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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Aug 02. 2024

신성한 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피렌체의 거리


젊은 천재의 등장

피렌체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이어 또 다른 천재가 등장했다. 그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레오나르도와 함께 미술사뿐 아니라 인류사 전체에서 최고의 천재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예술가다. 이렇게 뛰어난 인물들이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 나란히 등장하는 것을 보면 천재는 그저 우연히 태어나는 건 아닌듯 싶다. 천재는 우연이 아닌 시대가 만들어낸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그런데 두 천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동시에 거리를 활보하던 15세기 말의 피렌체로 한번 가보자. 레오나르도는 사실 얼굴도 미남에 키도 상당히 큰 편이었고 패션에도 상당히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원래 잘생긴 사람들은 남들보다 외모에 신경을 더 많이 쓰는 법니다. 레오나르도는 적당히 곱슬거리는 머리에 잘 기른 수염을 곱게 빗은 다음 붉은 장미색 튜닉을 입고 피렌체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멋쟁이였다. 그리고 그런 멋쟁이 레오나르도 곁에는 항상 친구들이 많았다. 그의 자유로운 성격때문에 골탕을 먹은 귀족들이 한가득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윗사람들일 뿐이지, 주변 친구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런 상황이 더 재미있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와는 정 반대였다. 그는 평상시에도 항상 꼴이 엉망이었는데 조각을 하느라 돌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몸이 땀으로 흥건해도 옷을 갈아입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조각을 할 때 떨어지는 돌조각으로부터 발을 보호하기 위해 신은 두꺼운 가죽 구두 속에는 땀이 웅덩이처럼 고여 아마 냄새가 진동을 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다른 사람들의 눈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둘은 피렌체의 길거리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어느 화창한 날, 레오나르도는 늘 그렇듯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산타 트리니타 광장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의 대화 주제는 단테의 <신곡>이었다. 수많은 비유과 인용 때문에 여간 유식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이 책은 '교양 있는 대화'의 주제로는 더할나위 없이 최고였다. 이때 마침 돌먼지를 뒤집어쓴 미켈란젤로가 지나갔다. 레오나르도는 미켈란젤로가 요즘 새로운 젊은 천재로 추앙받기 시작하는 것이 상당히 신경쓰였었는데 이참에 그를 골려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에게 단테의 <신곡>에 관해 물어보았다. 먼지투성이인 미켈란젤로가 그 어려운 단테의 서사시를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로렌초 밑에서 이미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단테의 <신곡>에 관해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단테는 그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였다. 미켈란젤로는 차갑게 응수했다.


“싫은데요. 본인이 직접 하시죠. 청동 기마상을 의뢰받고도 완성을 못해서 창피하게 포기해 버린 당신이 말이죠."


이 말은 상당히 짓궂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청동 기마상 제작을 미루다가 실패한 사건을 들어 레오나르도를 비꼰 것이다. 전쟁 때문에 그만뒀다고는 핑계야 있었지만 어쨌든 못한 건 못한 것이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도 보통이 아닌 게 여기서 뒤돌아서며 한번 더 쏘아붙였다.


"밀라노의 수탉들은 도대체 당신의 뭘 믿은 건지.."


미켈란젤로는 이런 남자였다. 자존심 강한, 천재 중의 천재였지만 어쩐지 친구로 삼기에는 무섭다고 해야 할까. 


채석장의 꼬맹이

미켈란젤로가 유독 성격이 까칠했던 이유는 아마도 귀족 출신임에도 어렵게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아버지였던 루도비코는 은행업을 하다 망한 몰락한 귀족이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당시의 귀족 자제들이 받는 교육을 받을 형편이 되지 않았다. 돈이 없는 귀족이었으니 자존심이라도 붙잡고 살아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 미켈란젤로가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 또한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의 어려운 환경 때문이었다. 미켈란젤로는 6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유모 밑에서 자랐는데 이 유모의 남편이 석공이었다고 한다. 아마 미켈란젤로는 꼬맹이 시절부터 유모를 따라 대리석 채석장에서 돌을 쪼면서 뛰놀았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어린시절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유모에게 젖과 함께 받은 것은 나의 조각을 만들기 위한 정과 망치를 다루는 법이었다."


어린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미켈란젤로는 언젠가부터 조각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런 정체성은 당시로는 특이한 것이었는데, 레오나르도도 그랬지만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은 조각이든 그림이든 건축이든 뭐든지 다 잘하는 '만능맨'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특별히 자기 정체성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유독 자신이 '조각가'라는 확실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미켈란젤로는 뭐든지 확실한 성격이었다. 

어느정도 나이가 찬 미켈란젤로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의견을 직접 말했다. 어차피 집안 형편 때문에 다른 길은 어려우니 차라리 예술가가 되겠다고. 아들을 교육할 여력이 되지 않았던 아버지는 아들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래서 어린 미켈란젤로를 자신의 친구였던 기를란다요에게 데려갔다. 그래서 1487년, 12살의 미켈란젤로는 견습생으로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는 재능도 있었지만 그의 타고난 집념으로 공방에서 최선을 다했던 공부했던 모양이다. 곧 기를란다요의 공방에서 최고의 학생이 되었다. 


오타비오 바니니 <로렌초에게 판의 머리를 보여주는 미켈란젤로> 1635, 프레스코


로렌초와의 만남

당시 피렌체를 통치하고 있던 위대한 자 로렌초는 할아버지 코시모가 도나텔로를 친구처럼 대하며 후원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자신도 할아버지처럼 특별히 조각가를 후원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원래 그릇이 컸던 로렌초는 아예 규모를 키워 메디치 소유의 산 마르코 정원에 '미술 아카데미'를 열었다. 메디치가 소유했던 그리스 로마 조각들을 정원에 깔아놓고 견습생들이 이를 모방하면서 자유롭게 실력을 키우도록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 '미술 아카데미'는 유럽 최초의 미술학교라고 할 수 있다. 로렌초는 기를란다요에게도 견습생 중에 똘똘한 놈 있으면 몇 명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기를란다요는 당연히 학생들 중 최고였던 미켈란젤로를 로렌초에게 보냈다. 그렇게 미켈란젤로와 메디치 가문의 인연이 시작된다. 

어느 날 로렌초는 이 '미술 아카데미'에 방문했다. 아마 아카데미가 잘 돌아가고 있는지 순방을 나갔던 모양이다. 마침 미켈란젤로는 '판Faun신(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의 머리에 염소의 몸을 가진 신)'의 두상 조각을 만들고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은 단연 눈에 띄었는데 로렌초는 지나가다가 조각을 보더니 한 가지를 지적했다. 신화에 따르면 보통 '판'은 늙은 고령의 신으로 묘사되는데 네가 만든 판은 너무 이빨이 가지런해서 늙은이의 이빨 같지 않다고 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미켈란젤로는 로렌초가 다른 학생들의 작품을 한바퀴 둘러보고 오는 그 짧은 순간에 이빨을 쪼고 갈아내서 노인의 치아처럼 만들어 놓았다. 다시 돌아온 로렌초는 모델도 없이 순식간에 조각을 수정할 수 있는 미켈란젤로의 재능과 그의 순수한 태도를 바로 알아보았다. 그날 이후, 로렌초는 미켈란젤로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었다. 견습생에 불과한 레오나르도를 집에 들여 메디치 가족들과 함께 살도록 한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이나 재벌이 어느 미대생을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자라도록 한것과 비슷하다. 

미켈란젤로는 이때 로렌초 밑에서 메디치 가문의 자식들과 함께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게 된다. 당연히 신플라톤주의, 그리스 로마의 철학같은 인문 교육도 받을 수 있었고 거기에 더해 앞으로 피렌체의 미래를 짊어질 메디치의 청년들과도 친분을 맺게된다.



다이엘레 다 볼테라 <미켈란젤로의 초상> 1545

외모 콤플렉스

그런데 이렇게까지 잘 나가면 아무래도 동료들의 질투를 받기 마련인다. 돈도 없는 건방진 놈이 어디서 굴러들어오더니 로렌초의 총애를 받는것도 모자라 로렌초의 집에까지 살게 된 것이니까.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앞서 레오나르도와의 일화에서도 그랬지만 자존심이 꼿꼿하다 못해 부러질 것 같은 남자였다. 그리고 아카데미에서도 친구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다른 학생들이 그림을 못 그리면 거침없이 비난하곤 했다고 한다. 쉽게 표현 하자면 '공부 엄청 잘하는 엄청 재수 없는 놈'쯤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일이 터졌다. 아카데미 학생들이 단체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마사초의 벽화를 따라 그리는 실습을 나갔는데 그곳에서 토리지아노라는 다른 학생과 대판 싸움이 붙게 된 것이다. 사건의 발단까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 늘 그러했듯 친구들이 재수없는 미켈란젤로에게 시비를 걸었을 것이고 미켈란젤로는 이에 질세라 친구들의 그림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응수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날 유독 서로 감정이 격해졌는지 토리지아노와 미켈란젤로는 주먹싸움을 벌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냥 투닥거린 게 아니라 이날은 토리지아노가 작정하고 주먹을 날려버렸고 정통으로 주먹을 맞은 미켈란젤로는 그자리에서 코뼈와 연골이 푹 들어가 버렸다. 뒤 늦게 소식을 들은 로렌초는 격노했지만 상황은 이미 끝나있었다. 로렌초는 토리지아노를 잡아오라고 지시했지만 토리지아노는 어린나이에 감옥에 가는 것이 두려워 그 길로 피렌체에서 도망쳐 버렸다. 

이 사건으로 미켈란젤로의 코는 완전히 내려 앉아버렸고 다시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내려앉은 코 때문에 평생 자신의 외모에 상당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아야 했다. 미켈란젤로에게는 안타까운 사건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지만 다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미켈란젤로의 예술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은 이때 생긴 자신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를 예술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라고. 


사보나롤라의 영향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가문에서 교육을 받기 시작한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코뼈는 부러졌어도 미켈란젤로는 그의 인생에서 이 2년이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피렌체의 최고 권력자의 집에서 교양 있는 친구들과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지냈으니 그럴만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행복도 곧 끝나게 된다. 1492년, 위대한 자 로렌초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로렌초의 죽음 이후 메디치 가문은 점점 내리막길을 가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많은 예술가들을 지원했던 메디치의 후원들도 하나 둘 끊기기 시작했고 미켈란젤로도 메디치 가문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사보나롤라의 집권시대가 시작되었다. 아직 어렸던 미켈란젤로였지만 피렌체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것을 몸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메디치가 주도하는 피렌체는 인본주의의 풍요로움이 넘치던 시대였다면 사보나롤라 집권시대는 다시 엄숙한 중세로 돌아갈 듯 보였다. 

미켈란젤로 입장에서는 인문학과 예술이 꽃피던 피렌체를 다시 과거로 되돌리려고 하는 사보나롤라가 얄미웠을까?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정 반대였다는 것이다. 이때 미켈란젤로 또한 보티첼리처럼 사보나롤라에게 완전히 감화되어 버렸다. 사보나롤라의 설교가 정말 대단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미켈란젤로는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그리스 철학과 인본주의에 관해 충분히 공부했지만 어쩐일인지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들은 이후에는 완전히 기독교에 심취하여 평생을 신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결국 머리보다 중요한 것은 가슴이라고 해야하는 걸까. 미켈란젤로의 친구이자 작가였던 아스카니오 콘비디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공부했고, 그리고 이를 연구한 사보나롤라의 글도 심도있게 공부했습니다. 그는 사보나롤라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었고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미켈란젤로 안에 살아있었습니다."


앞으로 살펴볼 미켈란젤로의 작품들을 생각해 보면 사보나롤라의 역할이 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미켈란젤로의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작품들, <피에타>, <다비드>,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이 모두는 기독교를 주제로 하고 있다. 사보나롤라는 아직 어린 미켈란젤로의 가슴에 예술이 '세상'이 아닌 '하늘'을 향하도록 불을 붙였다. 사실 예술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시시콜콜한 사랑이야기나 세상 이야기를 예술로 다루는 것보다는 저 높은 천상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최고를 꿈꾸는 예술가들에게는 더 강한 원동력을 제공할 수 있으니까


미켈란젤로 <바쿠스> 1496-7 


사기로 경력을 시작하다

어쨌든 메디치 가문의 지원이 끊긴 미켈란젤로는 이제 스스로 일어서야 했다. 그런데 그 과정이 재미있다. 미켈란젤로가 친하게 지냈던 메디치 가문의 사람 중에는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Lorenzo di Pierfrancesco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미켈란젤로에게 큐피드상을 하나 주문했다. 그런데 주문하면서 이상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큐피드 조각을 땅에 묻었다가 꺼내서 고대 골동품인 것처럼 만들어 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다. 당시에는 르네상스의 여파로 고대 조각에 대한 열풍 불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 골동품으로 팔면 더 비싼 값으로 팔 수 있었던 모양이다. 말하자면 미켈란젤로에게 '골동품 사기'를 치자고 한 것인데 미켈란젤로도 당시에 상당히 돈이 궁했는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만든 큐피드에 흙을 묻히고 살짝 고쳐서는 마치 고대의 조각인 것처럼 바꾸어 놓았다. 그리고 이 '가짜 골동품'은 로마의 추기경이자 미술품 수집가였던 발다사레Baldassarre Del Milanese에게 200 두카트 금화에 팔리게 된다. 이는 당시 같은 크기의 조각으로 받을 수 있는 가격에 거의 7배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런데 이 '가짜 골동품'은 미술품 수집가였던 추기경의 눈을 속일수는 없었다. 추기경은 나한테 사기를 쳤다며 화를 냈지만, 미술을 볼 줄 알았던 그는 한편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이 정도까지 기가 막히게 큐피드를 위조할 수 있는 거지? 궁금했던 그는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불러들였다. 이것이 바로 미켈란젤로의 경력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로마에 도착한 20대 초반의 미켈란젤로는 추기경의 도움으로 당장 귀족들로부터 몇 개의 작품을 의뢰받을 수 있었다. 위 <바쿠스>는 미켈란젤로 이 때 의뢰받은 작품 중 하나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에 관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고 사람들은 그의 실력에 감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미켈란젤로는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역작을 의뢰 받게 된다. 바로 <피에타>다. 


미켈란젤로 <피에타> 1498–1499


피에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서양 세계가 지금까지 생산한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다. 로마에서 미켈란젤로의 이름이 조금씩 알려지자,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추기경 장 드 빌레르경Jean de Bilhères은 자신의 무덤에 장식할 조각을 의뢰하게 되는데 이 작품이 바로 <피에타>였다. '피에타Pietà'는 '연민'이라는 뜻인데,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의 시신을 안고 슬퍼하는 장면을 부르는 말이다. 젊은 패기와 야심으로 가득찼던 미켈란젤로는 1497년부터 1499년까지 약 3년에 걸쳐 이 작품을 완성했다. '피에타'는 기독교 내에서 가장 매력적인 주제 중 하나인 만큼 중세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피에타를 만들었지만 지금까지 미켈란젤로처럼 피에타를 아름답게 표현했던 예술가는 없었다. 

미켈란젤로를 천재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작품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는 보통 예술가들의 생각을 한차원 뛰어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전체적으로 삼각형인 구도가 상당히 안정되어 보이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미켈란젤로가 두 인물의 비율을 붕괴시켰기 때문이다. 잘 보면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몸집이 예수에 비하면 거의 거인이라고 해도 될 만큼 큰데, 그래야 안정적으로 예수를 품에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대신 거대한 마리아의 몸집을 천으로 감싸서 교묘하게 감추었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천의 주름의 아름다움에 가려 그녀의 몸집은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이다. 아마 마리아의 몸집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바로 캐치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니까 적어도 50대가 다 된 여인이었을텐데 미켈란젤로는 거의 20대 초반의 여인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에 대해 몇몇 사제들이 아무리 그래도 성모 마리아를 저렇게 어리게 표현하는게 맞는거냐고 비판했지만 이에 대해 조르조 바사리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들은 동정녀가 오랫동안 젊음을 유지하고 반대로 그리스도처럼 고통을 겪은 분은 빨리 늙는다는 것을 모를만큼 무지한가?"


결과적으로 이런 논쟁은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오히려 더 돋보이게 만들 뿐이었다. 잘 생각해 인체의 크기를 변형시키고, 늙은 여인을 젊게 바꾼 것은 예술적 완성을 위해 르네상스의 불문율이었던 자연주의Naturalism까지 희생시킨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눈은 이미 다른 예술가들보다 한참 더 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신적인 것'이라고 표현하는게 맞을만큼 아름다웠다. <피에타>가 완성되자 당장 이를 지켜보던 로마 시민들이 난리가 났다. 로마의 시민 그 누구도 평생 이렇게 아름다운 조각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당연히 도대체 이토록 아름다운 조각을 한 예술가가 누구인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이 조각을 누가 만들었는지 웅성 웅성거리며 서로 물어보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밀라노 출신 조각가 고보Il Gobbo가 만들었을걸."이라고 답했다. 이때 미켈란젤로는 약간 재미있는 행동을 하는데 우선 미켈란젤로는 '내가 만들었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고 밤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날 밤, 몰래 작은 끌과 망치를 가져와서는 밤새 성모마리아의 가슴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래서 피에타를 보면 성모 마리아의 가슴에 가방끈 같은 띠가 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MICHAEL.A[N]GELVS BONAROTVS FLORENT[INVS] FACIEBAT"

"피렌체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했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인류사 최고의 위대한 걸작을 만들어 놓고는 성모 마리아의 가슴에 저렇게 '내가 했다'는 유치한 글을 새겨 버린 것이다. 아무리 봐도 천재답지 않은 유치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때 미켈란젤로의 나이가 고작 24살이었다는 점이다. 천재이긴 했지만 그는 아직 20대 초반의 청년에 불과했다. 어쨌든 미켈란젤로도 곧 정신이 들었는지 곧 이런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그리고 "창조주는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을 만드시고도 그 어디에도 서명을 하지 않았는데..."라고 말하며 이후 다시는 자신의 작품에 사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켈란젤로 <다비드> 1501-04


다비드 상

<피에타>를 성공적으로 완성한 미켈란젤로는 1499년에 피렌체로 돌아왔다. 그렇게 고향에 돌아와서 완성한 작품이 또 다른 그의 역작, <다비드(다윗)>다. 이 조각은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위원회에서 의뢰한 것이었다. 대성당 위원회는 25년 전쯤에 6m짜리 거대한 대리석을 구입해 놓았다고 한다. 대성당 외부 벽 위쪽에 올려놓을 거대한 조각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막상 이 큰 대리석을 조각할만한 배짱을 가진 예술가를 지금까지 구할 수가 없었다. 부담도 부담이었지만, 이 정도 사이즈라면 조각하다가 다리 한 쪽이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부서져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돌은 작업장 한쪽에 지난 25년간 사실상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이 때 24살이었으니까 미켈란젤로보다 1살 많은 돌이라고 해야 할까. 피렌체 시민들은 쓸모없이 버려져 있는 이 큰 돌을 '거인Il gigante'라고 불렀다.

이 시점에 <피에타>로 성공을 거둔 미켈란젤로가 배짱 좋게 나선 것이다. 사실 미켈란젤로는 이미 <피에타>를 만들기 전부터 야심 차게 그 돌을 노려보고 있었다고 한다. 언젠가 내가 저 거대한 돌덩이를 위대한 조각으로 탄생 시키리라. 위원회 입장에서는 미켈란젤로가 하겠다고 나서자 안시킬 이유가 없었다. 벌써 25년이나 버려져 있는 돌덩이였으니 골치거리였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 <피에타>로 이미 최고의 실력을 증명한 미켈란젤로가 나섰으니까. 

미켈란젤로는 우선 사람들의 시선을 막기 위해 돌 주변을 판자로 큰 울타리를 세웠다. 아무래도 시민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만큼 미켈란젤로도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조각해 나가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하는 과정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적이 있다.  


"최고의 예술가는 대리석 껍질 속에 갇혀있는 것이 무엇인지만 생각한다. 예술가의 능력은 그저 그 돌 속에 잠들어있는 형상을 자유롭게 할 뿐이다."


미켈란젤로는 멋있어 보이려고 이런 말을 한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생각에 예술가의 역할은 '돌 속에 존재하는 영혼'을 '영적인 눈'으로 발견한 꺼내어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아마도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일 텐데, 예술가는 이데아의 세계에 존재하는 완전무결한 아름다움을 육체의 눈이 아닌 고결한 영적인 눈으로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정말 그 큰 대리석 속에서 '다비드의 영혼'을 찾아서 꺼내려고 했다.

3년 뒤, 그렇게 미켈란젤로는 또 다른 인류사 최고의 걸작을 탄생시키게 된다. 인체 표현의 완벽함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다윗을 표현했다. 미켈란젤로를 천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인데 <피에타>에서도 그랬지만 그는 항상 사람들 머릿속의 편견을 깨고 자신만의 고민과 해석으로 예술을 창조했던 것이다. 

성경에서 다윗은 갑옷을 입기에도 벅찬 어린 소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나텔로를 포함한 과거의 예술가들이 다윗을 유약한 소년으로 표현하는 것은 나름 성경의 내용을 충실히 재현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거인의 돌에서 전혀 새로운 다윗을 창조했다. 유약한 소년이 아닌 독립성과 주체성을 가진 확신에 찬 눈빛의 늠름한 청년 다윗을 창조한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왜 이렇게 파격적으로 다윗을 표현했을까. 아마 미켈란젤로는 '늠름한 청년 다윗'을 통해 피렌체 시민들에게 용기를 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경속 다윗은 도나텔로의 <다비드> 이후, 어떤 어려움에도 역경을 이겨내며 버티는 피렌체를 상징하는 인물로 자리잡았는데, 미켈란젤로는 강인한 자세와 태도 그리고 아름다운 근육으로 다윗을 표현하여 피렌체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한 것이다. 조르조 바사리는 다비드 상을 보고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그가 작품을 드러냈을 때, 고대의 그리스와 로마, 현대, 그 어떤 시대의 예술 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게 <다비드>가 완성되자 위원회는 이 조각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일단 8.5톤에 달하는 거대한 조각상을 성당의 옥상으로 옮기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올리다가 자칫하면 얇은 다리쪽 부분이 부러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저 대성당 벽의 장식으로 올려놓기에는 너무 대작이었다. 그래서 위원회는 자문단을 만들어서 이 작품을 어디다 놓을지 결정하기로 했다.

이 자문단에는 레오나르도, 보티첼리, 필리포 리피를 포함한 당대 쟁쟁한 예술가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이때 주류 의견은 이 위대한 작품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시청Palazzo Vecchio 앞 광장에 전시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레오나르도와 몇몇 소수의 예술가들은 이상하게도 광장 옆쪽의 지붕 아래 두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표면적인 이유는 '작품을 비바람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지만, 다르게 말하면 잘 안 보이는 곳에 놓자고 한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레오나르도는 23살이나 어린놈이 천재랍시고 날뛰고 있는 것이 어지간히 신경 쓰였는지 미켈란젤로의 대작을 사람들로부터 최대한 감추려고 했던것인지도 모른다.  



루벤스 <레오나르도의 앙기에리 전투 모작>  1603 


두 천재의 세기의 대결

라이벌이라고 해서 꼭 서로 으르렁 그르렁 거려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는 둘 다 자존심이 강한 성격들이라 애초에 친해지기 어려운 관계였다. 그리고 누구보다 스스로 '천재'라는 점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는 남자들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런 유치한 생각을 한 번 해 볼 수 있다. 만약 이 둘이 서로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 역사상 흔치 않은 최고의 천재들의 대결, 그런데 재미있게도 실제로 그 일이 벌어졌다. 바로 벽화 대결이다. 

1504년, 피렌체의 곤팔로니에였던 소데리니Soderini는 우선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시청사Palazzo Vecchio의 500인 회의장을 장식하는 벽화를 의뢰했다. 이 거대한 강당은 시청건물 내에서도 가장 큰 공간이었는데 가로 50m에 높이가 18m에 달하는 거대한 벽면을 벽화로 채워달라고 한 것이다. 피렌체에서도 전례가 없는 역대급 규모의 벽화였다.

그리고 소데리니는 재미있게도 그 반대편 왼쪽 벽화는 미켈란젤로에게 의뢰했다. 누가 봐도 이건 완전히 의도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현대에도 UFC 경기든 축구 경기든 사람들은 라이벌끼리 붙어서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데 소데리니는 이와 비슷하게 두 천재가 '배틀'을 벌이도록 대놓고 경기장을 만들어 놓고 두 사람을 부른 것이다. 소데리니는 아마 인생의 재미를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벽화 배틀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각자 어떤 장면을 선택했을까? 레오나르도가 선택한 장면은 1440년 피렌체와 밀라노가 서로 싸웠던 '앙기에리 전투'의 격렬한 기마전이었다. 여러 마리의 말들과 병사들이 거칠게 뒤엉켜서 싸우는 극적인 장면을 선택한 것이다. 


바스티아노 <미켈란젤로의 카시나 전투 모작>  1542


그렇다면 급부상하는 젊은 천재 미켈란젤로는 어떤 장면을 선택했을까? 미켈란젤로가 택한 장면은 다소 의외였다. 그는 1364년 피렌체와 피사가 싸웠던 '카시나 전투'에서의 한 장면을 선택했는데, 격렬한 전투장면이 아니라 아르노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던 병사들이 전쟁 나팔이 울리자 급히 옷을 챙겨 입고 전투에 나서는 모습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아마 국가가 부르면 어떤 상황에서도 전장으로 달려가야하는 병사들의 애국심을 벽화에 담고 싶었던 모양이다. 미켈란젤로는 확실히 평범한 선택은 하지 않는 남자였다.

먼저 벽화를 시작한 쪽은 레오나르도였다.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의 레오나르도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레오나르도는 죽어도 프레스코는 그리기가 싫었는지 이번에는 안료에 왁스를 섞어서 그리는 새로운 이상한 방법을 또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최후의 만찬>에서도 그랬지만 이렇게 근본 없는 방법이 성공할리가 없었다. 레오나르도가 어느 정도 그림을 그리다가 아래를 보니 여전히 왁스는 마르지 않았고 한쪽에서부터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황한 레오나르도는 당장 뜨거운 숯이 담긴 화로 두 개를 들고 와서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벽화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는 오히려 재앙을 불러왔다. 화로는 벽을 말리는게 아니라 녹여버렸던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지켜보는 가운데 그림은 점점 더 흘러내려 바닥에 웅덩이처럼 고이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는 아마 속으로 '아 또 망했네'라고 외쳤을 것이다. 결국 레오나르도는 벽화를 포기하고 그대로 손을 놓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소데리니는 기가 찼겠지만 그런다고 돌아올 레오나르도가 아니었다.

한편 미켈란젤로는 벽화를 시작도 못해보고 포기해야 했다. 스케치는 어느 정도 해 놓았지만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부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로마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소데리니 입장에서는 교황청과의 관계 때문에 미켈란젤로를 붙잡아둘 수가 없었다. 아쉽지만 결국 두 천재의 대결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스케치 단계에서 다른 후배 화가들이 베껴그린 그림들만 남아있다. 위는 레오나르도를 존경했던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복제 스케치, 아래는 미켈란젤로를 존경했던 바스티아노Bastiano da Sangallo가 남겨놓은 복제 스케치다. 두 스케치만 보고 판단해 보자, 만약 대결이 정말로 성사되었다면 누구의 손을 들어주어야 할까?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 아담의 창조>


시스티나 천장화

그렇게 로마로 불려 간 미켈란젤로는 그의 또 다른 최고의 역작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그리게 된다.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부른 사람은 역사에서 '투사Warrior 교황'으로 알려진 율리우스 2세였다. 율리우스 2세는 식스투스 4세처럼 야심 찬 교황이었다. 그는 로마에도 피렌체처럼 전 세계가 놀랄만한 미술을 만들면 무너진 교황의 권위가 조금이라도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를 포함한 여러 예술가들을 불러모은 것이다.

하지만 사실 미켈란젤로는 이 천장화를 도저히 하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화가'가 아닌 '조각가'라는 자기 인식이 강한 사람이기도 했고, 현실적으로도 프레스코 천장화를 맡아서 해본 경험이 전혀 었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격이 다혈질이었던 교황은 '까짓 거, 천재면 원래 그냥 할 수 있는 거 아냐?'는 식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에 미켈란젤로는 반 강제로 천장화를 시작해야 했다. 다만 교황은 원래 천장에 예수의 12제자들을 그리길 주문했지만 미켈란젤로가 보니 그 천장은 12명으로 가득 채우기에는 너무 넓었다. 그래서 그는 교황에게 주제를 바꾸어 가운데는 천지창조, 아담과 이브의 창조, 노아의 홍수이야기, 그리고 바깥에는 예수의 선조들과 선지자들과 무녀들, 이렇게 2중으로 그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디테일한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던 교황은 당연히 허락했고 천장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막상 작업이 시작되기는 했지만 이 일은 20m 위의 천장에 세로 35m, 가로 14m의 거대한 천장에 그리는 일은 육체적으로 상당히 고된 일이었다. 공사장처럼 사람이 올라가서 일할 수 있도록 나무로 된 비계 구조물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천장화를 그리기 싫었던 미켈란젤로는 얼마나 일이 고되었는지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에 썼다.


미켈란젤로가 편지에 그린 자신의 모습


"나는 이 굴 속에서 갑상선 종양을 키웠다. 롬바르디아의 똥물에 사는 고양이들처럼...

내 수염은 천국 쪽으로 향하고, 내 목덜미는 척추에 고정된 채로 아래로 떨어진다.

내 갈비뼈는 눈에 띄게 마치 하프처럼 자라나고 있고, 

붓에서 떨어진 물감들은 내 얼굴에 두껍고 얕은 자수를 새긴다.."


20m의 높은 곳까지 올라가서 목을 계속 하늘로 쳐들고 작업해야 하니 고통이 상당했던 것이다. 게다가 다혈질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 입장에서는 너무나 피곤한 존재였다.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에서도 그랬지만 완성될 때까지는 사람들에게 작품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데 율리우스 2세는 작품 진행과정이 너무 궁금했는지 중간에 하도 보여달라고 징징거리는 바람에 비계 구조물을 해체하고 보여주어야 했다. 교황 잠깐 보여준다고 비계를 힘들게 해체하는 것도 짜증 났지만 해체하는 과정에서 먼지가 엄청 피어오르는 바람에 그림에 먼지가 다 묻은 것이다. 그리고 그림을 본 교황은 얄밉게 '난 그림 먼저 봤다'면서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고 다녔다. 고작 그 한마디 하고싶어서 이 고생을 시키는건지, 미켈란젤로는 약이 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성질이 급한 교황은 틈만 나면 미켈란젤로에게 도대체 언제 천장화가 완성되느냐고 투정을 부렸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어릴 때부터 누가 잔소리한다고 굽히는 스타일의 남자가 아니었다. 교황이 도대체 언제 완성되는 거냐고 다시 한번 묻자


"아니 교황님. 제가 예술가인데, 제가 충분히 만족해야 끝나는 거죠."


라고, 감히 교황에게 짜증을 냈다. 그러자 교황이 가만히 있다가 다시 말했다.


"틀렸어. 너는 나의 만족을 위해서 일하는 거지."


사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틀린 말은 아다. 그리고는


"너는 내가 빨리 해달라고 하면 빨리 하는 거야. 너 빨리 안 끝내면 그림 그릴 때 위에서 밀어서 떨어뜨려버린다?"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 리비아의 무녀>

     

라고 덧붙였다. 이쯤 되면 거의 깡패 비슷한 느낌인데 '투사 교황'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문제는 작품이 거의 완성되어 가는데도 교황이 대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몇 번이나 찾아갔지만 교황은 돈을 주지 않았다. 사실 당시 교황은 전쟁도 벌이고 있었고 성 베드로 성당을 재건축하는 엄청난 사업도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돈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너무 화가 나서는 교황에게 다시 한번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교황이 말했다.


"그래, 그래서 천장화는 언제 끝낼 건데?"


돈도 안 주면서 자꾸 빨리 끝내라는 말만 하는 교황에게 짜증이 난 미켈란젤로는


"아니 교황님. 내가 끝낼 때 끝내는 거라니까요."


말했다. 그러자 건방지게 대드는 미켈란젤로가 마음에 안 들었던 '투사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버럭 화를 냈다.


"끝낼 때 끝낸다고? 끝낼 때 끝낸다고? 내가 진짜 끝내게 해 줘?"


라고 소리치며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로 미켈란젤로를 한대 후려 갈겨버렸다. 자타공인 역사상 최고의 예술가였던 미켈란젤로였지만 교황한테 한대 얻어맞은 것이다. 집으로 씩씩거리며 돌아온 미켈란젤로는 별안간 짐을 싸기 시작했다. 울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더러워서 못해먹겠다고, 피렌체로 몰래 떠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교황 같은 다혈질의 인간들은 원래 화해도 빠른 편이다. 율리우스 2세는 곧 시종을 보내서 500 은화를 용돈으로 주면서 사실은 교황의 '거친 애정의 표현'이었다면서 살살 달래려고 했다. 교황도 내심은 진짜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로 도망가 버릴까 신경이 쓰이기는 했던 모양이다. 미켈란젤로도 교황의 스타일은 알고있었으니 마음을 고쳐먹고는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미켈란젤로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1508-12


그렇게 5년의 우여곡절 끝에 천장화가 완성된다. 작품 발표일은 1512년 10월 31일 할로윈 데이였다. 로마 시민들은 이 천장화를 보기 위해 잔뜩 기대하며 이 날을 기다렸다. 31일 작품이 공개되자 교황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은 그저 멍하게 작품을 바라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떤 인간도 할 수 없는 인류사 최고의 걸작이 한 사람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때 생긴 미켈란젤로의 별명이 있다. 바로 '일 디비노Il divino', '신성한 자'라는 뜻이다. 인간을 초월한 예술가라는 것이죠. 나중에 이 천장화를 보고 괴테는 이렇게 격찬했다.


"시스틴 성당의 천장화를 보지 않은 사람은 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한계를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조르조 바사리는


"이 작품은 정말로 우리 예술의 등대였다. 이 작품은 회화에 큰 이익과 계몽을 가져다주어 수백 년 동안 어둠의 상태로 남아 있던 세상을 밝히기에 충분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역사의 인물들은 시스티나 천장화를 직접 보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도 만약 인류 미술사 최고의 걸작을 단 한 개만 뽑아야 한다면 아마 시스티나 천장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근대와 현대를 다 포함해서, 이보다 더 뛰어난 예술이 과연 있었을까 고민해 봐도 도저히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 <율리우스 2세의 명묘와 원래 모형 예상도> 1505–1545


율리우스 2세의 영묘

벌써 마흔도 되기 전에 인류사 최고의 걸작을 3개나 탄생시킨 미켈란젤로였다. 그런데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사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천장화를 시작하기 전에 그에게 또 다른 '대작'을 미리 주문했었다. 앞으로 자신이 묻히게 될 영묘였다. 다혈질이었던 교황은 일단 말부터 던지고 보는 스타일이었던 모양인지 그가 주문한 영묘는 역사에 전례 없다고 해도 될 만큼 화려한 규모의 무덤이었다. 3층 구조에 총 40개의 조각이 들어가는 초대형 영묘를 주문한 것이다. 아마 교황은 '뭐 조각 한 40개쯤 들어가는 영묘로 만들 수 있겠어?'같은 가벼운 느낌으로 주문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역시 통이 컸던 미켈란젤로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 엄청난 천장화를 고작 5년 만에 완성시킨 그였으니, 돌을 여러 개를 동시에 깔아놓고 미친 듯이 쪼기 시작하면 40개 정도야 금방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마 이 작품이 완성되었다면, 미켈란젤로는 '신성한 자'라는 별명에 걸맞는 또 다른 대작을 역사에 남겼을 것이다. 3층 높이에 40개의 조각이 꿈틀거리는 영묘는 상상만으로도 엄청나다. 하지만 이 대형 프로젝트는 초라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교황은 이때 벌써 나이가 70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고열이 나는 바람에 죽어버렸던 것이다. 시스티나 성당화가 완성되고 고작 3달 뒤였다. 교황이 죽자 그 거대한 영묘를 만들 돈을 줄 사람이 없었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우스 2세의 친척들과 계속 협상을 이어나갔지만, 결국 이 프로젝트는 이후 40년 동안 5번이나 설계도를 바꾸면서 거대한 영묘에서 한쪽 벽을 장식하는 초라한 벽무덤으로 끝나버리게 된다. 미켈란젤로는 야심 차게 시작했지만 결국 본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이렇게 프로젝트가 쪼그라들어버린 것에 상당히 실망했던 모양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영묘에 묶여서 청춘을 다 보내고 말았다."


물론 미켈란젤로는 중간에 계속 다른 작품을 완성했으니 '묶였다'는 표현은 과하지만, 아마 마음 한구석에 이 영묘가 계속 불편함으로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가운데도 미켈란젤로는 역시 실력을 보여주었다. 축소된 버전의 영묘에서 가장 중요한 조각은 성경의 인물 <모세>다. 미켈란젤로의 <모세>는 더 이상 흠잡을 수 없는 완벽함에 다다른 그의 조각 실력을 보여준다. 미켈란젤로도 프로젝트 자체는 축소되었지만 <모세> 자체는 마음에 들었는지, 작업이 끝나는 날 모세의 무릎을 탁 치면서 "말씀이라도 좀 해보세요."라고 농담을 던졌다고 한다. 어쨌든 아쉽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이때 영묘가 원래 계획대로 완성되었다면 '시스티나 천장화'에 이은 또 다른 걸작이 완성되었을 텐데 말이다.


미켈란젤로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무덤> 1526–34 


혼란의 시기

그렇게 보면 예술가의 실력만큼 중요한 것은 결국 예술가들을 지원해 줄 수 있는 '후원자'들이 아닐까. 메디치가 지금껏 피렌체의 예술가들을 후원한 것은 말할것도 없고,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도 만약 다혈질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무식하게 밀어붙이지 않았으면 실현될 수 없었던게 아닐까.

중요한 후원자였던 율리우스 2세의 사망 이후, 미켈란젤로는 혼란스러운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그처럼 '대작'을 주문하는 사람이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꾸준히 들어오는 주문을 통해 이 시기에도 많은 조각을 남겼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것이 가장 활발히 활동해야 할 40대와 50대의 시간에 작은 규모의 조각밖에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메디치 가문이라도 이 시기에 힘이 있었다면 아마 또 다른 대작을 주문했겠지만 메디치 가문은 로렌초 이후 여전히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메디치가에서는 고작 작은 크기의 영묘를 주문했을 뿐이다. 위의 영묘가 미켈란젤로에게 주문했던 메디치 가문의 영묘다.

거기에 더해 피렌체의 정치적인 상황도 좋지 않았다. 사보나롤라가 재가 된 이후 메디치 가문이 잠시 다시 피렌체를 통치했지만 정치를 엉망으로 하는 바람에 메디치 가문은 오히려 피렌체 시민들에 의해 쫓겨나게 된다. 그리고 이는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다. 메디치 가문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겠다면서 피렌체의 통치권을 요구했고, 피렌체 시민들은 저항했다. 그러자 메디치 가문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 세와 동맹을 맺고 피렌체를 침략해 버렸다. 지금껏 피렌체의 수호자였던 메디치 가문이 거꾸로 피렌체를 침략했으니, 정말 피첸체의 정치는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 공화정을 지지했던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시민들의 편에 서서 방어를 돕게 된다. 미켈란젤로 입장에서는 어릴 적 자신을 키워줬던 메디치에 대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재능으로 요새를 만들고 이런저런 방어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제시하여 피렌체의 방어를 도왔지만 결국 피렌체는 카를 5세의 군사력을 앞세운 메디치 가문에 의해 함락되었다. 미켈란젤로는 1534년, 결국 총기를 잃은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갔다.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1534–41


최후의 심판  

당시 로마는 새로 선출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로마도 사실 상황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메디치와 함께 피렌체를 침략했던 황제 카를 5세가 1527년 내려오는 길에 이미 로마를 약탈했었기 때문이다. 군사력이 약했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성당과 수도원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살해되고, 수녀들이 강간당하는 모습을 그저 숨어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의 수장 교황이 통치하는 로마가 같은 기독교인 군주였던 카를 5세에 의해 약탈당한 것이다. 

클레멘스 7세는 잔뜩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마침 미켈란젤로가 로마로 온 것이다. 그는 미켈란젤로에게 그의 또다른 역작 <최후의 심판>을 주문했다. 아마 클레멘스 7세는 카를 5세에게 벽화를 통해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교황청의 도시 로마를 약탈한 너는 분명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마침 시스티나 성당의 정면 벽이 비어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에 이어 시스티나 성당의 정면에 <최후의 만찬>을 그리게 된다.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클레멘스 7세가 갑자기 병이 나서 죽어버리고 말았다. 자칫 프로젝트가 무산될 뻔했지만 클레멘스 7세는 유언으로 무조건 벽화를 완성시켜야 한다고 명시했기 때문에 후임 교황이었던 바오로 3세는 벽화를 다시 진행시켰다. 미켈란젤로는 다시 한번 '대작'에 진지한 마음으로 임하게 되었다. 그의 스케일답게, 300명이 등장하는 어머어마한 규모의 벽화가 시작된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완성하는데 총 8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문제가 좀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항상 그랬지만 그저 평범하게 예술을 창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작품을 구상할 때 자신의 창의적인 생각을 더해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예술을 창조했던 것이다. 이번 <최후의 심판>의 문제는 미켈란젤로가 이 300명에 달하는 인물들을 대부분 나체로 그렸다는 것이다. 아마 죽고 나서 심판을 받는 것이니까 나체로 그리는 것도 말이 되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예배당의 정면에 보이는 그림인데 전부 나체였으니 이를 본 사제들이 상당히 당황했다. 아마 지금 시대라도 교회 벽면을 덜렁거리는 나체들로 덮어버린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그래서 그림이 거의 4분의 3 정도 완성되었을 때 로마의 사제들은 교황에게 저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탄원을 올렸다. 그중 특히 고위 사제였던 비아지오라는 사제는 바오로 3세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신성한 곳에 저렇게 부끄러운 나체를 드러낸 사람들이 그려져 있는 건 불경하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공중목욕탕이나 술집에나 어울릴법한 그런 그림입니다."


그런데 신참 교황 바오로 3세는 로렌초의 집에서 인문학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예술에 대한 이해가 매우 깊은 교황이었다. 게다가 미켈란젤로를 개인적으로도 무척이나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탄원을 무시할 생각이었다. 문제는 이 소식을 미켈란젤로가 흘러 전해 들었다는 것이다. 이 '대작'을 앞에 두고 목욕탕 그림이니 술집 그림이니 하는 소리를 하다니, 미켈란젤로 성격에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림으로 복수하기로 했다. 미켈란젤로는 지옥의 문을 지키는 미노스의 얼굴에다가 이 비아지오 사제의 얼굴을 그려버린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지옥 수문장 '미노스'로 묘사된 비아지오 사제


미켈란젤로는 비아지오를 지옥 입구로 보낸 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모습도 기괴하게 그려놓았는데, 귀는 당시 '멍청함'을 상징하는 당나귀 귀로 묘사해 놓았고, 거기에 더해 지옥의 뱀이 미노스, 즉 비아지오의 중요한 부분을 꽉 깨물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놓았다. 이는 '음탕함'을 상징하는 것인데 아마 당시에 비아지오가 실제로 문란했다는 소문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림을 보면 미켈란젤로의 작심이 느껴지는게 뱀이 정말 작정하고 꽉 깨물고 있는 모습이다. 

비아지오가 지나가다가 가만히 보니까 꽉 물린 미노스의 얼굴이 다름아닌 자신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급하게 바오로 3세에게 제발 미켈란젤로에게 시켜 얼굴을 바꾸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바오로 3세는


"내가 천국은 관할인데 지옥까지는 교황의 관할이 아니어서 말이죠..."


라며 웃어넘겼다고 한다. 결국 비아지오의 얼굴은 지옥의 입구에 영원히 박제되는 버렸다. 안타깝다고 해야할까 아니면 자업자득이라고 해야할까 그도 아니면 그래도 영광이라고 해야할까.

그렇게 해서 그의 또 다른 대작 <최후의 심판>이 완성되었다. 중앙에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마지막 날에 심판을 내리고 있고 그 옆에는 성모 마리아가 심판당하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의로운 자들은 왼쪽 아래 무덤에서 일어나 위쪽 천국으로 올라가고 있고, 믿지 않는 자들은 오른쪽 아래에 꽉 물린 미노스의 안내를 받으며 지옥으로 내려가는 모습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순교당한 성 바돌로매'로 묘사된 미켈란젤로


재미있는 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른쪽 아래에 껍질이 벗겨지는 순교를 당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성 바돌로메가 그려져 있는데, 미켈란젤로는 여기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놓았다는 점이다. 미켈란젤로는 왜 껍질이 벗겨진 바돌로매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을까. 미켈란젤로는 청빈하고 금욕적인 삶을 산 것으로 유명했다. 누구보다 신실한 기독교인인 미켈란젤로였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는 정말 자신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던 모양이다. 신실한 미켈란젤로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고민을 했던 것일까? 

시중에는 미켈란젤로 또한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이 대부분 '남성 나체'인 것,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레오나르도나 도나텔로처럼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 동성애자가 아니었겠느냐고 추측한다. 또 한가지는 미켈란젤로가 친하게 지내던 토마소 카발리에리라는 미남 귀족 소년이 있었는데, 둘 사이에 오고 간 편지가 동성 친구에게 보낸 편지라기보다는 마치 '사랑편지'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는 편지의 한 부분이다. 


나의 매우 친애하는 당신 토마소, 당신으로부터 받은 편지에 대해 답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가 먼저 다가가서 마른 발로 작은 개울을 건너거나 물이 부족해서 메마른 물가를 건너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당신께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해안을 떠난 지금, 제가 기대했던 찰랑이는 물 대신 엄청난 파도가 있는 바다가 제 앞에 나타났기에 저는 익사하지 않기 위해 제가 출발했던 마른 땅의 발자국들을 되돌아 보려고 합니다...저의 작품들이 당신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면 훌륭한 일이라기보다는 행운이라고 여기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어떤 경우에도 당신의 기쁨에 대해 확신한다면, 현재와 미래의 모든 시간을 당신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미래의 한정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당신을 위해 헌신할 수 없었다는 것이, 과거를 되돌리 수 없다는것이 저를 슬프게 합니다. 저는 이제 너무 늙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편지를 읽어봐도 이 편지들을 꼭 '사랑 편지'라고 봐야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든다. 편지 내용이 남자끼리 보내기에는 너무 시적이고 감상적이기는 하지만 '애로틱'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다. 기사도가 아직 살아있던 당시에는 동성간의 편지에도 '존경'의 마음을 담다보면 이렇게 보들보들한 느낌의 편지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남자 뿐 아니라 비토리아 콜론이라는 여인과도 그런 편지를 주고 받았으니까 미켈란젤로를 동성애로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지만 만약 미켈란젤로가 동성애 성향이 있었더라도 그는 아마 육체적 사랑이 아닌 플라토닉한 사랑을 추구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미켈란젤로가 그렇게 자신을 '껍질 벗긴 순교자'로 표현한 것은 분명 자신의 인생에 대한 종교적 성찰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동성애든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든 인간은 죄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니까. 미켈란젤로의 마음에는 철저한 회개를 촉구했던 사보나롤라의 설교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성 베드로 대 성당

성 베드로 대성당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심판>을 완성했을 때가 그의 나이가 66세였다. 천재도 어느새 점점 마지막 시기에 가까워 온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말년에 주로 <성 베드로 대 성당> 재건축에 몰두했다. 투사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성 베드로 성당의 재건축을 개시하고 건축가였던 브라만테에게 맡겼지만, 1514년 브라만테가 죽는 바람에 잠시 중단된 상황이었다. 그리고 라파엘로가 총감독을 맡았다가 그 또한 죽는 바람에 다시 미켈란젤로가 총감독을 맡은 것이다.

미켈란젤로 또한 전형적인 '르네상스 맨'이었기 때문에 그는 당연히 건축도 할 수 있었다. 사실 그는 '대작들'을 완성하는 중간중간에도 계속 작은 규모의 건축 프로젝트를 맡기도 했다. 피렌체의 <라우렌티아나 도서관>이나 기하학적 디자인으로 유명한 <카피톨리노 광장>은 모두 미켈란젤로의 건축 작품이다. 하지만 성 베드로 대성당을 감독을 맡았을 때 미켈란젤로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자신의 창의성을 거의 발휘하지 않았다. 그는 최초 설계자였던 브라만테의 설계안을 최대한 수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스스로 조각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건축가였던 브라만테의 초기 설계안을 존중한 것이다. 자존심이 강한 남자는 다른 남자의 자존심도 존중할 줄 아는 법이다. 미켈란젤로는 이후 거의 20년 동안 성 베드로 대성당을 감독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아무리 있는 설계도 그대로 진행한다고 해도 역대 최고의 규모로 진행되는 성당 재건축에는 상당히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 시기에 미켈란젤로는 거의 다른 작품은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신실한 신앙인이었던 미켈란젤로에게는 '신의 안식처'를 건축하는 이 시간이 분명 의미 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 <론다니니의 피에타> 1564

론다니니의 피에타

그렇게 성 베드로 성당 재 건축을 감독하는 와중에 미켈란젤로는 어떤 조각 하나를 만들기 시작했다. 보통 <론다니니의 피에타>로 알려진 또 다른 피에타다. 제목이 '론다니니'인 이유는 미켈란젤로 죽고 나서 론다니니 후작이 이 작품을 구입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미켈란젤로는 그가 죽기 3일 전까지, 자신의 마지막 한계까지 이 작품을 조각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미완성작이다. 이 작품은 누군가 의뢰해서 주문한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대작을 완성시킨 미켈란젤로는 이미 지방의 영주만큼이나 돈이 많았기 때문에 특별히 돈이 더 필요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이 작품을 10년 동안이나 붙잡고 있었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왜 완성하지 못했을까. 단순히 늙은 육체의 한계 때문이었을까. 

미켈란젤로를 성공하게 만들었던 조각은 <피에타>였다. 젊은 시절 미켈란젤로는 열정과 야심으로 그 어떤 조각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피에타를 만들었지만 이제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온 미켈란젤로는 아마 자신이 정말 신의 아들과 신의 어머니를 그렇게 조각해도 될까 하는 고민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의 육체는 쇠했지만  그의 정신은 점점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감히 인간인 내가 신적인 존재들을 표현해도 되는 것인지, 한계가 있는 인간의 실력으로 한계가 없는 존재의 모습을 조각으로 남겨도 되는 것인지 고민했던 게 아닐까. 그래서 미켈란젤로의 이 작품은 미완성임에도 도저히 미완성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완성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고 완성하지 못한 솔직함 그 자체가 가장 완벽한 완성이기 때문이다. 


죽음  

죽기 3일 전까지 돌망치로 대리석을 두드리는 그의 모습은 아름답고, 경이롭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미켈란제로는 많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죽음에 가까이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이제 내 삶은 폭풍우 치는 바다 위에 있네. 

모든 것이 서로 이별하는 넓은 항구에 다다른 작은 쪽배처럼

좋고 나쁜 것 마저 모두 영원으로 떨어지는 그곳에 다다르기 전에.

인간이 방향도 모른 채 찾는 것은 얼마나 죄악 된가

내 영혼을 세상 예술의 숭배자와 노예로 만든 

내가 사랑했던 그 환상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이제 나는 아네

가볍게 가리워진 욕망스러운 생각들은 

두 개의 죽음 앞 가까이서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한 죽음은 분명하고,

다른 죽음은 나를 두렵게 하네.

그림과 조각은 이제 안식을 취하고

내 영혼은 크신 사랑으로 향하네

십자가 위 우리를 붙잡기 위해 두 팔을 펼치신

저 높은 곳에 계신 그분의 크신 사랑으로..


1564년 2월 18일, 88세의 미켈란젤로는 로마의 초라한 그의 집에서 사망했다. 엄청난 재산을 가졌음에도 그의 유품은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작은 성 베드로 조각과 십자가를 지고 있는 작은 예수 조각, 몇 장의 드로잉이 전부였다. 미켈란젤로의 작업량은 엄청났기 때문에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스케치만 모아도 족히 수천 장은 됬을텐데, 미켈란젤로의 스케치는 지금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가 죽기 직전 대부분의 스케치들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그가 왜 모든 자료들을 불태웠는지는 알 수 없다. 그의 타고난 완벽주의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이 땅에서의 예술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천국이 있다면 그는 아마 지금 쯤 천국 어디에선가 아름다운 무언가를 창조하고 있을 것 같다. 그는 무언가를 창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하는 남자였으니까. 정말 그렇다면 그가 천국에서 창조한 예술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창조된 예술은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창조한 예술로는 상상할 수 없는 높은 그 무엇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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