기독교의 삼위일체Trinity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를 보면 왼쪽에는 성모 마리아, 오른쪽에는 성 요한이 앉아있고, 그리고 다시 그 아래에는 작품 제작의 기부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이 벽화는 르네상스의 분기점이라고 되는 중요한 작품이다. 마사초는 높이 6m에 달하는 이 벽화를 통해 인류 최초로 완벽한 '환영Illusion'을 구현했기 때문이다. 

마사초가 그림을 완성한 뒤 성당에 들어가 이 그림을 처음 봤던 당시의 사람들은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우선 이런 식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표현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표현하는 방식 자체도 혁신적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던 이유는 그다음 때문이었다. 그렇게 감탄하면서 그림을 보다가 문득 이 장면 전체가 조각이 아니라 그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마사초는 상당히 자신감이 있었는지 인물들 뿐 아니라 제단마저 모두 그림으로 그려놓았는데 아래 제단이 그림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혹시 뒤에 공간이 있는 건 아닌지 뒤쪽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그저 벽 뿐이었다. 자신의 눈이 마사초의 기술에 완전히 속았다는 것을 순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은 평면에 이 정도까지 착시가 일어나는 3차원의 공간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마사초는 역사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던 그림을 그려낸 것이다.



마사초는 상당히 의도적이었다. 그는 소실점을 그림의 아래에서 180cm 정도의 지점에 위치 치켰다. 이는 위 그림에서 처럼 관객의 키에 맞추어 최대한 눈높이에 정확히 초점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마사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기계나 건축물을 설계하듯이 소실점의 정 중앙에 못을 박아 선을 그어가며 정확한 수학적 계산을 통해 환영을 구축했다. 

마사초의 <삼위일체>는 르네상스의 분기점이라고 하는 이유는 회화의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원근법의 가능성은 이미 100년 전 지오토부터 있어왔지만 이를 이토록 정교하게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화가들은 수학보다는 문학적 감성이 뛰어난 자들이니까. 그런데 마사초는 브루넬레스키가 발견한 선 원근법을 완벽하게 회화에 구현하여 회화의 새로운 길을 열게 된다.

당시 이 선 원근법이 예술가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으로 느껴졌는지는 그 이후의 화가들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같은 피렌체 화가였던 파올로 우첼로Paolo Uccello는 원근법을 처음으로 배운후 얼마나 신기하게 느껴졌는지 밤낮 원근법을 그리는 연구를 했는데, 와이프가 당신은 도대체 잠은 언제 잘거냐고 따지자


"원근법이 도대체 얼마나 매력적인가!"


라고 말하며 계속 원근법 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아래 그림을 보면 우첼로는 바닥쪽에 병사들의 창을 교묘하게 그리드처럼 배치해서 원근법을 표현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있다.


파올로 우첼로 <산로마노의 전투>1438-40, 템페라,


마지막 1년

2년 뒤 헝가리에서 돌아온 마솔리노는 다시 마사초와 재회했다. 마솔리노는 분명 마사초가 그린 아담과 하와, 그리고 성 삼위일체를 보았을 것이다. 마솔리노가 이 새로운 그림을 보고 어떤 감상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둘은 재회 후 오랜만에 다시 로마의 순례 교회인 산타 마리아 마조레Santa Maria Maggiore의 제단화를 같이 제작하기 시작했다. 아마 마솔리노는 한참 어린 동생이자 예술밖에 모르는 곰 같은 동생을 질투하기보다는 그의 천재성을 인정해 주고 오히려 응원해 주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1428년 6월, 마사초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마사초는 잠시 작업을 중단하고 로마로 떠났는데 아마도 제작 중인 제단화의 제작 비용을 받기 위해 로마로 떠났던 모양이다. 그런데 하필 그 해 여름 로마에서는 페스트가 다시 창궐했다. 그렇게 전염병에 휩쓸려 27살의 젊은 천재는 너무도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마사초에게 원근법을 알려주었던 브루넬레스키는 마사초가 죽었다는 소식에 


"마사초의 죽음으로 우리는 지금 엄청난 상실감을 겪고 있다."


라고 말했다. 브루넬레스키는 그저 한 젊은 예술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가까운 이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순박하고 예술밖에 모르는 이 순수한 청년을 많은 선배 예술가들은 진심으로 사랑했던 모양이다. 


마사초, 삼위일체의 아래 부분, 1426-28

나는 한때 당신이었다

그렇고 보니 마사초가 삼위일체 아래 제단을 그리면서 해골 위에 새겨 넣은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IO FU[I] G[I]A QUEL CHE VOI S[I]ETE E QUEL CH['] I[O] SONO VO[I] A[N]CO[R] SARETE"

"나는 한때 당신이었고 또한 네가 언젠가 될 나다"


이 문장의 의미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언젠가 우리 모두 저 해골처럼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구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나이 든 예술가의 통찰이라고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차라리 어느 젊은 예술가의 고민이 느껴지는 문장이라고 해야 할까. 결과적으로 이 문장은 땅에 묻힌 마사초의 마지막 숨결이 되어버렸다. 그는 그렇게 '27세 클럽'에 합류했다. 하지만 그의 예술은 이후 르네상스 예술이 가야할 방향을 밝게 비추는 역할로 계속 살아 남게된다. 고작 6년의 활동 중에 그나마 전성기는 3년에 불과 했으니 남긴 작품도 몇 개 없지만 그럼에도 이후 거의 모든 피렌체의 예술가들은 그 몇 개의 그림을 보기 위해 브랑카시 예배당과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로 찾아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필리포 리피, 로렌조, 기를란다요, 반디넬리, 폰토르모 등등 사실상 피렌체 전성기의 거의 모든 예술가들은 그의 그림을 보기 위해 찾아갔던 것이다. 이들은 말하길 '좋은 예술의 계율이 무엇인지' 영감을 얻기 위해 마사초의 그림을 찾았다고 했다. 그 '계율'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그 예술가들이 단순히 원근법을 공부하러 찾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사초가 죽고 나서는 원근법이 이론적으로 완전히 정립되었기 때문에 이미 책으로도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말한 마사초의 '계율'은 어쩌면 예술가라면 예술만 생각해야 한다는 그의 순수한 '태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마사초가 몸소 보여주었던 것처럼 뛰어난 예술가가 되려면 잡다한 세상사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오로지 예술적 완성에만 몰두해야 뛰어난 예술을 완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브랑카시 예배당, 왼쪽벽이 마사초의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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