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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Mar 08. 2024

중단된 르네상스, 흑사병의 창궐

  

피터르 브뤼헐 '죽음의 승리' 1562


또 다른 혼란, 흑사병

니콜라와 지오토의 탄생 이후 갑자기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이 폭발적으로 등장할 것만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계보를 살펴보면 니콜라와 지오토 이후 반짝하다가 갑자기 거의 100년 동안 예술가들이 사라지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지오토와 다음편에 소개할 예술가 브루넬레스키를 비교해 본다면, 지오토는 1267년생이지만, 브루넬레스키는 1377년생이다.

르네상스의 중간에 이렇게 큰 구멍이 나있는 이유는 이 시기에 갑자기 유럽에 흑사병이 발발했기 때문이다. 흑사병은 유럽인들에게는 말 그대로 재앙이었는데 학자들은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인구의 거의 절반 또는 삼분의 일에 달하는 숫자가 사망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4인 가족이라면 갑자기 가족 중 2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경험을 유럽인들은 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유럽인들은 한세기동안 예술을 발전시킬만한 여유도, 능력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흑사병은 십자군 전쟁의 종식과 함께 중세의 마지막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십자군 전쟁에 이어 유럽에 갑자기 흑사병은 들이닥친 이유는 무엇일까. 


카파 공성전

지오토가 죽은 뒤 9년 뒤, 1346년의 일이다. 동유럽의 도시의 카파에서는 한참 공성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카파는 무역도시 제네바의 식민도시로 현대로 치면 우크라이나의 도시 페오도시야에 해당하는데 카파를 공격하는 측은 몽골제국이었다. 칭기즈칸 사후 몽골제국은 여러 세력으로 갈라졌고 그중 하나였던 킵차크 칸국이 유럽으로 넘어가는 관문 중 하나였던 카파를 공략하고 있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도 그랬지만 공성전은 항상 참혹하기 마련이다.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성벽 위에서 쏘아대는 화살과 돌멩이들, 뜨거운 기름을 정면으로 맞으면서 공격해야 하기 때문에 희생이 크고,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마실 물과 먹을 것이 떨어져 말과 인육까지 먹으며 버텨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에 끔찍하다. 그렇게 참혹하다 보니 공성전을 할 때는 서로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필요 이상으로 커지는 경우가 많다. 카파 공성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카파 공성전이 한참 진행중이던 시점에 한 가지 이변이 일어났다. 공격에 집중하던 몽골인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몽골 병사들은 어쩐일인지 갑자기 매일 수백 명씩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몽골인들은 가뜩이나 성벽 위에서 쏘아대는 돌과 화살 때문에 약이 바짝 오른 상태였는데 갑자기 전염병까지 돌자 마음속에 적에 대한 증오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그 증오 가득한 마음을 죽은 시체들을 투석기에 넣어 성 안으로 던지는 것으로 해소하려고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동시대의 기록자 가브리엘 드 무시스Gabriele de Mussis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몽골인들을 덮친 병은 군대 전체를 감염시켜, 매일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들은 시체에서 나온 끔찍한 악취가 성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죽일 것이라고 희망하면서 시체를 투석기에 넣어 도시 안으로 투척하기 시작했다. 산더미같이 쌓여있던 시체들이 성안으로 던져졌고, 기독교인들은 시체를 최대한 바다로 던져서 처리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시체는 계속 성안으로 들어왔다. 

썩어가는 시체는 공기와 식수를 오염시켰고, 악취는 너무나 지독해 아무도 피해 도망갈 수 없었다. 게다가 병에 감염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독을 옮겼고, 쳐다보기만 해도 사람들을 병에 감염시켰다. 누구도 이를 막아낼 방법을 알거나 찾지 못했다.... 제네바 선원 중 일부가 배를 이용해 카파를 벗어났다. 어떤 선박은 제노바로 돌아갔고, 다른 일부는 베네치아나 다른 기독교 지역으로 향했다.


몽골인들이 감염된 전염병이 바로 '흑사병Black Death'이었다. 흑사병은 당시 치사율이 90%에 달했을 만큼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몽골 병사들은 균이나 바이러스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직 몰랐지만 병든 시체를 성 안으로 던지면 그 병이 퍼진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몽골인들은 분노의 감정을 담아, 그리고 무엇보다 공성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일종의 공성 전략으로써 시체를 성 안으로 던져 넣은 것이겠지만 그들이 던져 넣은 시체가 향후 수천만의 유럽인들을 죽게 만들며 유럽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라는 예측까지는 하지 못했다. 

시체가 나뒹구는 카파 성 안에는 한명 두명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했고 여전히 날아들어오는 생화학무기에 성 안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그런데 진짜 심각한 문제는 카파가 항구를 끼고있는 해안가 도시였다는 점이다. 성에서 버티던 사람들은 하나 둘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항구도시였던 만큼 이들은 육로가 아니라 배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흑사병은 배를 타고 순식간에 전 유럽으로 퍼지게 된다.


죽음의 배 Death Ship

1347년 10월, 카파를 빠져나온 제네바의 상선 12척이 프리드리히가 태어난 섬 시칠리아의 메시나 항구에 도착했다. 시칠리아 사람들은 배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우선 시찰단을 보냈다. 그런데 시찰단이 배 안으로 들어가자 그 안은 이미 시체 썩은 내로 진동하고 있었다. 선원들 대부분이 죽은 상태였으며,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들도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온몸은 고름으로 뒤덮여있었고 피부는 시커멓게 변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병의 이름이 '흑사병'인 이유가 이것인데 실제로 피부가 마치 검은 물감을 칠한 것처럼 시커멓게 변했기 때문이다. 시찰단은 상부에 보고했다. 저 배들은 끔찍한 '죽음의 배'라고.

의학지식이 거의 없다시피 한 중세의 사람들이라고해도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마을로 들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시칠리아 당국은 급하게 '죽음의 배'들을 즉시 항구에서 떠나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시칠리아 항구의 사람들도 하나둘씩 피부가 검게 변하는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시찰을 나갔던 사람들을 통해 병균이 항구로 퍼지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덧붙이자면 '격리'를 뜻하는 쿼런틴quarantine은 이 시절 생긴 말이다. 베네치아는 흑사병이 번진다는 소식을 접하자 베네치아로 들어오는 모든 배를 해상에 40일 동안 일단 격리 시키고 항구로 들였는데 그동안 배 안에 전염병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안전한 배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여기서 이탈리아어로 40을 의미하는 quarantena가 현대의 영어에서 '격리'를 뜻하는 쿼런틴으로 바뀐 것이다. 

십자군 전쟁 때 유럽에서 가장 폭발적으로 성장한 도시는 베네치아, 피사, 제네바, 아말피, 이렇게 모두 항구도시였다. 8차에 달하는 십자군 원정에서 항구도시들은 수 만명의 병사들과 함께 말, 목재, 무기 등등 어마어마한 물자의 이동을 담당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항구도시들 또한 성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십자군 물품을 전달하는 허브의 역할을 맡았던 이 항구도시들은 이제는 거꾸로 흑사병을 전파하는 죽음의 허브의 역할을 하게 된다. 해로를 통한 전파속도는 육로 전파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빨랐다. 처음 시칠리아 메시나 항구에서 발병한 지 세 달 뒤인 1348년 1월쯤에는 이탈리아를 벗어나 프랑스의 마르세유에서 까지 피부가 검게 변한 확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흑사병은 곧 엄청난 속도로 퍼져 서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전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1348년 6월이 되자 프랑스를 벗어나 스페인, 포르투갈, 영국에도 확진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349년에는 북유럽의 노르웨이에도 확진자가 나타났다. 1350년이 되자 독일, 스코틀랜드, 스칸디나비아를 거쳐 동쪽과 북쪽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1351년에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벌판에서까지 흑사병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알프스나 피레네 산맥처럼 산속에 고립된 지역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유럽 땅에서 확진자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단어, 펜데믹Pendemic이 시작된 것이다.



흑사병의 희생자들을 묻는 투르네(벨기에) 사람들, 삽화, 1353

유럽인들의 대처

그 시대를 살던 이탈리아의 작가인 아뇰로 디 투라Agnolo di Tura는 1348년 흑사병이 자신의 마을 시에나Siena에도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자신의 경험을 아래와 같이 기록했다. 


아버지는 자식을 버렸고, 아내는 남편을 버렸으며, 형제는 형제를 버렸다. 이 병은 공기와 눈길로도 번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죽어나갔다. 죽은 사람을 땅에 묻어줄 사람을 구할 수가 없었다. 죽은 자를 위해 예배를 드려줄 성직자도 없이, 살아남은 가족들은 최선을 다해 가족의 시체를 하수구로 가져다 놓았다. 하루에도 밤낮으로 수백 명씩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주민들은 큰 구덩이들을 여러 개 파고 시체들을 쌓아놓기 시작했다.... 나도 내 다섯 자식을 내 손으로 땅에 묻었다. 그곳에는 흙으로 대충 덮은 시신들이 많이 있었고 개들이 이 시신들을 끌고 나와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곳에는 죽음 때문에 우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들도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제 종말이 왔다고 믿었다.


상황이 이토록 끔찍했지만, 더 끔찍했던 것은 유럽인들은 이 병의 원인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점성술사들은 별들이 일렬로 배치되었기 때문에 이런 재앙이 일어났다고 말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유태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들은 '균'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독'은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독을 마셔서 병이 생겼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찾기보다는 책임을 덮어 씌울 사람을 먼저 찾기 마련이다. 소수민족이었던 유태인은 죄를 뒤집어 씌우기 딱 좋은 대상이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중세인들은 차라리 자신들이 지은 죄 때문에 신의 형벌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편이 그들에게는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종말의 때가 가까이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중세의 불쌍한 서민들은 기도를 하거나 고행을 해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병을 치유하려고 했다. 교회는 죄를 뉘우치려고 모인 사람들로 넘쳐났고, 어떤 마을에서는 신부가 길거리에서 웃통을 벗고 채찍으로 등을 내리치면 죄를 회개하는 고행을 시작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신부에 감명받은 사람들은 모두 신부 곁으로 모여들어 자신들도 웃통을 벗고 등에 채찍을 내리찍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이런 행동들은 전염병을 더 퍼뜨리는 결과를 낳을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피를 튀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 입장에서는 이들의 '속죄 행동'이 미련해 보일 수도 있지만, 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가만히 누워서 죽기를 기다리기에는 삶이 너무 억울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허무하게 죽느니 차라리 일단 밖에 나가서 등에 채찍질이라도 한번 해보고 죽는 게 속이라도 시원하지 않았을까. 


폴 퓌리스트의 판화 '로마의 역병 의사Plague doctor', 1656


죽음의 의사

흑사병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그림은 이렇게 새부리 모양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다. 지금봐도 상당이 기분 나쁜 그림이지만 사실 이 사람들은 그 시대의 의사들이었다. 위 아뇰로의 글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사람들은 흑사병이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공기를 통해 '균'이 퍼진다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했고 대신 '냄새'가 퍼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사들은 '냄새'를 막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저렇게 새 부리모양의 가면을 쓰고 새 부리 쪽에는 향기가 강한 허브로 막아놓았다. 허브의 강한 '향기'가 흑사병의 '냄새'를 막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마스크는 생각보다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향기가 강한 허브들은 실제로 항균 능력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가면은 분명 사람을 고치는 의사의 가면인데 왜 사람들은 이 의사를 '죽음의 사신'처럼 느끼기 시작했던 것일까. 이는 중세의 의학이 처참한 수준이었기 때문인데, 중세 의사들은 다리가 아프다고 하면 도끼로 다리를 잘라버리는 사실상 도축업자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당시의 의사들이 흑사병 걸린 사람들에게 해주는 가장 일반적인 시술은 '방혈술'이라는 피를 빼는 시술이었다. 중세의 사람들은 병이 생기는 이유가 '나쁜 피' 때문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쁜 피를 빼서 병을 고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병에 걸린 사람들은 피를 빼면 더 빨리 죽을 뿐이었다. 아무리 흑사병이라도 치사율은 100%가 아니었기 때문에 살아남는 사람도 있었지만 의사가 피를 빼는 바람에 오히려 사람들이 더 뻘리 죽어나갔던 것이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의사라고 해도 새부리 가면을 쓴 사람이 왔다만 가면 사람들이 죽어나갔으니 실제로는 '죽음의 사신'처럼 느껴졌을지 모르겠다. 


흑사병의 종식

흑사병은 약 8년 정도 기승을 부리다가 1353년쯤 되면서 서서히 종식되었다. 왜 흑사병이 갑자기 멈추었는지에 대해서는 현대의 학자들도 확실히 결론 내릴 수가 없다고 한다. 어떤 학자들은 사람들이 점점 서로 격리하는 습관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줄어들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아니면 어떤 학자들은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버려서 더 이상 병이 빠르게 퍼질 수가 없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또 어떤 학자들은 병의 매개체 역할을 하던 쥐들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종식되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유럽인들을 절망에 빠뜨렸던 흑사병은 그렇게 어느 순간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모든 유럽인들은 절망하며 세상의 종말이 찾아 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허무하게 느껴질 만큼 갑자기 병의 유행이 멈춘 것이다. 다만 죽음의 사신은 이미 유럽 인구의 절반을 데리고 저 멀리 사라져 버린 뒤였다. 




흑사병은 왜 생겨났는가?

그렇다면 흑사병은 갑자기 왜 생겨난 것일까? 흑사병이 창궐하던 중세로 잠시 돌아가 보자. 기후학자들에 따르면 중세 말, 10~14세기에는 전 지구적 기온 상승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중세 온난기Medieval Warm Period'라고 한다. 중세 온난기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태양활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태양 흑점활동의 변화에 따라 지구에는 계속된 온도 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태양이 활발히 활동하면 지구가 뜨거워져 간빙기가 시작되고 반대로 잠잠해지면 지구가 추워져 빙하기가 오는 식이다. 아마 중세 말에는 활발한 태양 흑점활동이 있었고, 그에 따른 기온상승도 있었던 모양이다.

중세 온난기는 식량 생산의 증가를 가져왔다. 날씨가 따듯하면 아무래도 농작물이 자라기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량이 많아지자 전 지구적으로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학자들은 11세기부터 흑사병이 시작되기 직전인 14세기까지 유럽의 인구가 최대 1억 명까지 증가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전에 비해 인구가 3배나 증가한 셈이다. 이는 당연히 아시아도 마찬가지였는데, 중국 송나라의 경우 12세기 4500만 명 규모였던 인구가 13세기에는 8000만 명 수준까지 올라갔다. 

그렇다면 중세 온난기와 흑사병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흑사병은 카파에 시체를 던지던 몽골인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몽골인들이 살던 초원을 살펴봐야 한다. 지금도 몽골은 아름답게 펼쳐진 초원으로 유명하지만, 14세기 몽골의 초원은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다. 식물학자들이 몽골의 오래된 나무들의 나이테를 조사해 본 결과 14세기는 지난 1천 년동안 가장 강수량이 많았던 시기라고 한다. 메마른 초원이 아닌 풍요가 가득한 초원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징기스칸과 몽골 제국의 탄생도 중세 온난기 덕분이었을지 모른다. 인구증가 뿐 아니라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몽골 제국의 핵심 전력은 기마병이었는데 몽골의 초원에서 풀이 어마어마하게 자라준 덕분에 다수의 말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초원의 축복은 몽골에 사는 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먹을 것이 풍부해지자 초원에 사는 쥐들의 숫자는 빠르게 늘어났다. 그런데 이 쥐들 중에 '검은 쥐'라는 종이 있었다고 한다. 이 '검은 쥐'들은 페스트 균, 바로 흑사병의 원인이 되는 균을 가지고 있는 쥐들이었다. 그런데 이 쥐들이 숫자가 불어나면서 서식지를 벗어나 인간이 사는 지역까지 침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쥐들의 몸에 기생하던 벼룩이 인간의 몸에 옮겨 타면서 페스트 균이 인간에게도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쥐벼룩 가설'이다.


중세 온난기의 명과 암

이것이 중세 온난기에 유럽인에게 닥친 재앙, 흑사병의 창궐에 대한 추론이다. 저 멀리 있는 태양의 변덕이 돌고 돌아 인간사회에 이토록 큰 재앙을 일으켰다고 생각하면 어쩐지 먹먹하게 느껴진다. 아니면 대자연의 섭리 앞에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조금 넓은 관점에서 보면 중세 온난기는 르네상스가 태어나게 만드는 양분의 역할을 했다고도 볼수 있다. 우선 르네상스의 발단이 된 십자군 전쟁 자체가 중세 온난기의 영향으로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시기에 갑자기 유럽인구가 급증하자 이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터전이 필요했고 '종교 전쟁'이라는 명분으로 찾아 동쪽으로 떠난 것이 십자군 전쟁의 본질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십자군에 참여한 많은 병사들은 원정을 갔다가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고 중동 지역에 눌러 앉은것도 사실이니까. 

그리고 전반적으로 유럽의 인구가 증가한 것은 이 시기에 도시문화를 발달시켰다. 당시 유럽의 도시들이 발달한 것을 알 수 있는 사례는 도시들아 앞다투어 고딕 성당을 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캔터베리 대성당, 1174년 고딕식으로 재건 시작

프랑스 - 생드니 수도원 교회 - 1122년

이탈리아 - 피사의 산타 마리아 델라 스피나 - 1230년

영국 - 캔터베리 대성당 - 1174년

벨기에 - 리에주 대성당 - 1189년

스페인 - 레온 대성당 - 1205년

독일 - 마그데부르크 대성당 - 1209년


위는 나라별로 이시기에 세워졌던 대표적인 고딕성당들이다. 많은 자원가 인력을 필요로하는 대성당이 이 시기에 많이 세워지기 시작한것은 그만큼 도시의 경쟁력이 강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애초에 르네상스같은 문화운동이 일어나려면 기본적으로 대도시가 발달해야 한다. 적은 인구로는 아무래도 큰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 많아져야 인재 풀이 넓어지고 그 중에 뛰어난 사람들, 소위 '천재들'도 나타날 수 있다. 

이렇게 중세 온난기는 나쁜 결과로는 흑사병을 일으켰지만, 한편으로는 르네상스의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십자군 전쟁, 몽골 제국의 침략, 르네상스의 탄생, 흑사병의 창궐,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 시기는 분명 격동의 시기였다. 그런데 중세 온난기는 묘하게도 지금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우리는 급격한 지구 온난화 현상을 겪고 있는데 그에 따라 1900년에 16억 이었던 인구가 최근 80억까지 불어나며 전례 없는 급격한 인구 증가를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우리는 전대미문의 '코로나 사태', 팬데믹을 겪었다. 그런데 한편 인류는 컴퓨터, 스마트폰, AI 같은 지금껏 인류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기술혁신을 이루어 내기도 했다. 역사는 다시한번 돌고 도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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