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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Jun 13. 2024

작은 술통, 보티첼리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에 그려진 자화상, 1475


과도기의 아름다움

르네상스는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이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두 세계가 이리저리 어지럽게 섞여있는 세계라고 할 수도 있다. 르네상스의 아름다움은 어쩌면 양극단의 세계관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긴장감에서 꽃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새벽이 밤과 낮 사이에서 양쪽의 아름다움을 모두 가지고 있듯 르네상스도 종교가 가진 아름다움과 인본주의가 가진 아름다움이 섞이면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시대라면 혼란 또한 생기가 마련이다. 아직 기독교 세계관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개혁적인 르네상스가 세상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반대로 르네상스의 개혁자들은 개혁을 쫓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과거에 갇혀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르네상스의 예술가들도 마찬가지로 그 가운데서 혼란스러워했다. 예술가들은 이제 성모 마리아를 그려야 할까 아니면 비너스를 그려야 할까?

생각해 보면 가장 앞서 예술을 이끌어 가던 피렌체의 예술가들 중에도 아직까지는 비너스를 그린 화가가 한명도 없었다. 도나텔로도, 마사초도 모두 그리스 로마의 방식과 생각을 부활시키려고 했지만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다윗같은 성경속의 인물들을 그렸던 것이다. 그만큼 기독교적 세계관은 아직까지 강력하게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도 쉽게 넘지 못한 그 선을 넘은 화가가 있다. 바로 산드로 보티첼리다.


필리포 리피 '성모와 아기 예수 그리고 두 천사', 나무에 템페라 1460-65 / 보티첼리 '성모와 아기예수와 어린 세례요한' 나무에 오일과 템페라 1470-75


보티첼리

마사초도 별명이었고 도나텔로도 별명이었던 것처럼, 보티첼리도 별명이다. 본명은 알레산드로Alessandro di Mariano di Vanni Filipepi 였고, 보티첼리는 '작은 술통'이라는 뜻 이다. 설에 의하면 원래 보티첼리의 형이 술통처럼 뚱뚱한 몸매 때문에 '보티첼로'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그의 동생이었던 알레산드로도 몸매가 비슷했는지 끝만 살짝 가벼운 느낌으로 바꿔서 '보티첼리'라는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마 보티첼리의 어머니는 어릴 적 보티첼리를 부를 때 "산드로야 밥 먹어라!"라고 불렀겠지만 언젠가부터 보티첼리는 자신의 별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스스로도 보티첼리라고 사인하기 시작했다.

보티첼리는 어릴 적부터 평범하지는 않았던 학생이었다. 무두장이(가죽을 만드는 사람)였던 그의 아버지는 꽤나 교육열이 있었는지 보티첼리가 원하는 교육은 다 시켜주려고 했지만 보티첼리는 학교 생활을 매우 지루해했다고 한다. 아마 머리가 너무 똑똑해서 읽기, 쓰기, 산수 같은 평범한 학교 수업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학교에서는 선생님 속을 꾀나 썩이는 아이였는지 짓궂은 농담을 하는 참을성 없는 아이였다고 한다. 보티첼리는 학교생활에 계속 적응을 못했지만 다행히 미술에 재능이 있어서 학교공부는 그만두고 미술 공방 쪽으로 가게 된다. 그때 만난 스승이 필리포 리피Filippo Lippi라는 화가였다. 필리포 리피로부터 기본적인 미술 공부를 마친 보티첼리는 25살쯤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작업실을 열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위는 보티첼리의 스승 필리포 리피의 그림이다. 보티첼리 그림의 특징 중 하나는 인물의 외곽선이 강조되었다는 점인데, 아마 그의 스승이었던 필리포 리피에게서 배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보티첼리는 필리포 리피로부터 그림 기술보다 더 귀중한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필리포 리피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는 중이었는데, 보티첼리도 스승을 통해 메디치 가문을 만나게 된 것이다. 당시 예술가로서는 최고의 인맥이 닿게 된 것이다.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 패널에 템페라, 1475 

메디치 가문과 보티첼리

이 그림은 1475년경, 가스파레라는 피렌체의 금융 중개인이 보티첼리에게 의뢰한 <동방박사의 경배>다. 이 금융인은 자신의 가족 예배당을 위해 이 그림을 주문했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 멀리서 경배하러 온 3명의 동방박사 중 한 명의 이름이 '가스파레'였다고 하는데 동방박사 중 한 명이 자신과 이름이 같으니 동방박사의 경배라는 주제를 보티첼리에게 주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그림의 재미있는 점은 당시 메디치 가문의 남자들이 숨겨져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맨 왼쪽에 붉은 옷을 입고 칼을 들고 있는 인물은 앞서 메디치의 불꽃 남자 로렌초 데 메디치다.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1475년이니까 아직 파치 음모가 일어나기 3년 전의 모습이기 때문에 매우 젊게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중앙에 아기예수의 발을 만지며 무릎 꿇고 있는 동방 박사는 국부 코시모, 그리고 정 중앙에 붉은 망토를 입은 남자는 코시모의 다음 후계자였지만 통풍으로 일찍 죽었던 피에로, 그리고 피에로 바로 옆에 흰 옷을 입고 향로를 들고 있는 남자는 일찍 죽은 피에로의 동생 조반니, 그리고 그의 오른쪽에 검은 망토를 입은 검은 머리의 남자가 파치음모 사건에서 암살당했던 줄리아노다. 

이렇게 보티첼리는 동방박사의 주인공 3명을 모두 코시모와 그의 아들들을 묘사해 놓았고, 그의 두 손자 로렌초와 줄리아노까지 등장시켰다. 그리고 보티첼리는 자신의 자화상도 그려 놓았다. 맨 오른쪽에 노란색 옷을 입고 관객을 응시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보티첼리다. '작은 술통'이라는 별명에 알맞게 참치처럼 통통한 몸매를 자랑하는 보티첼리다. 

그렇다면 의뢰인 가스파레는 자신의 가족 예배당에 올려놓을 그림에 왜 굳이 메디치의 남자들을 등장시킨 것일까? 누군가는 피렌체의 금융인이었던 가스파레가 여전히 피렌체의 금융계를 꽉 잡고 있던 메디치 가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보티첼리에게 '특별주문'을 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보티첼리가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는 메디치 가문이 고마워 스스로 메디치 가문의 인물들을 그림에 몰래 등장시켰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당시에는 주문자의 요구가 상당히 중요하던 시절이니까 아마 '가스파레 아부설'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어느 쪽이든 보티첼리가 어느새 메디치 가문과 가까워졌다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신플라톤주의 

그러는 동안 피렌체에는 신플라톤주의가 꽃피고 있었다. 피렌체의 신플라톤주의는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국부 코시모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문학에 누구보다 관심이 많았던 코시모는 신플라톤주의를 피렌체의 지성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소개했고 신플라톤주의자였던 마르실리오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코시모가 손자 로렌초의 가정교사로 마르실리오를 선택했던 이유도 그만큼 그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물론 코시모는 자신이 부흥시킨 신플라톤주의가 앞으로 르네상스의 미술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까지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코시모는 물주였지 예술가나 학자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코시모는 돈이라는 연료를 신플라톤주의라는 자동차에 부었고 이는 결국 신플라톤주의가 거침없이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코시모는 왜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도 아니고 신소크라테스주의도 아니고 신플라톤주의를 택했을까? 여전히 유럽은 기독교 중심사회였다. 아마 기독교를 믿는 유럽인들에게 그나마 가장 이질감이 없는 그리스의 사상이 바로 플라톤의 사상이었을 것이다. 플라톤은 알려진 것처럼 '이데아'의 세계를 주장했는데, 이는 묘하게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관념적으로 유사하다. 또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론도 신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일자, 정신, 영혼'과 어딘가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아직 기독교의 교리들이 완성되지 않았던 2~3세기의 교부 철학자들은 기독교를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과정에서 플라톤의 사상을 많이 가져다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디치의 후원을 받으며 로렌초와도 가깝게 지냈던 보티첼리도 자연스럽게 신플라톤주의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보티첼리는 어릴 적부터 지적 호기심이 상당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런 새로운 철학의 물결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이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마르실리오와도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아마 보티첼리는 카레기에 있는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밤새 등불을 켜고 앉아 마르실리오와 신 플라톤주의와 그리스 철학에 관한 토론을 나누지 않았을까.


보티첼리 '프리마베라(봄)' 패널에 템페라, 1470~1480 사이


프리마베라

보티첼리는 이 시점에 상당히 과감한 시도를 했다. 신플라톤주의를 그림에도 적용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위 <프리마베라>는 르네상스 예술에서 본격적으로 그리스 신화를 다룬 첫 번째 그림이다. 생각해 보면 그리스 로마의 문화를 깨우는 르네상스 문화운동이 시작된 지 벌써 200년이나 됐지만, 보티첼리에 와서야 그리스 신화를 그린 그림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만큼 어느 분야에서든 변화를 일으키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림의 전체적인 주제는 제목 그대로 '봄'이다.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그림을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천천히 살펴 보자. 오른쪽에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아름다운 요정 클로리스를 납치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꽃 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신이 있는데 그녀는 플로라다. 재미있는 점은 꽃의 여신 플로라와 요정 클로리스는 원래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다. 신화에 따르면 제피로스는 클로리스를 납치한 이후 이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그녀를 꽃의 여신 플로라로 탈바꿈 시켜주었다고 한다. 보티첼리는 이 짧은 이야기를 오른쪽 한 장면에 몰아서 보여주고 있다. 

중앙에는 그림의 주인공인 미와 사랑의 여신 비너스가 서 있고 그 위에는 사랑의 신 큐피드가 화살을 겨누고 있다. 프리마베라(봄)라는 제목과 사랑의 여신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사실 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랑의 계절을 상징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춘화春畵는 직역하면 '봄 그림'이지만 실제로는 남녀 간의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그림을 뜻한다. 비너스의 경우도 봄을 시작하는 4월의 여신이자 동시에 사랑의 여신이다. 

그리고 왼쪽에는 쾌락, 순결,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그리스의 삼미신이 서 있다. 특히 가운데 순결을 상징하는 여신은 장난스러운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 시선이 왼쪽 끝의 남자를 향하고 있다. 아마 큐피트의 사랑의 화살을 맞고 왼쪽 끝의 저 남자에게 사랑에 빠진 모양이다. 그녀가 사랑에 빠진 남자는 전령의 신이자 5월을 관장하는 신 머큐리다. 그는 하늘의 먹구름을 쫓아내며 봄을 지키고 있다. 

보티첼리는 이 그림을 왜 그린 것이고 누구의 주문을 받은 것일까? 학자들은 이 그림이 로렌초가 가문의 6촌 조카의 결혼식에 선물로 보내준 그림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단 그림의 전체적인 주제가 '사랑'이기 때문인데 오른쪽의 제피로스와 클로리스의 사랑, 중앙의 사랑의 여신 비너스, 왼쪽의 순결의 여신과 머큐리와의 사랑, 모두 사랑의 스토리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적인 배경을 살펴보자. 뒤에 있는 '오렌지 나무 숲'은 무엇일까. 오렌지는 메디치 가문을 상징하는 과일이다. 메디치 가문의 문장에 있는 '빨간 공'이 오렌지는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꽃이 가득한 것은 피렌체 도시 자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피렌체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꽃의 도시'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정리해 보면 주제는 '꽃의 도시 피렌체에 새로운 봄이 오게 할 메디치 가문'이고, 목적은 사랑을 상징하는 비너스와 사랑의 스토리들을 담아 조카의 희망찬 결혼식을 축하하며 보내준 그림인 것이 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묘한 지점이 있다. 르네상스에 처음 등장한 그리스 신화의 그림인데 이 정도까지 내용이 복잡할 수 있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보통 상식으로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라고 하면 제우스, 포세이돈, 비너스 정도가 될텐데 보티첼리는 삼미신, 서풍의 신 제피로스와 플로리스, 그리고 4월과 5월을 상징하는 비너스와 머큐리, 말하자면 그리스 신화를 전공한 사람이나 알 법한 내용을 담아 복잡하게 그림을 그린 것이다. 아마 보티첼리는 그리스 철학 전문가였던 마르실리오의 도움을 받아 내용을 구성하지 않았을까 싶다. 메디치 가문 사람의 결혼식을 축하하는 선물로 그리는 것인데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로렌초의 주문이니 보티첼리는 아마 신경을 많이 썼을 것이다.



비너스의 탄생

보티첼리는 비슷한 시기에 다른 한 장의 그림을 또 그렸다. 보티첼리의 대표작 <비너스의 탄생>이다. 이 그림은 <프리마베라>보다는 조금 더 이해하기 쉽다. 기본적으로 호메로스의 시를 그대로 이미지화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최고의 시인이었던 호메로스는 자신의 찬가에서 비너스 여신의 탄생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다.


키프로스 섬, 촉촉한 제피로스의 숨결이 부는 곳으로

그녀는 부드러운 거품으로 울려 퍼지는 바다 위로 이끌렸습니다.

금빛띠를 두른 호라이 여신이 그녀를 기쁘게 맞이하며 

그녀에게 하늘의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비너스는 바다에서 탄생했다. 농경의 신 크로노스가 자신의 아버지이자 하늘의 신 우라노스에게 불만을 품고 거대한 낫으로 아버지를 거세를 해 버렸는데 그때 우라노스의 정액이 바다로 떨어졌다. 바다에 떨어진 우라노스의 정액은 바닷물과 섞여 거품이 되었고, 거품 상태에서 바람에 이끌려 키프로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정액 거품 속에서 탄생한 여신이 바로 비너스다. 보티첼리는 호메로스의 시에서 비너스의 탄생을 다룬 장면을 거의 그대로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림을 왼쪽부터 다시 살펴보면 보티첼리 그림의 단골 출현인 서풍의 신 제피로스와 그가 납치한 연인 플로라가 다시 등장했다. 제피로스는 입으로 바람을 불어주고 있고 플로라는 꽃을 뿌리고 있다.


카피톨리노의 비너스, 로마, 기원전 3-2세기


그리고 중앙에는 키프로스 섬의 바닷가에서 이제 막 탄생한 비너스 여신이 거대한 가리비 조개껍데기 위에 서서 부끄러운 듯 몸을 가리고 있다. 비너스 여신은 한손으로는 가슴을, 그리고 다른 한손으로는 음부를 가리고 있는데 이 자세는 '비너스 푸디카Venus Pudica'라고 부르는 고대부터 비너스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자세다. 직역하면 '겸손한 비너스' 또는 '부끄러워하는 비너스'쯤 되는데 그리스 로마시절 만들어진 비너스 조각들에서 자주 나타난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계절의 여신 호라이가 꽃으로 장식된 옷을 부끄러워 하는 비너스 여신에게 급하게 덮어주고 있다. 아마 꽃으로 된 옷을 입고 꽃으로 된 옷을 비너스에게 덮어주려고 하는 것을 보면 호라이 여신중에 봄을 상징하는 '탈로Thallo' 여신을 그린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에는 지금껏 르네상스의 회화에서 나타나지 않았던 '인문학의 향기'가 진하게 나기 시작한다. 그리스 로마를 부활시키는 르네상스라고는 해도 지금까지 르네상스 예술은 종교예술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분명 보티첼리의 그림에서 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시도를 처음 했음에도 보티첼리는 신화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리려고 했기 때문에 예술적 깊이가 느껴진다. 그리고 비너스의 탄생은 르네상스 최초의 '전신 누드화'이기도 하다. 마사초도 그랬던 것처럼 화가들은 아담과 이브를 표현할 때는 누드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관능적으로 그리는 화가는 없었다. 그런데 보티첼리는 대 놓고 비너스의 몸은 전면으로 내세운, 당시로 보면 상당히 자극적인 그림을 그린 셈이다. 여러가지 의미에서 보티첼리는 과감한 시도를 했던 예술가였다. 


프라 바르톨로메오가 그린 사보나롤라의 초상, 패널에 유화, 1498

사보나롤라의 등장

삶과 죽음, 밝음과 어두움, 이성과 감성, 이상하게도 인간세상에는 항상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가 서로 대립하면 나타나곤 한다. 르네상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메디치가를 중심으로 인문학이 꽃 피고 보티첼리도 이에 맞는 아름다운 예술들을 탄생시키기 시작하던 그 시기에 피렌체의 분위기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인물이 등장했다. 바로 예언자 사보나롤라다. 그는 피어오르는 피렌체의 인본주의 위에 갑자기 재를 뿌리기 시작했다.

젊은 수도사였던 사보나롤라는 처음에는 허름한 차림으로 광장에서 설교를 하면서 피렌체의 타락을 꾸짖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젊은 수도사가 거리에서 설교한들 사람들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피렌체는 이제 막 인본주의가 깨어나 세상이 조금씩 바뀌고 있는데 웬 수도사가 나타나서 "금욕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라고 떠들어댔으니 사람들은 오히려 기분만 언짢았던 것이다. 

그런데 피렌체에서 그렇게 거리 설교를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해 1485년, 사보나롤라는 어떤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하늘이 열리고 여러 무서운 재난이 내려와 교회들과 사람들이 고통받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부터 사보나롤라의 설교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의 태도와 말투에는 너무도 강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그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의 열정적인 설교는 금방 소문이 났고 피렌체의 사람들은 점점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던 와중 사보나롤라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갑자기 어떤 예언을 하게 된다. 


"교황과 독재자가 한해에 같이 죽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뜻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는 곧 중요한 예언이었다는게 드러난다. 1492년, 지금까지 피렌체를 잘 이끌어왔던 지도자 위대한자 로렌초가 43세의 젊은 나이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아버지 피에로와 같은 통풍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식스투스 4세의 후임 교황이었던 인노켄티우스 8세도 죽어버렸다. 사보나롤라의 예언대로 교황과 독재자(로렌초)가 같은 해에 죽어버린것이다. 피렌체 시민들은 사보나롤라를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사보나롤라는 진짜 예언자일까? 진짜 신의 목소리를 들은 걸까? 그때 사보나롤라는 다시 한번 예언했다.


"나폴리의 왕은 곧 죽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 1494년 로렌초와 동맹을 맺었던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1세가 진짜로 죽어버렸다. 학자들은 페르디난도 1세가 이때 이미 나이가 많아 몸이 안 좋다는 내부정보를 사보나롤라가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예언을 맞춘건 맞춘것이다. 사람들은 이쯤되자 진짜로 사보나롤라가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사보나롤라는 기세를 몰아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예언을 했다.


“산을 뒤흔드는 폭풍이 일어날 것이며, 이사야가 기록한 고레스 같은 사람이 알프스 너머로 이탈리아를 치러 올 것이다!” 


이 예언을 들은 피렌체 시민들은 이번에는 그저 신기하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 예언은 쉽게 말해 알프스 위쪽에서 누군가가 내려와 아래쪽 이탈리아를 공격한다는 것인데 혹시라도 이 예언이 맞는다면 피렌체도 위험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로 그 일이 일어나 버렸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한 것이다.  


샤를 8세의 초상, 16세기, 작자미상

구원자

로렌초 시절 그래도 한동안 평화를 유지했던 피렌체는 다시 한번 위기에 빠졌다. 전쟁은 인간세계에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 지금껏 지오토, 도나텔로, 마사초, 보티첼리, 그 외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쌓아 올린 르네상스의 업적은 고작 며칠 만에 파괴되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 전쟁의 무서움이다. 피렌체 시민들은 공포에 빠졌다. 그런데 이 위기 상황에서 예언자 사보나롤라가 직접 나서게 된다. 

누가 봐도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침략자였다. 아닌 게 아니라 샤를 8세는 페르디난도 1세가 죽고 혼란스러운 나폴리를 침략하여 그대로 점령해 버렸다. 그리고 그 샤를 8세는 이제 피렌체 앞까지 진격한 상태였다. 그런데 예언자 사보나롤라의 관점으로 보면,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침략군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예언을 실현하고 타락한 피렌체를 심판해 줄 ‘하나님의 검’이었다. 그래서 사보나롤라는 직접 헨리 8세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피렌체 정부도 사보나롤라의 이런 자신감 있는 태도에 감화되었는지 사보나롤라를 특별 사절로 임명하여 헨리 8세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사보나롤라는 소수의 사절단만 이끌고 평원에 주둔하고 있는 샤를 8세의 막사에 들어섰다. 나폴리왕과 담판을 지었던 로렌초와는 어쩐지 다른 느낌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보나롤라는 수만의 병력을 끌고 온 왕 앞에서 당당하게 이렇게 말했다. 


"왕이시여, 드디어 오셨군요. 당신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십니다. 제가 수년 동안 예언한 대로 이탈리아의 비애를 구제하기 위해 주님께서 당신을 보내셨습니다!"


아마 샤를 8세는 갑자기 머리에 혼란이 왔을 것이다. 아니 나는 분명 정복하러 왔는데 나한테 기다렸다느니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느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나는 누구지? 그때 사보나롤라는 이어서 말했다. 당신이 피렌체 시민들에게 경고를 내리는 역할에서 벗어나 시내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한다면 '하나님의 손'이 당신을 치고 당신에게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그런데 사보나롤라의 이 당당한 태도에 기가 눌려버렸는지 정말로 샤를 8세는 피렌체를 침략하지 않고 그대로 떠나버렸다. 그렇다고 왕씩이나 된 사람이 고작 수도사의 말한마디에 그렇게 돌아가버릴 일인가 싶기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샤를 8세도 침략자이기 이전에 그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아마 신통하기로 유명한 예언자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진짜 내가 하나님의 검이 맞는걸까 싶었던 모양이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사보나롤라의 배짱 혹은 신앙심, 그 무엇이라고 표현하든 그는 로렌초처럼 협상을 통해 피렌체를 구원한 것이다. 그는 피렌체 시민들의 영혼뿐 아니라 육체까지 구원하게 된 것이다. 사보나롤라 덕분에 피렌체 시민들의 목숨 뿐 아니라 수많은 르네상스의 조각들과 예술품들도 보존할 수 있었다.

이 사건 이후로 사보나롤라는 로렌초가 죽은 이후 아직 구심점이 없는 피렌체에 새로운 지도자로 자연스럽게 등극하게 된다. 메디치 가문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참주'의 등장이라고 해야 할까. 


'허무한 것들의 화형식', 게임 어쎄신 크리드에서의 묘사


허무한 것들의 화형식
하지만 사보나롤라는 정치인이 아니라 종교인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피렌체가 '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르네상스에 탄생한 인본주의로 '더럽혀진' 피렌체를 다시 신성하고 완전한 기독교 국가로 탈바꿈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르네상스의 예술이야말로 타락의 상징이었습니다. 아마 전신 누드의 비너스를 그리며 남자들을 흥분시킨 보티첼리야 말로 사보나롤라는 최악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시점에야 보티첼리의 그림이 예술로 보이지만 포르노그라피가 없던 그 시절 헐벗은 비너스 여신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엄청 자극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사보나롤라는 예술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동정녀 마리아를 창녀가 옷을 입은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르네상스의 여파로 점점 야해지고 예뻐져가는 '성모 마리아' 그림들을 보며 사보나롤라는 분노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에게 당신은 예술을 모른다며 무시했을까? 사실은 그 반대였습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감명되어 이미 그의 강력한 추종자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를 만난 뒤부터는 더 이상 그리스 신화의 아름다운 여신들을 그림으로 그리지 않았다. 

1497년,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사순절 축제가 있기 전에 사보나롤라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명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허무한 것들'을 모아 오라고. 어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여러 권의 부도덕한(?) 인문학책을 가져오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주었던 화려한 드레스를 들고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시뇨리아 광장의 한가운데는 화장품, 고급 드레스, 카드놀이, 악기, 세속적이라고 할만한 모든 것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당연히 예술품들도 있었다. 그렇게 광장에 건물 몇 층높이만큼 쌓인 물건들에 사보나롤라가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허무한 것들의 화형식'에는 보티첼리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가장 먼저 르네상스의 회화가 세속적으로 가는 길을 연 혁신의 화가였지만 지금은 반대로 가장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사보나롤라에 따르면 그의 '혁신'은 '타락의 혁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티첼리는 모닥불에 자신의 작품들을 던져 넣고는 가까이 서서 자신의 그림이 불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보티첼리 '신비로운 탄생' 캔버스에 유화, 1500-1


예언자의 죽음

하지만 사보나롤라 같이 너무 대가 곧은 사람은 결국 부러지기 마련이다. 자신감을 얻은 사보나롤라는 이제 로마 교황까지 비판하기 시작했다. 사실 로마 교황청의 비리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니까 올바른 비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사보나롤라의 비판에 심기가 불편해진 교황은 사보나롤라를 그대로 파문해 버렸다. 

이 파문의 효과는 피렌체의 여론에도 영향을 주었다. 사실 귀족들도 내심 예술은 커녕 야한 속옷까지 입지 말라고 하는 사보나롤라가 못마땅한 상황이었는데 교황의 파문이 내려지자 기세를 몰아 그를 정치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시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사보나롤라의 꽉 막힌 태도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피렌체는 부유하고 더 여유로운 피렌체였지 도시 전체가 지금처럼 수도원 처럼 변해가는것은 원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불만을 폭발시킨 귀족들은 과격해졌다. 피렌체의 귀족들은 사보나롤라가 교황에게 파문을 당했다는 근거로 아예 그를 이단 재판에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의회를 통해 재빠르게 내려지는는 사형 선고. 결국 사보나롤라는 '허무한 것들의 화형식'이 일어난 그다음 해 1498년, 정확히 같은 장소에서 화형을 당해 불타 죽게 된다. 

사보나롤라를 진심으로 따랐던 보티첼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의 죽음 이후 한 장의 그림을 그렸다. 보티첼리 후반기의 대표작인 <신비로운 탄생>이다. 이 그림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내용이지만, 당시 사보나롤라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도 명확한 메시지의 그림이었다. 사보나롤라는 줄곧 타락한 피렌체에 곧 하늘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내릴 것이라고 설교했다.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의 예언 그대로 심판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그림 보면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심판을 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중앙에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였고, 아래에는 작은 악마들이 갈라진 땅으로 떨어지는 내용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맨 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나 알레산드로(보티첼리)는, 1500년 말 이탈리아가 고난 속에 있을 때 이 그림을 그린다. 이 혼란기의 초반은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번째 재앙에 따라 악마가 삼 년 반 동안 풀려날 것이다. 그 후 악마는 제12장의 말씀대로 묶일 것이고 이 그림에서 처럼 땅에 묻힌 악마를 볼 것이다. "


아마도 보티첼리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사보나롤라의 예언이 이루어져 몇 년 내로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고 믿은 듯하다. 위 보티첼리의 메시지를 해석해 보면 아마 자신이 추종하던 사보나롤라가 불타 죽은 날이 요한계시록의 11장에서 말하는 ‘악마가 삼 년 반 동안 풀려나는 시기’의 시작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3년 반만 지나면, 사보나롤라를 죽게 만든 '악마들'이 그림에서 처럼 땅으로 꺼지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보티첼리는 이 그림에서 기법적으로도 확실히 중세로 회귀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사초 이후 선 원근법은 완벽하게 정착했는데, 보티첼리는 원근법을 거의 무시했기 때문이다. 중앙의 주인공인 성모 마리아를 보면 마치 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덩치가 매우 커 보이는데 이는 중세의 방식을 따른 것이다. 중세 예술에서는 '사실성'보다는 '상징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중요한 인물일수록 더 크게 그렸던 것이다. 이 중세로 회귀하려는 것 자체도 일종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아마 예술가들은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비너스의 탄생>을 그리던 혁신의 아이콘 보티첼리가 점점 과거로 온몸을 구겨 넣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3년 반이 지난 뒤 1501년,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고 세상은 변함없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사보나롤라가 꿈꾸는 피렌체는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보티첼리, 단테 신곡의 묘사, '불지옥, 셰퍼드의 숭배' 1480년대 추정


보티첼리의 마지막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를 만난 감화된 이후 더 이상 세속적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결국 보티첼리는 점점 가난해졌다. 물론 교회와 관련된 그림은 여전히 그렸지만 상류층이 원하는 세속적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니 아마 고객이 반으로 줄었을 것이다. 그렇게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보티첼리는 나중에 너무 가난해져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거의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나마 메디치 가문의 도움으로 근근이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보티첼리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자신이 태어난 지역이었던 피렌체의 보르고 오그니산티 지역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보티첼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비너스를 그릴때도, 사보나롤라를 만나고 나서도 같은 마을에 계속 살았다. 누구든 살면서 한 번쯤은 이사를 하기 마련인데 완전히 한 마을에 박힌 돌처럼 살았던 것이다. 이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보티첼리는 단순히 집돌이였다기 보다는 무언가에 애착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자신이 진심으로 믿는 무언가가 생긴다면 변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 신플라톤주의를 공부하며 인문학의 꽃향기를 맡았을 때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혁신을 이끌어갔지만 후반기에 신앙인으로 회귀하고 나서는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완전히 기독교에 심취하며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는 우리 주변에서 늘 볼 수 있는 평범한 한 사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젊은시절 방탕하게 살다가 노년에 과거를 후회하고 종교에 회귀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볼 수 있으니까. 그렇게 노년에 접어든 보티첼리는 몸이 점점 쇠약해 젔고, 목발의 도움 없이는 똑바로 서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어쩐지 자신이 태어난 마을을 굳은 표정으로 배회하고 있는 늙은 보티첼리의 모습이 보이는 듯 하다. 그렇게 보티첼리는 1510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은 어쩐지 쓸쓸했지만 그의 유산은 계속 르네상스를 따라 이어졌다. 보티첼리는 말년에 더이상 그리스 신화를 그리지 않았지만 다른 화가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를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그림은 앞으로 르네상스와 매너리즘, 바로크와 로코코까지 계속 이어지며 나타날 것이다. 

이제 르네상스의 3대 천재로 알려진 다빈치, 미켈란젤로, 도나텔로가 차례로 등장할 시기가 되었다. 지오토,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보티첼리 같은 르네상스의 선구자들이 심은 나무가 드디어 열매를 맺을 때가 왔다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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