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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Jun 11. 2024

불꽃남자, 로렌초 데 메디치

브론치노 '위대한 자, 로렌초의 초상' 1565-69


코시모의 고민

피렌체는 코시모의 리더쉽 아래 점점 르네상스의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공평한 세월아래 코시모도 점점 나이를 먹기 시작했다. 그런 코시모에게는 고민이 한 가지 있었다. 나의 시대도 곧 끝날텐데 나 다음으로는 누가 피렌체를 이끌어가야 할까? 코시모에게는 온화한 아들 피에로가 있었지만, 그는 몸이 너무 병약했다. 피에로의 별병은 'Il Gottoso'였는데 이는 '통풍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30대의 젊은이에게 사람들이 그렇게 짓궂은 별명을 지어 줄 만큼 아들의 몸 상태는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코시모는 언젠가부터 자신의 손자였던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로렌초는 항상 쾌활하고 에너지가 넘치며 지식을 사랑하는 소년이었다. 코시모는 어느 순간 자신이 로렌초와 대화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로렌초는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리더가 될 재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로렌초는 어린 나이에도 메디치 가문의 남자가 짊어져야 하는 짐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코시모는 이때부터 로렌초에게 자신이 세운 '플라톤 아카데미'의 학장 마르실리오를 가정교사로 붙여주었다. 혹시 피에로가 빨리 죽더라도, 로렌초가 다음 세대의 피렌체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도록 확실한 '지도자 교육'을 시켜놓은 것이다. 

코시모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아들 피에로는 코시모 사후 지도자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고작 5년 정도 통치를 더 할 수 있었을 뿐이다. 통풍이 심해져 사망한 것이다. 그나마도 병 때문에 대부분의 정무는 침대 위에서 봤다고 한다. 그렇게 피에로가 죽고 로렌초는 20살의 어린 나이에 피렌체의 지도자 자리를 물려받았다. 다행히 코시모가 설계해 놓은 '참주정' 시스템은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었다. 



보티첼리 '비너스와 마르스' 판넬에 템페라 1485


아름다운 두 형제

이렇게 피렌체에는 젊은 로렌초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가 전면 등장하게 된다. 로렌초는 나중에 '위대한자Il Magnifico'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피렌체 공화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한가지 단점이 있었다. 바로 외모가 다소 볼품없었다는 점이다. 아마 메디치 가문을 일으켰던 조반니의 유전자가 내려갔던 모양인지 키는 평균 키 정도에 짧은 다리,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을 가졌는데, 특히 코가 뭉개진 듯한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로렌초는 넓고 탄탄한 어깨, 그리고 상당한 운동신경은 가지고 있었다. 1469년에 피렌체에서는 마상시합이 열린 적이 있었는데 로렌초는 이 대회에서 20세의 나이에 우승을 했다.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는 이를 두고 로렌초가 "누가 봐줘서가 아니라 자신의 용기와 능력으로" 우승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메디치 가문의 위세로 상대방을 누른게 아니라 진짜 정정당당하게 실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로렌초의 뛰어난 운동신경은 그가 죽음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다. 

그런데 유전자가 어떻게 이상하게 갈라졌는지, 로렌초의 동생 줄리아노Giuliano de' Medici는 피렌체에서도 유명한 미남이었다고 한다. 줄리아노가 얼마나 미남이었는지 보티첼리는 그의 그림 <비너스와 마르스>에서 마르스의 모델로 줄리아노를 기용하기도 했다. 위 그림에서 오른쪽에 나른하게 누워있는 남자가 바로 동생 줄리아노다. 왼쪽의 비너스의 모델은 시모네타Simonetta Vespucci라는 피렌체 최고의 미인인데 보티첼리는 아마 시모네타가 피렌체를 대표할만한 미녀라면 줄리아노는 피렌체를 대표할만한 미남이라고 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렇게 젊은 두 형제가 등장하면서 피렌체 시민들은 하나같이 피렌체의 밝은 미래를 기대했다. 외모는 볼품없었지만 매력과 지성, 책임감을 골고루 갖춘 형 로렌초, 그리고 그의 아름다운 동생 줄리아노까지. 사람들은 두 형제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희망찬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피렌체 시민들의 그런 기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먹구름은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반 겐트와 베루게테 '교황 식스토 4세' 1474–76

세속교황 식스토 4세

역사에서 대표적인 '세속 교황'으로 알려진 인물이 있다. 그는 1471년 새로 즉위한 식스토 4세다. 그는 로마 교황청이 지금 처해있는 상황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교황은 더 이상 과거의 교황이 아니었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 이후 교황의 권위는 완전히 땅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유럽의 왕들과 귀족들 뿐 아니라 최근에는 심지어 서민들까지도 교황을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식스토 4세는 자신의 취임식 때 이를 몸소 경험했는데, 대관식날 기병행렬이 가다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충돌 사고가 생기자 사람들이 교황을 조롱하며 마차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개한테도 함부러 안던지는 돌을 '신의 대리인'인 교황에게 던지다니 확실히 세상은 바뀌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식스토 4세는 상당히 현실적이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교황의 권위는 이제 더이상 중세시대 수준으로 되살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권위'가 아닌 '실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마치 세속 군주처럼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식스토 4세는 재임 기간 중 행했던 대표적인 세속 정책은 족벌주의 정책이다. 추기경이나 주교 자리가 나면 공정하게 서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친척이나 최측근을 꽂아 넣는 식이다. 교황은 아마 자신이 앞으로 무슨짓을 하든 확실히 지지해 줄 강한 세력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교황은 어쨌든 기독교세력 전체의 '아버지'다. 유럽 기독교인 전체의 '아버지'가 되어야 할 사람이 이제 자신의 세력만을 위한 '아버지'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세속 군주처럼 차근차근 이탈리아 중부에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숨겨놓은 자식

그런데 그런 야심 찬 식스토 4세에게는 한 가지 이상한 소문이 있었다. 교황에게 사실은 숨겨놓은 자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름은 지롤라모 리아리오Girolamo Riario였는데 일단 표면적으로는 교황의 친척으로 알려진 남자였다. 그런 소문이 돌았던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식스토 4세가 뜬금없이 이몰라라는 작은 도시를 밀라노로 부터 구매하더니 지롤라모에게 넘겨주려고 나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교황이 갑자기 도시를 통째로 사서 지롤라모에게 넘기려고 하는 것을 보고 지롤라모는 사실 친척이 아닌 숨겨놓은 아들이며, 유산을 상속하는 느낌으로 도시를 넘겨주는 것이라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지롤라모가 진짜 교황의 숨겨놓은 아들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어쨌든 당시 이몰라를 소유하고 있던 밀라노는 이 거래를 긍정적으로 검토했다. 사실 밀라노 입장에서 이몰라가 산하의 도시라고는 해도 오히려 피렌체에서 더 가까운 도시였기 때문에 관리하기 어려운 도시였다. 그렇게 해서 밀라노와 교황은 총 40,000 플로린 금화, 요즘으로 치면 400억 정도의 가격에 이몰라를 거래하기로 합의했다. 

식스토 4세는 이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었던 메디치 은행에 대출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돌아가는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로렌초는 고민에 빠졌다. 원래 같으면 교황의 요청이니 두말 않고 돈을 빌려줬어야 하겠지만, 교황 식스토 4세는 지금까지의 교황들과는 너무 다른 느낌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교황이 피렌체 위쪽의 도시 이몰라를 갑자기 구입하고는 자신의 조카인지 자식인지 알 수 없는 인물을 꽂아 넣으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교황이 숨겨놓은 자식을 챙겨주려는 것이라면 차라리 다행이겠지만 혹시 세력을 키워 결국 피렌체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게 아닐까? 단순히 영향력만 끼치는 게 아니라 이몰라 다음 아예 피렌체를 먹으려고 하는 것을 아닐까? 이런 저런 고민이 많았던 로렌초는 핑계를 대면서 돈을 빌려주길 차일피일 미루게 된다. 

식스토 4세는 자신의 주거래 은행인 메디치 은행에서 돈을 빌려주지 않자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참다못한 교황은 로렌초에게는 니 맘대로 하라고 하고는 당시 메디치의 경쟁 은행이었던 파치 은행에서 돈을 빌려버렸다. 파치 가문은 피렌체에서 메디치 다음으로 큰 은행 가문이었다. 그런데 교황은 정말로 화가 많이 났던 모양이다. 지금껏 메디치 가문에게 주던 교황의 수익 관리권마저 파치 가문에게 넘겨버린 것이다. 로렌초 입장에서는 피렌체의 안전을 위해 신중히 행동한 것이었지만, 그 결과로 메디치 가문의 가장 중요한 고객이었던 교황청을 잃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이렇게 조반니 이후 거의 한 세기 동안 친분관계였고던 메디치와 교황청과 사이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파치 가문의 문장


파치 음모

그런데 여기서 이 상황을 보고 군침을 흘리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교황이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했을때 일을 맡아서 했던 파치 가문의 프란체스코Francesco de' Pazzi였다. 가만히 앉아있다가 돈벼락을 맞은 파치 가문은 갑자기 욕심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거의 한 세기 동안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일인자였는데 우리 가문이라고 피렌체의 일인자가 되지 못할 이유가 있나? 교황까지 등에 업은 마당에 이판사판 피렌체를 한번 뒤집어 볼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그는 정말로 메디치를 뒤엎을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프란체스코는 우선 자신과 함께 해줄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물망에 오른 인물은 교황의 숨겨놓은 아들로 추정되는 인물이자 이몰라의 신임 군주가 된 지롤라모였다. 그리고 다음 합류한 인물은 피사의 대주교 살비아티였다. 피사의 대주고 살비아티가 갑자기 합류한 이유는 그도 로렌초를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비아티는 교황 식스토 4세의 최측근이었는데 피렌체의 대주교로 가고 싶어 했다. 그런데 교황의 의도를 계속 의심하고 있던 로렌초는 피렌체의 대주교까지 교황의 최측근이 되는 것은 막고 싶었기 때문에 계속 부임을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피렌체의 대주교가 되지 못한 것이 억울했던 살비아티는 로렌초에게 분을 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프란체스코, 지롤라모, 살비아티 이렇게 3 총사가 모여 음모를 꾸미게 된다.

음모의 내용은 간단했다. 피렌체의 수장이자 메디치 가문의 수장 로렌초와 그의 동생 줄리아노를 동시에 죽여버리자는 것이다. 두 명을 반드시 동시에 죽여야 하는 이유는 로렌초만 죽일 경우 동생 줄리아노가 다시 권력을 이어받으면 메디치는 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3명은 교황 식스토 4세 에게 암살 계획을 보고했다. 그런데 식스토 4세는 아무리 메디치 가문이 얄밉다고는 한들 교황의 체면에 차마 메디치 가문의 형제들을 암살하라는 승인까지는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저 '침묵'했다. 말하자면 굳이 막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3명에게 교황의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로 읽히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3 명은 교황의 묵인 아래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암살팀과 선동팀

스타워즈나 마블시리즈 같은 영화를 보면 보통 적과 싸울 경우 '보스 암살조'와 '주력 부대 전투'로 나누어서 싸우는 것이 일종의 공식이다. 어벤저스가 타노스와 싸우는 동안 밑에서는 병사들끼리 싸우고, 스타워즈에서도 스카이워커가 다스베이더와 결투를 벌이는 동안 아래서는 제국군과 저항군이 싸우는 식이다. 파치 음모 사건에서도 비슷했다. 보스 암살팀과 대중 선동팀으로 나우서 행동한 것이다. 

이들은 세 가지로 나누어서 작전을 세웠다. 우선 가장 먼저 처치해야 할 사람은 당연히 로렌초와 줄리아노 두 형제였다. 이는 프란체스코 본인이 직접 맡기로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목표는 친 메디치 사람으로 가득 찬 피렌체의 의회였다. 피렌체 의회의 점령은 살비아티 대주교가 맡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목표는 피렌체 시민들을 선동하는 것이다. 이들을 잘 선동해서 메디치가문이 피렌체의 공화주의를 무너뜨리고 있으니 이제부터는 파치가문을 응원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많은 인원 동원이 필요했던 세번째 임무는 프란체스코의 삼촌이 파치 가문의 수장이었던 야코포가 맡기로 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거사의 날

1478년 4월 26일 부활절 주일 아침이 밝았다. 부활절은 크리스마스와 함께 서양에서 가장 큰 명절이다. 이들이 부활절을 거사의 날로 택한 것은 분명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암살만 한다면 조용히 처리하는게 좋겠지만 대중 선동도 같이 진행하려면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에서 암살하는것이 확실한 홍보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얼마 뒤 로렌초와 그를 따르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부활절 예배를 드리기 위해 브루넬레스키의 돔이 있는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도착했다. 로렌초는 피렌체 최고의 권력자인 만큼 많은 남자들이 로렌초와 함께 있었다.

그런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프란체스코는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발견했다. 로렌초와 나란히 같이 있어야 할 동생 줄리아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급하게 수소문을 해보니 전날 과음으로 몸이 안 좋아 집에서 쉬고 있다고 한다. 프란체스코는 급하게 줄리아노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리고는 빨리 일어나서 교회가서 예배를 드리자면서 깨우기 시작했다. 죽이기 위해 사람을 굳이 깨우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아마 프란체스코는 로렌초와 줄리아노를 동시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죽여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프란체스코는 줄리아노를 데리고 성당으로 왔는데 오는 길에서 마치 장난을 치듯 줄리아노의 몸을 계속 건드렸다고 한다. 누가 보면 젊은 두 귀족이 장난을 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프란체스코는 줄리아노가 속에 갑옷이라도 혹시 받쳐 입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몸을 건드렸던 것이다.

아직 숙취로 몽롱했던 줄리아노가 교회에 도착하고 곧 부활절 미사가 시작되었다. 예배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음모자들은 잔뜩 긴장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이들이 거사의 신호로 정한 것은 예배의 마지막을 장식할 성찬 예식이었다. 예배가 클라이맥스에 달했을 때 암살해 전시효과를 높이려고 한 것이다. 

신부가 높은 제단 앞에서 성경을 읽으며 빵을 들어 올렸다. 성찬 예식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자 프란체스코와 그를 돕기로 한 친구 베르나르도는 함께 단검을 뽑고 줄리아노를 향해 소리치며 돌진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다. 줄리아노는 피할 겨를도 없이 당해야 했다. 프란체스코의 친구 베르나르도의 칼날이 줄리아노의 머리에 그대로 명중했고 이는 치명상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전문 암살자들이 아니었다.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에 겁에 질려 너무 흥분한 나머지 프란체스코는 이미 죽어있는 줄리아노의 몸에 뛰어올라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며 줄리아노를 계속 찔러댔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19번 쯤 칼을 내리꽂았을 때 프란체스코는 이상하게도 자신의 허벅지에서 피가 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칼질을 하다가 자신의 허벅지를 찔러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변은 없었다. 이미 줄리아노는 사망한 뒤였다. 그렇게 꽃처럼 아름다운 청년이었던 줄리아노는 25살의 나이에 파치 가문에 의해 사망하고 만 것이

한편 앞쪽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던 로렌초는 아직 완벽하게 상황이 파악하지 못했다. 뭔가 뒤에 소란이 있나 싶어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을 때, 갑자기 성찬을 돕던 두 명의 사제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음모자들은 영리하게도 예배를 인도하는 사제들 중에 암살자를 숨겨놓은 것이다. 안토니오와 스테파노로 알려진 이 두 사제는 단검을 뽑아 로렌초의 등을 노렸다. 하지만 로렌초는 마상시합에서 1등을 했던 민첩한 무인이었다. 망토를 손으로 잽싸게 휘둘러 방패를 삼아 칼을 막았고 두 번째 칼이 내리치는 것은 간신히 피해 목에 스쳤다. 목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지만 다행히 치명타는 아니었다. 

로렌초는 얼른 뒤돌아 자세를 잡고 두 사제를 향해 칼을 꺼냈다. 두 사제는 계획이 틀어진 것을 직감했다. 평범한 사제에 불과했던 두 사람이 칼을 든 로렌초와 정면승부를 한 들 승리할 가망성은 없었기 때문이다.이 둘은 그대로 도망가 버렸다. 

사태를 파악한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은 일단 급한대로 로렌초가 대피할 장소를 찾았다. 그때 성구실 문이 눈에 들어왔다. 성구를 보관하는 방의 문은 청동이었기 때문에 두껍고 튼튼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진형을 짠 후 피를 흘리는 로렌초를 둘러싸고 성구실로 이동하여 문을 잠가버렸다. 그렇게 로렌초는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팔라초 베키오Palazzo Vecchio(시청실)


의회 점거

한편 살비아티 주교는 몇 명의 시종을 데리고 시청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살비아티 주교는 프란체스코가 로렌초와 줄리아노를 암살하는 동안 피렌체 의회의 곤팔로니에였던 페트루치를 암살할 계획이었다. 시청에 도착한 살비아티 주교는 지금 교황의 급한 전갈이 있다면서 페트루치에게 만날 것을 요청했다. 마침 식사 중이었던 페트루치는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페트루치는 지금 로렌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저 거리가 이상하게 평소보다 소란스럽다는 정도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식사를 마친 페트루치는 살비아티 주교가 기다리고 있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둘은 아무렇지 않게 일단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앉았다. 페트루치는 교황의 급한 전갈이 무엇인지 물어보았는데 어쩐지 살비아티 주교의 행동이 뭔가 이상하게 보였다. 살비아티 주교는 교황의 급한 전갈인지 뭔지는 말하지도 않고 어딘가 긴장을 한 듯 진땀을 흘리며 자꾸 이상한 말로 횡설수설만 했던 것이다. 게다가 마치 누굴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초조하게 문을 자꾸만 쳐다봤다.

살비아티 주교는 사실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이었다. 자신의 역할은 곤팔로니에를 일단 사무실까지 불러오는 것이었고 그동안 후속 병사들이 올라와서 집정관을 암살하고 시청을 접수한다는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아무리 기다려도 병력들이 올라오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에는 가끔 웃지 못할 상황에서 웃긴 상황이 발생하곤 한다. 사실 예정대로 병력들이 올라오지 못한 이유는 황당하게도 그들이 길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큰 도시의 시청 청사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요즘도 큰 시청에 가서 등본이라도 하나 떼려면 직원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어봐야 겨우 갈 수 있는데 마찬가지로 살비아티의 병력들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다가 이상한 문으로 들어가 버렸는데 그러다가 완전히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런 상황을 알 리 없는 살비아티의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식은 땀을 흘리며 병력이 올라오길 기다렸지만 어디선가 길을 헤메고 있는 병력들이 올라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뭔가 잘못된 것을 느낀 살비아티는 계획을 바꾸어 자신이 직접 곤팔로니에를 처리하기로 결심했다. 살비아티는 같이온 일행과 눈빛을 주고 받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칼을 꺼내 집정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미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있었던 페트루치는 다행히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급한 대로 주변에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을 찾아 방어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 손에 잡힌 것이 벽난로 옆에 있던 바베큐용 꼬챙이였다. 

그런데 곤팔로니에 페트루치도 로렌초처럼 젊은 시절 칼싸움을 꽤나 했던 모양이다. 페트루치는 바베큐용 꼬챙이로 공중을 가르며 몇합을 겨루더니 그대로 살비아티와 일행들을 제압해 버렸다. 사실 평생 미사나 드리던 주교가 쉽게 누굴 암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집에서 인형에 대고 칼질하는 연습이라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어쨌든 그렇게 곤팔로니에 암살과 시청실 점거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메디치 궁Palazzo Medici Riccardi

대중 선동

음모자들에게 남은 최후의 수단은 대중 선동이었다. 광장 선동 역할을 맡은 사람은 프란체스코의 삼촌이었던 파치 가문의 수장 야코포Jacopo de' Pazzi였다. 야코포는 자신의 병사들과 광장에서 자리를 잡고는 크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시민과 자유!(Popolo e liberta!)” 


이 외침은 전통적으로 피렌체 시민들이 권력에 대항할 때 사용하던 외침이었다. 공화주의 전통이 있는 피렌체 시민들은 이 외침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혁명을 일으키자는 선동 구호인 것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광장에 있던 사람들은 시큰둥하게 바라볼 뿐 아무도 선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마 '부활절 점심에 저 사람들은 뭐 하는 거지?'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시민들 생각에는 피렌체가 지금 메디치가를 중심으로 잘 굴러가고 있는데 갑자기 혁명이라니 황당했던 것이다. 

이때 메디치 궁전 옥상에서 갑자기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로렌초였다. 그는 성구실에서 도망쳐 나와 급한 대로 목에 응급처치를 한 후 연설을 시작했다. 목에 붕대를 감은 로렌초는 침착하게, 지금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나의 동생 줄리아노는 벌써 끔찍하게 암살을 당했으니, 폭도들의 손에 피렌체의 정의가 넘어가게 두지 말아 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이를 들은 시민들은 갑자기 외치기 시작했다.


"공 만세!(Evviva le Palle!)”


여기서 공이 의미하는 바는 메디치 가문의 문장의 빨간 공을 의미한다. 피렌체 시민들은 메디치 가문의 편이었던 것이다. "공! 공!(Palle! Palle!)"를 외치는 시민들에 의해 파치가문의 사람들은 오히려 점점 구석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마지막 시도였던 대중 선동마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드로잉, 줄리아노에게 일격을 가했던 베르나르도, 1479


복수의 시간

파치가의 음모는 이렇게 실패로 끝났고 시민들과 메디치 사람들은 이후 완전히 상황을 장악했다. 모든 음모의 중심이었던 프란체스코는 그대로 잡혀와서 알몸이 벗겨지고 시청 청사에 목이 매달렸다. 그 다음은 살비아티 주교였다. 그도 마찬가지로 목이 매달렸는데 그는 생의 집착이 강했는지 옆에 이미 죽어 매달려있는 프란체스코를 입으로 물고 잠시라도 더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고 한다. 하지만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던 그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리고 줄리아노에게 치명타를 가했던 프란체스코의 친구 베르나르도 또한 그대로 청사에 목이 매달렸다.

대중 선동을 맡았던 자코포는 대중 선동이 실패하자마자 바로 도망쳤지만 며칠 뒤 아펜니노 산맥에서 체포되어 피렌체로 호송되었다. 그도 다른 주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옷이 벗겨진 채로 목이 매달렸다. 다만 파치 가문의 수장이었던 만큼 자코포는 죽은 뒤에 훨씬 끔찍한 처분을 당하게 된다. 분노에 찬 시민들이 그의 시신을 도시의 자갈길에서 질질 끌고 다니며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시켰고 그의 머리를 잘라 파치 가문의 궁전 문고리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결국 야코포의 머리는 아르노 강에 던져졌다. 

이후에도 파치 가문의 사람들은 하나 둘 잡혀와서 처형을 당했다. 이때 음모의 여파로 쫓겨나거나 살해된  사람이 8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나마 어린 파치 가문의 어린아이들은 죽이지 않고 피렌체에서 영구히 추방하는것으로 결정되었다. 파치 가문은 말 그대로 '멸문지화'를 당한 셈이다.

덧붙이자면 보티첼리는 이 사건이 끝나고 얼마 뒤 로렌초의 의뢰로 피렌체 세관 건물에 이때 교수형을 당한 사람들의 대형 프레스코를 제작하게 된다. 하지만 나중에 이 프레스코화는 철거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볼 수 없다. 예술가들이 남긴 기록 중에는 다빈치가 그린 드로잉이 남아있는데 위 드로잉은 프란체스코의 친구이자 줄리아노에게 칼을 꽂았떤 그 베르나르도를 그린 것이다. 


재반격

그렇게 파치 음모 사건은 일단락 된다. 하지만 동생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로렌초는 그다음 대응책을 마련해야 했다. 음모 3인방 중 프란체스코와 살비아티 대주교는 죽었지만, 나머지 한 명 지롤라모는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치 음모를 뒤에서 '침묵'으로 지원해 주었던 교황 식스토 4세 또한 살아있었다. 지롤라모가 교황의 숨겨놓은 아들이라는 소문이 맞다면 '아빠와 아들'이 살아남아서 피렌체를 여전히 위협을 가하고 있는 셈이다. 교황은 특히 자신이 임명한 심복이었던 살비아티가 끔찍하게 이빨로 버티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교황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카드는 역시 '파문'이었다. 교황은 우선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 도시 전체에 파문을 내렸다. 그리고 이어서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로마의 메디치 은행을 비롯한 메디치 가문의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교황의 파문은 그전보다 상당히 힘이 약해졌지만 적어도 금융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파문을 당한 자의 빚은 사실상 갚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메디치 은행은 이때 많은 자금을 회수할 수 없었고 이 사건 이후로 메디치 은행은 점점 내리막길로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도 교황은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실력행사에 나서기 시작했다. 식스토 4세는 남쪽의 나폴리와 동맹을 맺고 아예 피렌체와 전면전을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로렌초의 예상대로, 처음부터 교황은 진짜 피렌체를 집어삼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나폴리는 입장에서는 급성장하는 경쟁도시 피렌체를 견제할 수 있으니 교황에게 협조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결국 전쟁이 시작되었고 이 전쟁은 2년 동안 이어지게 된다. 전쟁 과정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교황청과 나폴리의 협공에 피렌체 산하의 많은 도시들이 함락되었고 무엇보다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되면서 시민들의 삶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피난민이 급증했고, 하이에나 같은 도적떼들은 이때다 싶어 서민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왜 나쁜 일은 항상 겹쳐서 오는지 피렌체에는 역병까지 다시 창궐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을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로렌초는 어쨌든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세금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지금껏 메디치에 우호적이었던 시민들도 점점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피렌체는 순식간에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에 빠진 것이다. 



조르지오 바사리와 마르코 마르체티, '로렌초가 나폴리왕 페르디난도를 만나다' 1556-58


위대한 자, 로렌초

풍전등화의 피렌체를 두고 로렌초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피렌체를 구할 수 있을까? 그는 아마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압박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는 아직 20대 후반의 청년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손에 메디치와 피렌체 전체의 운명이 걸려있었던 것이다.

로렌초는 무슨 결심이었는지 아무도 모르게 바다Vada항구로 갔다. 그리고 최소한의 인원만 데리고 조용히 나폴리로 가는 배를 탔다. 그렇게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나폴리에 도착한 로렌초는 목숨을 건 배팅을 했다. 무장을 해제하고 나폴리의 왕 앞에 스스로 잡히는 선택을 한 것이다. 로렌초의 이 행동은 최 측근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혼자 나폴리에 들어가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1세와 담판을 지을 생각이었다. 전쟁중에 사령관이 무장을 해제하고 적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은 마치 불구덩이에 홀로 기어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관점에 따라서 이 행동은 무모하다 못해 지도자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나폴리 왕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로렌초는 그대로 죽은 목숨이었고 지도자를 잃은 피렌체는 절대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폴리 왕도 아마 상당히 당황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스스로 볼모가 된 로렌초는 인신을 구속당한 상태에서 이후 3개월 동안 끈질기게 나폴리 왕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1480년 4월 로렌초는 나폴리에서 풀려나 피렌체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그의 손에는 둘둘 말린 문서가 한 장 들려 있었다. 바로 나폴리 왕의 서명이 담긴 평화 조약서였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전쟁으로 잃어버린 피렌체의 영토들을 돌려준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두말할 것 없는 로렌초의 완전한 승리였다.

로렌초는 어떻게 나폴리왕을 설득할 수 있었을까? 사실 로렌초는 아무 생각 없이 나폴리에 몸을 던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동쪽에서 오스만 제국의 메흐메드 2세가 군사를 일으켰고 곧 나폴리에 상륙한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 따라서 나폴리가 곧 다가올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상대하려면 피렌체에서 군대를 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계산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로렌초는 식스토 4세가 지금까지의 교황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페르디난도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당신이 이런 식으로 교황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다가는 피렌체가 문제가 아니라 언젠가 당신네 나폴리도 위험해질 것이라는 점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그렇게 로렌초는 칼도 없이 홀몸으로 적진에 뛰어들어가 배짱 하나로 풍전등화에 놓였던 피렌체를 구한 것이다. 

피렌체의 시민들은 영웅의 귀환을 소리쳐 환영했다. 그는 위대한 자Il Magnifico라고 불릴 자격이 있었다. 수만의 군사력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혼자 적진으로 들어가 이루어 낸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소식을 접한 교황 식스토 4세는 격노하며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나폴리가 전선을 이탈하자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변국들도 지금 누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의미없는 전쟁을 일으킨 쪽은 분명 식스토 4세였고 로렌초와 시민들은 그저 피렌체를 지키고 싶어 했을 뿐이었다. 자신에 대한 여론이 점점 악화되고 있는 것에 더해 나폴리를 거쳐오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까지 신경 써야 했던 교황 식스토 4세는 어쩔 수 없이 피렌체와 평화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르네상스의 전성기

그렇게 해서 결국 로렌초는 피렌체의 평화를 지켜냈다. 증조 할아버지 조반니, 할아버지 코시모에 이어 로렌초는 가문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피렌체를 다시 한번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로렌초의 권력은 그저 혈통과 권위로 물려받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파치음모와 반피렌체 전쟁을 극복하면서 스스로 피렌체의 새로운 통치자로 일어선 것이다. 로렌초는 파치 가문의 음모 사건 이후 1492년 까지 14년동안 피렌체를 안정적으로 다스렸다. 그리고 로렌초의 시대에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최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로렌초에게는 지도자로서 심각한 단점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경제 감각'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는 반 피렌체 전쟁 이후에도 주변 나라들과의 동맹을 통해 피렌체의 평화를 지켜내며 정치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는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메디치 은행은 로렌초 시절부터 내리막길로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 유럽에 퍼져있었던 메디치 은행 분점들은 로렌초의 시대에 하나둘씩 폐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로렌초는 그렇게 메디치의 은행업이 기울어 가는 상황에서도 예술과 문화에 후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는 결국 메디치 은행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측근들은 메디치 은행이 어느정도 회복될 때 까지는 후원을 멈추시는게 어떻냐고 로렌초에게 조언했지만 로렌초는 후원을 멈추지 않았다. 로렌초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아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이를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이 후원들이 국가에 크나큰 영광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돈들은 적절히 잘 쓰였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나는 이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로렌초의 선택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확실한 것은 르네상스 전성기 최고의 천재들은 대부분 로렌초의 시대에 태어나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모두 로렌초의 영향력 아래 예술가로서 최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뿐 아니라 인류사 전체를 통틀어 봐도 가장 찬란하게 예술이 피어난 시대였다. 그리고 그 천재들이 인류 문화, 과학, 예술 발전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 보면 역사적으로도 근대Modern로 가는 길을 연 가장 중요한 시대였다. 만약 로렌초가 이 시기에 메디치의 은행업을 살리기 위해 예술과 문화에 후원했던 돈들을 회수했다면 피렌체의 르네상스가 지금처럼 빛날 수 있었을까? 메디치 가문은 살릴 수 있었겠지만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로렌초를 기점으로 내리막길로 갔을지 모를 일이다. 기회는 대머리라는 표현이 있다. 앞으로 왔을 때 잡아야지 뒤따라가며 잡으려 하면 잡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로렌초는 르네상스의 앞머리를 움켜쥐며 분명 인류 전체를 위해 좋은 일을 해 주었다. 

앞으로 소개할 4명의 예술가들,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는 피렌체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예술가들이다. 그리고 이들 뒤에는 위대한 자 로렌초가 있었다. 피렌체를 구원한 것 뿐아니라 인류 역사에 다시없을 위대한 예술가들이 탄생하도록 그 바탕을 마련해 준 로렌초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대한자Il Magnifico라고 불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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