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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Jun 07. 2024

곰 같은 천재, 마사초

The 27 Club

역사에는 참 이상한 우연이 있습니다. 유독 27세에 요절하는 천재 예술가들이 많았던 것이죠. 지미 헨드릭스, 커트 코베인, 에이미 와인하우스, 장 미셀 바스키아 같은 예술가들은 하늘의 별처럼 빛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땅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안타깝게도 샤이니의 종현이 27세에 생을 마감하여 많은 팬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사인은 자살, 의문사, 병사 다양하지만 이상하게도 모두 27세에 생을 마감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른바 '27세 클럽'입니다.

르네상스의 천재들 가운데도 27살에 사망한 예술가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 원근법을 최초로 회화에 구현한 화가이자 르네상스 회화가 성장기를 넘어 전성기로 가도록 문을 열어준 천재 화가, 마사초입니다. 마사초는 르네상스의 천재들 가운데 유일하게 요절한 예술가였는데 하필 정확히 27세에 생을 마감했으니 역시나 이상한 우연입니다. 

물론 '27세 클럽'의 탄생은 그저 우연일 것입니다. 다만 이들은 모두 삶에서 모든 것이 가장 뜨거울 나이에 자신의 삶을 예술에 쏟아부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남들이 평생에 걸쳐 사용하는 에너지를 젊은 시절 너무 급격하게 예술에 불태웠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자신을 태워 주변을 눈부시게 밝힌 다음 재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 것이죠. 


브랑카시 예배당 벽화에 그려진 자화상, 1427

불꽃같은 예술가

마사초는 정말 불꽃처럼 자신을 불태우고 사라진 예술가였습니다. 마사초는 따지고 보면 고작 6년 정도밖에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시대라도 6년 활동이면 상당히 짧다고 해야 할 텐데, 당시에는 프레스코 벽화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몇 년이 걸리기도 하던 시대였으니까요.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고작 몇 개의 회화와 벽화만 남길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그 몇 개의 작품으로 이후 르네상스 회화 전체의 방향을 바꾸었으니 천재는 천재입니다.

마사초는 정말 예술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마사초는 본명은 토마소Tommaso di Ser Giovanni di Simone고 마사초는 별명인데 이 별명이 그의 속성을 잘 보여줍니다. 마사초는 '서투른' 또는 '뚱뚱한'을 의미하는 마소Maso에다가 ccio를 붙여서 약간 놀리듯 만든 별명이라고 합니다. 의역하자면 '덤벙이' 쯤 될까요. 아마 마사초는 예술 밖에 모르는 우직한 곰 같은 남자였던 모양입니다. 그는 모든 생각이 예술에만 쏠려있었기 때문에 세상 물정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도나텔로처럼 옷차림도 허술하게 입고 다녔습니다. 문제는 세상 돌아가는 걸 전혀 몰라, 그나마 그 짧은 인생도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마사초는 친구들이 돈을 빌려달라고 하면 허물없이 빌려주었다가 못 받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받는 것에 신경 쓸 시간에 그림을 그렸던 것이죠. 그가 죽기 한 해 전인 1427년의 피렌체의 재산 등록부를 살펴보면 마사초는 자기 소유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친구 화가 한 명에게는 120리라, 다른 화가에게는 6 플로린의 빚을 지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7백만 원 정도의 돈입니다. 미술사에 큰 업적을 남긴 위대한 화가지만 고작 7백만 원을 갚을 여력이 없었던 것이죠. 심지어 빚 때문에 그의 옷 몇 벌마저 '사자와 젖소Lion and the Cow'라는 전당포에 저당 잡혀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마사초를 두고 '서투른 놈'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이유를 알 듯합니다. 예술밖에 모르는, 세상 물정에는 '서투른' 사람이었던 것이죠. 


마사초, 산 지오베날레 삼부제단화(San Giovenale Triptych), 나무에 템페라, 1422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를 만나다

마사초는 여느 피렌체의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어린 시절 도제교육을 받고 21살쯤에 독립 예술가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마차초의 초기 작품들은 사실 평범합니다. 결국 사람은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 마사초 인생 최고의 행운은 피렌체에서 르네상스의 선배 예술가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은 자기들처럼 '예술에 미친 종자'였던 마사초를 금방 알아봅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조언합니다. 네가 진짜 제대로 된 예술을 하려면 로마를 꼭 가봐야 한다고. 

그래서 마사초는 형들의 말을 듣고 1423년 잠시 로마로 여행을 떠납니다. 마사초의 예술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이 시점부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마사초가 여행했던 로마에는 그가 본받을 만한 로마의 회화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조각은 돌이라 천년의 세월을 버텨 그때까지 보존되어 있었지만 회화는 이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지 오래였던 것이죠. 하지만 머릿속이 예술로만 가득했던 마사초는 왜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가 로마로 여행하라고 했는지 금방 이해합니다. 고대 로마의 정신, 즉 아름다운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던 고대 그리스 로마 예술가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한 것이죠. 이때부터 마사초는 지금껏 배웠던 딱딱한 교회의 고딕 양식을 버리고 자연을 모방하기로 결심합니다. 이것이 향후 400년 동안 유럽 미술의 바탕으로 작동할 자연주의Naturalism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의 그림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브랑카시 예배당

1425년 이탈리아의 따듯한 봄바람이 피렌체에 불 때쯤, 마사치오는 브랑카시 예배당Brancacci Chapel으로 갑니다. 마사치오보다 나이가 18살이나 많은 형이었던 마솔리노Masolino가 마사초를 불렀기 때문입니다. 마솔리노는 마사초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두 사람은 같은 길드에서 만나 지금까지 계속 친한 사이로 지내왔습니다. 마사초는 아직 20대 초반이었고 마솔리노는 벌써 40대에 접어들었지만 둘은 나이 차이에도 꽤나 마음이 잘 맞았던 모양입니다. 둘을 주변 사람들이 따로 부르는 특이한 별명도 있었는데, "일 확실히 하는 유명한 듀오Duo preciso e noto"였습니다. 둘은 공동작업을 하는 일이 많았는데 주문자의 마음에 쏙 들게 일처리를 확실하게 했던 모양입니다. 아마 사회경험이 많은 마솔리노는 예술밖에 모르는 '서투른' 동생이었던 마사초를 잘 이끌어주며 같이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솔리노는 브랑카시 가문의 부탁으로 브랑카시 가족 예배당의 벽화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벽화 작업은 이미 작년부터 시작했지만 겨울에는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기가 어려워 잠시 쉬었다가 봄이 되면 마사초를 불러 같이 작업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도착한 마사초는 마솔리노와 함께 작업을 시작합니다. 둘은 양쪽 벽을 나누어서 프레스코 벽화를 그렸습니다. 왼쪽 벽은 마사초가, 그리고 오른쪽 벽은 형 마솔리노가 맡았던 것이죠. 그런데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한참 같이 작업하던 마솔리노는 갑자기 다른 일 때문에 헝가리로 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형을 떠나보낸 마사초는 혼자 남아 열심히 벽화를 그리게 됩니다.



마솔리노, 아담과 하와, 1425 / 마사초, 아담과 하와, 1427


이때 마사초가 그린 그림에서부터 그가 로마에서 무엇을 느끼고 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침 마솔리노와 마사초는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하와'라는 주제를 동시에 그리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그림을 비교해 보면 자연스럽게 마사초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왼쪽은 마솔리노가 그린 '뱀에게 유혹당하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오른쪽은 마사초가 그린 '추방당하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40대에 접어든 노련한 마솔리노의 그림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 보입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서 있는 자세를 보면 어딘가 모르게 뻣뻣해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뻣뻣한' 스타일은 당시 종교화에서는 당연한 방식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성경의 인물이니 최대한 '신성한'느낌이 들도록 그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불상에서 볼 수 있는 경직된 표정과 자세를 떠올리면 비슷합니다. 

반면 마사초의 그림을 보면 '서투른' 마사초답게 테크닉은 다소 엉성한 느낌이 들지 만, 아담과 하와가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로 느껴집니다. 마치 평범한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한 것이죠. 하와의 표정을 보면 그녀는 세상을 잃은 듯 엉엉 울고 있고 그 와중에도 자신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며 터덜 터덜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 아담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등을 숙이고 얼굴을 감싸고 울며 있습니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낙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입장이니 정말 저렇게 슬퍼하지 않았을까요? 

어쨌든 두 사람은 같은 성경의 인물을 그렸지만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그렸습니다. 마사초는 아담과 하와를 신성한 성경 속 인물이 아닌 우리와 같은 땀냄새나는 인간의 레벨에서 그리려고 한 것이죠. 


예술가의 여주인 자연

마사초의 이런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훗날 마사초에 대해 평가했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피렌체의 토마소, 마사초로도 알려진 그의 완벽한 작품을 보고 있으면, 예술의 여주인인 자연을 통해 양분을 얻지 않는 다른 예술가들의 노력이 얼마나 헛된지를 보게 된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빈치가 말한 '자연을 통해 양분을 얻지 않는 다른 예술가들'은 다른 예술가의 작품을 모방하는 예술가들을 말합니다. 사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을 발전시킬 때 주변 동료들의 그림을 모방하고 연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인간은 경쟁하는 동물이니 주변을 의식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다빈치는 위대한 예술가들은 주변 인간의 손재주가 아니라 '예술의 여주인인 자연'을 모방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동료를 모방하는 예술가들은 옆으로 걸을 수밖에 없지만 자연을 모방하는 예술가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죠. 자연은 완벽하게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다빈치는 지오토가 위대했던 이유도 그가 스승 치마부에를 모방했기 때문이 아니라 베스피냐노의 언덕에서 양 떼들의 움직임을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사초는 지오토처럼 들판에서 양 떼를 모방할 기회는 없었지만 누구보다도 자연을 모방해야 한다는 인식을 정확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생각은 르네상스의 선배, 도나텔로와 브루넬레스키에게 물려받은 것입니다.



원근법의 본격적인 시작

마사초는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에게 또 다른 한 가지를 배운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선 원근법입니다. 브루넬레스키는 로마를 여행할 때 유적의 폐허를 스케치하다 선 원근법의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스케치를 하다 보니 모든 풍경은 멀어지면서 결국 한 점에 모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그리고 이를 그리드에 이미지를 그려낸 적이 있습니다. 정확히 어떤 이미지였는지는 남아있지 않지만 아마 위와 비슷한 그리드에 정확한 비율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는 회화는커녕 조각조차 일찌감치 포기하고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의 돔을 건축하는데 몰두 중이었습니다. 때문에 자신이 발견한 선 원근법을 구체적으로 회화에 적용시킬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마사초는 이 원리를 풀어서 자신의 그림에 적용시키게 됩니다. 


마사초,  공물 돈The Tribute Money, 1425-1428


위는 브랑카시 예배당에 마사초가 '추방되는 아담과 하와'에 이어서 그린 벽화입니다. 그림의 내용을 먼저 간단히 설명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와 베드로가 '세금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중앙의 그림은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독교인들은 교회에도 헌금을 내는데 국가에 세금을 내야 하느냐고 묻자 예수께서 세금을 내야 한다고 답하시는 상황이고, 왼쪽은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낚시를 하라고 하자 베드로가 물고기를 낚고 물고기 입에서 은전을 꺼내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맨 오른쪽에서는 베드로가 그렇게 찾은 은전으로 세리에게 세금을 납부하고 있습니다. 세 장면에서 주인공 베드로는 모두 모두 회색 머리에 파란 옷에 노란 천을 두르고 있습니다.  마사초는 이 성경의 이야기 세 가지 장면을 한 화면에 나누어서 표현했는데 당시의 벽화는 이렇게 여러 가지 내용을 하나의 그림 안에 분할해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마사초는 이 그림에서 정확히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소실점을 위치시켰습니다. 그리고 소실점을 중심으로 연결점을 밖으로 그어보면 오른쪽의 건물들이 선의 연장선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사초는 이렇게 처음으로 선 원근법을 본격적으로 회화에 적용시키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마사초는 원근법을 그저 활용한 정도에 그쳤습니다. 


마사초, 삼위일체Trinity, 1426-28

삼위일체Trinity

마사초의 새로운 시도가 빛을 발하는 작품은 바로 그의 대표작 '삼위일체'입니다. 그는 브랑카시 성당 벽화를 마치고 얼마 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 이 프레스코 벽화를 그렸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제목 그대로, 대좌 위에 하느님이 앉아계시고(성부) 그 아래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계시며(성자)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하얀 비둘기(성령)를 표현하여 기독교의 삼위일체Trinity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를 보면 왼쪽에는 성모 마리아, 오른쪽에는 성 요한이 앉아있고, 그리고 다시 그 아래에는 작품 제작의 기부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높이 6m에 달하는 이 그림을 통해 마사초는 인류 최초로 완벽한 '환영Illusion'을 구현했습니다. 르네상스의 분기점이라고 할 만한 예술이 탄생한 것이죠.

마사초가 그림을 완성한 뒤 성당에 들어가 이 그림을 처음 봤던 당시의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우선 이런 식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표현한 전례가 없었습니다. 삼위일체를 표현하는 방법 자체도 우선 혁신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그렇게 감탄하면서 그림을 보다가 문득 이 장면 전체가 조각이 아니라 그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사초는 상당히 자신감이 있었는지 인물들 뿐 아니라 제단마저 모두 그림으로 그려놓았는데 제단이 그림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혹시 뒤에 공간이 있는 건 아닌지 뒤쪽을 확인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곧 자신의 눈이 마사초에게 완전히 속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평면에 이 정도까지 착시가 일어나는 3차원의 공간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마사초는 한 번도 없던 그림을 그려낸 것이죠.


마사초는 상당히 의도적이었습니다. 그는 소실점을 그림의 아래에서 180cm 정도의 지점에 위치 치켰습니다. 위 그림에서 처럼 관찰자의 눈높이에 정확히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마사초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기계나 건축물을 설계하듯이 소실점의 정 중앙에 못을 박아 선을 그어가며 정확한 수학적 계산을 통해 환영을 구축했습니다. 

마사초의 삼위일체는 르네상스의 분기점이라고 할 만합니다. 원근법의 가능성은 이미 100년 전 지오토부터 있어왔지만 이를 이토록 정교하게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화가들은 수학보다는 문학적 감성이 뛰어난 자들이니까요. 하지만 마사초는 브루넬레스키가 발견한 선 원근법을 완벽하게 회화에 구현하여 회화가 새로운 길로 가는 문을 열게 됩니다.


마지막 1년

2년 뒤 헝가리에서 돌아온 마솔리노는 다시 마사초와 재회합니다. 마솔리노는 분명 마사초가 그린 아담과 하와, 그리고 성 삼위일체를 보았을 것입니다. 마솔리노가 이 새로운 그림을 보고 어떤 감상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후 둘은 재회 후 오랜만에 로마의 순례 교회인 산타 마리아 마조레Santa Maria Maggiore의 제단화를 같이 제작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마솔리노는 한참 어린 동생이자 예술밖에 모르는 곰 같은 동생을 질투하기보다는 그의 천재성을 인정해 주고 오히려 응원해 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1428년 6월, 마사초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마사초는 잠시 작업을 중단하고 로마로 떠났는데 아마도 지금 제작 중인 제단화의 제작 비용을 받기 위해 로마로 떠났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하필 그 해 여름 로마에서는 페스트가 다시 창궐했습니다. 그렇게 전염병에 휩쓸려 27살의 젊은 천재는 너무도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마사초에게 원근법을 알려주었던 브루넬레스키는 마사초가 죽었다는 소식에 "마사초의 죽음으로 우리는 지금 엄청난 상실감을 겪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그저 한 젊은 예술가의 죽음을 애도한다기보다는 가까운 이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듯합니다. 아마 순박하고 예술밖에 모르는 이 순수한 청년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마사초, 삼위일체의 아래 부분, 1426-28

나는 한때 당신이었다

그렇고 보니 마사초가 삼위일체 아래 제단을 그리면서 해골 위에 새겨 넣은 문구가 눈에 들어옵니다.


"IO FU[I] G[I]A QUEL CHE VOI S[I]ETE E QUEL CH['] I[O] SONO VO[I] A[N]CO[R] SARETE"

"나는 한때 당신이었고 또한 네가 언젠가 될 나다"


이 문구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나이 든 예술가의 통찰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차라리 어느 젊은 천재 예술가의 순수함이 느껴지는 문장이라고 해야 할까요. 결과적으로 이 문장은 땅에 묻힌 마사초의 마지막 숨결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그렇게 '27세 클럽'에 합류합니다. 하지만 그의 예술은 이후에도 살아남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6년의 활동 중에 전성기는 고작 3년이었으니 남긴 작품도 몇 개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후 거의 모든 피렌체의 예술가들은 그 몇 개의 그림을 보기 위해 브랑카시 예배당과 산타 마리아 노벨라 교회로 갔던 것이죠.



브랑카시 예배당

명단도 화려한데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필리포 리피, 로렌조, 기를란다요, 로소, 반디넬리, 폰토르모 등등 사실상 피렌체 전성기의 모든 예술가들은 그의 그림을 보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이들은 말하길 "좋은 예술의 계율이 무엇인지" 영감을 얻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 '계율'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아마 후배 예술가들은 단순히 원근법을 공부하러 찾아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그때쯤이면 원근법은 이론적으로 완전히 정립되어 책으로도 나와 있었으니까요. 이들은 마사초의 예술에서 다른 무언가를 배우려고 했습니다. 이들이 말한 '계율'은 어쩌면 예술밖에 모르는 한 예술가의 정신, 그리고 그의 열심에서 나오는 인간의 영을 움직이는 힘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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