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반격
1차 십자군 원정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여전히 중동의 사막에는 칼과 방패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본격적인 이슬람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오히려 전쟁은 더 커졌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반격은 당연한 대응이었다. 기독교인들 입장에서는 지금껏 이어져온 이슬람의 침략에 대한 정당한 복수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이슬람 입장에서는 그저 누군가 자신들의 땅에 침략해 들어온 것 뿐이다. 인간은 원래 다른 사람들의 속내까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법이다.
이슬람의 반격은 중동의 군주 살라딘Salah ad-Din Yusuf ibn Ayyub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살라딘은 기독교인들이 보기에도 존경스러울 만큼 덕과 지혜를 모두 갖춘 뛰어난 지도자였다. 그는 십자군의 공격으로 흩어져 있던 이슬람 세력을 자신 지휘 아래 재집결시켰고 탁월한 전략과 전술로 여러 전투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한 승리를 거둔다. 그리고 1187년, 88년만에 예루살렘을 다시 이슬람의 손으로 돌려놓게 된다. 살라딘은 예루살렘의 재탈환 과정에서 88년전 십자군이 보여주었던 학살 같은 만행은 결코 저지르지 않았다. 실력과 인품, 양쪽 모두에서 승리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예루살렘을 다시 빼앗긴 기독교 측은 여전히 '성도 탈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최초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우르바누스 2세는 이미 한참 전에 죽었지만 후임으로 등장한 교황들은 연이어 계속 2차, 3차 십자군 원정을 보낸 것이다. 특히 3차 십자군에는 초월적인 전투력으로 유명한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Richard the Lionheart가 등장하며 전선을 기독교측에게 유리하게 이끌기도 했지만 예루살렘 재탈환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영국 본토에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성도 탈환'은 여전히 미완의 상태로 남게된다. 그래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다시 한번 십자군을 보내야겠다고 결심한다. 1201년, 그렇게 다시 4차 십자군 원정이 결성되었다.
그런데 4차 십자군은 총 8차에 걸친 십자군 원정 가운데서 가장 엉망진창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앞으로 기술하겠지만 4차 십자군은 아군의 등에 칼을 꽂는 만행을 계속 저지르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그렇게 엉망진창인 가운데서 이상하게도 르네상스의 불씨가 처음으로 피어나기 시작 했다는 점이다. 엉망진창이었던 4차 십자군에서 어떻게 르네상스의 불씨가 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
4차 십자군
4차 십자군이 엉망진창이 된 이유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지중해에서 무역도시로 성공한 베네치아는 당시에도 냉철한 장사꾼의 나라로 유명했다. 현대의 기업들처럼 오로지 이익을 위해 모든 판단을 내리는 나라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베네치아는 어찌보면 '성지 탈환'같은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있던 십자군 원정과는 애초에 성격이 맞지 않는 집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랬던 베네치아가 4차 십자군 개입하게 된 이유는 십자군 측이 배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십자군은 1차, 2차 때 육로로 이슬람을 침공했었는데, 육로로 침공할 경우 시간도 오래 걸리고 가는 길에 이슬람의 기습을 당할 위협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따라서 3차 십자군 때부터는 해로로 이동하는 것이 기본 전략이 된다. 당시 베네치아는 바다의 무역으로 성장한 도시였던만큼 지중해에서는 배 건조능력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에 십자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 4차 십자군이 선포되고, 교황의 명에 따라 베네치아 공국의 수장 단돌로는 4차 십자군을 위한 대규모의 선단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럽의 왕과 영주들은 베네치아가 1년동안 배를 준비하는 동안 각자 나라에서 준비를 마치고 다음 해 베네치아에 집결하기로 교황 앞에 맹세했다.
돈 문제
1202년, 드디어 유럽의 영주들과 기사들은 베네치아로 모였다. 베네치아는 단돌로의 지휘아래 지난 1년동안 모든 국력을 총 동원해서 화려한 대규모의 선단을 완성해 놓았다. 총 200척에 달하는 최고급 선단이 지중해의 하얀 햇살을 받으며 떠 있는 풍경은 아마 이슬람 사람들이 봐도 아름답다고 말할 만큼 웅장했을 것이다. 다만 이 정도의 거대한 선단을 한번에 움직이려면 숙련된 지휘관이 필요했기 때문에 나이가 많지만 베네치아의 수장 단돌로 본인이 직접 배에 승선해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결정한다. 이렇게 4차군을 떠나기 위한 준비가 모두 끝났다.
그런데 막상 최고급 선단을 구축해 놓고 출발하려고 보니 문제가 있었다. 바로 돈 문제였다. 원래 계획은 일단 베네치아 측에서 대규모 선단을 미리 구축해 놓고나면 4차 십자군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유럽의 영주들이 돈을 모아와서 베네치아에게 비용을 갚아주는 것이었다. 일종의 '후불제'였던 셈이다. 그런데 막상 유럽에서 온 영주들이 돈을 모아보니 액수가 부족했다. 돈을 얼마 못 가져온 영주도 있었고 아예 개인 사정 때문에 십자군에 참여하지 못한 영주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결국 있는 돈을 다 긁어서 모았지만 베네치아에게 지불해야 할 비용 중 절반도 채워지지 않았다.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입장이었던 단돌로는 입장이 난처했다. 베네치아의 국력을 총 동원해서 지난 1년간 배를 만들어놨는데 갑자기 4차 십자군 측에서 돈이 없다고 나왔으니까. 결국 단돌로는 출정 거부를 선언한다. 돈을 주지 않으면 아예 배를 띄울 수 없다고 잘라 말한 것이다. 교황이 중재를 시도했지만 아무리 교황이 말해도 단돌로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무역으로 성장한 베네치아 사람들은 이런 스타일로 유명했는데, 아무리 '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교황이 상대라고 해도 돈 문제가 걸리면 무서울만큼 냉철하게 대했던 것이다.
비극의 시작
여기서 비극이 시작된다. 4차 십자군은 돈 때문에 출발도 하지 못한 채 베네치아 항구에 한동안 발이 묶여있어야 했다. 아마 번쩍번쩍 빛나는 갑옷을 입은 수많은 십자군의 기사들은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항구에 도란 도란 모여 앉아 있었을 것이다. 이때 눈치를 보던 단돌로가 한 가지를 제안한다. 가까운 곳에 '자라'라는 도시가 있는데 이 도시 사람들은 전부터 우리 베네치아의 무역을 계속 방해해왔다, 그러니까 십자군이 자라를 정복해서 베네치아에 넘겨준다면 모자란 뱃값이 절반을 탕감해 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4차 십자군은 갑자기 혼란에 빠진다. 빚의 절반이나 탕감해 준다고 했으니 구미가 당기기는 했지만 '자라'는 분명 같은 기독교인들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십자군은 어디까지나 이슬람을 공격하고 성도를 탈환하기 위해 모인 신성한 목적의 군대라는 점이다. 그런데 그런 십자군에게 같은 기독교인들의 도시를 공격하라니, 분명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십자군 기사들은 지금 어렵게 준비를 해서 모였는데 돈이 없어서 출발조차 못해보고 항구에 앉아 있으니 고민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고민 끝에 십자군 수뇌부는 결국 '자라'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어쩌면 작은 도시니까 그 정도는 신께서 눈감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해서 이슬람을 공격하기 위해 결성된 신의 군대는 같은 기독교인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4차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게 된다. 결국 자라에 살던 많은 기독교인들은 같은 기독교인인 십자군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엉망진창 원정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문제는 이 엉망진창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편지
자라 정복은 성공 했지만 여전히 4차 십자군은 뱃값을 전부 지불하지 못했다. 여우 같은 베네치아의 단돌로는 자라를 정복해 주면 '절반'만 탕감해 준다고 말했지 '전부'를 탕감해 준다고 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우연인지 필연인지 편지 한 장이 십자군 수뇌부로 도착했다.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황태자 알렉시오스로부터 온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지금 삼촌이 반란을 일으켜서 우리 아버지가 왕위를 빼앗겼다, 아버지는 끔찍하게도 두 눈이 뽑힌 채로 지하 감옥에 감금되어 있다, 십자군이 얼른 와서 반란을 진압해 주고 악마 같은 삼촌을 무찔러 달라, 그리고 적통인 우리 아버지를 구해달라, 마침 십자군이 돈이 없어서 딱하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만약 반란을 진압해 준다면 우리 동로마제국에서는 뱃값 전부를 지불해 주겠다, 그리고 그 뱃값의 두 배가 넘는 20만 마르크 금화를 추가로 보상으로 주겠으며 거기에 더해 십자군에 참여할 병력과 말도 제공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수뇌부는 다시 한번 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자라 점령 때는 눈 딱 감고 한번 나쁜 짓을 한 느낌이었지만 이번에는 자라 때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자라는 작은 기독교 도시였지만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라는 이름에서도 느껴지듯이 동쪽에서 가장 큰 기독교인들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신의 군대'가 동쪽에서 가장 큰 '신의 도시'를 공격한다니, 이건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십자군 수뇌부는 이번에는 자라 때와는 달리 내부에서 상당한 의견다툼이 있었다. 심지어 일부 십자군 기사들은 화를 내며 아예 짐을 싸서 고향으로 돌아가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십자군 수뇌부 입장에서는 여전히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베네치아에게 진 빚이 여전히 절반이나 남아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돈때문에 여전히 4차 십자군은 본격적인 출발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그렇게 십자군들이 고민하는 와중에, 다시 한번 베네치아의 여우 단돌로가 꼬리를 흔들며 나섰다. 우리 베네치아 공화국은 공격에 찬성이다, 비록 기독교인들의 도시이기는 하지만 '반란군 진압'이라는 분명한 대의명분이 있고, 무엇보다 나도 빨리 십자군을 떠나고 싶은데 그깟 빚 때문에 지금까지 우리 신성한 십자군들이 떠나지도 못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빨리 동로마제국의 황제와 황태자를 구출하고 돈도 받고 십자군 원정을 시작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단돌로가 진심으로 십자군 원정을 빨리 떠나 '성도 탈환'을 이루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돈을 빨리 받고 싶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래도 후자 쪽이라고 봐야할 듯 하지만 어쨌든 당시 50대 50으로 팽팽했던 찬반 의견은 단돌로의 개입으로 추가 급격하게 기울게 된다. 결국 4차 십자군은 동쪽에서 가장 큰 기독교의 도시, 이슬람의 공격에도 지금까지 꾿꾿하게 버텨왔던 동쪽 기독교인들의 심장,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막장 중의 막장
콘스탄티노플은 4세기에 최초 도시를 세웠을 때 로마인들이 야만족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방어용 목적으로 세운 도시였고 규모도 동쪽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때문에 십자군의 역량을 총 동원한 다고 해도 쉽게 점령할 수 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때문에 십자군이 막상 공격을 시작했지만 콘스탄티노플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고 공방전은 10개월에 걸쳐 지루하게 진행된다.
하지만 끈질긴 십자군의 공격 끝에 결국 10개월 만에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당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악의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10개월이 지나는 동안 십자군 병사들의 마음 속에는 콘스탄티노플 방어군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기독교인들이지만 10개월동안 서로 공격하고 죽이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해 미워하는 감정이 싹 튼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처음에 십자군에게 편지를 보냈던 황태자 알렉시오스와 지하에 갇혀있던 황제는 전쟁 와중에 암살을 당해버렸다. 십자군 입장에서는 그토록 고생하며 10개월 동안 싸웠지만 정작 계약의 당사자가 죽어버렸으니 20만 마르크 금화를 과연 받을 수 있을까 초조한 마음까지 생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상황이 겹쳐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 점령 후 악랄한 복수와 약탈을 시작했다. 이미 복수심과 돈에 눈이 돌아간 십자군 수뇌부와 병사들은 교황의 파문의 위협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약탈에 대한 한 역사가의 기록이 있다.
"3일 동안 그들은 고대 야만족들조차 깜짝 놀랄 만큼 엄청난 규모의 살인, 강간, 약탈, 파괴를 자행했습니다. 십자군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은 고대와 비잔틴 미술을 전시하는 박물관이자 약탈의 백화점으로 전락했습니다. 그나마 베네치아 인들은 약탈한 예술품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대부분을 보존했지만, 다른 십자군들은 무차별적으로 예술품들을 파괴했습니다. 그들이 파괴를 하지 않을 때는 잠시 기분전환을 위해 포도주를 마시거나, 수녀들을 강간하거나, 성직자들을 살해할 때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기야 소피아 성당의 은 성상과 이콘화, 성서를 파괴하고, 교회의 성스러운 그릇에 포도주를 마시면서 같이 놀던 창녀를 교회 대주교의 권좌에 앉히고 놀았습니다. 수세기에 걸쳐있던 서쪽 기독교인들과 동쪽 기독교인들의 갈등은 콘스탄티노플의 정복, 그리고 끔찍한 학살로 인해 그 정점을 찍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 살던 기독교도들은 한탄할 뿐이었습니다. 차라리 이슬람인들이 도시를 점령했다면 이토록 잔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
마지막 문장이 인상깊다. 십자군이 이 때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한 총금액은 약 90만 마르크 금화에 이른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받은 금액은 단돌로를 중심으로 한 베네치아 인들이 15만 마르크를 받았고, 십자군은 5만 마르크였다. 그리고 나머지 수십만 마르크의 금화는 아마도 십자군 병사들이 약탈하면서 뒷돈으로 챙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4차 십자군은 그렇게 막장 중에 막장짓을 저지르고 돈도 두둑하게 챙기고는 그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최소한의 부끄러움은 있었는지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이 끝나고 스스로 먼지처럼 흩어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4차 십자군은 십자군 역사상 최악의 원정이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하지만 여우 같았던 단돌로는 오히려 베네치아 내에서 국익을 위한 선택을 했던 최고의 지도자로 평가받게 된다. 실제로 베네치아 공화국은 4차 십자군을 통해 얻었던 이익을 바탕으로 이때부터 '지중해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베네치아 공화국 역사상 최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피리 부는 사나이
덧붙이자면 동화 '피리 부는 사나이'는 최악이었던 4차 십자군을 비판하는 내용의 우화라는 설이 있다. 4차 십자군의 한심하다 못해 참혹한 결말을 전해들은 온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한탄하고 있을 무렵, 프랑스에서는 스테팡이라는 소년이 등장했다. 이 소년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편지를 직접 전달 받았다고 하는 엉뚱한 소년이었는데, 그는 스스로 '어린이 십자군'을 결성해서 예루살렘으로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무리의 유럽 어린이들이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 소년을 따라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로 니콜라이라는 소년이 등장하여 '어린이 십자군'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 소년 주변에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는데, 이 소년은 자기를 따라오면 자신이 모세가 바다를 가른 것처럼 바다를 가르고 예루살렘까지 직통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무리와 함께 마르세유에 도착한 니콜라이는 모세처럼 막대기로 바다를 첨벙 첨벙 두번 쳤다. 바다가 갈라졌을까? 당연히 바다는 갈라지지 않았다.
4차 십자군 직후에 갑자기 '어린이 십자군'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유럽인들 사이에는 그 무엇보다 순수해야할 십자군이 타락한 것에 대한 절망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런 어른들의 절망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어린이들이 직접 나서기 시작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망가뜨린 십자군 정신을 자신들이 바로 세워야겠다는 '순수한 마음'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순수한 사람일수록 더 맹목적으로 변하기도 쉬운 법이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된 소년 십자군은 훨씬 끔찍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양 떼 같은 소년 소녀들이 항구에 도착하자, 악랄한 어른들이 예루살렘까지 태워주겠다라고 속여서는 그대로 배에 태워서 중동으로 팔아넘겨버린 것이다. 어른들은 이슬람 노예사냥꾼들이 하던 짓을 기독교인 어린이를 상대로 자행했다. 이 어린이들은 그대로 지중해에서 사라져버다.
그리고 얼마 뒤 '피리부는 사나이'라는 동화가 민중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동화 속 인물들과 정확히 일대일 대응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관계를 연결 지어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피리 부는 사나이 - 신의 명령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쥐들을 쫓아주면 돈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돈을 주지 않았던 마을 주민들 - 돈에 얽혀있었던 베네치아의 단돌로와 4차 십자군
피리 부는 사나이와 함께 사라져 버린 마을 아이들 - 희생된 소년 십자군
아마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동화의 저자는 4차 십자군의 악행 이후 갑자기 소년 십자군이 등장하고, 결국 노예로 팔려가는 비극을 목격하고는 이것이야말로 신의 분노라고 생각했던게 아닐까. 4차 십자군의 악랄함에 분노한 신이 아이들을 데려가는 것으로 타락한 십자군에게 경고를 내렸다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불씨
이렇게 4차 십자군과 콘스탄티노플의 끔찍한 파괴와 약탈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서양사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참혹했던 도시 파괴의 한 사례로 남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규모의 약탈과 파괴의 과정에서 르네상스의 불씨가 피어났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우선 콘스탄티노플에 잠자고 있던 수많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예술품들이 십자군에 의해 약탈되어 서방으로 이동했다. 콘스탄티노플은 동방에서도 가장 역사가 깊은 대 도시였던 만큼 어마어마한 양의 예술품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 약탈되어 서쪽으로 이동되었던 작품 중 하나가 과거 콘스탄티노플의 대 경기장을 장식하던 <승리의 마차Triumphal Quadriga> 다. 이 작품은 지금도 베네치아의 광장에 가면 복제품을 볼 수 있다. 아마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약탈되어 넘어온 고대의 예술품들을 처음 보면서 '우리 조상들이 과거에는 이런 것도 만들었구나'하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또 한가지는 콘스탄티노플이 파괴되면서 당시 도시 안에 살던 많은 지식인들 또한 대거 서방으로 넘어오게 되었다는 점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넘어온 지식인들 중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지식과 철학'을 가진 지식인들이 많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은 과거 동로마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에 여전히 로마적 사고방식을 가진 지식인들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서쪽으로 대거 넘어오게 되면서 기독교 세계관에 갇혀있던 서방 쪽 사람들의 생각을 조금씩 깨우게 된다. 1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고대의 인본주의가 다시 조금씩 서유럽에 이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1204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플이 파괴되던 그 날, 악랄하게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살해하던 4차 십자군의 병사들은 자신들이 르네상스의 불씨를 피울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그들은 십자군의 본분은 잊은 채 그저 폭력과 강간 그리고 약탈을 통한 순간의 쾌락을 즐겼을 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행위는 르네상스의 불씨가 된다.
역사가들 입장에서는 역사가 매번 이런식으로 흘러가니 인간사를 '우연의 연속'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역사적 필연'으로 봐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르네상스의 불꽃은 이렇게 콘스탄티노플의 폐허 위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