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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Aug 01. 2024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화상, 1512, 종이에 분필


나눗셈을 못하는 천재

영국의 교육 컨설턴트 앤서니 피터 부잔Anthony Peter Buzan은 1995년 재미있는 연구를 발표했다. 역사 속의 유명한 인물들의 지능을 순위로 한번 매겨보려고 한 것이다. 그는 천재로 유명했던 사람들을 나름의 방법으로 지능을 측정한 뒤 총 100위까지 순위로 매겨놓았다. 그는 IQ와 GS(Genius Score) 두 가지 수치를 측정했다고 한다. 


IQ순위

1. 레오나르도 다빈치

2. 괴테

3. 윌리엄 셰익스피어

4.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5. 아이작 뉴턴

6. 토머스 에디슨

7. 토머스 제퍼슨

8. 아리스토텔레스

9. 아르키메데스

10. 브루넬레스키


GS순위

1. 레오나르도 다빈치

2. 윌리엄 셰익스피어

2. 괴테

4. 미켈란젤로

5. 아이작 뉴턴

6. 토머스 제퍼슨 

7. 알렉산더 대왕

8. 피디아스(그리스 조각가)

9.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0. 토머스 에디슨


개인적으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순위권 밖이라는 것이 다소 의아하지만, 어쨌든 눈에 띄는 부분은 두가지 측정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한 사람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였다는 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길래 르네상스를 넘어 인류사 최고의 천재로 선정된 것일까? 그는 정말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상상 속 괴물 같은 엄청난 존재일까?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믿기 어렵겠지만 1위의 천재로 뽑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높은 숫자의 나눗셈은 잘하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중학생만 되어도 쉽게 할 수 있는 나눗셈을 레오나르도는 어려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레오나르도는 라틴어를 잘 못해서 40대가 되어서야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라틴어는 당시 유럽에서는 공용어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현대로 치면 영어와 비슷하다. 우리나라만 해도 영어 잘하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만약 우리나라 최고의 천재라는 사람이 40살이 될 때까지 영어를 거의 못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실제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스스로를 '못 배운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천재는 천재인데 나눗셈과 라틴어를 못하는 천재였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강한 교육열 때문에 초등학생들이 미적분을 배우기도 하는 나라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면 영재 꼬맹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미적분을 풀고 있으니 이 나라는 천재가 매년 수천 명씩 나오겠구나 하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역사에 남을만한 천재는 거의 배출하지 못했다. 혹시 우리는 천재에 대해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귀족 청년과 시골 소녀의 사랑

그렇다면 천재 레오나르도는 어린시절 어떤 인물이었을까. 레오나르도의 아버지는 피렌체의 귀족이자 법률 공증인이었던 피에로 다 빈치Piero da Vinci였다. 이름에 '다 빈치'가 붙은 이유는 '빈치Vinci 출신'이라는 의미다. 15세기까지도 이탈리아에서는 성을 사용하는 방법이 보편화되지 않아 보통 출신지나 가문의 이름, 예를들면 de Medici를 끝에 붙이는 식이었다. 

1451년 6월의 여름날, 피에로는 빈치의 작은 마을 안키아노에서 한 시골 소녀를 만나게 된다. 카테리나라는 이름의 평범한 농부의 딸이었다. 귀족 청년과 시골 소녀는 어쩌다 보니 서로 눈이 맞았고 한여름밤의 꿈같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태어난 아이가 바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하지만 귀족이었던 피에르는 농부의 딸이었던 카테리나와 결혼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이미 다른 귀족 약혼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둘은 그렇게 헤어질 수밖에 없었고 레오나르도는 어쩔 수 없이 홀 어머니 밑에서 자라게 된다. 영화에 나올법한 씁쓸한 비극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두 사람의 관계는 이후에도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이런 일이 꽤 흔했는지 피에르 가족과 카테리나 가족은 이후에도 계속 친분을 유지했고 오히려 피에로의 아버지는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잘 시집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와주었다. 레오나르도 또한 아주 어릴 때는 어머니 집에서 자랐지만 조금 크고 나서는 아버지 집을 오가며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어린 시절 주로 친할아버지 집에서 할아버지와 삼촌들에게 읽기, 쓰기, 산수 같은 기본적 교육을 받게 된다. 다만 여전히 서자 출신이라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레오나르도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레오나르도는 어린 시절 아마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 자연을 친구삼아 지냈던 지오토처럼 다빈치 또한 시원한 바람이부는 빈치의 초원을 누비며 자연을 친구 삼아 지내지 않았을까.


동굴 속의 괴물

어느 날 레오나르도는 홀로 산에서 놀다가 우연히 어떤 동굴을 발견하게 된다. 호기심에 입구에 다다른 레오나르도였지만 막상 검은 동굴입구를 보자 갑자기 두려움이 몰려왔다. 동굴의 깊은 안쪽에서 갑자기 무서운 괴물이라도 나타나지 않을까 무서웠던 것이다. 그런데 마음 한쪽에서 강한 호기심 또한 느껴졌다. 그 공포스러운 괴물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강한 욕망 또한 생겨난 것이다.  

결국 욕망이 두려움을 이겨냈다. 레오나르도는 손으로 더듬어가며 어두운 동굴 깊이로 천천히 들어섰다. 그러자 그 안에는 이상한 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갑자기 두려움이 다시 몰려왔다. 이 거대한 뼈들은 무엇이일까.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다시 용기를 내어 가까이 다가갔다. 이 뼈들은 아마 고래의 뼈들이었던 모양이다. 레오나르도는 어른이 된 뒤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오, 네가 갈라진 지느러미와 세 개로 갈라진 꼬리로 채찍질하여 바다에 흰 물안개와 갑작스러운 폭풍우를 만들어 배를 뒤흔들고 물속에 잠기게 했을 때, 너의 무자비한 분노 앞에 겁에 질린 돌고래 떼와 큰 참치들이 도망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가...

오 시간이여, 피조물을 빠르게 약탈하는 자여, 당신은 얼마나 많은 왕과 얼마나 많은 민족을 파멸시켰습니까? 이 구불구불하고 깊은 움푹 파인 곳에서 이 경이로운 모습의 물고기가 죽은 이후로도 얼마나 많은 시대와 환경의 변화가 있었습니까?..."


이 어린 시절의 기억은 일생 레오나르도의 뇌에 각인된다. 자연은 때때로 우리에게 귀중한 경험을 가져다주고는 한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레오나르도는 다른 아이들처럼 학교에서 공부할 기회는 없었지만 대신 그렇게 산속을 뛰놀며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경이로움을 직접 경험할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한 기억은 그로 하여금 평생 자연을 궁금해하고 연구하도록 이끌게 된다. 


베로키오 <그리스도의 세례>, 나무에 유화, 1472–1475

베로키오의 견습생

1460년대 중반, 이제 막 소년 티를 벗은 레오나르도는 아버지를 따라 피렌체로 갔다. 하지만 서자 출신인 레오나르도는 아버지의 직업인 법률을 공부할 수는 없었다. 당시에는 변호사, 법률가, 공무원 같은 고위직들은 서자 출신들에게는 출세길이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피에로는 그가 어릴 적부터 미술에 재능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래서 피렌체에서 큰 공방을 운영하던 친구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에게 찾아가 레오나르도가 그린 스케치를 몇 장 보여주었다.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의 재능을 바로 알아보았고 레오나르도를 자신의 견습생으로 들였다. 이렇게 레오나르도의 예술 경력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 밑에서 총 7년간 훈련을 받게 된다. 베로키오의 곁에는 보티첼리나 기를란다요 같은 뛰어난 선배 화가들도 많았으니 아마 어린 레오나르도가 미술 공부하기는 최고의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레오나르도는 확실히 재능이 있었던 모양이다. 견습생 시절 이미 스승 베로키오를 뛰어넘었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견습생이 된 지 몇 년쯤 되었을 때, 베로키오는 자신의 그림 <그리스도의 세례>에서 레오나르도에게 천사의 얼굴을 그리도록 지시했다. 이는 당시 견습생들을 교육하는 방법이었는데, 그림에서 비교적 덜 중요한 부분을 그리도록 해서 실력을 키워주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의 말 대로 열심히 천사를 그렸다. 위 그림에서 가장 왼쪽에 있는 천사가 바로 레오나르도가 그린 천사다. 그런데 얼마 뒤 베로키오가 돌아와 레오나르도가 그린 천사를 봤는데 크게 놀랐다고 한다. 아직 어린 레오나르도의 그림이 자신을 벌써 뛰어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떤 것이다. 베로키오는 이때 자존심이 너무 상해 붓을 꺾고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기록을 살펴보아도 베로키오는 1475년을 전후로 거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다만 그가 정말로 '자존심이 상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베로키오가 이 시기부터 그림보다 수입이 좋은 조각 쪽에 더 집중했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하니까. 다만 레오나르도가 견습생 시절부터 이미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을 뛰어넘는 실력을 가지게 됐다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그냥 보기에도 레오나르도가 그린 천사는 생기가 넘쳐흐른다. 


동성애 소송사건

베로키오 공방은 요즘으로 치면 미술 대학같은 곳이니까 레오나르도에게는 포근한 둥지 같았을 것이다. 친한 선배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고 일도 하고 때로는 토론을 나누기도 하며 즐거운 시절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레오나르도는 1476년 어떤 소송 사건에 휘말리면서 베로키오 공방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바로 '동성애 소송 사건'이다 

소송 내용은 레오나르도를 포함한 4명의 젊은이들이 살터렐리Saltarelli라는 17세 소년에게 '부적절한 서비스'를 제공받았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일일까, 레오나르도는 정말 그 소년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당시 피렌체에서는 동성애가 생각보다 흔했다고 한다. 도나텔로, 보티첼리, 그리고 스승 베로키오도 모두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성애로 의심을 받았으니까. 레오나르도도 아마 그런 성향이 있었던 모양이다.

문제는 피렌체에서 동성애는 여전히 법적으로는 사형도 가능한 중죄였다는 점이다. 결국 구치소에 갇히게 된 레오나르도는 예술가로 꽃도 피워보기 전에 경력이 끝나버릴지 모르는 끔찍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운이 좋았다. 이 4명의 젊은이 중 한 명이 메디치 가문과 친척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피렌체의 수장이었던 로렌초는 이 문제로 골치가 아픈 상황이었다피렌체를 이끌고 있는 메디치 가문 사람이 다른 혐의도 아니고 남색 혐의로 감옥에 간다면 큰 망신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로렌초는 뒤에서 손을 조금 썼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후 이 사건은 '추가 혐의 없음'으로 기각되었다. 레오나르도는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동방박사의 경배> 1478-82, <광야의 성 재롬> 1480-82


자유로운 영혼

동성애 사건 이후 베로키오 공방을 떠나게 된 레오나르도는 독립하는 길을 택했다. 원래 레오나르도는 빈치의 초원을 뛰놀 때부터 자유로운 영혼이었으니 그에게는 독립하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레오나르도의 영혼이 자유로워도 너무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우선 독립한 레오나르도는 3개의 작품 의뢰를 받았다. 실력은 확실했으니 금방 의뢰가 들어온 것인데 레오나르도는 이 3개의 의뢰 중에 단 한 개도 완성하지 못하는 '참사'를 일으키게 된다. 하나는 아예 시작하지도 못했고, 그나마 시작한 다른 두 개는 끝내 미완성작으로 남겨 놓고 그냥 손을 떼 버린 것이다. 이때 미완성으로 남긴 두 작품이 위의 <동방박사의 경배>와 <광야의 성 제롬>이다.

레오나르도에게 작품을 의뢰한 사람 입장에서는 아마 황당했을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니까 의뢰한 것뿐이고 분명 돈도 지불 했는데 레오나르도가 도저히 그림을 그려주지 않았으니까. 이런 레오나르도의 성향을 일찌감치 알고 있던 사람은 바로 그의 아버지 피에로였다. 피에로는 아들이 첫 번째 의뢰를 받고도 도저히 완성을 하지 못하자 자신의 법률 전공을 살려서 레오나르도가 다음 <동방박사의 경배>를 계약할 때는 굉장히 상세한 계약서를 만들어 주었다. 어떻게든 계약서로라도 강제해서 레오나르도가 붓을 들게 만들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레오나르도는 요지부동이었다.

레오나르도가 아무리 자유로운 영혼이라지만,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림을 완성시키지 않은 것일까? 르네상스의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는 레오나르도의 미적 감각이 '너무 세밀하고 초월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레오나르도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예술은 완벽하지만 아직 자신의 기술이 부족해 완벽하게 구현할 수 없으니 차라리 포기해 버렸다는 것이다. 

말이야 좋지만 어쨌든 의뢰자들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었을 것이다. 이후에도 이런 레오나르도의 성향은 바뀌지 않았다. 실제로 다빈치는 죽을 때까지 수많은 '미완성작'을 남긴 것으로 악명이 높은데 일생동안 고작 16점 정도의 그림밖에 완성시키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말도 안 되게 적은 숫자인데, 70세 가까이 살았으니 사실상 거의 '놀았다'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참고로 근대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거의 900점에 달하는 그림을 남긴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노트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물의 소용돌이 연구>


코덱스 시리즈

그렇다면 레오나르도는 그림은 그리지 않고 정말 놀았던 것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레오나르도는 독립한 이후부터 그림 보다는 주로 자기가 연구 하고 싶은 것들을 혼자 연구하기 시작 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왕성한 호기심은 산속에서 고래의 뼈를 발견했을 때 부터 이미 나타났었다. 자유로운 영혼 레오나르도는 세상의 모든 현상과 원인이 궁금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부터 노트에 자신이 궁금해하던 것을 적어놓기 시작했다. 


새는 어떻게 날지?

딱따구리의 혀는 어떻게 작동하는 거지?

하늘은 왜 파란 거지? 

태양의 크기를 있을까? 

물은 왜 소용돌이치는 거지? 

사람들은 왜 하품을 하는 걸까? 


이 시대는 아직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나타나기도 전이다. 레오나르도는 아직 세상에 과학이 탄생하기 전부터 과학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늘이 파란걸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 진짜 이유를 궁금해했던 사람이 바로 레오나르도였다.

당연히 이 시대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리라는 그림은 안 그리고 스스로 연구를 시작했던 것이다. 우선 그는 자연을 면밀히 관찰했다. 하늘을 관찰하고, 새를 관찰하고, 사람을 관찰하고, 물을 관찰하고 가능한 모든 것을 관찰하고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그렇게 남겨놓은 기록들이 앞으로 그의 일생을 관통하게 될 '코덱스Codex'시리즈다. 레오나르도는 평생 스스로 연구한 내용을 기록하여 총 20,000장 이상의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그 중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약 7,200장 정도인데 그가 남겨놓은 이 문서들을 나중에 그의 제자였던 멜지Francesco Melzi가 분야별로 정리해 놓게 된다. 문서들의 주제를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코덱스 아틀란티쿠스Codex Atlanticus - 해부학, 천문학, 식물학, 화학, 지리, 수학, 역학, 기계학, 조류 등

코덱스 레스터Codex Leicester - 물의 움직임에 관하여 

코덱스 아룬델Codex Arundel - 역학 및 기하학

코덱스 윈저Codex Windsor - 해부학

코덱스 우르비나스Codex Urbinas - 회화


코덱스는 '오래된 문서'라는 뜻이고 뒤에 붙은 이름은 주로 나중에 이 문서를 소유한 사람들에 따라 이름이 붙은 것이다. 예를 들어 '코덱스 레스터'는 레스터 백작이라는 사람이 구매한 레오나르도의 문서들이다. 여기서 코덱스들의 내용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왜 나눗셈도 제대로 못하는 그를 '천재'라고 하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코덱스 레스터' (천문학) 


레오나르도는 산에서 고래 화석이 발견되는 것을 보고 산이 고대에 해저에 있다가 점차 솟아올라 산을 형성했다고 추론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산에서 고래뼈가 발견되면 그저 신나게 가지고 놀 뿐이겠지만 레오나르도는 그 원인을 추론 했던 것이다. 참고로 '판 구조론'이 과학 이론으로 만들어진 것은 19세기다. 레오나르도는 이미 15세기에 그런 추측을 한 것이다. 또 식물을 관찰하던 레오나르도는 나뭇잎이 가지에 무작위로 배열되지 않고 수학적 법칙에 따라 배열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실제로 나뭇잎들은 피보나치 수열에 따라 자라나는데 보통 더 많은 양의 햇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또한 근대 식물학자들보다 3세기나 앞선 발견이다. 그리고 하늘을 관찰하다가 태양을 '스스로 빛나는 구체'라고 가정하고 달은 태양빛을 반사하고 있기 때문에 밝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초승달의 어두운 부분에서 보이는 희미한 밝음은 지구에 반사된 빛에 의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심지어는 행성들이 '자석처럼 끌어당긴다'는 관념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멀리는 중력까지 예측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레오나르도는 수백 년을 앞선 과학적 발견들을 그의 '관찰과 직관'에 의해 해내었던 것이다. 앞으로 몇 세기동안 레오나르도의 추론들은 수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토론거리가 될 것이다. 

이런 태도가 바로 그가 진정한 천재인 이유다. 천재는 단순히 수학계산을 빨리하는 '머리 좋은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천재는 아무도 새로운 생각해 낼 수 있는 '창의력'과 복잡성에서 원칙을 찾아낼 수 있는 '직관'을 가진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생각이 꽃 피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레오나르도의 연구들은 근대의 발전을 더 앞당기게 만들어 주었고 사람들에게 세상 모든것에 의문을 품고 연구하는 태도를 알려주었으니 레오나르도는 가장 중요한 천재 중 한 명으로 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가지 특이한 점은 레오나르도는 이 내용들을 '거울 쓰기 기법'으로 썼다는 것이다. 이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글자를 뒤집어서 쓴 것인데, 코덱스를 읽으려면 마치 암호를 해독하듯 거울로 비춰야 읽을 수 있다. 다만 레오나르도가 왜 그렇게 썼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레오나르도는 뭐든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 <암굴의 성모 1> 1483–1486, <암굴의 성모 2> 1495–1508, 패널에 유화


밀라노로 

그러던 와중 1482년, 레오나르도는 로렌초의 부탁으로 밀라노의 루도비코 공작에게로 파견을 나가게 된다. 당시 피렌체의 예술은 전 유럽에 그 명성이 이미 알려져 있었다. 다른 나라들은 아직 딱딱한 고딕 종교화를 벗어나지 못하는 동안 피렌체는 도나텔로, 보티첼리 같은 걸출한 예술가들을 배출하며 유럽에서 최고 수준의 미술들을 창조해내고 있었으니까. 로렌초는 예술을 일종의 외교적 무기로 활용하려고 했다. 친해질 필요가 있는 밀라노나 교황청 같은 곳에 피렌체의 예술가들을 파견한 것이다. 보티첼리는 이때 교황 식스투스 4세를 위해 잠시 로마로 떠났고 레오나르도의 스승 베로키오는 베네치아로 갔다. 그리고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떠나게 된다. 로렌초 입장에서 레오나르도를 밀라노로 보낸것은 이래 저래 좋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재능이야 일찌감치 알았지만 그림을 주문해봐야 도통 완성하지 못하니 차라리 밖에 외교 카드로 써먹으면 딱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 가서도 여전히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밀라노에서 처음 의뢰를 받은 작품은 <암굴의 성모Virgin of Rocks>였는데 이 작품은 무염시태Immaculate Conception 수도회가 산 프란체스코 그란데 교회 예배당에 올릴 제단화로 의뢰한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다행히 이번에는 작품을 완성시키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또 무슨생각이었는지 의뢰인들의 의견은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원래 수도회 측에서는 "성모의 치마는 진홍색에 금으로 수를 놓고 아기 예수는 천사들과 여러 예언자들에 둘러 쌓여있어야 하고..." 등등 그림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요청했는데 레오나로드는 그런 요청 따위는 싸그리 무시하고는 자기 마음대로 그려버린 것이다. 위 그림을 보면 레오나르도는 요청했던 예언자들과 천사들은 전혀 그리지 않았고 성모 마리아와 천사, 그리고 아기예수와 아기 세례요한 이렇게 4명의 등장인물이 마치 소풍을 나온 듯한 느낌으로 그렸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주인공인 아기 예수와 아기 요한이 구분하기도 어려웠다는 점과 아기 예수께 손가락질을 하는 천사가 상당히 불경하게 보인다는 점이었다. 

아마 수도회 사람들은 황당했을 것이다. 분명 돈은 다 줬는데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우리 요구를 따르지 않는거지? 돈 준 사람의 요구대로 그리는 것은 당시에는 너무도 당연한 관행이었다. 우리가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했는데 홍차가 나온다면 이해할 수 없는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이 문제는 결국 소송까지 가게 된다.

소송전으로 가면 당연히 레오나르도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레오나르도는 그림을 다시 그려 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게 된다. 그래서 두 번째 그려준 버전이 오른쪽 그림이다. 우선 레오나르도는 수도회의 요구대로 누가 아기예수와 아기 세례요한인지 확실히 구분하기 위해 아기 세례 요한의 상징인 '나무 십자가 지팡이'를 추가하였고, 예수를 향한 천사의 불경해 보이는 손가락 또한 없애 주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새롭게 그린 두 번째 버전이 첫번째 그렸던 버전과 사실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아마 수도회 사람들은 레오나르도가 마음에 안들기는 했어도 그의 첫번째 그림이 내심 마음에 들기는 했던 모양이다.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확실히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의 종교화를 훨씬 뛰어넘는 고급스러움이 있었던 것이다.  


보티첼리와 레오나르도의 차이


이 고급스러운 느낌은 그의 전매특허인 '스푸마토Sfumato'라는 기법 덕분이다. 레오나르도는 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에 몰두했지만 그 와중에 물론 예술에 관한 연구도 있었다. 당시 화가들의 문제점 중 하나는 그림들이 마치 나무조각처럼 딱딱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이는 예술가들의 재능이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고 오히려 그들이 너무 과도하게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었다. 예를들어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보면 눈썹과 머리카락 한올 한올을 다 묘사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자연을 그런식을 보지 않는다.

레오나르도는 늘 그러하듯 자연을 관찰하다가 자연에는 정확한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래서 그는 그의 메모에 이렇게 기록했다.


"선은 물체의 표면의 일부도 아니고, 그를 둘러싼 공기의 일부도 아니다."

"선은 그 자체로 물질이나 실체가 아니며 실제하는 무언가라기 보다는 상상의 아이디어에 가깝다. 이것이 선의 본성이며 선은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스푸마토는 '연기와 같이'라는 뜻이다. 레오나르도는 어떤 사물을 표현하기 위해서 예술가는 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을 없애야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경계선 부분을 선이 아닌 마치 연기처럼 뿌옇게 뭉게버리는 방법을 개발한 것인데 이것이 스푸마토 기법이다. 결과적으로 레오나르도의 그림은 그 이전의 화가들 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확실히 보티첼리와 레오나르도의 그림을 보면 레오나르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렸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기법은 이후 근대를 거쳐 현대까지도 예술가들이 사용하는 기법으로 남게된다. 그는 열심히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지만 고작 몇점의 그림으로 후대의 예술에까지 계속 이어지게 될 중요한 업적을 남겨 주었으니 확실히 천재는 천재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노트 <자궁 내 태아에 대한 연구> <내장기관 연구>


해부학 연구

레오나르도는 남이 시키는 일은 하기 싫어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꼭 하는 사람이었다.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해부학에는 진지하게 몰두하기 시작했다. 원래 피렌체의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는데 해부학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가 쓴 '회화에 관하여'에서 이미 강조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그릴 때 누드를 먼저 그리고 옷을 입혀야 한다. 그리고 누드를 그릴 때 우리는 먼저 뼈 구조를 그리고 그다음 근육, 그리고 피부를 덧 입히는데 그렇게 그리면 속에 있는 근육을 다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레오나르도가 밀라노로 와보니 밀라노는 피렌체보다 해부학이 훨씬 발달해 있었다. 당시 밀라노는 의학 쪽에서는 피렌체보다 앞서 있었다고 한다. 이때다 싶었던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의 파비아 대학으로 가서 의사들로부터 해부학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고 직접 시체를 해부하면서 공부했다. 그리고 해부학에 관한 글과 그림들을 기록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인체를 자세히 그림으로 남긴 것은 의학과 예술 양쪽에서 레오나르도가 역사상 최초였다.  

레오나르도는 평생 30구 이상의 인체를 해부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예상할 수 있겠지만, 레오나르도는 단순히 그림을 더 잘 그리기 위해 해부학 연구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의 몸의 작동 방식 자체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심장이 어떻게 피를 뿜어내는지, 뇌, 폐 같은 장기들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정말로 연구해보려고 한 것이다. 당연히 이렇게 연구하여 남긴 스케치와 기록들은 예술 뿐 아니라 향후 의학 발전에도 도움을 주게 된다. 


기마상, 날로 먹은 10년

애초에 레오나르도가 밀라노로 온 이유는 로렌초의 부탁으로 밀라노의 수장 루도비코를 돕기 위함이었다. 루도비코는 당시 빈약했던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 줄 멋진 기마상을 만들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를 불렀다. 아마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가 어떤 스타일의 인물인지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던 모양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에게 기미상을 부탁하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대우를 해 주었다. 기마상은 아무래도 말이 중요하니까 말을 마음껏 연구할 수 있도록 궁정 마구간도 개방해 주었고 넓은 거처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를 도와줄 2명의 조수와 견습생들까지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 금액을 계속 지불해 준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성심 성의껏 기마상을 만들어 주었을까? 역시나 그렇지 않았다. 이 때다 싶었던 레오나르도는 그 돈으로 평소 자기가 하고 싶었던 연구들을 마음껏 하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의 관심은 '기마상'이 아니라 '말의 육체' 즉 해부학이었다. 그는 기마상을 만든다는 핑계로 말을 해부하기 시작했고 이와 관련되어 거의 논문 수준에 가까운 수많은 드로잉과 연구자료를 남기게 된다. 그리고 만들라는 기마상은 제쳐두고 말을 키우면서 말들에게 자동으로 먹이를 주는 기계나 말 똥을 자동으로 물로 청소해 주는 기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제자들과 평소부터 관심이 있었던 '날틀', 즉 하늘은 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레오나르도는 이 시절 언덕에서 날틀 시험도 했지만 제자의 다리가 부러지는 것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물론 이 또한 결과적으로는 인류에게 큰 도움을 주게 된다. 비록 직접적인 비행에는 실패했지만, 공기 역학과 비행에 관한 수많은 드로잉,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이 날 수 있다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던 그 시대에 인류 비행 실험의 스타트를 끊은 셈이니까.

어쨌든 이렇게 레오나르도가 신나게 실험을 즐기는 동안 밀라노의 수장 루도비코는 이런 상황은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덧 그렇게 10년이 흘렀는데도 기마상에 전혀 진척이 없자 루도비코는 로렌초에게 편지를 한 장 보냈다. 


"혹시 이런 일에 능숙한 다른 예술가를 한 두 명(다시) 보내 줄 수 없겠소? 내가 레오나르도한테 이 일을 맡기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이 친구는 이 일을 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소..."


편지를 받은 로첸초는 아마 모든걸 안다는 듯이 빙그레 웃고 말았을 것이다. 어쨌든 레오나르도도 눈치가 없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러다가는 자신이 해고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래서 일단 급하게 찰흙으로 된 기마상을 먼저 만들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기마상 연구 드로잉> 1490


레오나르도는 예술 작품보다는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역시 작품을 시작만 하면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급하게 제작한 찰흙 기마상은 역대 가장 큰 기마상이었는데, 도나텔로가 만들었던 4m의 가타멜라타 청동 기마상보다 훨씬 큰 7m의 높이에, 무게는 100톤이 넘어가는 거대한 사이즈의 기마상이었다.  레오나르도의 역동적인 기마상이 공개되자 밀라노 시민들은 그의 실력과 기마상의 위엄에 압도당했다. 이 를 본 밀라노의 시인들은 다음과 같이 찬양했다고 한다. 


"그리스인과 로마인, 그 누구도 이보다 위대한 기마상을 본 적이 없다."

"격렬하게 일어섰고 거칠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기마상은 완성되지 못했다. 프랑스의 샤를 8세가 갑자기 밀라노로 쳐들어오는 바람에 청동 기마상 계획이 취소된 것이다. 전쟁이 급했던 밀라노는 청동 기마상에 사용해야 할 모든 청동을 징발하여 대포를 만드는 데 사용해버렸다. 아마 레오나르도는 속으로 환호를 질렀을 것이다. 10년 동안 기마상은 안 만들고 하고 싶은 일들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마상을 그만 두어야할 확실한 핑곗거리가 생겨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루도비코 입장에서는 결국 10년 동안 돈과 시간만 날려버린 꼴이 되었다. 어쨌든 이 프로젝트의 실패는 객관적으로 봐도 아쉽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레오나르도야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를 실컷 했으니 아쉬울 게 없었겠지만, 후대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밀라노뿐 아니라 르네상스 전체에서 최고가 될 뻔한 기마상의 탄생을 놓친 셈이니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 <흰 족제비를 안은 여인> 1489-91, 페널에 유화


물론 레오나르도가 완전히 놀기만 한 것은 아니다. 레오나르도는 루도비코의 애첩이었던 세실리아의 초상화를 한 장 그려주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이 레오나르도가 남긴 4점의 여인 초상화 중 하나인 <흰 족제비를 안은 여인>이다. 루도비코 가문의 상징이 흰 족제비였으니까 이 그림은 나름 레오나르도의 가벼운 유머가 담긴 작품이다. 밀라노 최고의 지도자 루도비코(족제비)가 그의 애첩 체칠리아에게 안겨있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도 이번에는 재빨리 완성해 주었던 것을 보면 레오나르도도 루도비코에게 내심 미안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최후의 만찬

그런데 밀라노의 수장 루도비코는 찰흙 기마상과 <흰 족제비를 안은 여인>을 그린 레오나르도의 실력에 반하게 된다. 10년 동안 돈을 쏟아부었는데도 결과물이 안 나왔으면 레오나르도를 내칠 법도 한데, 루도비코 다시 한번 레오나르도에게 큰 일을 맡긴 것이다. 이때 의뢰한 작품이 바로 레오나르도의 대표작이자 르네상스 역사상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최후의 만찬>이다. 

<최후의 만찬>은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 벽을 장식할 벽화였다. 루도비코는 새로 지은 이 성당을 자신의 가문의 영묘로 사용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아마 건물 내부 이곳저곳을 멋진 벽화로 장식하려고 했던 것이다. 

사실 이번 작품까지도 말아먹는다면 레오나르도는 루도비코에게 멱살을 잡혀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청동 기마상이야 어쨌든 대포 만드느라 청동을 구할 수가 없었다는 핑곗거리라도 있지만, 이번에는 그런 핑계도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레오나르도가 이번 벽화만큼은 그래도 성실하게 작업해 주었을까? 그러나 역시 레오나르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차 레오나르도는 자기 맘대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벽화를 보통 프레스코Fresco라는 방식으로 그렸다. 프레스코는 Fresh(신선한)라는 뜻인데, 쉽게 설명하자면 하얀색 시멘트를 벽에 바르고, 그 시멘트가 마르기 전에(신선할 때) 붓으로 물감을 스며들게 해서 그리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시멘트를 부수기 전까지는 영구 보존이 가능하기 때문에 벽화로는 최고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프레스코는 일단 그리고 나면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다. 시멘트 벽이 굳어버리고 나면 부셔서 뜯어내기 전에는 수정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레오나르도는 이렇게 중간에 수정할 수 없는 프레스코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참 고민하던 레오나르도는 결국 스스로 벽화 그리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하기로 했다. 이런저런 실험 끝에 석유에서 나온 검댕과 옻나무 기름, 그리고 젯소를 섞은 물질을 벽에 바르고, 계란 노른자를 안료에 섞어서 그리는 템페라 방식까지 결합한 새로운 벽화 방식을 개발한 것이다.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수정이 불가능한 전통 프레스코를 극복한 최고의 방식이 될 것입니다. 결과는 과연 어땠을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1495-1498, 템페라 벽화


레오나르도는 1495년부터 98년까지 약 4년 정도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그림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은 두말할 것 없었지만 문제는 그림이 거의 완성될 때쯤에는 왼쪽 아래쪽에서부터 물감이 벽과 분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레오나르도도 속으로 '아 이거 망했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어찌어찌 완성은 했지만 그림은 밑에서부터 계속 후두둑 뜯어지고 있었다. 조르조 바사리는 나중에 20년 정도가 지난 시점에서 이곳에 방문해 그림을 보았는데 너무 훼손되서 '그저 형체는 알아볼 수 없는 얼룩 덩어리만 남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 루도비코는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레오나르도를 칭찬했겠지만 나중에 그림이 점점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는 마음이 착잡해졌을 것이다. 물론 그때쯤이면 레오나르도는 이미 밀라노를 떠나 피렌체로 돌아간 상황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 그림은 르네상스 최고의 작품 중 하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최후의 만찬'이라는 주제는 중세 때부터 수많은 화가들이 그려왔지만 이보다 더 뛰어나게 표현한 화가는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최후의 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가 처형되시기 전날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만찬을 나누시다가 유다가 자신을 배신할 것임을 알려주시는 상황을 그린 것이다. 우선 레오나르도는 그림 전체의 소실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위치시켰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있어야 할 둥근 후광을 없앴는데 대신 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배치했다. 후광을 빛이 들어오는 창문으로 대체한 것인데 중세의 도상학은 완전히 없애지 않으면서 르네상스의 자연주의Naturalism의 방식과도 충돌하지 않는 기가 막힌 방식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리고 레오나르도는 성경을 읽고 인물 한 명 한 명의 성격, 몸짓, 상황을 다 자기만의 해석을 더해서 그리려고 했다. 다소 체념한 듯 팔을 내려뜨린 예수 그리스도, 죄책감을 느끼는 유다, 칼을 들고 흥분하는 다혈질 베드로, 당시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성경을 읽고 상상했던 얼굴 모델을 찾기 위해 계속 밀라노 시내를 돌아다녔는데 이를 지나가다 우연히 본 수도원 원장은 루도비코에게 레오나르도가 그림은 안 그리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노는 것 같다고 불평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자기가 하고싶은 일에는 진심이었던 레오나르도였다. 레오나르도는 결국 지오토가 그렸던 최후의 만찬을 넘어선 최고의 <최후의 만찬> 벽화를 그려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루도비코는 고생 끝에 대박을 터뜨린 셈이다. 최후의 만찬은 레오나르도가 이상한 방식으로 그리는 바람에 지금까지 수많은 복원과정을 거쳐야 했고 심지어 지금까지도 계속 복원과 관리를 해야 하는 번거로운 그림이지만 어쨌든 루도비코 덕분에 밀라노는 르네상스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최후의 만찬>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현대의 밀라노 시민들도 어마어마한 관광객을 이 벽화 한개로 유치하면며 돈을 벌고 있으니 후세들에게도 고마운 일을 해준 셈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1503-06, 페널에 유화

모나리자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최후의 만찬>을 완성하고 곧 밀라노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밀라노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는 전쟁을 피해 만토바와 베네치아를 잠시 여행했다가 1500년 고향 피렌체로 돌아왔다. 거의 20년 만에 돌아온 고향, 그가 예술보다는 연구에 몰두하는 사이 어느새 그도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피렌체는 그 사이에 너무도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피렌체의 화려한 전성기를 이끌었던 로렌초는 이미 사망했고 이어 사보나롤라의 짧은 집권이 있었지만 그 또한 화형당하는것으로 사라졌다. 로렌초 이후 메디치 가문은 점점 내리막길로 가고 있었는데 메디치가 힘이 빠지자 어쩐지 피렌체 도시 전체도 힘도 잃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피렌체는 마지막 힘을 짜 내듯 르네상스의 또 다른 천재를 키워내고 있었다. 레오나르도의 라이벌,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다.

피렌체로 돌아온 레오나르도는 프란체스코 델 지오콘도Francesco del Giocondo라는 어느 귀족 상인으로부터 초상화 한 장을 주문받았다. 자신의 아내였던 리사Lisa를 그려달라는 주문이었다. 이 초상화가 바로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초상화 <모나리자>다. 

<모나리자>라는 제목은 귀부인의 호칭인 '모나Mona'에 '리사Lisa'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모나리자>는 명실상부 인류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려진 모든 그림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보러 가고, 가장 많은 해석 글이 존재하고, 가장 많이 패러디되었으니까.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그림이 왜 그토록 유명한지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이 초상화는 그저 평범한 귀부인의 초상화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최후의 만찬>처럼 스케일이 큰 것도 아니고, 어떤 비밀스러운 수수께끼가 숨겨져 있는 것도 아니고, 역사에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것처럼 특별히 아름다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그림은 유독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왜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는 이토록 유명한 것일까. 만약 이 그림의 독특한 점을 한가지 꼽아본다면 이 그림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스스로 스토리를 생산해 냈다는 점이다. 마치 너무도 평범한 외모를 가졌지만 기구한 운명 때문에 이리 저리 휩쓸려 다닌 비극의 여주인공처럼. 우선 레오나르도는 <모나리자>를 주문자였던 상인에게 돌려 주지 못했다. 주문자에게 주지 못한 이유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몇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는데 우선 레오나르도가 늘 그랬듯 결국 완성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모나리자>는 눈썹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데, 눈썹이 일부러 없는 것이 아니라 레오나르도가 눈썹 부분을 완성하지 못한것이고 결국 미완성이기 때문에 주문자에게 돌려주지 못했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완성은 했지만 주문자가 받기를 거절했다고 보기도 한다. 이 또한 눈썹 때문인데, 당시에는 행실이 좋지 못한 여인들이 눈썹을 밀고 다녔다고 한다. 상인 입장에서는 자기 아내를 마치 행실이 나쁜 여자인 것처럼 묘사했으니 화가 나서 주문을 취소했다는 것이다. 또 어떤 추측은 레오나르도가 이 그림을 그려놓고 스스로 너무 마음에 들어서 돈도 포기하고 그냥 이 그림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결국 주문자에게 가지 못한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는 평생 가지고 다니게 된다. 이 그림이 지금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이유가 이것인데, 나중에 프랑스로 갈 때 들고 갔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를 따라 프랑스에 도착한 이 그림은 이후에도 복잡한 스토리가 쌓인다. 우선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그의 아들 앙리 2세는 이 그림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보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욕실에 계속 걸어놓았는데, 결과적으로 욕실의 습기 때문에 그림이 다 갈라져 버렸다. 지금도 <모나리자>가 미세하게 갈라져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이 그림을 궁전에 두고 보기 위해 베르사유 궁전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루이 16세 때는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다시 파리의 루브르로 돌아왔다. 그리고 혁명 이후 새롭게 권력을 잡은 황제 나폴레옹은 이 그림을 계속 보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침실에 걸어두었다. 그러다가 나폴레옹이 몰락하고는 지금의 루브르에 일단 안착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이 그림이 레오나르도의 고향인 이탈리아로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페루자라는 사람에 의해 도난당했다. 그렇게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으로 갔다가 다시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협상에 의해 최종적으로 루브르로 돌아오게 된다. 

역사에 이토록 복잡한 풍파를 겪었던 그림이 있었을까. <모나리자>의 기구한 운명은 여전한데, 인권이나 환경 운동가들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틈만 나면 페인트니 수프니 하는 것들을 그녀의 얼굴에 뿌려대고 있다. 모나리자는 강화유리가 아니었다면 일찌감치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모나리자>가 왜 이토록 유명한지에 대해 확실히 말한 수는 없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그녀를 좋아하는것 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성모와 아기 예수와 성 안나> 1501-19, 페널에 유화

프랑스로

레오나르도는 말년에 프랑스로 불려 갔다.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1세가 간절히 레오나르도를 곁에 두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프랑스 파리하면 벨 에포크를 상징하는 최고의 문화 도시라는 생각이 들지만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프랑스는 피렌체와 비교해 보면 '덩치만 큰 촌동네'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프랑스의 왕들은 유독 피렌체의 예술을 동경했다. 아무리 군사력이 강하고 힘이 있어도 어쩐지 피렌체의 문화와 예술만 보고 오면 기가 죽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프랑수아 1세의 선대 왕이었던 루이 12세는 레오나르도에게 제단화 <성모와 아기 예수와 성 안나>를 의뢰했었는데 언제나 그랬듯 레오나르도는 이 그림을 완성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루이 12세는 레오나르도의 그림을 가질 수 없었다. 루이 12세는 심지어 밀라노를 점령했을 때는 <최후의 만찬>을 뜯어가려고까지 했다. 레오나르도가 만약 <최후의 만찬>을 프레스코 벽화로 튼튼하게 그렸다면 지금쯤 벽 째 뜯겨져 나가 프랑스에 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아들 프랑수아 1세도 마찬가지로 피렌체의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동경, 무엇보다 천재 레오나르도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그는 프랑스에도 피렌체 같은 미술이 꽃 피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모양이다. 그래서 여러 차례 레오나르도를 프랑스로 초청하려고 시도했다가 1515년에 마침내 소망을 이루게 된 것이다.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에 도착한 레오나르도를 극진히 모시고 자기 성 근처의 자택에 머물도록 하면서 물심양면으로 최고의 대우를 해 주었다. 

아마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가 프랑스에 있으면서 <최후의 만찬>같은 기가 막힌 작품을 하나 남겨주길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늘 그랬듯 레오나르도는 프랑스에 도착해서도 그림은 그리지 않고 식물과 하늘의 별들을 관찰하며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연구에 몰두했을 뿐이다. 하지만 프랑수아 1세는 그래도 레오나르도가 좋았던 모양이다. 자신의 성과 가까우니까 자주 레오나르도 집에 방문해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고 이를 매우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밀라노의 루도비코 처럼 프랑수아 1세 또한 승리자다. 이때 레오나르도가 <모나리자>를 프랑스로 들고 왔기 때문에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까. 


죽음

천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사실 전조는 있었다. 65세가 되었을 때쯤 뇌졸중 증상으로 오랫동안 앓아누웠던 적이 있었다. 그때 이후로 레오나르도는 오른손이 마비되어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평생을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레오나르도였지만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점점 삶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던 모양이다. 그는 사제에게 신앙의 가르침과 선한 길, 교리에 대해 알려 달라고 부지런히 요청했다고 한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자유로웠던 삶에 대한 약간의 후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마지막 즈음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내가 마땅히 완성했어야 할 예술을 하지 않아 신과 인간들에게 죄를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신으로부터 최고의 재능을 부여받았음에도 그는 고작 16점 정도의 작품밖에 남기지 못했으니까. 평생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던 '자유로운 영혼' 레오나르도였지만 막상 인생의 마지막에 와서 돌아보니 완성하지 못한 채 버려둔 예술들이 너무 많은것이 후회로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레오나르도는 그럼에도 행복한 삶을 산 남자였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사는 인생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레오나르도는 그의 생애 마지막 날에 사제를 불러 죄를 고백하고 성찬을 받았다. 그리고 1519년 5월 2일 프랑수아 1세가 하사한 저택 클로 루세Clos Lucé에서 67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곧 성 플로렌틴 대학 교회에 안치되었다. 다만 지금은 그의 무덤을 볼 수 없는데 18세기의 프랑스 혁명때 교회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의 뼈들이 흩어져 버린 것이다 .어쩌면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레오나르도에게는 무덤이 없는편이 더 어울리는것이 아닐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노트 <날틀>

르네상스 맨

아인슈타인, 스티브 잡스와 같은 역사의 천재들의 전기를 쓴 아이작슨은 레오나르도에 관해 이렇게 평가했다.


“역사상 그 어떤 인물도 그렇게 많은 분야에서 창의적이지 않았다."


레오나르도는 물론 뛰어난 실력의 예술가이기도 했지만, 우리는 고작 16장 정도밖에 안 되는 그의 그림으로 그를 평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음장에서 살펴볼 미켈란젤로와 비교해 본다면 레오나르도의 예술적 성과는 사실 거의 창피한 수준이다. 그래서 레오나르도와 관련된 전시를 가보면 그림은 없고 대부분 그의 연구 노트나 스케치들, 그리고 그가 발명했던 기계들을 현대에 다시 제작하여 전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천재는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저 수학문제를 남들보다 빨리 풀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짜 천재는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문을 열어주는 사람이다. 가까이는 스마트폰을 만들어 혁신을 일으켰던 스티브잡스, 고전 물리학을 붕괴시키고 현대 물리학의 길을 열었던 아인슈타인, 야만인들의 세상이었던 서유럽을 새롭게 창조한 카이사르처럼 다음 시대를 예고하는 혁신가들을 우리는 천재라고 부르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별명은 '르네상스 맨'이다. 그는 중세와 근대라는 거대한 두 세계의 정 가운데 서 있는 인물이다. 물론 근대로 가는 이정표는 레오나르도 혼자 세운 것은 아니지만 그는 르네상스의 길목에서 과학과 이성, 그리고 합리주의가 지배할 근대라는 세계의 이정표를 가장 정확히 짚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을 연 사람, 진정한 의미에서 천재인 것이다. 

레오나르도를 보면서 천재란 어떤 사람인지 다시한번 고민하게 된다. 우리나라에도 언젠가 그렇게 다음 세상을 변화시키는 천재가 등장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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