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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Apr 16. 2024

괴물, 브루넬레스키

피렌체의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괴물들의 시대

소위 '브루넬레스키의 돔'이라고 불리는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의 돔'은 자그마치 무게가 37000톤에 달합니다. 3톤 트럭 12,000대를 공중에 띄웠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돔을 건축하는데 사용된 벽돌은 4백만개고 높이는 114.5m입니다. 밑에서 보면 까마득한 이 건물은 현대로 치면 거의 45층 높이에 육박합니다. 참고로 50층이 넘어가면 초고층 건물으로 분류하는데 우리나에는 114개의 초고층 건물이 있다고 합니다. 돔 자체만 보면 폭은 54.8m(내부는 45.5m)이고 높이는 34m입니다. 이미 돔 자체만으로도 고층 아파트의 높이가 되는 셈입니다.  

이 건축을 완성한 사람은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건축가,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입니다. 르네상스는 이런 괴물 같은 예술가들의 시대였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단순히 건축가가 아니라 르네상스가 최전성기에 도달하기 전 토양을 마련해 놓은 초기 르네상스의 천재들 중 한명입니다.


조반니의 결심

브루넬레스키의 이야기는 14세기말부터 시작됩니다. 14세기 말, 피렌체에서는 갑자기 흑사병 환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흑사병 팬데믹은 분명 50년 전에 끝났지만 그렇다고 모든 바이러스가 사멸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죠. 여전히 유럽의 공기 중에는 흑사병의 먼지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피렌체의 시민들은 다시 사람들이 피부가 검게 변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던 50년 전의 지옥이 다시 재현되는 건 아닐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을 일으킨 영웅 조반니 역시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평민출신이기도 했지만 조반니는 누구보다 평민들의 안위를 걱정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무언가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병원을 후원하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시민들을 위로하기에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피렌체 세례당의 북쪽 문을 새로 제작해 신께 봉헌하기로 합니다. 아름다운 부조로 장식된 거대한 문을 만들어서 신께 바치는 것으로 피렌체 시민들의 건강과 평안을 위한 기도를 올리겠다는 것이죠. 조반니는 어려운 시절 예술을 보고 마음의 위안을 얻은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 이렇게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이삭의 희생' 왼쪽은 기베르티, 오른쪽은 부르넬레스키의 출품작, 1401


'이삭의 희생' 콩쿨

1401년, 피렌체 세례당의 북쪽 문을 제작할 예술가를 찾기 위한 콩쿨이 열립니다. 주제는 '이삭의 희생', 심사위원장은 물론 조반니 데 메디치입니다. 수많은 피렌체의 예술가들이 이 콩쿨에 참가한 가운데 조반니를 중심으로 심사위원들은 신중하게 출품작들을 심사합니다. 우선 7명이 선정되었고 그 중 다시 두 명을 선택합니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선택된 사람은 기베르티, 그리고 이 장의 주인공 브루넬레스키였습니다.

위 두 작품은 당시 콩쿨에 최종적으로 선정된 실제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의 작품들입니다. 여러분이라면 둘 중 어느 작품을 선택하실 것 같나요? 기베르티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목을 칼로 찌르는 그 날카로운 순간을 택했습니다. 영화처럼 가장 극적인 장면을 택한 것이죠. 반면 브루넬레스키는 천사가 아브라함을 다급하게 손으로 말리는 장면에 더 집중했습니다. 아무래도 표면적인 화려함 보다는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이 이야기의 교훈을 자세히 설명하고자 했던 모양입니다. 이 콩쿨에서 결과에 따라 피렌체 세례당의 북쪽문 제작자가 결정될 것입니다. 조반니와 심사위원들을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을까요? 조반니를 중심으로 한 심사위원들은 고민에 빠집니다. 두 작품 모두 너무 훌륭했기 때문이죠. 

오랜 고민 끝에 승리자가 결정되었습니다. 최종 승리자는 이 장의 주인공 브루넬레스키가 아니라 바로 기베르티였습니다. 아마 심사위원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의 목을 찌르려고 하는 그 찰나를 보여주는 '리얼리티'에 더 높은 점수를 주었던 모양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심사위원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조반니는 여전히 고민에 빠집니다. 사실 두 작품 중 무엇이 확실히 더 뛰어나다고 쉽게 말하기는 어려울 만큼 둘 다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조반니는 고민 끝에 조용히 두 사람을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둘 중 누구의 작품이 더 뛰어나다고 말하기는 솔직히 어렵소. 그러니 두 사람이 같이 작업을 하는 것은 어떨까요? 대신 우승자는 어쨌든 기베르티로 정해졌으니 브루넬레스키께서 돕는 느낌으로 같이 작업을 하면 좋을듯 듯합니다."


하지만 조반니의 따듯한 이 제안은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패배로 자존심이 상한 브루넬레스키가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원래 그렇게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는 남자였습니다.

결국 승리자 기베르티는 이후 장장 21년에 걸쳐 이 거대한 청동문을 완성하게 됩니다. 총 28개의 장면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4명의 성자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명실상부 르네상스 초기의 걸작 중 하나입니다.


로렌조 기베르티, 피렌체 세례당의 북쪽문과 동쪽문

기베르티는 이 북쪽 문을 성공적으로 완성 한 이후 연이어 1424년에는 동쪽 문까지 제작 의뢰를 받게됩니다. 그렇게 기베르티는 르네상스 초기 예술가 중에 가장 빛나는 영광을 누립니다. 훗날 미켈란젤로는 기베르티가 제작한 동쪽 문을 보고 '천국의 문이다'라고 극찬했는데, 문 전체를 화려한 청동 부조로 장식한 이 문을 보고 있으면 미켈란젤로가 왜 '천국의 문'이라고 평가했는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곤조'

그렇다면 기베르티가 그렇게 예술가로서 승승장구하는 동안 브루넬레스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콩쿨에서의 패배는 자존심 강한 24살 조각가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됩니다. 이후 브루넬레스키는 더 이상 조각에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작 콩쿨에 한번 진 걸로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지만, 르네상스의 천재들은 그런 남자들이었습니다. 시쳇말로 '곤조'로 사는 인간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쩌면 그런 '곤조'가 없었다면, 애초에 브루넬레스키는 예술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브루넬레스키는 법을 공부하라는 아버지가 명을 무시하고 자기 고집대로 예술가가 되기로 선택한 남자였으니까요. 

그렇게 브루넬레스키는 지금까지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던 조각을 버리고는 새롭게 건축 공부를 시작하게 됩니다. 조각에서 기베르티를 이기지 못했으니 다른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것이죠.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브루넬레스키를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자로 만들어주게 됩니다.


영원의 도시Eternal City, 로마로

콩쿨에서 패한 다음 해,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한 브루넬레스키는 9살 후배 동생이었던 조각가 도나텔로를 끌고 로마로 갑니다. 브루넬레스키는 건축을 연구하기 위해 일종의 '유학'을 간 셈입니다. 유럽인들의 마음속에 '영원의 도시Eternal City'로 남아있는 로마로 떠난 것이죠. 

당시 피렌체의 시민들은 광장이나 식당, 술집 그 어디에서든 고대 로마의 영광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르네상스의 분위기였습니다. 르네상스Renaissance의 뜻 자체가 영어로 직역하면 Re-birth 즉 '죽어있는 고대 로마의 정신을 다시 깨우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로마를 '교양 있는 대화'로 소비하는 사람들 중에, 그렇다고 진짜 로마로 가서 고문서를 뒤져가며 로마의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브루넬레스키는 진짜로 로마로 가서는 스스로 로마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브루넬레스키가 로마에 직접 가 보니 상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영원의 도시'라고 하기에는 도시의 상태가 너무 나빴던 것이죠. 잡초가 무성한 폐허같았던 로마는 사실 지난 중세 천 년간 거의 버려져 있었습니다. 로마는 기독교인들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 박해'를 상징하는 도시이기 때문에 중세의 기독교인들은 로마를 거의 버려두다시피 했던 것이죠. 어쨌든 두 사람은 로마의 폐허를 뒤져가며 연구를 시작합니다. 조각가였던 동생 도나텔로가 신나서 로마의 조각들을 연구하는 동안 브루넬레스키는 로마의 건축들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 하면 '콜로세움 경기장'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로마인들은 뛰어난 토목건축기술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지난 천 년간 로마의 건축 기술은 완전히 잊혀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고대 로마 건축의 공학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모든 연구를 스스로 해야 했습니다.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참고자료도 없습니다. 그저 건축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고 스케치하고 치수를 재고 건축 방법을 머릿속으로 연구하는 것이죠.  


로마의 판테온, 2세기

판테온

그중에 특히 브루넬레스키가 유독 관심을 가졌던고 건축은 판테온Pantheon, 즉 만신전이었습니다. 이 신전은 2세기에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완성한 신전으로 말 그대로 '세상 모든 신들을 위한 신전'입니다. 판테온을 두고 중세의 사람들은 '악마의 건물'이라고 말하며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유일신을 믿는 중세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다신교의 건물이니까 기분 나쁘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 중세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어떻게 저런 거대한 구조물이 천년동안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사이즈의 돔이 지지대도 없이 스스로 버티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악마들이 이교도의 건물을 지탱시켜주고 있다'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판테온이 버틴 세월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악마를 고용했다고 믿을만합니다. 돔의 폭은 43m이고 중량만 자그마치 4500톤에 달하는데, 지난 1,300년간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멀쩡하게 그 중량을 버티고 있었던 셈이니까요. 심지어는 지금까지도 멀쩡하게 잘 버티는 바람에 이탈리아 인들이 여전히 신나게 입장료를 받고 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이 판테온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거대한 구조물이 천년이나 버티고 있을 수 있었는지 자세히 눈으로 관찰하고, 하나하나 정확히 그림을 그리고, 사이즈를 측정해 보고, 건축 방법을 추론해 보는 것이죠. 

고집 센 남자의 장점은 여기서 꽃을 피웁니다. 잊힌 '고대의 비밀'을 자신의 손을 밝혀내겠다는 그의 의지는 결국 나중에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돔을 완성하는 토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원근법의 탄생

잠시 덧붙이자면, 아마 브루넬레스키는 이 '유학'시절에 원근법의 비밀 또한 발견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브루넬레스키의 업적을 말할 때 가장 첫 번째는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돔이고, 두 번째는 회화의 역사를 바꾼 '원근법의 발명'입니다. 

원근법에 관해서는 앞으로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브루넬레스키는 건축을 연구하기 위해 수많은 로마의 건축들과 유적들을 스케치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도시 풍경을 그릴 때 멀리 있는 건축들일수록 작게 그리게 되는데, 그렇게 계속 점점 작게 그리다 보면 어떻게 될까요? 결국 저 멀리있는 대상은 계속 작아지다가 '작은 한 점'이 될 때까지 작아지게 됩니다. 바로 소실점Vanishing point을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브루넬레스키는 로마에서 피렌체로 돌아온 이후 이에 관해 더 자세히 연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원근법을 발명하게 된 것이죠.


브루넬레스키, 죄 없는 자들을 위한 병원Ospedale degli Innocenti 디자인, 1419–1445


다시 고향으로

로마에서 돌아온 브루넬레스키는 더 이상 조각가가 아닌 건축가로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처음 맡은 건축은 최초의 르네상스 건축으로 평가받는 '죄 없는 자들을 위한 병원Ospedale degli Innocenti'이라는 고아원 병원이었습니다. 평범해 보이는 건축이지만, 이 건축은 로마인들이 자주 사용하던 둥근 아치와 기둥장식, 무엇보다 완벽한 수학적 비례로 설계된 건축입니다. 특히 수학적 비례는 앞으로 계속 등장할 르네상스 건축의 기본적인 원칙이 됩니다. 수학적 비례를 사용한 것은 단순히 더 튼튼하게 건축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숫자에 아름다움의 법칙이 숨어있다'라고 생각했던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의 사고방식을 따라간 것이죠. 파르테논 신전이 1:1.618로 알려진 황금비와 9:4의 비율에 따라 설계되었던 것도 '숫자에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다'고 믿었던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을 반영합니다.  

이 건축의 완성도에 감탄한 조반니는 그에게 로렌조 대성당 건축을 맡깁니다. 아마 몇 년 전 기베르티에게 패배한 후 대차게 떠났던 브루넬레스키라는 청년을 조반니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후 여러 건축의 설계를 맡으며 브루넬레스키는 더욱 승승장구합니다. 그러나 그를 당대 최고의 건축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무엇보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건축,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의 돔'입니다.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의 돔

꽃의 성모마리아 대성당, 통칭 '피렌체 대성당'은 원래 백여 년 전 1296년 지오토의 시대에 처음 착공된 건축입니다. 당시 피렌체 정부는 점점 강해지는 피렌체의 위상을 뽐낼 대성당을 기획했고 건축가 아르놀포Arnolfo di Cambio를 고용해 설계를 맡겼습니다. 아르놀포의 설계에 따라 야심차게 시작된 피렌체 대성당은 1380년에, 일단 본당까지는 완공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돔이었습니다. 아르놀포의 초기 설계대로 건축한다면 돔이 붕괴한다는 계산이 나왔기 때문에 손을 못대고 있었던 것이죠. 이 상태에서 40년 동안 공사가 중단됩니다.

에초에 폭이 45m에 달하는 돔을 제작하려면 거대한 나무 뼈대도 구축해야 하는데, 길이가 45m인 나무를 인근에서 구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무게였습니다. 계산 실수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한쪽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해결할 건축가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지난 40년동안 피렌체 시민들은 뚜껑이 열려있는 채로 비를 맞고 있는 피렌체 대성당을 아마 씁쓸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1418년, 피렌체 정부는 드디어 이 일을 마무리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아직 얼마가 들어갈지 상상조차 안 되는 건축 비용은 당대 최고의 상인 길드였던 피렌체 양모 길Arte della Lana에서 치르기로 했습니다. 물론 그 뒷배에는 메디치 가문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과연 어떤 건축가가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피렌체는 200 플로린 금화라는 거액을 걸고 유럽 전역의 건축가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돔을 감당할 수 있는 진짜 천재들을 찾아 나선 것이죠.

응모 결과 전 유럽에서 총 12명의 예술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응모합니다. 광장에는 이들이 응모작으로 제출한 거대한 모형들이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모형이었지만 워낙 큰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어떤 모형은 집채만 하기도 했습니다. 12개의 모형들이 광장에 펼쳐져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브루넬레스키의 출품 모형,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


심사위원들은 12명의 건축가들을 불러 한명 한명 설명을 들어가며 심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심사 끝에 최종으로 2명의 건축가가 선택됩니다. 그런데 무슨 우연인지 이번에도 최종 2인에 오른 것은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였습니다. 지난 17년간 한 명은 건축가로, 다른 한 명은 조각가로 살아왔는데 다시 한번 만나게 된 것이죠.

브루넬레스키는 심사위원들에게 나는 나무 지지대 없이도 충분히 돔을 완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피렌체에서는 구할 수 없는 45m의 나무 기둥 없이도 건축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이죠. 브루넬레스키의 해결책은 매력적이었지만 문제는 고집 넘치는 브루넬레스키의 '톤 앤드 매너Tone and manner'였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시종일관 입술을 꾹 닫고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는데, 아마 자신의 새로운 건축 아이디어를 다른 사람들이 훔칠까 봐 두려웠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이번에도 기베르티에게 패배해 17년의 악몽이 되살아나는건 아닐까 두려워 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심사위원들을 난처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어려운 공사라는 걸 모두 알고 있는데, 뽑힌 사람이 적극적으로 설명해도 모자랄 판에 저렇게 뚱하게 앉아있다니요.   

하지만 심사위원회도 브루넬레스키의 태도보다는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해야 했습니다. 브루넬레스키의 비협조적인 태도는 도저히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설계가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였던 것이죠. 결국 응모에 최종 선정된 것은 브루넬레스키였습니다. 하지만 위원회는 17년 전과 비슷한 조건을 내 겁니다. 기베르티와 공동 작업을 해달라고 제안한 것이죠. 아마 위원회는 브루넬레스키의 태도에 불안함을 느껴 기베르티를 일종의 '보험'으로 삼을 요량이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브루넬레스키는 격분합니다. 기베르티와는 절대로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이죠. 결국 브루넬레스키는 위원회를 상대로 소리를 지르다가 쫓겨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워낙 큰 공사였기 때문에 위원회는 끈질기게 브루넬레스키를 설득합니다. 결국 브루넬레스키는 이 조건을 받아들입니다. 우리의 야생마 같은 브루넬레스키가 드디어 마음을 착하게 고쳐 먹은 것일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건축이 막상 시작되자 기베르티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전날 기베르티가 무언가를 해놓으면 다음날 어떤 멍청이가 이런 식으로 공사를 해 놓았냐고 소리치며 해체해 버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베르티가 뭘 할 수 있었을까요?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돔 건축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기베르티가 아니라 브루넬레스키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건축의 주도권은 브루넬레스키에게 넘어가고 기베르티는 사싱상 배제 됩니다. 


천재의 해결책

돔에서 가장 위험한 문제는 돔이 중력에 의해 붕괴하는 것입니다. 수만 톤의 돌이 아래로 짓누르는 것은 마치 어린이용 축구공 위에 엄청 뚱뚱한 사람이 올라가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잠시 무게를 버틴다 해도 결국 공은 옆으로 터져버릴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돔도 벽돌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면 옆으로 터져버리게 됩니다. 일단 브루넬레스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돌과 쇠로 된 4개의 거대한 체인으로 돔을 감싸는 방법을 구상합니다. 공이 엄청난 무게에 짓눌릴 때 옆으로 터지지 않게 하기 위해 공의 옆면을 두꺼운 체인으로 칭칭 동여 메는 것과 비슷합니다. 

두 번째는 돔을 외부와 내부의 2중 구조로 설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아이디어는 브루넬레스키가 로마에서 판테온을 보고 배워온 것입니다. 판테온은 외벽과 내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마치 사람이 피부와 뼈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외부돔은 피부의 역할, 그러니까 비바람 같은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돔을 보호하고, 내부 돔은 중량을 견디는 뼈대의 역할을 하는 것이죠. 거기에 더해 이렇게 이중으로 설계하면 외부 돔과 내부돔 사이에 빈 공간이 생겨 무게도 줄일 수도 있었습니다.


로마의 트라야누스광장의 벽돌 패턴와 브루넬레스키 돔의 패턴


또 한 가지 해결책은 '헤링본Herringbone 구조'로 벽돌을 쌓는 것이었습니다. 헤링본은 '청어 등뼈무늬'라는 뜻으로 우리나라의 '오늬무늬'와 비슷한 패턴입니다. 이 역시 마찬가지로 로마에 여행을 갔다가 로마 건축에서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위와 같이 벽돌을 지그재그로 쌓아 결속력을 강화하는 것이죠. 이 구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세로 벽돌들입니다. 중간중간에 서 있는 이 벽돌들은 일종의 일종의 '중간 기둥'의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책 여러 권을 세워놓으면 도미노처럼 한쪽으로 쓰러질 수밖에 없는데, 중간에 기댈 수 있는 받침대가 있다면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이죠. 이 구조 덕분에 벽돌들은 건설 도중 흘러 떨어지지 않고 더 효율적으로 버틸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에 이런 건축 방법은 전례 없었던 것이고, 어떻게 보면 이런 전례 없는 방법을 쓰지 않으면 완성할 수 없는 건축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막상 건축이 시작되자 일꾼들은 브루넬레스키를 완전히 신뢰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단순한 일꾼이 아니라 석공 조합Masonry의 기술자들이었기 때문에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브루넬레스키의 공법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들은 곧 브루넬레스키를 신뢰하게 됩니다. 브루넬레스키가 벽돌들을 공중으로 올리기 위해 기중기를 직접 제작해서 가져왔는데 이 기중기는 고작 소 한 마리의 힘으로 수많은 벽돌들을 천장까지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효율이 좋았습니다. 이 기중기는 근대 이전까지는 최고의 효율을 가진 기중기라고 합니다. 이런 천재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죠.

거대한 돔을 완성하는 일은 마치 군대를 운용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일꾼들이 그 엄청난 높이에 매일 올라가서 일을 하려면 충분히 힘을 내도록 만들게 하기 위해 임산부들이 먹는 특식을 제공했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포도주에는 물을 섞도록 했습니다. 일꾼들은 포도주에 물을 섞는 것만큼은 엄청나게 반대했던 모양이지만, 브루넬레스키는 총책임자로서 안전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백만 개의 벽돌을 쌓는 일은 몇 달 안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브루넬레스키와 일꾼들이 최선을 다해서 작업을 했음에도 한 달에 고작 30cm 이상 벽돌을 올리기는 어려웠습니다. 야심 찬 계획이기도 했지만 웬만한 끈기가 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프로젝트였던 셈이죠. 결국 이 작업은 총 16년 23일이 걸렸습니다. 



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꼭대기의 렌턴 구조물에는 관광객들이 올라가 있습니다. 2중 돔의 빈 공간 사이에 계단을 설치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올라갈 수 있게 설계된 것이죠. 사진 속의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일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의 돔을 브루넬레스키는 16년간의 끈기로 완성해 냈습니다. 1436년, 피에솔레 주교가 돔의 마지막 돌을 놓는 것으로 돔은 완공됩니다. 남자의 전성기를 돔 하나에 올인한, 고집스러운 브루넬레스키의 성공이라고 해야 할까요. 


건축가의 지위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 시민들의 마음속에 지난 100년간 묵어있던 응어리를 풀어주었습니다. 아무도 완성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돔을 그가 완성했기 때문입니다. 피렌체인들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자신들의 도시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피렌체에 걸맞는 최고의 돔이 완성되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사람들은 누구나 브루넬레스키의 천재성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그 자체로 건축가의 사회적 지위가 이미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이후 10년간 피렌체의 최고의 건축가로 활동하다 1446년 죽게 됩니다. 다만 아쉽게도 브루넬레스키는 자신이 설계한 돔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은 보지 못하고 죽게됩니다. 돔 자체는 1436년에 완성되었지만, 그 위의 렌턴, 즉 최종 장식까지 완성되는 데는 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위 사진에 보이는 렌턴은 1461년 브루넬레스키의 설계에 따라 그의 친구 미켈로초Michelozzo 에 의해 완성되었고 위의 금빛 구리 공은 조각가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돔이 최종적으로 완성된 해는 1469년이 됩니다.

돔의 구리공을 완성했던 베로키오의 작업실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라는 젊은 견습생이 있었습니다. 베로키오는 이 무거운 구리공을 들어 올리기 위해 브루넬레스키가 고안한 기중기를 사용했는데 다빈치는 이 기계를 직접 보고는 브루넬레스키의 천재성에 매료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직접 기중기를 관찰하면서 여러 장의 스케치를 남겼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돔 공사 중에도 문제가 생기면 직접 기계를 뚝딱 만들어서는 문제를 해결하고는 했는데, 아마 다빈치는 브루넬레스키의 이런 천재성에 매료되었던 모양입니다. 알려진 것처럼 다빈치는 평생 수많은 기계들을 발명했습니다. 다빈치는 브루넬레스키의 이런 천재성을 멘토 삼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초기의 천재들

브루넬레스키는 자신이 돔을 건축한 꽃의 성모마리아 대성당 지하에 지금도 묻혀 있습니다. 그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CORPVS MAGNI INGENII VIRI

PHILIPPI S BRVNELLESCHI FLORENTINI

피렌체의 위대한 천재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여기 잠들다


그는 정말 르네상스 초기의 위대한 천재 중 한명이었습니다. 고집 센 브루넬레스키는 당시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로마 방문'을 통해  로마 건축을 연구하는 것으로 르네상스 건축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실제로 이후 등장할 성 베드로 성당 같은 르네상스의 뛰어난 건축들은 모두 브루넬레스키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등장할 미켈란젤로나 다빈치 같은 예술가들은 모두 브루넬레스키가 발명한 원근법을 통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명실상부 르네상스의 초석을 깔아놓은 위대한 '초기의 천재들' 중 한명이라고 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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