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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신영 Feb 09. 2024

십자군의 배신, 콘스탄티노플 함락

지난 100년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지 벌써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중동의 사막에서는 날카로운 칼과 방패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정복 이후 예루살렘의 평화는 짧게 이어졌을 뿐입니다. 이슬람의 반격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에서는 살라딘이라는 영웅이 등장합니다. 살라딘은 기독교인들이 보기에도 존경스러울 만큼 덕과 지혜를 모두 갖춘 뛰어난 이슬람의 군주였습니다. 결국 이슬람 세력은 살라딘의 지휘 아래 다시 예루살렘을 재 탈환합니다. 단, 살라딘은 예루살렘의 재탈환 과정에서 십자군이 보여주었던 대학살 같은 만행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실력과 인품, 양쪽 모두에서 승리했다고 해야 할까요.

여전히 '신의 아들이 태어난 도시'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교황은 계속 2차, 3차 십자군 원정을 보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공격은 살라딘에게 다시 막혀 버립니다. 그럼에도 교황은 지치지도 않았는지 다시 한번 십자군을 보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렇게 해서 4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4차 십자군에서 르네상스의 불꽃이 피어납니다. 재미있는 점은 4차 십자군은 총 8차에 걸친 전체 십자군 원정 중에서 가장 엉망진창이었던 십자군으로 유명했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그 엉망진창인 가운데서 르네상스의 불씨가 피어난 것이죠.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당시에는 아무리 봐도 우연이지만 지나 놓고 보면 필연처럼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엉망진창이었던 4차 십자군과 르네상스의 탄생도 그러합니다. 두 사건의 연관성이 사건이 그저 '우연'에 불과한지 아니면 거대한 시대흐름 속의 '필연'이었는지 한번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베네치아의 은화, 베네치아 공화국의 원수(Doge) 엔리코 단돌로(왼쪽)와 베네치아의 수호성인 성 마가(오른쪽)


4차 십자군

4차 십자군이 엉망진창이었던 이유는 베네치아 공국이 개입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우 같았던 베네치아 공국의 수장 단돌로의 역할이 컸습니다. 단돌로는 4차 십자군 당시 이미 95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맞지않게 얄밉고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선 4차 십자군에서 베네치아가 개입하게 된 이유는 십자군 측이 배를 필요로 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군은 1차, 2차 때 육로로 이슬람을 침공했었는데, 육로로 침공할 경우 시간도 오래 걸리고 가는 길에 이슬람의 기습을 당할 위협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 것이죠. 그래서 3차 십자군 때부터는 해로로 이동하는 전략을 택하게 됩니다. 당시 베네치아는 바다의 무역으로 성장한 도시였던만큼 지중해에서는 배 건조능력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에 십자군에 참여하게 됩니다. 

4차 십자군이 선포되고, 교황의 명에 따라 베네치아 공국의 수장 단돌로는 4차 십자군을 위한 어마어마한 선단을 구축합니다. 단돌로의 지휘아래 베네치아의 국력을 총 동원해서 바다가 빛날 만큼 화려한 대규모의 선단을 완성한 것이죠. 총 200척에 달하는 최고급 선단이 지중해의 하얀 햇살을 받으며 떠 있는 풍경은 이슬람 사람들이 봐도 감동할 만큼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단돌로는 늙은 몸을 이끌고 본인이 직접 배에 승선해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결정합니다. 거대한 선단을 운영하려면 배를 다룰 줄 아는 지도자가 필요했으니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베네치아, 13세기의 삽화

한 가지 문제

그런데 막상 최고급 선단을 구축해 놓고 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대규모 선단의 비용을 대는 일이 만만치 않았던 것입니다. 원래 계획은 4차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유럽의 영주들이 돈을 모아서 베네치아에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출발하기 위해 각 유럽에서 영주들이 모여보았더니 돈을 얼마 못 가져온 영주도 있었고 개인 사정 때문에 아예 십자군에 오지 못한 영주들도 많았습니다. 결국 돈을 닥닥 긁어서 모아봤지만 베네치아에게 지불해야 할 비용 중 절반도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입장이었던 단돌로는 입장이 난처했습니다. 베네치아의 국력을 총 동원해서 지난 1년간 배를 만들어놨는데 갑자기 4차 십자군 측에서 돈 없다고 배 째라는 식으로 나오다니요. 결국 단돌로는 출정 거부를 선언합니다. 돈을 주지 않으면 아예 배를 띄울 수 없다고 잘라 말한 것이죠. 교황이 중재를 시도했지만 아무리 교황이 말해도 단돌로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교황이라고 해도 베네치아 사람들은 돈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칼 같았습니다. 무역업으로 성장한 나라였으니 돈 계산에 철저했던 것이죠.  


비극의 시작

여기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4차 십자군은 돈 때문에 출발도 하지 못한 채 베네치아 항구에 한동안 발이 묶여있어야 했습니다. 아마 철 갑옷을 입은 수많은 십자군들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항구에 퍼질러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이때 눈치를 보던 단돌로가 한 가지를 제안합니다. 베네치아 옆에 '자라'라는 동네가 있는데 여기에서 자꾸 우리 베네치아의 무역을 방해한다, 그러니까 십자군이 자라를 정복해서 베네치아에 넘겨준다면 모자란 뱃값이 절반을 탕감해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4차 십자군은 혼란에 빠집니다. 빚의 절반이나 탕감해 준다고 했으니 구미가 당길 만도 한데 왜 십자군이 혼란에 빠졌을까요? 왜냐하면 '자라'는 같은 기독교인들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십자군은 이슬람을 공격하고 기독교를 보호하기 위한 모인 '신성한 목적'의 군대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그런 십자군에게 같은 기독교인들을 공격하라니요. 분명 말도 안 되는 요구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십자군은 지금 힘들게 모였는데 돈이 없어서 출발조차 못해보고 항구에 쭈그리고 앉아 있으니 고민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십자군 수뇌부는 결국 '자라'를 공격하기로 결심합니다. 어쩌면 작은 도시니까 그 정도는 신께서 눈감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을 공격하기 위해 결성된 '신의 군대'는 같은 기독교인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출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결국 자라에 살던 많은 기독교인들은 같은 기독교인인 4차 십자군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엉망진창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죠. 문제는 이 엉망진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편지

여전히 4차 십자군은 뱃값을 전부 지불하지 못했습니다. 여우 같은 단돌로는 자라를 정복해 주면 '절반'만 탕감해 준다고 말했지 '전부'를 탕감해 준다고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우연인지 필연인지 편지 한 장이 십자군 수뇌부로 도착합니다.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황태자 알렉시오스로부터 온 편지입니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삼촌이 반란을 일으켜서 우리 아버지가 왕위를 빼앗겼다, 아버지는 끔찍하게도 두 눈이 뽑힌 채로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 있다, 십자군이 얼른 와서 반란을 진압해 주고 악마 같은 삼촌을 무찔러 달라, 그리고 적통인 우리 아버지를 구해달라, 마침 십자군이 돈이 없어서 딱하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만약 반란을 진압해 준다면 우리 동로마제국에서는 뱃값 전부를 지불해 주겠다, 그리고 그 뱃값의 두 배가 넘는 20만 마르크 금화를 추가로 보상으로 주겠으며 거기에 더해 십자군에 참여할 병력과 말도 제공해 주겠다, 는 내용입니다. 

수뇌부는 다시 한번 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자라 점령 때는 눈 딱 감고 한번 나쁜 짓을 한 느낌이었지만 이번에는 자라때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습니다. 자라는 작은 기독교 도시였지만 콘스탄티노플은 동쪽에서 가장 큰 기독교인들의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신의 군대'가 동쪽에서 가장 큰 기독교인들의 도시를 공격한다니.

십자군 수뇌부는 이번에는 자라 때와는 달리 내부에서 상당한 의견다툼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일부 십자군 기사들은 화를 내며 아예 짐을 싸서 유럽으로 돌아가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십자군 입장에서 여전히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네치아에 진 빚을 값을 돈이 없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4차 십자군은 돈 때문에 본격적인 출발도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십자군이 고민하는 와중에, 다시 한번 베네치아의 여우 단돌로가 꼬리를 흔들며 나섭니다. 우리 베네치아는 공격에 찬성이다, 비록 기독교인들의 도시이기는 하지만 '반란군 진압'이라는 분명한 대의명분이 있고, 무엇보다 나도 빨리 십자군을 떠나고 싶은데 그깟 빚 때문에 지금까지 십자군을 떠나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 빨리 동로마제국을 구출하고 돈도 받고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자!

단돌로가 진심으로 십자군 원정을 빨리 떠나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돈 때문에 그랬던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봐도 후자 쪽인 듯 하지만 어쨌든 당시 50대 50으로 팽팽했던 찬반 의견은 단돌로의 개입으로 추가 급격하게 기울게 됩니다. 결국 4차 십자군은 동쪽에서 가장 큰 기독교의 도시, 이슬람에 둘러쌓인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기독교인의 도시로 1000년을 버텨왔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 십자군, 15세기 삽화


막장 중의 막장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은 애초에 야만족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방어용 목적으로 세워진 도시였고 규모도 동쪽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때문에 십자군의 역량을 총 동원한 다고 해도 쉽게 점령할 수 없는 도시였습니다. 십자군이 공격을 시작했지만 결국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은 10개월에 걸쳐 지루하게 진행됩니다. 

하지만 끈질긴 십자군의 공격 끝에 결국 10개월 만에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당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악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10개월이 지나는 동안 십자군 병사들에게는 증오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같은 기독교인이지만 10개월에 걸친 공방전은 서로를 미워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죠.

그리고 처음에 십자군에게 편지를 보냈던 황태자 알렉시오스와 두 눈이 뽑힌 채 지하에 갇혀있던 황제는 전쟁 와중에 암살을 당해버렸습니다. 십자군 입장에서는 그토록 고생하며 10개월 동안 싸웠지만 정작 계약의 당사자가 죽어버렸으니 20만 마르크 금화를 과연 받을 수 있을까 초조해지기 시작했던 것이죠.

결국 이 모든 상황이 겹쳐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 점령 후 악랄한 복수와 약탈을 시작합니다. 이미 복수심과 돈에 눈이 돌아간 십자군은 교황의 파문의 위협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모양입니다. 약탈에 대한 한 역사가의 기록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3일 동안 그들은 고대 야만족들조차 깜짝 놀랄 만큼 엄청난 규모의 살인, 강간, 약탈, 파괴를 자행했습니다. 십자군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은 고대와 비잔틴 미술을 전시하는 박물관이자 약탈의 백화점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나마 베네치아 인들은 약탈한 예술품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대부분을 보존했지만, 다른 십자군들은 무차별적으로 예술품들을 파괴했습니다. 그들이 파괴를 하지 않을 때는 잠시 기분전환을 위해 포도주를 마시거나, 수녀들을 강간하거나, 성직자들을 살해할 때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기야 소피아 성당의 은 성상과 이콘화, 성서를 파괴하고, 교회의 성스러운 그릇에 포도주를 마시면서 같이 놀던 창녀를 교회 대주교의 권좌에 앉히고 놀았습니다. 수세기에 걸쳐있던 서쪽 기독교인들과 동쪽 기독교인들의 갈등은 콘스탄티노플의 정복, 그리고 끔찍한 학살로 인해 그 정점을 찍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 살던 기독교도들은 한탄할 뿐이었습니다. 차라리 이슬람인들이 도시를 점령했다면 이토록 잔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한 총금액은 약 90만 마르크 금화에 이른다고 합니다. 공식적으로 받은 금액은 단돌로를 중심으로 한 베네치아 인들이 15만 마르크를 받았고, 십자군은 5만 마르크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수십만 마르크의 금화는 아마도 십자군 병사들이 약탈하면서 뒷돈으로 챙겼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4차 십자군은 그렇게 막장 중에 막장짓을 저지르고 돈도 두둑하게 챙기고는 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최소한의 부끄러움은 있었는지 스스로 먼지처럼 흩어져 버린 것이죠. 

하지만 여우 같았던 단돌로는 국익을 위해 헌신했던 최고의 지도자로, 적어도 베네치아 내에서는 최고의 평가받게 됩니다. 베네치아 공국은 4차 십자군을 통해 얻었던 이익을 바탕으로 이후 '지중해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베네치아 역사상 최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했으니까요. 



피리부는 사나이, 케이트 그린어웨이(1846-1901)의 일러스트


피리 부는 사나이

덧붙이자면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는 이 4차 십자군의 막장짓을 비판하는 내용의 우화라는 설이 있습니다. 4차 십자군이 막장으로 끝나고 얼마 뒤 유럽에는 갑자기 '소년 십자군'이 일어나는데, 동화의 저자는 같은 시대에 일어난 이 두 가지 끔찍했던 사건을 연결 지어 세태를 비판하려고 했다는 것이죠.

'소년 십자군'은 무엇일까요. 4차 십자군의 한심한 결과에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한탄하고 있을 무렵, 프랑스에서는 '스테팡'이라는 소년이 등장합니다. 이 소년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를 직접 전달 받았다고 하는 엉뚱한 소년이었는데 어쨌든 한 무리의 어린이들이 그를 따라 십자군에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니콜라이'라는 소년이 마찬가지로 십자군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이 소년 주변에도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는데, 이 소년은 자기를 따라오면 모세가 바다를 가른 것처럼 자신도 바다를 가르고 예루살렘까지 직통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마르세유에 도착한 니콜라이는 모세처럼 막대기로 바다를 첨벙 첨벙 두번 쳤습니다. 바다가 두개로 갈라졌을까요? 니콜라이도 내심 '이게 될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어쨌든 당연히 바다는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스테팡과 니콜라이를 따라갔던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망가뜨린 십자군 정신을 자신들이 바로 세워야겠다는 '순수한 마음'이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순수한 사람일수록 더 맹목적으로 변하기도 쉬운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소년 십자군은 훨씬 끔찍한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양 떼 같은 이 소년 소녀들을 악랄한 어른 노예상들이 '예루살렘까지 태워주겠다'라고 속여서는 그대로 배에 태워서 중동으로 팔아넘겨버렸기 때문입니다. 피리부는 사나이를 쫒아갔던 아이들처럼 그대로 지중해에서 사라져버린 것이죠.

동화 속 인물들과 정확히 일대일 대응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관계를 연결 지어보면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 - 신의 명령 

쥐를 쫓아준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돈을 주지 않았던 못된 주민들 - 돈에 얽혀있었던 단돌로와 4차 십자군

피리 부는 사나이와 함께 사라져 버린 마을 아이들 - 희생된 소년 십자군 


아마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동화의 저자는 4차 십자군의 악행 이후 갑자기 소년 십자군이 등장하는 현상을 보면서 이것이야말로 신의 분노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4차 십자군의 악랄함에 분노한 신이 아이들을 데려가는 것으로 기독교인들에게 경고를 내렸다는 것이죠.



<콘스탄티노플 경기장을 장식하던 '승리의 마차'>


르네상스의 씨앗

이렇게 4차 십자군과 콘스탄티노플의 파괴와 약탈로 끝을 맺게 됩니다. 그리고 서양사에서 가장 끔찍했던 도시 파괴의 역사로 남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규모의 약탈과 파괴의 과정에서 '지성의 탄생', 르네상스의 볼꽃이 피어납니다. 

우선 콘스탄티노플에 잠자고 있던 수많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예술품들이 십자군에 의해 약탈되어 서방으로 이동합니다. 콘스탄티노플은 동방에서도 가장 역사가 깊은 대 도시였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양의 예술품들이 있었던 것이죠. 이때 약탈되어 서쪽으로 이동되었던 작품 중 하나가 콘스탄티노플 경기장을 장식하던 <승리의 마차Triumphal Quadriga> 입니다. 이 작품은 지금도 베네치아의 광장에 가면 복제품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약탈되어 넘어온 고대의 예술품들을 보면서 '우리 조상들이 이런 것도 만들었구나'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유럽인들도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이런 아름다운 예술들이 많이 만들었지만, 기독교 사회로 바뀌고 나서부터는 딱딱한 종교 미술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예술품들이 넘어오는 것으로는 변화가 생기기 어렵습니다. 결국 '사람'이 중요한데, 콘스탄티노플이 파괴되고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살던 지식인들이 서방으로 대거 넘어오게 됩니다. 도시가 엉망이 되어 자신들이 살 집이 없어져버렸으니 살 곳을 찾아 서쪽으로 넘어온 것이죠. 동쪽에는 항상 이슬람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으므로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동방의 지식인들 콘스탄티노플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만큼 여전히 고대 로마식 사고방식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동방과 서방을 비교해 보면 과학이나 수학은 비교가 안될 만큼 동방이 더 우세했다고 합니다. 중세의 서유럽 귀족들은 자기 이름조차 쓸 줄 모를 만큼 멍청한 경우가 많았는데, 중세의 귀족들은 평생 하는 일이라고는 싸움질이었기 때문에 그저 칼만 잘 갈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이렇게 갈곳 없어진 동로마의 지식인들이 서쪽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기독교 세계관에 갇혀있던 서방 쪽 사람들의 생각을 조금씩 깨우게 됩니다. 1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그리스 로마의 '지성'이 콘스탄티노플의 피난을 통해 다시 서방에 이식되기 시작한 것이죠. 


1204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플을 악랄하게 파괴하고 주민들을 살해하던 4차 십자군의 병사들은 자신들이 르네상스의 불꽃을 피울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폭력과 강간, 그리고 약탈, 그렇게 순간의 쾌락을 즐겼을 뿐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행위는 르네상스의 씨앗이 됩니다. 

역사가들 입장에서는 역사가 매번 이런식으로 흘러가니 인간사를 '우연의 연속'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역사적 필연'으로 봐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겠죠. 어쨌든 르네상스의 불꽃은 이렇게 콘스탄티노플의 폐허 위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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