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도시의 마지막
피렌체Firenze라는 이름은 '꽃을 피우다'는 뜻의 플로렌티아Florentia에서 기원했다. 아마 처음 이 땅에 식민지를 세웠던 로마의 카이사르는 아르노강의 언덕에 아름답게 핀 꽃을 보고 그런 이름을 짓지 않았을까. 그런데 정말 피렌체는 지중해의 '꽃의 도시'라고 할만했다. 인류사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르네상스를 화려하게 꽃 피운 도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원히 시들지 않을 것 같았던 르네상스는 여느 꽃의 운명처럼 어느새 점점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피렌체의 중심역할을 하던 메디치의 몰락하자 어쩐지 도시 전체도 점점 활기를 잃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로렌초가 죽은 이후 그의 아들 피에로Piero de' Medici가 가문을 이어받았지만 그는 기울어가는 가문을 일으키기에는 너무 나약한 성격이었다. 당연히 정치적인 역량도 부족했다. 결국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에 대한 통치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그렇게 메디치가 기울어 감에 따라 별처럼 빛나던 피렌체의 예술가들도 더 이상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르네상스가 끝으로 향해 가던 시점에 그 마지막 역할을 담당할 예술가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는 르네상스 3대 천재의 마지막이었던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다. 그는 레오나르도처럼 독창적이지도 않았고 미켈란젤로처럼 신적인 예술가도 아니었지만 르네상스의 문을 닫고 한 시대를 마무리하는 역할을 맡기에는 충분한 예술가였다.
훈훈한 남자
라파엘로는 선배 천재들과는 달리 온유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자화상에 보이는 것처럼 얄상하고 훈훈한 미남이기도 했는데, 외모처럼 성격도 주변에 따듯한 성격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세상 자기밖에 몰랐던 레오나르도나 건드리는 사람은 교황조차 물어뜯는 미켈란젤로와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얼마나 성격이 좋았는지 미켈란젤로를 지팡이로 후려갈겼던 다혈질 교황 율리우스 2세마저 그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때문에 독신으로 살았던 두 천재와는 달리 항상 여자들이 쫓아다니는 남자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구김살'이 없는 남자라고 해야 할까.
그렇지만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그렇게 구김살이 없지는 않았다. 어릴 적 두 부모님을 잃고 고아로 자라야 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8살에 돌아가셨고, 우르비노 지역의 화가였던 아버지 조반니 데 산티Giovanni de' Santi는 라파엘로가 11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어떤 어려움이든 그 어려움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온화한 성격의 라파엘로는 고아가 된 뒤 엇나가기보다는 오히려 더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라파엘로는 아버지가 죽고 얼마 뒤 아버지 생전의 친구였던 페루지노Perugino밑으로 가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17살이 되던 해에 독립된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화가였던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기 때문인지 라파엘로는 곧 우르비노 지역에서는 꽤 실력 있는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위 그림은 이 시절 우르비노의 산 도메니코 교회의 제단화로 제작된 것이다. 물론 비슷한 시기의 피렌체 그림에 비하면 수준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지만 그래도 그의 부드러운 붓질과 색감을 보면 그의 재능은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러던 중 그의 인생을 바꿀 한 가지 소문이 서쪽에서 들려왔다. 바로 피렌체에서 레오나르와 미켈란젤로가 벽화로 배틀을 벌인다는 소문이었다.
벽화대결 직관
이 소문이 동쪽 마을까지 소문이 퍼졌던 것을 보면 당시에 확실히 큰 사건이기는 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세기 최고의 두 천재가 벽화 배틀을 벌이는 것이니까. 아직 어렸던 라파엘로는 동경하는 두 천재가 대결한다는 소문을 듣고 마치 아이돌의 공연소식이라도 들은 소년처럼 마음이 들떴던 모양이다. 두 천재의 대결이라니, 라파엘로는 진심으로 이 대결이 궁금했는지 정말로 짐을 싸고는 피렌체로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라파엘로는 이 참에 아예 피렌체라는 더 큰 물에 나가서 꿈을 펼쳐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모양이다. 라파엘로는 단순히 여행이 아니라 아예 피렌체로 이주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는 아직 어렸지만 우르비노에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이름이 있는 예술가였기 때문에 우르비노 공작의 누이였던 조반나 펠트리아 의 추천서를 받을 수 있었다. 1504년, 라파엘로는 벽화 배틀의 설계자이자 피렌체의 곤팔로니에였던 소데리니Soderini에게 보내는 추천서 한 장을 들고 피렌체로 떠났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두 천재의 대결은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라파엘로는 실망스러웠겠지만 그래도 레오나르도의 앙기에리 전투의 그림 일부와 미켈란젤로의 카시나 전투의 스케치는 볼 수 있었다. 라파엘로는 이 그림들을 보고 아마 엄청나게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고향에서는 그래도 나름 실력있다고 인정받은 예술가였지만 두 천재의 그림과 자신의 그림은 하늘과 땅 차이였던 것이다. 라파엘로는 두 천재의 그림들을 보면서 새롭게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레오나르도는 라파엘보다 30살이나 많았으니 까마득한 대선배 느낌이었겠지만, 당시 아직 젊었던 미켈란젤로와는 8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으니까 아마 언젠간 미켈란젤로를 이겨보리라 하는 경쟁심도 있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피렌체에는 두 천재 말고도 마사초를 포함한 수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들은 널려있었기 때문에 공부할 자료들은 충분했을 것이다. 라파엘로는 그렇게 피렌체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다른 재능
라파엘로는 피렌체로 정착하고 나서는 소데리니의 도움으로 금방 작품을 의뢰받을 수 있었다. 어쨌든 고향에서는 실력을 인정받은 뛰어난 화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파엘로는 습득하는 속도가 빨랐는지 피렌체에 도착하고 나서 그린 그림들을 보면 스타일이 상당히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두 선배 천재들처럼 독창적인 스타일을 창조하기보다는 겸손하게 두 천재의 방식을 습득하는 방법을 택했다. 아마 그의 온건한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리라.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에게서는 스푸마토 기법과 따듯한 색감, 편안한 구도를, 그리고 미켈란젤로에게서는 역동적인 인체 묘사와 창의적인 표현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위 <성모와 아이>를 앞서 보았던 우르비노 시절의 제단화과 비교해 보면 피렌체로 이주한 이후 라파엘로의 스타일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것을 알 수 있다. 일단 딱딱한 고딕 스타일은 거의 사라졌고 따듯한 색감뿐 아니라 레오나르도에게 배운 곰살 맞은 포즈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이렇게 부드러운 스타일의 그림은 피렌체의 귀족들과 부유층들의 취향에 딱 맞는 그림이기도 했다.
그런데 라파엘로에는 두 선배 천재에게는 없는 확실한 다른 재능이 있었다. 바로 사회성이다. 바사리의 표현에 따르면 '온화함 그 자체'였던 라파엘로는 금방 피렌체의 예술가들과 친해질 수 있었고 아름다운 매너와 성격으로 그의 부유한 후원자들과도 친분을 쌓게 된다. 그의 사회성은 단순히 원만한 인간관계뿐 아니라 주문자와의 약속을 지키는 성실함도 포함된다. 돈만 받고 그림을 그려주지 않아 후원자들을 열받게 했던 레오나르도나 주로 자기 마음대로 그림을 그렸던 미켈란젤로와는 확실히 스타일이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라파엘로는 피렌체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금방 많은 숫자의 작품 의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평생 프레스코를 포함하면 거의 150점이 넘는 그림들을 완성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비교적 일찍 죽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다. 다시 말하지만 70세가 가까이 살았며 고작 16점의 작품밖에 완성하지 못했한 레오나르도와느 확실히 비교된다. 거기에 더해 라파엘로는 얼굴도 귀여웠기 때문에 금방 피렌체의 주류로 진입할 수 있었다. 우르비노 출신의 시골 청년이었던 라파엘로는 몇년만에 미켈란젤로에 이어 피렌체에서 주목받는 '또 다른 젊은 천재'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로
1508년, 율리우스 2세는 라파엘로를 로마로 불러들였다. 라파엘로를 추천한 사람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설계했던 건축가 브라만테Donato d' Aguolo Bramante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학연과 지연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성향인지 브라만테는 같은 우르비노 지역 출신이었던 라파엘로를 끌어주려고 했던 것이다.
이 시기는 율리우스 2세가 이미 미켈란젤로를 불러서 한참 구박하던 시기였는데, 율리우스 2세는 당시 미켈란젤로뿐 아니라 뛰어난 예술가라면 누구든 로마로 불러오던 시절이었다. 그는 예술가들을 불러 모아 로마 도시 전체, 특히 바티칸을 피렌체처럼 예술이 빛나는 도시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율리우스 2세는 우선 라파엘로에게 자신이 사는 공관의 '서명의 방'에 4개의 벽면에 벽화를 그리도록 지시했다. 서명의 방은 교황이 서명하는 방이니까 요즘으로 치면 집무실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라파엘로는 아마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옆동에서는 자신이 동경하던 미켈란젤로가 천장화를 그리고 있으니 이 의뢰를 제대로 성공하기만 한다면 미켈란젤로처럼 되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이루는 셈이기 때문이다.
라파엘로는 4개의 벽면에 당시 인문학의 주요 주제였던 신학, 철학, 시학, 법학에 관한 주제를 그리기기 시작했다.
서명의 방
라파엘로가 서명의 방 4 벽면에 기획한 그림이 주제는 아래와 같다.
성찬 논쟁 (신학)
아테네 학당 (철학)
뮤즈들의 고향 파르나소스(시학)
그레고리우스 9세와 유스티니아누스(법학)
처음 시작한 그림은 신학을 주제로 한 <성찬 논쟁>이었고 이어서 철학을 주제로 한 <아테네 학당>도 그리기 시작했다. 율리우스 2세는 라파엘로의 프레스코 벽화들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났을 때쯤 벽화를 직접 보게 되었는데 상당히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교황은 라파엘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 잘하고 있어. 내가 보니까 너는 다른 놈들과는 다르게 확실히 네가 하는 일을 알고 있구만."
율리우스 2세는 아시다시피 다혈질이었기 때문에 결정도 화끈했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아테네 학당>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교황은 다른 방의 벽들에 원래 그려져 있던 다른 화가들의 벽화들을 모두 지워버리라고 하고는 전부 라파엘로에게 다시 그리라고 시킨 것이다.
그리고 무슨 마법이 일어난 건지 언젠가부터 교황은 라파엘로를 "귀한 내 새끼"라고 부르면서 아끼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에게는 밀어서 떨어뜨려 죽인다느니 막말로도 모자라 지팡이로 후려쳤던 그 교황이 말이다. 이 역시 라파엘로의 타고난 따듯한 본성 때문일 것이다. 얼굴도 귀엽게 생겼는데 항상 친절하고 그림까지 잘 그리는 라파엘로를 귀여워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꼰대 미켈란젤로와 훈남 라파엘로
어쨌든 '신참'이었던 라파엘로 입장에서 미켈란젤로는 선배였고 무엇보다 같은 예술가라면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라파엘로는 항상 미켈란젤로에게 깍듯이 대했지만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미켈란젤로는 이미 피렌체 시절부터 라파엘로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원래 미켈란젤로는 자기밖에 모르는 독단적인 인물이기도 했지만 그는 라파엘로가 진정한 예술가가 아니라 그저 남의 기술이나 훔치는 따라쟁이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어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라파엘로는 나를 질투할만했습니다. 그는 예술에 관한 모든 것을 나한테서 배웠으니까요."
한쪽에서 싫어하면 반대쪽에서도 그 미움을 금방 눈치를 채기 마련이다. 미켈란젤로의 경멸어린 시선에도 온유한 남자 라파엘로는 항상 미켈란젤로에게는 존경을 표했지만, 그 착한 라파엘로도 한 번은 반항을 했던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같은 교황청에서 일을 했던 것이니까 오며 가며 복도에서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라파엘로는 사람이 좋았기 때문에 로마에 와서도 곧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최고 권력자인 교황과도 친한 예술가니까 금방 주류가 되어 잘생긴 귀족 청년들과 함께 몰려다녔던 것이다. 그 날도 라파엘로는 귀족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미소를 지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이 젊은 귀족들 집단은 '로마의 훈남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저쪽에서는 작업을 마친 미켈란젤로가 오늘도 땀에 절어 쉰내를 풍기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은 유독 미켈란젤로가 뭔가 심기가 불편했는지 한마디 쏘아붙였다.
"너는 뭐 꼭 사람들을 끌고 다니네. 네가 장군이라도 되나?"
평소 같으면 웃으며 친절했을 라파엘로지만 옆에 귀족 친구들도 있는데 무시를 당하자 객기가 발동했는지 그답지 않게 맞받아 쳤다.
"선배님은 항상 혼자 다니시잖아요. 마치 사형 집행인처럼 말이죠."
아마 옆에 있던 친구들은 히죽 히죽 웃으며 같이 미켈란젤로를 놀렸을 것이다. 그런데 분명 먼저 시비를 건 쪽은 미켈란젤로인데 이상하게도 라파엘로가 악역처럼 보이는 이유는 뭘까. 미켈란젤로는 그런 남자였다. 그 서글서글한 라파엘로까지 악당처럼 보이게 만드는 사람인 것이다. 어쨌든 미켈란젤로가 저렇게 쏘아붙인 것을 보면 아무리 천하의 미켈란젤로라도 라파엘로가 또 다른 '신흥 천재'로 불리는 것이 신경이 쓰였던게 아닐까 싶다.
한편 이런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평생 수도사 같은 삶며 예술에만 몰두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유명한데, 종교적으로 워낙 신실한 사람이라 별다른 연애 스토리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미켈란젤로도 남자였으니 왜 성적인 욕망이야 없었겠느냐마는 그는 종교적 신념으로 스스로 절제하며 살았던 것이다. 반면 라파엘로는 즐길 줄 아는 남자였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전형적인 귀여운 남자인 데다가 무엇보다 본인도 여자들을 좋아했으니 여자들이 곁을 떠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로마에서 교황의 총애까지 받는 예술가였던 라파엘로는 어느새 로마에서 거의 연예인 비슷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라파엘로는 로마에 와서 여러 파티 모임에 불려 다니며 당시 로마에서 소문난 미인들과 같이 파티를 즐기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생각했던 게 아닐까 싶다. 자신은 성적으로 억압된 삶을 사는데, 라파엘로는 성적으로 개방된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라파엘로는 실력도 안되는 놈이 자기 절제도 안되고, 하라는 노력은 안하고 그저 타고난 싹싹함 때문에 귀족들과 교황이 총애를 받을 뿐인, 천재라고 하기엔 한참 모자란 예술가인 것이다. 그런데 진짜 천재인 나보다 인기가 많고 게다가 로마 소녀들의 사랑까지 독차지하고 있으니 속에서부터 알 수 없는 질투가 올라왔던 것은 아닐까.
미켈란젤로의 영향
어쨌든 아무리 라파엘로가 인기가 많다고 해도 그도 근본은 예술가였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 예술가들의 '승부'는 인기가 아닌 예술로 내는 것이다. 둘 중 누가 더 뛰어난 예술가라고 해야 할까? '신적인 예술가'였던 미켈란젤로의 상대가 세상에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지만 만약 두 사람의 실력차이가 난다면, 그 누구보다 그 실력차이를 정확히 느끼는 사람들은 바로 본인들일 것이다.
라파엘로는 로마에서 미켈란젤로와 동시에 벽화 작업을 하고 있을 때를 생각해보면, 정확히 말하면 이때까지만 해도 미켈란젤로는 <피에타>와 <다비드>를 완성한 조각가였지 벽화를 그린 적은 없었다. 레오나르도와의 벽화 대결로 기획된 <카시나 전투> 벽화도 결국 취소되었고 <시스틴 성당 천장화>도 아직은 그리는 중이었으니까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직 모르는 시점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미 로마에 있는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에 관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엄청난 것이 천장에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누군가 미켈란젤로 몰래 성당 안에 들어가서 천장화의 진행과정을 봤던 모양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 본인은 어쨌든 그림이 완성되기 전 까지는 아무에게도 그림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했다. 도대체 천장화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가장 보고 싶어 했던 사람 중 하나는 당연히 라파엘로였다. 그래서 라파엘로는 고향 선배였던 브라만테에게 살짝 부탁했다. 미켈란젤로 모르게 천장화를 살짝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회가 쉽게 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는 쉬지 않는 예술가였으니까. 그러던 중 미켈란젤로가 잠시 피렌체로 떠날 일이 생기는 바람에 잠깐의 기회가 나게된다. 이 기회를 포착한 브라만테와 라파엘로는 예배당의 키를 가지고 와서 몰래 들어가 천장화를 봤다. 아마 라파엘로는 세상에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그 천장화들을 보고 느꼈을 것ㅇ다. 아, 이 사람은 미친 사람이구나.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엄청난 천장화를 본 이후 도저히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라파엘로가 피렌체에 있던 초기에는 주로 레오나르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면 이 시점 이후부터는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은 된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영향은 라파엘로의 여러 그림에 나타난다. 아직 완성은 하지 못햇던 <아테네 학당> 뿐 아니라 나중에 그리게 될 산타고스티노 교회의 <선지자 이사야> 그림에서도 미켈란젤로의 영향이 나타난다. 라파엘로는 피렌체시절에는 부드럽게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는데 이 시점 이후로 미켈란젤로 특유의 역동적인 인체 표현이 강조되는 스타일로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아테네 학당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충분히 받은 라파엘로는 작업중이었던 <아테네 학당>을 드디어 완성하게 된다. 잊지말하야 할 것은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의 영향을 받는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미켈란젤로조차도 분명 도나텔로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렇게 완성된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은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성당 천장화>와 함께 르네상스에서 가장 중요한 벽화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라파엘로는 '철학'이라는 주제에 맞추어 그리스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철학자들, 예를 들어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 아르키메데스, 차라투스트라 같은 철학자들을 한 곳에 모아 놓아 그렸다. 신플라톤주의가 한참 유행하던 시절이었으니 사람들은 아마 자신들이 좋아하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어떻게 생겼나 하고 한명 한명 확인하며 매우 흥미 있게 벽화를 구경했을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라파엘로가 이 철학자들을 그릴 때 같은 시대의 유명한 예술가들의 얼굴을 모델로 삼아 그렸다는 것이다. 그리스 시대의 철학자들 중에 가장 중요한 철학자는 아무래도 그리스 철학의 양대 기둥,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다. 라파엘로는 중앙에 그 두명을 그려놓았는데 플라톤의 얼굴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얼굴을, 그리고 그 옆 아리스토텔레스의 얼굴에는 미켈란젤로의 제자였던 바스티아노를 그려놓았다. 그리고 아르키메데스의 얼굴에는 자신을 끌어주었던 고향 선배 브라만테의 얼굴로 그려놓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매우 이상하다. 당시 예술가들의 명성을 생각해 본다면 플라톤를 레오나르도의 모습으로 그렸다면 당연히 그 옆의 아리스토텔레스에는 미켈란젤로가 들어가야 아귀가 맞다. 그런데 라파엘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리에 미켈란젤로가 아닌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그의 제자인 바스티아노를 그려 넣은 것이다. 그리고 미켈란젤로는 왼쪽 아래 헤라클리투스라는 철학자로 그려놓았다. 헤라클리투스는 그리스 철학자들 중에서 오만하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인간 혐오주의자로 철학자로 알려져 있고 별로 유명한 철학자도 아니다. 게다가 라파엘로는 헤라클리투스를 그릴 때 미켈란젤로 특유의 부츠를 신고 있는 우중충하고 꼬질꼬질한 복장으로 그려 놓았다.
라파엘로는 왜 미켈란젤로를 헤라클리투스에 그려 넣은 것일까. 일단 확실한 것은 원래 스케치 버전에서는 미켈란젤로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라파엘로가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에 감명을 받아서 나중에 미켈란젤로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추가하다 보니 자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헤리클리투스로 그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천장화를 그리기 전부터 이미 충분히 유명했으니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소심한 복수'가 아니었을까 싶다. 라파엘로는 줄곧 자신을 무시했던 미켈란젤로에게 '난 형님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 안 하는데요? 차라리 형님 제자가 더 대단한거 같은데요?'라고 말하며 자신도 한번 미켈란젤로를 무시해 보려고 했던게 아닐까. 그리고는 짓궂게도 우울증에 걸린 철학자인 헤라클리투스로 미켈란젤로를 그려 넣은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비아지오 사제를 지옥문의 미노스로 그린것처럼 라파엘로도 그림으로 소심한 복수를 한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아마 남들보다 몇배는 예민한 남자였던 미켈란젤로는 속으로는 상당히 약이 오르지 않았을까 싶다.
라파엘로의 방
앞서 설명한 것처럼 율리우스 2세는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을 훌륭하게 그리는 것을 보고 '서명의 방' 말고도 교황의 거주 공간에 있는 다른 방들에도 모두 벽화를 그리라고 주문했다. 그렇게 4개의 방에 총 16개의 거대한 프레스코 벽화를 주문한 것이니 율리우스 2세는 확실히 통이 큰 사람이었다. 이 총 16개의 그림이 있는 교황의 방들을 지금은 라파엘로가 그린 벽화가 남아있다는 의미로 '라파엘로의 방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라파엘로는 '서명의 방'을 완성한 다음 접견실에 새로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헬리오도로스 추방 (1511-1512)
볼세나 미사의 기적 (1512)
성 베드로 해방 (1513-1514)
레오 대왕과 아틸라의 만남 (1514)
이 접견실은 지금은 '헬리오도로스의 방'이라고 부르는데 첫 번째 그림이 '헬리오도로스의 추방'을 주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방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라는 큰 주제 아래, 위와 같은 4가지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 이 4개의 그림 중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성 베드로의 해방>이다.
이 벽화는 성경에서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나오는 이야기를 총 3개의 장면으로 나누어서 표현하고 있다. 가운데 장면에는 격자무늬의 철창살에 잠들어있는 병사들 사이에 눈부신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를 깨우고 있다. 오른쪽에는 그렇게 감옥에서 풀려나온 베드로와 천사가 잠든 병사들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오고 있다. 그리고 맨 왼쪽에는 병사들이 잠들어 있는 다른 동료병사들을 깨우며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보고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라파엘로는 아마 이쯤에서부터 자신의 색깔을 조금씩 찾기 시작했던게 아닐까 싶다. 라파엘로는 성경의 이야기를 그저 남들처럼 따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상상력을 사용하여 그리려고 했다. 천사를 표현할 때는 머리에 오로라가 아닌 몸 전체가 빛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그려 권능있는 존재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점도 그렇고 닫혀있는 격자무늬의 철창살을 적나라하게 그려 구조적 아름다움에 더해 당시의 현장의 생동감 또한 보여주고 있는 점도 그렇다. 누구보다 흡수가 빠른 예술가였던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를 통해 자신만의 색깔로 그리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은 게 아닐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르비노 시골 출신이 재능 있는 청년'에 불과한 라파엘로였지만, 이제는 정말 어였한 예술가가 된 것이다.
이렇게 라파엘로는 두 개의 방에 8개의 벽화를 완성하고 세 번째 방도 작업을 시작했지만 16개의 벽화를 전부 완성시키지는 못했다. 만약 16개의 벽화를 라파엘로가 전부 완성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중요한 예술로 남았겠지만, 나머지 방들은 한참 뒤에 라파엘로의 제자들이 라파엘로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다. 벽화가 중단된 이유는 라파엘로가 급하게 교황의 다른 명령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
1514년, 라파엘로를 물심양면으로 밀어주었던 고향 선배였던 브라만테가 죽었다. 70세의 나이였으니 갑작스러운 죽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브라만테는 죽으면서 자신의 일생 최대의 사업이었던 성 베드로 성당 재건축을 라파엘로에게 맡기고 떠났다. 사실 경력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이정도 규모의 일이라면 미켈란젤로에게 맡기는 게 맞았겠지만, 아무래도 브라만테는 고향 후배였던 라파엘로를 밀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라파엘로는 하던 벽화작업을 중단하고 급하게 대성당 프로젝트를 맡게 된 것이다.
당시의 건축은 공학적인 측면만큼이나 예술적인 측면이 중요했기 때문에 예술가들이 건축을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라파엘로는 로마로 오고 나서 몇년 뒤 키지 예배당을 포함한 몇개의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이 있지만 아마 이런 거대한 프로젝트는 맡아본 적이 없으니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라파엘로는 중요한 프로젝트였던 만큼 최선을 다했다. 때문에 성 베드로 대 성당의 총감독을 맡으면서 라파엘로의 그림 제작 숫자는 급속도로 줄어들게 된다. 거대한 성당 건축의 총감독을 맡는 일은 눈앞의 그림을 한 장 그리는 것과 비교가 안 되는 노력과 시간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몇 년 동안 라파엘로는 성 베드로 대 성당에 거의 모든 정력을 쏟아 부을 수 밖에 없었다.
성 베드로 대 성당의 총감독이 된 라파엘로는 위 설계도에 보이는 것처럼 정사각형이었던 브라만테의 기본 설계를 바꾸어 긴 직사각형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이 계획은 결과적으로는 실행되지 않았다. 라파엘로는 6년 정도 총감독을 맡았지만 다시 총감독을 그만두고 내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 다음 총감독은 페루치와 상갈로를 잠시 거쳐 최종적으로는 미켈란젤로가 맡아서 건축을 진행했다.
라파엘로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총감독에서 내려와야 했던 이유는 안타깝게도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빵집 딸과의 사랑
라파엘로는 두 선배 천재와는 달리 3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찍 생을 마감했다. 그는 왜 한창나이에 갑자기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일까. 라파엘로의 죽음은 안타깝게도 '여자 문제' 때문이었다.
얼굴도 귀엽고 성격까지 좋은 라파엘로는 성 베드로 대 성당의 총감독까지 맡으며 완전한 성공가도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성공까지 했으면 당연히 주변에서 혼담이 오갈 수밖에 없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는 평생 독신으로 산 것으로 유명하지만 라파엘로는 무엇보다 본인이 여자를 좋아했으니 결혼을 안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로마에 와서 베르나르도Bernardo Divizio추기경과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는데, 이 추기경은 라파엘로에게 장가는 도대체 언제 갈 거냐고 계속 재촉했다고 한다. 아마 추기경은 라파엘로에게 자신의 조카딸이었던 마리아를 소개시켜주고 싶어서 은근히 떠보았던 모양이다. 평민 출신이었던 라파엘로 입장에서는 이제 자리도 어느정도 잡았으니 귀족과 결혼할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1514년, 성 베드로 성당 총감독을 맡은 그 해에 라파엘로는 추기경의 조카딸 마리아와 약혼했다. 그런데 라파엘로는 마리아에게 조금 더 안정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며 약혼 후 6년 동안이나 결혼을 미루게 된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성당을 재건축을 하는 일이니 바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런데 라파엘로가 결혼을 미룬 이유는 단순히 바뻤기 때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르조 바사리는 라파엘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여자 때문에 행복을 느꼈으며, 항상 여자를 섬길 준비가 되어있었다."
라파엘로가 결혼을 계속 미루었던 이유는 당시에 다른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다른 여자는 빵집의 딸로 알려진 마르게리타 루티Margarita Luti라는 여인이었다. 라파엘로는 종종 자신의 그림에 이 빵집 딸 마르게리타를 숨겨놓았다. 라파엘로가 그렸던 여러 그림들을 살펴보면 유독 비슷한 외모의 여인이 자주 등장하는것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마르게리타 루티를 모델로 그린것으로 추측된다.
위 두 그림을 보면 왼쪽은 성모 마리아를 그린 것이고 오른쪽은 어느 여인의 초상화인데, 얼굴이 묘하게 닮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지금까지는 라파엘로와 마르게리타와의 관계를 그저 추측만 할 뿐이었는데, 2001년에 재미있는 연구가 발표된다. 엑스레이로 오른쪽 <라 포르나리나>를 촬영을 해봤더니, 그녀의 왼쪽 팔의 약지 손가락에 반지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반지가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누군가 손가락을 덧칠해 반지를 지워놓았기 때문이다. 반지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림을 보면 여인의 왼쪽 팔뚝의 파란색 팔찌에는 '우르비노의 라파엘로'라고 되어있습니다. 이는 라파엘로가 이 여인을 '라파엘로의 것'이라고 그림으로 찜해놓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약혼 반지는 이 여인과 라파엘로가 약혼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덧칠로 지워놓은 것은 그림이 그려진 후 그 약혼을 숨기려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종합해보면, 라파엘로가 이 그림을 그렸을 때가 1518년이었으니까 라파엘로는 1514년 추기경의 조카딸 마리아와 약혼을 이미 해놓고도 4년 뒤 빵집 딸과 또 다른 약혼을 했던 셈이다.
그런데 이 빵집 딸도 보통여자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연애에 있어서는 라파엘보다 한수 위였는지 라파엘로는 그녀에게 정신이 팔려서 그녀와 떨어져 있으면 그림을 그릴 수 없을 만큼 그녀에게 집착했다고 한다. 대 성당의 총감독을 맡기 전, 라파엘로는 아고스티노라는 은행가의 별장에 프레스코 벽화를 그린적이 있는데 이때 라파엘로는 이 빵집 딸에게 정신이 팔려서 그녀가 곁에 없으면 아예 작업 진행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고스티노는 이러다가는 영원히 작업이 완성되지 않을 거 같아 걱정하다가 아예 마르게리타를 라파엘로가 묵고 있는 별장으로 집어 넣어서 같이 살도록 했다. 그녀가 곁에 있자 라파엘로는 다시 그림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로 빵집 딸에 빠져있었으니 추기경의 조카딸과 결혼이 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 라파엘로는 고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은 평범한 빵 집 딸이었는데, 그렇다고 성공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귀족과의 결혼도 놓치기 싫었고 추기경 형님과의 신의도 버릴 수가 없으니, 약혼을 해 놓고도 안절부절 결혼을 계속 미룬 것이다.
이별
그렇게 고민하던 와중 라파엘로에게 갑자기 죽음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관한 조르조 바사리의 표현이 재미있다.
"라파엘로는 비밀리에 계속 육체적인 사랑을 즐겼는데, 그는 평범함을 넘어설 만큼 사랑의 쾌락을 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보통 때보다 더 과격하게 즐긴 후 심각한 병에 걸려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라파엘로는 평소에는 그렇게 상냥하고 서글서글한 남자였지만 침대에서 만큼은 몬스터가 되는 남자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 날은 너무 과도하게 즐기다가 몸이 상해버린 것이다. 조르조 바사리는 항상 선배 예술가들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찬양하는 방식으로 쓰곤 했는데, 아마 '과격하게 즐긴 후'라는 표현 까지 썼던 것을 보면 당시에 라파엘로가 쾌락적 사랑을 추구한다는 소문은 이미 상당히 유명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몸에서 불처럼 열이 나자 의사들은 방혈술을 처치했다. 당시 의사들은 사람들이 아픈 이유가 몸에 나쁜 피가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사람이 병이 들면 피를 뽑고는 했다. 의사들은 라파엘로의 피를 뽑았고 당연히 이 무식한 치료법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었다. 결국 이후 두 주 정도를 더 시름시름 앓았지만 라파엘로는 도저히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죽음에 가까이 가고있던 라파엘로의 곁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다름아닌 빵집 딸 마르게리타였다. 라파엘로는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 마르게리타에게 자신이 죽고 나서도 편안히 살 수 있도록 충분한 유산을 남겨주었다. 죽음을 앞에 둔 라파엘로가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렇게 둘은 죽음 앞에 헤어지게 된다.
마지막
3대 천재 중에 라파엘로는 교황들과 가장 사이가 좋았던 사람이었다. 율리우스 2세가 죽은 뒤에도 후임교황들과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런 라파엘로도 마지막에는 약간 욕심이 났던 모양이다. 라파엘로는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에게 자신을 판테온 신전에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판테온은 부르넬레스키가 돔을 연구했던 바로 그 로마 신전이다. 판테온은 로마 역사를 대표하는 신전이니까 그냥 아무나 묻히고 싶다고 묻힐 수 있는 장소는 당연히 아니었다. 그런데 누구보다 예술을 좋아했고 예술가들을 존경했던 레오 10세는 라파엘로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라파엘로는 마지막으로 예배를 드리고 회개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1520년 4월 6일, 고작 37세의 나이로 안타깝게도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라파엘로의 집 그의 시신 위에는 그의 마지막 작품인 <변형>이 놓여 있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마가복음 9:2-3
프랑스 나르본 대성당을 장식할 계획이었던 이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화산에서 광채로 변화했다는 성경의 기록을 그린 것이다. 라파엘로도 죽어서는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던 것일까.
로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예술가였던 라파엘의 장례식은 매우 장엄했고 많은 군중이 참석했다고 한다. 보라색 옷을 입은 네 명의 추기경이 그의 시신을 옮겼고, 교황이 그의 손에 마지막으로 키스를 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판테온 신전에 묻힌 라파엘로의 석관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ILLE HIC EST RAPHAEL TIMUIT QUO SOSPITE VINCI RERUM MAGNA PARENS ET MORIENTE MORI"
"여기 생전에 어머니 자연이 그에게 정복될까 두려워했던 라파엘로의 무덤이 있으니, 이제 그가 죽고 그와 함께 어머니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하노라."
어쩐지 허탈한 죽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앞날이 누구보다 밝았고 성격까지 좋았던 젊은 예술가 라파엘로는 '라파엘로의 방들'에 남은 여러 프레스코 벽화들과 성 베드로 대 성당을 미완성으로 남겨둔 채 갑자기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렇다면 빵집의 그녀 마르게리타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에 관한 기록은 바사리의 전기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후대의 사람들이 트라스테베레에 있는 산타폴로니아 수도원에 그녀의 기록을 찾아낼 수 있었다.
“1520년 8월 18일, 오늘 시에나의 프란체스코 루티Francesco Luti of Siena의 미망인 딸인 마르게리타Margherita가 우리 수도원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추정을 해볼 수 있다. 라파엘로가 그녀를 사랑했던 만큼 그녀도 라파엘로를 사랑했으며, 라파엘로가 먼저 죽자 그를 잊지 못한 마르게리타 또한 수도원에 평생 은둔하는 생활을 선택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둘은 정말 서로를 뜨겁게 사랑했던 모양이다.
르네상스의 마지막 천재
3대 천재의 마지막이었던 라파엘로는 이렇게 미켈란젤로보다 일찍 짧은 생을 마감했다. 미켈란젤로가 라파엘로를 아무리 얄밉게 생각했다고 한들 어두워져 가는 피렌체에 햇살처럼 등장했던 후배 예술가의 마지막을 씁쓸한 심정으로 지켜보지 않았을까.
라파엘로는 초월적인 두 천재 선배 예술가와는 분명 다른 성격의 예술가였다. 나쁘게 평한다면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만큼 비번하지는 않은 예술가였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는 분명히 르네상스 마지막 시기에 그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 했다. 라파엘로는 두 선배 천재들의 강한 천재성을 흡수하여 그의 성품답게 부드럽게 그의 예술로 녹여내었다. 르네상스의 강렬한 예술을 훨씬 대중적인 느낌의 편안한 예술로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 게다가 라파엘로는 요절했음에도 150점에 달하는 많은 수의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르네상스의 양식이 전 유럽에 퍼지는 씨앗이 될 수 있었다.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는 둘 다 숫자로는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이렇게 라파엘로를 마지막으로 끝에 다다르게 된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한다면 1500년대로 접어들면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로마로 이주한 것 자체가 피렌체 예술의 몰락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피렌체에는 더 이상 천재들을 뒷받침 해 줄만한 능력을 가진 후원자들도, 정치인들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꽃이 시들어야 씨앗이 맺히듯 피렌체의 르네상스가 시든 이후 르네상스의 씨앗이 맺힐 수 있었다. 이제 이 씨앗들은 전 유럽으로 퍼져 수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새로운 예술로 다시 탄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