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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Jun 13. 2024

작은 술통, 보티첼리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에 그려진 자화상, 1475


혼혈의 아름다움

르네상스는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가는 출발점입니다. 이는 다르게 말하면 두 세계가 이리저리 어지럽게 섞여있는 세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혼혈들 중에 미남 미녀가 많다는 말도 있지만 르네상스의 아름다움은 어쩌면 양극단의 세계관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긴장감에서 꽃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마치 혼혈아처럼 르네상스도 종교가 가진 아름다움과 인본주의가 가진 아름다움 사이에서 탄생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시대라면 혼란 또한 생기가 마련입니다. 아직 기독교 세계관에 젖어있는 사람들은 개혁적인 르네상스가 멀쩡히 잘 굴러가는 세상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반대로 르네상스의 개혁자들은 자신들을 쫓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고 중세적 세계관에 젖어있는 도무지 바뀔 줄 모르는 꼰대들이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르네상스의 예술가들도 마찬가지로 그 가운데서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예술가들은 성모 마리아를 그려야 할까요 아니면 비너스를 그려야 할까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가장 앞서있던 피렌체의 르네상스에서도 아직까지는 비너스를 그린 화가가 없었습니다. 그만큼 기독교적 세계관은 아직까지 강력하게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아무도 쉽게 넘지 못한 그 선을 넘은 화가가 있습니다. 바로 산드로 보티첼리입니다.


필리포 리피 '성모와 아기 예수 그리고 두 천사', 나무에 템페라 1460-65

보티첼리

마사초도 별명이었고 도나텔로도 별명이었던 것처럼, 보티첼리도 별명입니다. 본명은 알레산드로Alessandro di Mariano di Vanni Filipepi 였고, 보티첼리는 '작은 술통'이라는 뜻을 가진 별명입니다. 설에 의하면 원래 보티첼리의 형이 술통처럼 뚱뚱한 몸매 때문에 '보티첼로'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이었던 알레산드로도 몸매가 비슷했는지 끝만 살짝 귀엽게 바꿔서 '보티첼리'라는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아마 보티첼리의 어머니는 어릴 적 보티첼리를 부를 때 "산드로야 밥 먹어라!"라고 불렀겠지만 언젠가부터 보티첼리는 자신의 별명이 마음에 들었는지 스스로도 보티첼리라고 사인하기 시작했습니다.

보티첼리는 확실히 어릴 적부터 평범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무두장이(가죽을 만드는 사람)였던 그의 아버지는 꽤나 교육열이 있었는지 보티첼리가 원하는 교육은 다 시켜주려고 했지만 보티첼리는 학교 생활을 매우 지루해했다고 합니다. 아마 머리가 너무 똑똑해서 읽기, 쓰기, 산수 같은 평범한 학교 수업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학교에서는 선생님 속을 꾀나 썩이는 아이였는지 짓궂은 농담을 하는 참을성 없는 아이였다고 합니다. 보티첼리는 학교생활에 계속 적응을 못했지만 다행히 미술에 재능이 있어서 학교를 자퇴하고 미술 공방 쪽으로 가게 됩니다. 그때 만난 스승이 필리포 리피Filippo Lippi라는 화가였습니다. 필리포 리피로부터 기본적인 미술 공부를 마치고, 25살쯤에는 보티첼리라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작업실을 열게 됩니다.

위는 필리포 리피의 그림입니다. 보티첼리 그림의 특징 중 하나는 인물의 외곽선이 강조되었다는 것인데, 아마 그의 스승이었던 필리포 리피에게서 배웠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필리포 리피로부터 얻었던 것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필리포 리피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는 중이었는데, 보티첼리도 스승을 통해 메디치 가문을 만나게 된 것이죠. 당시 예술가로서는 최고의 인맥이 닿게 된 것입니다.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 패널에 템페라, 1475 

메디치와 보티첼리

이 그림은 1475년경, 가스파레라는 피렌체의 금융 중개인이 보티첼리에게 의뢰한 '동방박사의 경배'입니다. 이 금융인은 이 그림을 자신의 가족 예배당을 위해 주문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 멀리서 경배하러 온 3명의 동방박사 중 한 명의 이름이 '가스파레'였다고 합니다. 동방박사 중 한 명이 우연히도 자신과 이름이 같으니 동방박사의 경배라는 주제를 보티첼리에게 주문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재미있는 점은 당시 메디치 가문의 남자들이 숨겨져 그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맨 왼쪽에 붉은 옷을 입고 칼을 들고 있는 인물은 앞서 소개한 메디치의 마지막 희망 로렌초 데 메디치입니다. 그리고 중앙에 아기예수의 발을 만지며 무릎 꿇고 있는 동방 박사는 국부 코시모, 그리고 정 중앙에 붉은 망토를 입은 남자는 코시모의 다음 후계자였지만 통풍으로 일찍 죽었던 피에로, 그리고 피에로 바로 옆에 흰 옷을 입고 향로를 들고 있는 남자는 이미 죽은 피에로의 동생 조반니, 그리고 그의 오른쪽에 붉은 줄이 있는 검은 망토를 입은 검은 머리의 남자가 파치음모 사건에서 암살당했던 줄리아노입니다. 이때는 아직 파치 음모가 일어나기 3년 전이니까요. 보티첼리는 동방박사의 주인공 3명을 모두 코시모와 그의 아들들을 묘사해 놓았고, 그의 두 손자 로렌초와 줄리아노까지 그려놓은 것이죠. 그리고 귀엽게도, 보티첼리는 자신의 자화상도 그려 놓았습니다. 맨 오른쪽에 노란색 옷을 입고 관객을 응시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보티첼리입니다. '작은 술통'이라는 별명에 알맞게 참치처럼 통통한 몸매를 가지고 있던 보티첼리입니다. 

그렇다면 가스파레가 자신의 가족 예배당에 올려놓을 그림에 굳이 메디치의 남자들을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자는 피렌체의 금융인이었던 가스파레가 여전히 피렌체의 금융을 꽉 잡고 있던 메디치 가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보티첼리에게 '특별주문'을 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보티첼리가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는 메디치 가문이 고마워 스스로 메디치 가문의 인물들을 그림에 몰래 등장시켰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아마 당시에는 주문자의 요구가 상당히 중요하던 시절이니까 '가스파레 아부설'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어쨌든 어느 쪽이 맞다고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보티첼리가 어느새 메디치 가문과 가까워졌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신플라톤주의 

그러는 동안 피렌체에는 신플라톤주의가 꽃피고 있었습니다. 피렌체의 신플라톤주의는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국부 코시모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인문학 덕후였던 코시모는 신플라톤주의를 피렌체의 지성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싶었했고 젊은 신플라톤주의자였던 마르실리오를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코시모가 마르실리오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서 손자 로렌조 데 메디치의 가정교사를 맡겼던 것은 그만큼 그를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코시모는 자신의 행동이 앞으로 르네상스의 미술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까지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코시모는 쉽게 말한다면 '물주'였지 예술가나 학자는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결국은 연료가 있어야 앞으로 갈 수 있기 마련입니다. 코시모는 돈이라는 '연료'를 인문학이라는 자동차에 부었고 이는 결국 차가 거침없이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던 것이죠. 게다가 코시모는 신비한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신플라톤주의는 신비주의 성향도 있으니 취향에 딱 맞았던 것이죠.

그렇다면 왜 신 아리스토텔레스주의도 아니고 신 소크라테스주의도 아니고 신 플라톤주의였을까요? 여전히 유럽은 기독교 중심사회였습니다. 아마 기독교를 믿는 유럽인들에게 그나마 가장 이질감이 없는 그리스의 사상이 바로 플라톤의 사상이었을 것입니다. 플라톤은 알려진 것처럼 '이데아'의 세계를 주장했는데, 이는 묘하게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관념적으로 유사합니다. 또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부, 성자, 성령'도 어쩐 일인지 신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일자, 정신, 영혼'과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아직 얼기설기 짜여있던 기독교 교리를 탄탄하게 완성시켰던 2~3세기의 교부 철학들은 기독교를 이론적으로 정립하는 과정에서 플라톤의 사상을 많이 가져다 쓰기도 했습니다. 

메디치의 후원을 받으며 로렌초와도 가깝게 지냈던 보티첼리는 자연스럽게 신플라톤주의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보티첼리는 어릴 적부터 지적 호기심이 상당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런 새로운 철학의 물결에 빠져든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나이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마르실리오와도 자연스럽게 친해졌을 것입니다. 아마 보티첼리는 카레기에 있는 플라톤 아카데미에 방문하여 밤새 등불을 켜고 앉아 마르실리오와 신 플라톤주의에 관해 토론하지 않았을까요.


보티첼리 '프리마베라(봄)' 패널에 템페라, 1470~1480 사이


프리마베라

보티첼리는 그렇게 접합 신플라톤주의를 그림에도 적용시키게 됩니다. 물론 신플라톤주의의 사상을 퍼뜨리기 위해 그림으로 그린 것은 아니겠지만 보티첼리는 르네상스에서 처음으로, 성경 속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위 '프리마베라'는 미술사에서 본격적으로 그리스 신화를 다룬 첫 번째 그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리스 로마의 문화를 깨우는 르네상스 문화운동이 시작된 지 벌써 200년이나 됐지만, 보티첼리에 와서야 그리스 신화를 그린 그림이 나타난 것이죠. 어쨌든 이렇게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길을 여는 그림을 우리는 '혁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림의 전체적인 주제는 제목 그대로 '봄'입니다. 다소 복잡해 보이지만 그림을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천천히 이해해 보겠습니다. 오른쪽에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아름다운 요정 클로리스를 납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피로스는 이내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끼고는 클로리스를 꽃의 여신인 플로라로 탈바꿈시켜줍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꽃의 여신 플로라로 변화하여 꽃 원피스를 입고 꽃잎을 날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납치되는 요정과 꽃잎을 뿌리는 여신은 사실상 동일인물입니다.

그림 중앙에는 주인공 아름다움과 사랑의 여신 비너스가 서 있고 그 위에는 사랑의 신 큐피드가 화살을 겨누고 있습니다. 프리마베라(봄)라는 제목과 사랑의 여신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사실 봄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랑의 계절을 상징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춘화春畵는 직역하면 '봄 그림'이지만 실제로는 남녀 간의 성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그림을 뜻하니까요. 그리고 비너스는 봄을 시작하는 4월의 여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왼쪽에는 쾌락, 순결,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그리스의 삼미신이 있습니다. 특히 가운데 순결을 상징하는 여신은 장난스러운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 시선이 왼쪽 끝의 남자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 남자는 전령의 신이자 5월을 관장하는 신 머큐리입니다. 그는 하늘의 먹구름을 쫓아내며 봄을 지키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 그림이 로렌초가 가문의 6촌 조카의 결혼식에 선물로 보내준 그림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단 장소가 '오렌지 나무 숲'이라는 점에서 그러한데, 오렌지는 메디치 가문을 상징하는 과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문장에 '빨간 공'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오른쪽의 꽃의 여신 플로라는 피렌체 도시 자체를 상징합니다. 피렌체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를 '꽃의 도시'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 정리해 보면 '꽃의 도시 피렌체에 새로운 봄이 오게 할 메디치 가문'이 기본적인 그림의 주제가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사랑을 상징하는 비너스라는 주제를 중의적으로 담아 내용을 담아 조카의 희망찬 결혼식을 축하하며 보내준 그림인 것이죠. 

그런데 생각해 보면 묘한 지점이 있습니다. 르네상스에 처음 등장한 그리스 신화의 그림인데 이 정도까지 내용이 복잡할 수 있을까요? 그때나 지금이나 보통 사람들이 상식으로 알고 있는 그리스 신이라고 하면 제우스, 포세이돈, 비너스 정도입니다. 그런데 보티첼리는 삼미신, 서풍의 신 제피로스와 플로리스, 그리고 4월 5월을 상징하는 비너스와 머큐리, 모두 그리스 신화를 전공한 사람이나 알 법한 내용을 중의적으로 담아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마 보티첼리는 그림의 내용을 구성하는데 그리스 전문가였던 마르실리오의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비너스의 탄생

보티첼리는 비슷한 시기에 다른 한 장의 그림을 그립니다. 보티첼리의 대표작 '비너스의 탄생'입니다. 이 그림은 프리마베라보다는 조금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기본적으로 호메로스의 시를 그대로 이미지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최고의 시인이었던 호메로스는 자신의 찬가에서 비너스 여신의 탄생을 아래와 같이 묘사했습니다.


키프로스 섬, 촉촉한 제피로스의 숨결이 부는 곳으로

그녀는 부드러운 거품으로 울려 퍼지는 바다 위로 이끌렸습니다.

금빛띠를 두른 호라이 여신이 그녀를 기쁘게 맞이하며 

그녀에게 하늘의 옷을 입혀주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비너스는 바다에서 탄생했습니다. 농경의 신 크로노스가 자신의 아버지이자 하늘의 신 우라노스에게 불만을 품고 거대한 낫으로 거세를 해 버렸는데 그때 우라노스의 정액이 바다로 떨어집니다. 바다에 떨어진 우라노스의 정액은 바닷물과 섞여 거품이 되었고, 거품 상태에서 바람에 이끌려 키프로스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그 정액 거품 속에서 비너스가 탄생했다는 것이죠. 보티첼리는 호메로스의 시를 거의 그대로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왼쪽부터 보면 보티첼리 그림의 단골 출현인 서풍의 신 제피로스와 그가 납치한 연인 플로라는 다시 한번 등장해서 바람과 꽃을 불어주고 있습니다. 중앙에는 비너스 여신이 부끄러운 듯 몸을 가리고 있고, 오른쪽에는 계절의 여신 호라이가 꽃으로 장식된 옷을 비너스 여신에게 급하게 덮어주고 있습니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는 벌써부터 '인문학의 향기'가 진하게 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봐 왔던 종교화의 신성함이나 장엄함과는 조금 분위기가 다른 것이죠. 그리 대중적이지 않은 그리스 호메로스의 시가에서 아름다운 예술을 탄생시킨 것 자체로 아름다움 뿐 아니라 깊이도 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비너스의 탄생은 르네상스 최초의 '전신 누드화'이기도 합니다. 마사초도 그랬던 것처럼 과거에도 아담과 이브를 표현할 때 간혹 누드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보티첼리는 대 놓고 비너스의 몸은 전면으로 내세운 그림을 그렸습니다. 확실히 보티첼리는 르네상스의 중간에 서서 여러 가지 의미에서 과감한 시도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프라 바르톨로메오가 그린 사보나롤라의 초상, 패널에 유화, 1498

사보나롤라의 등장

삶과 죽음, 흑과 백, 밝음과 어두움, 이성과 감성, 이상하게도 인간세상에는 항상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가 서로 대립하면 나타나곤 합니다. 르네상스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메디치가를 중심으로 인문학이 꽃 피고 보티첼리도 여기에 발맞추어 화려한 예술들을 탄생시키기 시작하던 시기에 보티첼리의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예언자 사보나롤라입니다. 그는 피렌체에 피어오르는 인본주의가 충만한 분위기에 갑자기 먼지를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젊은 사제였던 그는 처음에 허름한 차림으로 광장에서 설교를 하면서 피렌체의 타락을 꾸짖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허름한 외모의 거리의 설교자가 말해봐야 사람들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막 피렌체는 인문학을 꽃피우며 세상을 바꾸고 있는데 웬 수도사가 나타나서 "금욕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회개하라!"이렇게 떠들어대니 사람들은 오히려 기분이 언짢았던 것이죠. 

그런데 피렌체에서 그렇게 거리 설교를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해 1485년, 사보나롤라는 어떤 환상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여러 재난이 세상의 교회들에 펼쳐지는 모습을 본 것이죠.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부터 사보나롤라의 설교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의 태도와 말투에는 너무도 강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둘씩 그에게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뛰어난 설교를 하는 사제가 있다는 소문이 나자 점점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광장으로 모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그가 갑자기 어떤 예언을 합니다. 


"교황과 독재자가 한해에 같이 죽을 것이다!"


그런데 1492년, 지금까지 피렌체를 잘 이끌어왔던 지도자 로렌초 데 메디치가 43세의 젊은 나이에 죽어버립니다. 사인은 아버지 피에로와 같은 통풍이었는데 어쩌면 통풍은 유전병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렇게 허무하게 위대한 자 로렌초가 죽은 그 해에, 식스투스 4세의 후임 교황이었던 인노켄티우스 8세가 죽어버립니다. 앞의 한 세대를 이끌었던 교황과 로렌초가 동시에 죽는다는 예언이 맞아버린 것이죠. 피렌체 시민은 무섭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설교도 잘하던데 이 사람은 진짜 예언자일까? 진짜 신의 목소리를 들은 걸까? 그리고 사보나롤라는 다시 한번 예언합니다.


"나폴리의 왕은 곧 죽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뒤 1494년 로렌초와 동맹을 맺었던 나폴리 왕 페르디난도 1세가 진짜로 죽어버렸습니다. 학자들은 페르디난도 1세가 이때 이미 나이가 많아 몸이 안 좋다는 내부정보를 사보나롤라가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진실은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쯤부터는 진짜로 무서워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보나롤라는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예언을 합니다.


“산을 뒤흔드는 폭풍이 일어날 것이며, 이사야가 기록한 고레스 같은 사람이 알프스 너머로 이탈리아를 치러 올 것이다!” 


이 예언에 피렌체 시민들은 그저 신기한 게 아니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혹시라도 이 예언이 맞는다면, 알프스 위쪽에서 누군가 내려와 아래쪽의 도시인 피렌체를 공격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진짜로 그 일이 일어나 버렸습니다.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한 것이죠.  


샤를 8세의 초상, 16세기, 작자미상

구원자

로렌초 시절 그래도 한동안 평화를 유지했던 피렌체는 다시 한번 위기에 빠졌습니다. 전쟁은 인간세계에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지금껏 지오토, 도나텔로, 마사초, 보티첼리, 그 외에도 수많은 예술가들이 쌓아 올린 르네상스의 업적은 고작 며칠 만에 파괴되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피렌체 시민들은 공포에 빠집니다. 그런데 이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예언자 사보나롤라는 피렌체를 정말로 '구원'하게 됩니다. 피렌체 시민의 영혼뿐 아니라 육체까지 구원하게 된 것이죠.

누가 봐도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침략자였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샤를 8세는 페르디난도 1세가 죽고 혼란스러운 나폴리를 그대로 침략하여 점령해 버립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샤를 8세는 나폴리 왕도 겸임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샤를 8세는 피렌체 앞까지 진격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때 사보나롤라가 나섭니다.

예언자 사보나롤라의 관점으로는, 프랑스 왕 샤를 8세는 침략군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예언을 실현할, 타락한 피렌체를 심판해 줄 ‘하나님의 검’이었습니다. 사보나롤라의 이런 자신감 있는 태도에 감화되었는지 피렌체 정부 시뇨리아는 사보나롤라를 특별 사절로 임명하여 헨리 8세에게 보내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사보나롤라는 소수의 사절단만 이끌고 평원에 주둔하고 있는 샤를 8세의 막사에 들어섭니다. 나폴리왕과 담판을 지었던 로렌초와는 다소 다른 느낌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보나롤라는 수만의 병력을 끌고 온 왕 앞에서 당당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시여, 드디어 오셨군요. 당신은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십니다. 제가 수년 동안 예언한 대로 이탈리아의 비애를 구제하기 위해 주님께서 당신을 보내셨습니다!"


아마 샤를 8세는 갑자기 머리에 혼란이 왔을 것입니다. 아니 나는 분명 정복하러 왔는데 나한테 기다렸다느니 환영한다느니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지? 나는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그리고 사보나롤라는 당신이 괜히 들어와서 사람 죽이고 그러면 '하나님의 손'이 당신을 치시고 재앙을 내릴 것이라고 엄포를 내립니다.

그런데 사보나롤라의 이 황당한, 또는 당당한 태도에 기가 눌려버렸는지 정말로 샤를 8세는 피렌체를 침략하지 않고 그대로 떠나버렸습니다. 그렇게 그냥 돌아가버린 샤를 8세가 어이가 없기는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도 침략자이기 이전에 그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기독교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 신통하기로 유명한 예언자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진짜 내가 하나님의 검인가 그런 건가 싶었던 모양입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사보나롤라의 배짱 혹은 신앙심, 그 무엇이라고 표현하든 그는 로렌초처럼 협상을 통해 피렌체를 구원했습니다. 피렌체 시민들의 목숨을 구한 것뿐 아니라 지금 시대의 입장에서 보면 사보나롤라 덕분에 수많은 르네상스의 조각들과 예술품들이 온전하게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이 사건 이후로 사보나롤라는 로렌초 데 메디치가 죽은 후 아직 구심점이 없는 피렌체에 새로운 지도자로 자연스럽게 등극하게 됩니다. 전혀 다른 느낌의 '참주'의 등장이라고 해야 할까요. 


'허무한 것들의 화형식', 게임 어쎄신 크리드에서의 묘사


1497년, 파괴되는 예술들
하지만 사보나롤라는 진심으로 피렌체가 '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르네상스로 '더럽혀진' 피렌체를 다시 신성한 중세적 세계, 완전히 기독교에 바쳐진 국가로 탈바꿈하려고 했던 것이죠.

그에게 있어서는 피렌체의 예술도 타락의 상징이었습니다. 아마 전신 누드의 비너스를 그리며 남자들을 흥분시킨 보티첼리야 말로 사보나롤라는 최악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지금 시점에야 보티첼리의 그림이 예술로 보이지만 포르노그라피가 없던 그 시절에는 일본 야애니 비슷한 엄청 자극적인 그림이 아니었을까요. 사보나롤라는 예술가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동정녀 마리아를 창녀가 옷을 입은 것처럼 만들어 놓았다!"


르네상스의 여파로 점점 야해지고 예뻐져가는 '성모 마리아' 그림들을 보며 사보나롤라는 분노했던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의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에게 당신은 예술을 모른다며 저항했을까요? 사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의 설교에 감명되어 이미 그의 강력한 추종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를 만난 뒤부터는 더 이상 그리스 신화의 아름다운 여신들을 그림으로 그리지 않았습니다. 

1497년,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는 사순절 축제가 있기 전에 사보나롤라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명합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허무한 것들'을 모아 오라고. 어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여러 권의 부도덕한(?) 인문학책을 가져오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주었던 화려한 드레스를 들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시뇨리아 광장의 한가운데는 화장품, 고급 드레스, 카드놀이, 악기, 세속적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예술품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광장에 건물 몇 층높이만큼 쌓인 물건들은 불을 붙이자 순식간에 불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허무한 것들의 화형식'에는 보티첼리도 참가 중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르네상스의 회화가 세속적으로 가는 길을 연 화가니까 어쩌면 가장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보티첼리는 모닥불에 자신의 작품들을 던져 넣고는 가까이 서서 자신의 그림이 불타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보티첼리 '신비로운 탄생' 캔버스에 유화, 1500-1


예언자의 죽음

하지만 사보나롤라 같이 너무 대가 너무 곧다 못해 뻣뻣한 사람은 결국 부러지기 마련입니다. 자신감을 얻은 사보나롤라는 이제 로마 교황까지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로마 교황청의 비리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니까 합리적 비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사보나롤라의 비판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교황은 사보나롤라를 그대로 파문해 버립니다. 

이 파문의 효과는 피렌체에도 영향을 줍니다. 사실 귀족들도 내심 예술은 커녕 야한 속옷까지 입지 말라고 하는 사보나롤라가 못마땅한 상황이었는데 교황의 파문이 내려지자 기세를 몰아 그를 정치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죠. 시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원하는것은 부유하고 더 여유로운 피렌체였지 도시 전체가 성당처럼 변하는것은 전혀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불만을 폭발시킨 귀족들은 과격해졌습니다. 피렌체의 귀족들은 사보나롤라가 교황에게 파문을 당했다는 근거로 아예 그를 이단 재판에 세웁니다. 그리고 재빠르게 내려지는 사형 선고. 결국 사보나롤라는 '허무한 것들의 화형식'이 일어난 그다음 해 1498년, 정확히 같은 장소에서 화형을 당해 허무하게 죽게 됩니다. 

사보나롤라를 따르던 보티첼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의 죽음 이후 한 장의 그림을 그립니다. 보티첼리 후반기의 대표작인 '신비로운 탄생'입니다. 이 그림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내용이지만, 당시 사보나롤라를 추종하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명확한 메시지의 그림이었습니다. 사보나롤라는 줄곧, 타락한 피렌체에 곧 하늘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내릴 것이라고 설교했습니다.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의 예언 그대로를 이미지로 만든 것이죠.

그림 보면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심판을 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앙에는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였고, 아래에는 작은 악마들이 갈라진 땅으로 떨어지는 내용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맨 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나 알레산드로(보티첼리)는, 1500년 말 이탈리아가 고난 속에 있을 때 이 그림을 그린다. 이 혼란기의 초반은 요한계시록 11장의 두 번째 재앙에 따라 악마가 삼 년 반 동안 풀려날 것이다. 그 후 악마는 제12장의 말씀대로 묶일 것이고 이 그림에서 처럼 땅에 묻힌 악마를 볼 것이다. "


아마도 보티첼리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몇 년 내로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고 믿은 듯합니다. 위 보티첼리의 메시지를 해석해 보면 아마 자신이 추종하던 사보나롤라가 불타 죽은 날이 요한계시록의 11장에서 말하는 ‘악마가 삼 년 반 동안 풀려나는 시기’의 시작이라고 본 듯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3년 반만 지나면, 사보나롤라를 죽게 만든 '악마들'이 그림에서 처럼 땅으로 꺼지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3년 반이 지난 뒤 1501년, 세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고 세상은 변함없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마치 사보나롤라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죠.

잠시 이 그림의 기법을 살펴보면, 보티첼리는 기법적으로도 확실히 르네상스에서 중세로 회귀하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사초 이후 선 원근법은 완벽하게 정착했는데, 보티첼리는 원근법을 거의 무시합니다. 중앙의 주인공인 성모 마리아를 보면 마치 깡패라도 되는 것처럼 덩치가 매우 커 보이는데 중세의 그림에서는 보통 성모 마리아를 매우 크게 그렸습니다. '사실성'보다는 '상징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중요한 인물일수록 더 크게 그렸던 것이죠. 이 중세로 회귀하려는 것 자체도 일종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요. 아마 예술가들은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비너스를 그리던 혁신의 아이콘 보티첼리가 점점 과거로 온몸을 구겨 넣고 있었던 것이죠. 



보티첼리, 단테 신곡의 묘사, '불지옥, 셰퍼드의 숭배' 1480년대 추정


보티첼리의 마지막

보티첼리는 사보나롤라를 만난 감화된 이후 더 이상 세속적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결국 보티첼리는 점점 가난해집니다. 물론 교회와 관련된 그림은 여전히 그렸지만 상류층이 원하는 세속적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니 아마 고객이 반으로 줄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보티첼리는 나중에 너무 가난해져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거의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나마 메디치 가문의 도움으로 근근이 버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보티첼리의 특이한 점 중 하나는 자신이 태어난 지역이었던 피렌체의 보르고 오그니산티 거리 주변에서 평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든 살면서 한 번쯤은 이사를 하기 마련인데 완전히 한 마을에 박힌 돌처럼 살았던 것이죠. 보티첼리는 성인이 되어서도, 사보나롤라를 만나고 나서도 같은 마을에 계속 살았습니다. 이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보티첼리는 단순히 집돌이였다기 보다는 무언가에 애착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진심으로 믿는 무언가가 있다면 변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젊은 시절은 신플라톤주의를 공부하며 인문학의 꽃향기를 맡았을 때는 그 누구보다 르네상스에 열중하며 혁신을 이끌어갔고 후반기에 신앙인으로 회귀하고 나서는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완전히 기독교에 심취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는 우리 주변에서 늘 볼 수 있는 평범한 한 사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노년에 접어든 보티첼리는 몸이 점점 쇠약해 젔고, 목발의 도움 없이는 똑바로 서기도 어려웠다고 합니다. 자신이 태어난 마을을 엄숙한 표정으로 배회하고 있는 보티첼리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렇게 보티첼리는 1510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어쨌든 르네상스는 계속 이어집니다. 이제 르네상스의 3대 천재로 알려진 다빈치, 미켈란젤로, 도나텔로가 차례로 등장할 시기입니다. 지오토,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보티첼리 같은 르네상스의 선구자들이 심은 나무가 드디어 열매를 맺을 때가 왔다고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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