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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Mar 08. 2024

흑사병의 창궐

  

피터르 브뤼헐 '죽음의 승리' 1562


천사와 악마

지오토의 탄생 이후 갑자기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이 폭발적으로 등장할 것만 같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계보를 살펴보면 이상하게도 지오토 이후 거의 100여 년간 예술가의 계보가 끊겨있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죠. 지오토와 다빈치를 비교해 본다면, 지오토는 1267년생이지만, 다빈치는 1452년생입니다.

르네상스의 중간에 이렇게 큰 구멍이 나있는 이유는 이 시기에 중세 최악의 재앙이었던 '흑사병'이 발발했기 때문입니다. 흑사병은 가히 최악이라고 할만했습니다. 먼 과거의 일이니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학자들은 거의 유럽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가 사망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쉽게 표현한다면 유럽인들은 자신의 4인 가족 중 2명이 죽어버리는 끔찍한 경험을 했던 것이죠. 절망에 빠진 유럽 사람들은 예술을 발전시킬만한 마음의 여유도, 경제적인 여유도 갑자기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묘한 점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르네상스는 어쩌면 흑사병과 같은 뿌리에서 태어난 형제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지만 한 아이는 천사로 아름답게 자라나고 다른 한 아이는 악마로 자라났다고 해야 할까요.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당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곰곰이 살펴보다 보면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심상치 않았던 당시의 상황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카파 공성전

지오토가 죽은 뒤 9년 뒤, 1346년입니다. 동유럽의 도시의 카파에서는 한참 공성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몽골인들이 제노바의 식민지였던 카파에 쳐들어 온 것입니다. 칭기즈칸 사후 몽골제국은 여러 나라로 갈라졌는데, 그중 하나였던 '킵차크 칸국'이 당시 제네바의 식민지였던 카파를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죠. 

공성전은 항상 참혹하기 마련입니다.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성벽 위에서 쏘아대는 화살과 돌멩이들을 그대로 맞으면서 공격해야 하기 때문에 희생이 크고,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갇혀있다 보니 마실 물과 먹을 것이 떨어져 시체까지 먹으며 연명하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에 끔찍합니다. 그렇게 참혹하다 보니 공성전을 할 때는 서로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카파 공성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서로 공방을 주고받던 중 한 가지 이변이 일어납니다. 한참 공격에 집중하던 몽골인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몽골 병사들은 갑자기 매일 수천 명씩 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몽골인들은 가뜩이나 성벽 위에서 쏘아대는 화살 때문에 약이 바짝 오른 상태였는데, 갑자기 전염병까지 돌자 마음속에 적에 대한 증오가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병사들은 그 증오 가득한 마음을 죽은 시체들을 투석기에 넣어 던지는 것으로 해소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동시대의 이탈리아인 가브리엘 드 무시스(Gabriele de Mussis)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몽골인들을 덮친 병은 군대 전체를 감염시켜, 매일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들은 시체에서 나온 끔찍한 악취가 성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일 것이라고 희망하면서 시체를 투석기에 넣어 도시 안으로 투척하기 시작했다. 산더미같이 쌓여있던 시체들이 성안으로 던져졌고, 기독교인들은 시체를 최대한 바다로 던져서 처리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시체는 계속 성안으로 들어왔다. 

썩어가는 시체는 공기와 식수를 오염시켰고, 악취는 너무나 지독해 아무도 피해 도망갈 수 없었다. 게다가 병에 감염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독을 옮겼고, 쳐다보기만 해도 사람들을 병에 감염시켰다. 누구도 이를 막아낼 방법을 알거나 찾지 못했다.... 제네바 선원 중 일부가 배를 이용해 카파를 벗어났다. 어떤 선박은 제노바로 돌아갔고, 다른 일부는 베네치아나 다른 기독교 지역으로 향했다.


몽골인들이 감염되어 있던 병은 바로 '흑사병Black Death'였습니다. 당시 흑사병의 치사율은 90%에 달할 만큼 끔찍했습니다. 몽골인들은 증오의 감정을 담아 그렇게 병들어 죽은 시체들을 성 안으로 던져 넣은 것이죠. 아직 균이나 바이러스의 존재에 대해서 몰랐던 시절이지만 몽골 병사들은 병든 시체를 성 안으로 던지면 그 병이 퍼진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몽골인들은 그들이 던져 넣은 시체가 향후 수천만의 유럽인들을 죽게 할지 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카파는 바다를 끼고 있는 항구 도시습니다. 상황이 점점 나빠지자 카파성벽을 지키던 사람들은 하나 둘 배를 타고 몰래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도망치는 사람들에 의해 흑사병은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됩니다.


죽음의 배 Death Ship

1347년 10월, 카파를 빠져나온 제네바의 상선 12척이 시칠리아 메시나 항구에 도착합니다. 시칠리아 사람들은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시찰단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시찰단이 배 안으로 들어가자 그 안에는 이미 시체 썩은 내로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선원들 대부분이 죽은 상태였으며, 고통으로 신음하던 생존자들 역시 역시 온몸은 고름으로 뒤덮여있었고 피부는 시커멓게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병의 이름이 '흑사병'인 이유가 이것인데, 실제로 피부가 마치 검은 물감을 칠한 것처럼 시커멓게 변했기 때문입니다. 시찰단은 상부에 보고합니다. 저 배들은 끔찍한 '죽음의 배'라고.

의학지식이 거의 없다시피 한 중세의 사람들이지만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마을로 들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습니다. 시칠리아 당국은 급하게 '죽음의 배'들을 즉시 항구에서 떠나도록 명령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시칠리아 항구 사람들도 하나둘씩 피부가 검게 변하는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죠. 아마 시찰을 나갔던 사람들을 통해 병균이 항구로 퍼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십자군 전쟁 때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한 도시는 베네치아, 피사, 제네바, 아말피, 이렇게 모두 항구도시였습니다. 십자군 병사들과 물자들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십자군 물품을 전달하는 허브의 역할을 했던 이 항구도시들은 이제는 거꾸로 흑사병을 전파하는 허브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무역로를 통한 전파속도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빨랐습니다. 처음 시칠리아에서 발병한 지 세 달 뒤, 1348년 1월쯤에는 이탈리아를 벗어나 프랑스의 마르세유에서 까지 확진자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곧 흑사병은 빠르게 퍼져 서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전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348년 6월이 되자 프랑스를 벗어나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에도 확진자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349년에는 북유럽의 노르웨이에도 확진자가 나타납니다. 1350년이 되자 독일, 스코틀랜드, 스칸디나비아를 거쳐 동쪽과 북쪽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1351년에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벌판까지 흑사병이 퍼져나가기 시작합니다. 알프스나 피레네 산맥처럼 산속에 고립된 지역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유럽 땅에서 확진자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단어, 펜데믹Pendemic이 시작된 것입니다.



흑사병의 희생자들을 묻는 투르네(벨기에) 사람들, 삽화, 1353

유럽인들의 대처

그 시대를 살던 이탈리아의 작가인 아뇰로 디 투라Agnolo di Tura는 1348년 흑사병이 자신의 마을 시에나Siena에도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자신의 경험을 아래와 같이 기록했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버렸고, 아내는 남편을 버렸으며, 형제는 형제를 버렸다. 이 병은 공기와 눈길로도 번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죽어나갔다. 죽은 사람을 땅에 묻어줄 사람을 구할 수가 없었다. 죽은 자를 위해 예배를 드려줄 성직자도 없이, 살아남은 가족들은 최선을 다해 가족의 시체를 하수구로 가져다 놓았다. 하루에도 밤낮으로 수백 명씩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주민들은 큰 구덩이들을 여러 개 파고 시체들을 쌓아놓기 시작했다.... 나도 내 다섯 자식을 내 손으로 땅에 묻었다. 그곳에는 흙으로 대충 덮은 시신들이 많이 있었고 개들이 이 시신들을 끌고 나와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죽음 때문에 우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들도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종말이 왔다고 믿었다.


상황이 이토록 끔찍했지만, 더 끔찍했던 것은 유럽인들은 이 병의 원인조차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균과 바이러스의 존재를 몰랐으니까요. 유럽인들은 별들이 일렬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이런 재앙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유태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균'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독'은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독을 마셔서 병이 생겼다고 믿는 것이 합리적이었던 것이죠. 그런 중세의 유럽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은 생각은 우리가 너무 타락해서 '신의 진노'에 의해 우리가 죗값을 치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중세의 불쌍한 서민들은 기도를 하거나 고행을 해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병을 치유하려고 했습니다. 교회는 죄를 뉘우치려고 모인 사람들로 넘쳐났고, 어떤 마을에서는 신부가 길거리에서 웃통을 벗고 채찍으로 등을 내리치면 죄를 회개하는 고행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부에 감명받은 사람들은 모두 신부 곁으로 모여들어 자신들도 웃통을 벗고 등에 채찍을 내리찍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얘기하면 이런 행동들은 전염병을 더 퍼뜨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있으면 아무래도 병이 더 빨리 퍼지기 마련이니까요.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이들의 행동이 바보같이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누워서 죽기를 기다리기에는 삶이 너무 억울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허무하게 죽느니 차라리 일단 밖에 나가서 등에 채찍질이라도 한번 해보고 죽는 게 속이라도 시원했을지 모릅니다. 


폴 퓌리스트의 판화 '로마의 역병 의사Plague doctor', 1656


죽음의 의사

흑사병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그림은 이렇게 새부리 모양의 가면을 쓴 사람들입니다. 지금봐도 상당이 기분 나쁜 형태지만 사실 이 사람들은 의사들이었습니다. 위 아뇰로의 글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은 흑사병이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공기'를 '냄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사들은 '냄새'를 막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새 부리모양의 가면을 쓰고 새 부리 쪽에는 향기가 강한 허브로 막아놓았습니다. 허브의 강한 '향기'가 흑사병의 '냄새'를 막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마스크는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다고 합니다. 허브는 보통 항균기능을 하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이 가면은 분명 사람을 고치는 '의사의 가면'인데, 사람들은 의사를 '죽음의 사신'처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중세의 의학이 처참한 수준이었기 때문인데, 중세 의사들은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도끼로 다리를 잘라버리는 사실상 '도살자'에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흑사병 걸린 사람들에게 해주는 가장 일반적인 시술은 '방혈술'이라는 피를 빼는 시술이었습니다. 나쁜 피를 빼서 병을 고친다는 것이죠. 하지만 병에 걸린 사람들은 피를 빼면 더 빨리 죽을 뿐이었습니다. 흑사병의 치사율도 100%는 아니었기 때문에 살아남는 사람도 있었지만 의사가 피를 빼는 바람에 오히려 사람들이 죽어나갔던 것이죠. 사람들 입장에서는 의사라고 해도 새부리 가면을 쓴 사람이 왔다만 가면 사람들이 죽어나갔으니 실제로는 '죽음의 사신'처럼 느껴졌을지 모르겠습니다. 


흑사병의 종식

흑사병은 약 8년 정도 기승을 부리다가 1353년쯤 되면서 서서히 종식됩니다. 왜 흑사병이 갑자기 멈추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도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사람들이 점점 서로 '격리'하는 습관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아니면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미 죽어버려서 더 이상 병이 퍼질 수가 없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병의 매개체 역할을 하던 쥐들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종식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유럽인들을 절망에 빠뜨렸던 흑사병은 그렇게 어느 순간 갑자기 종식됩니다. 인류의 종말이 올 것 같았지만 허무하게 느껴질 만큼 갑자기 병의 유행이 멈춘 것이죠. 다만 죽음의 사신은 유럽 인구의 절반을 데리고 저 멀리 사라져 버린 뒤였습니다. 




흑사병은 왜 생겨났는가?

그렇다면 흑사병은 갑자기 왜 생겨난 것일까요?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로 잠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기후학자들에 따르면 중세 말, 10~14세기에는 전 지구적 기온 상승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중세 온난기(Medieval Warm Period)'라고 합니다. 중세 온난기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태양활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태양 흑점활동의 변화에 따라 지구에는 계속된 온도 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태양이 활발히 타오르면 지구가 뜨거워져 간빙기가 시작되고 반대로 잠잠해지면 지구가 추워져 빙하기가 오는 식입니다. 아마 중세 말에는 활발한 태양 흑점활동이 있었고, 그에 따른 기온상승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중세 온난기는 식량 생산의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날씨가 따듯하면 아무래도 농작물이 자라기 좋으니까요. 그리고 식량이 많아지자 인구가 늘어났습니다. 학자들은 대략 11세기부터 흑사병이 시작되기 직전인 14세기까지 유럽의 인구가 최대 1억 명까지 증가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전에 비해 인구가 3배나 증가한 것입니다. 이는 아시아도 마찬가지였는데, 중국 송나라의 경우 1100년 4500만 명 규모였던 인구가 1200년에는 8000만 명 수준까지 올라갑니다. 

그렇다면 중세 온난기와 흑사병은 무슨 관계일까요? 흑사병은 카파에 시체를 던지던 몽골인들 사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몽골인들이 살던 초원으로 한번 가보겠습니다. 지금도 몽골은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초원으로 유명하지만, 14세기 몽골의 초원은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습니다. 식물학자들이 몽골의 오래된 나무들의 나이테를 조사해 본 결과, 14세기는 지난 1천 년동안 가장 강수량이 많았던 시기라고 합니다. 메마른 초원이 아닌 풍요가 가득한 초원이었던 것이죠. 어떤 학자들은 몽골 제국의 탄생 자체가 중세 온난기 덕분이었을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몽골 제국의 핵심 전력은 기마병이었는데, 몽골의 초원에서 풀이 어마어마하게 자라준 덕분에 다수의 말을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이죠. 

이 초원의 축복은 몽골에 사는 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먹을 것이 풍부해지자 초원에 사는 쥐들의 숫자는 빠르게 늘어납니다. 그런데 이 쥐들 중에 '검은 쥐'라는 종이 있었습니다. 이 쥐들은 '페스트 균'을 몸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흑사병의 원인이 되는 균입니다. 그런데 이 쥐들이 숫자가 불어나면서 서식지를 벗어나 인간이 사는 지역까지 침투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쥐들의 몸에 기생하던 벼룩이 인간의 몸에 옮겨 타면서 페스트 균이 인간에게도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쥐벼룩 가설'입니다.


중세온난기의 명과 암

이것이 중세 온난기에 유럽인에게 닥친 재앙, 흑사병의 창궐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전말입니다. 저 멀리 있는 태양의 변덕이 돌고 돌아 인간사회에 이토록 큰 재앙을 일으켰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참 허망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니면 대자연의 섭리 앞에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요.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중세 온난기는 인간을 깨우는 '인본주의의 꽃', 르네상스가 태어나게 만드는 양분의 역할도 했습니다. 인구의 증가야말로 문명이 더 빠르게 발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니까요.  

중세 온난기에는 전 유럽에 걸쳐 도시문화가 급속도로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전반적으로 인구가 증가하자 사람들이 시골을 떠나 도시로 모여들었고 자연스럽게 도시문화가 발달했을 것입니다. 도시에는 항상 에너지가 넘쳐나기 마련입니다. 도시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대화를 나누고 토론하며 '지성'을 발전시키기 시작합니다. 아마 르네상스는 그렇게 모여서 생각을 나누던 '집단지성'의 결과로 탄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많아지면 그중에는 소위 '천재'들이 등장하기 마련입니다. 서두에 말했던 것처럼 중세 온난기의 나쁜 결과로는 태어난 '악마'가 흑사병이라면, 그 반대의 밝은 측면으로 태어난 '천사'가 르네상스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보면 이 시기는 유난히도 격동적이었던 시기입니다. 십자군 전쟁, 몽골 제국의 침략, 르네상스의 탄생, 흑사병의 창궐,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어쨌든 격동의 시기였다는 것이죠. 태양이 미쳐 날뛰기 시작하자 그에 따라 인간들도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요.  

조심스러운 얘기이기는 하지만, 중세 온난기는 묘하게도 현대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최근 우리는 급격한 지구 온난화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전례 없는 급격한 인구 증가 또한 겪고 있습니다. 1900년에 16억 하던 인구가 어느새 80억까지 5배나 불어났으니까요. 지구에 지금까지 이렇게 사람이 많았던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최근 우리는 전대미문의 '코로나 사태', 팬데믹을 겪었습니다. 사실 팬데믹의 전조는 꾸준히 있어왔습니다. 코로나 이전에 몇 년을 주기로 메르스, 사스 같은 전염병이 돌았으니까요. 그리고 어쩌면, '진짜 팬데믹'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나쁜 측면이라면, 그 반대의 측면도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엄청난 속도의 기술발전도 겪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AI 같은 인류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기술혁신이 지난 몇십 년간 계속 등장한 것이죠. 이 모습은 어쩐지 중세 온난기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온난화와 그에 따른 인구증가, 그리고 시대를 바꾼 급격한 혁신의 등장. 


흑사병 이후

흑사병은 유럽을 초토화시켰지만 르네상스의 불꽃은 오히려 이후 더 활발하게 불타오르게 됩니다. 흑사병으로 인해 '시민 계급'이 본격적으로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흑사병으로 인해 인구가 갑자기 줄어들자 영주들은 농사를 지을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직접 농사를 지을 수는 없었는데 농사 기술도 없었지만 귀족이 농사를 지으면 영 체면이 서지 않았던 것이죠. 그래서 영주들은 대신 비싼 값에 일꾼들을 '모셔'오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마치 축구선수 FA시장 처럼 어느 동네에 힘좀 깨나 쓰는 '돌쇠'가 있다고 하면 영주들이 '돌쇠'와 임금 협상을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는 노동자 계급, 이른바 '프롤레타리아'가 역사상 처음 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농민 계급의 사회적 지위가 올라가는 와중에, 피렌체에서는 평민 출신이지만 르네상스 전체의 방향을 결정할 위대한 인물이 한 명 등장합니다. 유럽 근세사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 바로 '메디치 가문'을 일구어낸 조반니 데 메디치Giovanni de' Medici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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