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감성의 멜로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리뷰
2019년 8월 28일, 오랜만에 기대감을 갖게 만든 멜로 영화가 개봉했다. 실제로 존재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소재로 만든 작품이자, 역대 멜로 영화 최고 오프닝 스코어를 경신하며, 그 화제성을 보여주고 있는 ‘유열의 음악앨범’이 말이다.
첫사랑의 감성을 담다
당연히 멜로 영화 타이틀을 달고 나온 작품인 만큼, 영화는 미수와 현우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1994년, 현우가 등굣길에 미수의 빵집을 들르게 되며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시작된다. 현우의 태도는 까칠 그 자체였지만, 미수네 빵집에서 일하게 되며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하루 종일 빵집에서 일하며 붙어있는 시간이 늘어났던 미수와 현우. 이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지만, 이상하리만치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털어놓는 법이 없다.
모든 게 조금 서툴 수밖에 없는 첫사랑. 아마도 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두 사람은 각자가 가지고 있던 마음을, 쉽사리 털어놓지 않았던 것 같다.
3년 뒤,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났던 미수와 현우는 그제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군대라는 암초가 두 사람을 갈라놓고 만다.
사랑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미수
이후 미수는 취업을 하며 일을 배워 나간다. 하지만 글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취업했던 곳에서 미수의 업무는 단순한 사무 일. 안정적이라면 안정적이었지만, 원래 미수가 원했던 삶과는 꽤 큰 괴리가 있었다.
계속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던 미수는 시간이 좀 더 흐른 뒤, 제대로 글을 쓸 수 있는 직장을 구하며, 그제야 대학시절부터 원했던 글 쓰는 일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현우와 마주하며, 두 사람은 또다시 사랑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 이번에야말로 두 사람은 진정한 연인 사이로 발전한 듯했다.
같이 있으면 편하고, 함께 하면 즐거운 사람. 미수에게 현우는 그런 존재였다. 현우 역시 미수와 보내는 일상이 행복하게만 보였다.
하지만 역시 사랑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을까? 미수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던 출판사 사장과 엮이기 시작한다.
고급 외제차를 끌며, 괜찮은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던 사장은, 미수의 빵집이 있던 자리에 다시 빵집도 차려주겠다고 이야기한다.
분명 사랑하는 사람은 현우였지만, 그는 금전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계속 불안정한 상태. 반면 사장은 현우만큼 애틋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미수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미수가 그만큼 영악해서라기 보다, 현실적인 고민 앞에 놓인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들이었다.
결코 행복할 수 없던 소년들
그럼 현우는 왜 이토록 불안한 상황의 놓였던 걸까? 현우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했던 이유는 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는 학교 옥상에서 친구들이랑 놀다, 한 친구가 추락하는 사고에 휘말렸다. 옥상에서 친구를 밀었다는 혐의로 소년원 신세까지 져야 했던 현우는 이 사고로 평생을 죄책감 속에 살아가야만 했던 것.
단순히 현우만 이런 삶을 산 건 아니었다. 그때 같이 있던 친구들 역시, 어른으로서의 삶을 제대로 이어 나가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들은 제대로 된 일자리라기보다, 일용직에 가까운 일들로 연명하기 바빴고, 자신의 꿈을 가지기보다 주어진 삶을 그저 살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에겐 현우의 모습이야말로 이상하게 보였던 것 같았다. 분명 현우도 사고에 휘말렸던 사람인데, 나름의 꿈을 가지고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자신들과는 다른 어떤 괴리감을 느꼈던 것.
친구들은 자신들과 거리를 두고 새 인생을 살아가려 하는 현우야 말로 이중적인 태도의 사람이며, 죄책감을 털어낸 듯한 현우에게, 묘한 혐오감까지 가지게 된다. 여전히 현우가 죄책감을 떠안고 살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결코 이들은 행복할 수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친구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들이 어떤 성공, 어떤 행복을 손에 쥐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삶에 일정 부분을, 죄책감으로 채워야만 했다.
학교 폭력이나 강력 사건을 일으킨 가해자는 분명 아니지만, 불의의 사고일지라도 친구의 죽음을 막지 못했던 이들에겐 그만큼에 해당하는 죄의 무게가 항상 따라다녔다.
감독은 행복해질 수 없는 이들을 통해 오랜 시간이 흘러도, 결코 덜어질 수 없는, 사고의 후유증을 보여주는 듯했다.
레트로 감성을 자극하는 여러 요소들
앞서 말씀드렸듯, 이 영화는 과거의 시간을 배경으로 흘러간다. 1994년에서 1997년, 그리고 2005년. 과거의 시간 속에 이 작품은 머물러 있다.
그리고 시간적 배경이 과거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여러 장소와 소품, 그리고 음악들을 사용했다.
지금은 찾아보기도 힘든 제과점, 비디오 대여점, 만화책방이 배경으로 등장했고, 초기 인터넷, 폴더폰, PC 메신저 등 과거 향수를 자극할 만한 소재들로 관객들의 시간 여행을 도왔다.
예쁘게 구워진 컵케이크를 보고 이름을 지을 때도 그랬다. 현우는 컵케이크 이름을 노래 제목을 따다 붙였는데 그가 붙인 컵케이크의 이름은 '기억의 습작', '날아라 병아리' 그리고 '오래전 그날'.
이 시기에 유행했던 노래 제목을 컵케이크의 붙여주며, 이 영화가 흐르는 배경이 언제인지를 좀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치였다.
이 영화를 보며 가장 많이 연상되었던 건 이른바 '응답하라 시리즈'. 이야기의 방향과 콘텐츠의 속성은 꽤 달랐지만 우연의 일치로 겹친 년도(1994년)와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여러 장치들 때문에, 자연스레 이 시리즈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러한 부분은 받아들이는 관객들에 따라 촌스럽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요즘 트렌드중 하나가 바로 뉴트로 아니었던가. 시간적 배경도 과거, 연출 자체도 세련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이렇게 녹여낸 부분이야말로 요즘 트렌드에 부합하지 않았나 싶다.
[뉴트로]
새로움 (New) + 복고 (Retro)를 합친 신조어
복고를 새롭게 즐기는 경향을 의미
빠른 세상 속 홀로 느리게 흐르던 영화
영화는 과거의 시간 속에서, 현재에 가까운 시간으로 흐르며 진행된다. 순식간에 몇 년을 뛰어넘기도 하며, 그 시간 뒤에는 또 다른 배경이 펼쳐진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는 달리, 영화는 굉장히 느린 템포로 흘러간다. 여기서 느리다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이야기의 전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는 걸, 힘들어하던 두 사람은, 보는 사람이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발전해 나가고, 작은 결정들도 굉장히 오랜 시간에 걸쳐, 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며 속도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 현대사회와는 달리, 영화는 아날로그적 여유를 품고 있다. 이러한 부분에서, 다소 지루함을 느끼는 관객들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접할 수 있던 여유로운 멜로 장르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여유로움을 더 효과적으로 나타낸 건, 롱테이크 씬. 짧은 컷과 잦은 장면 연출로 관객의 지루함을 방지하는 요즘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는 정말 예전 영화처럼 롱테이크로 긴 장면을 이어간다.
과거라는 시대적 배경, 여유로운 분위기. 그리고 여기에 더해진 긴 호흡의 장면 연출은 이 영화를 더 느낌 있게 만들어주었다.
꿈을 좇는 이들을 위한 응원
작품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건 당연히 두 사람의 사랑이지만, 이 둘의 사랑을 관통하는 건 하나의 ‘꿈’이었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싶어 이직을 고민하고 갈등했던 미수. 그리고 오랜 죄책감 속에 꿈 없이 살아가던 도중, 사진이라는 꿈을 품게 된 현우.
두 사람의 꿈은 결코 쉽게 이루어질 수 없었지만, 이들은 끊임없이 그 꿈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꿈을 이루는 데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주며, 이들의 사랑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냈다.
꿈이라는 거창한 말 앞에 수 천 번 흔들리고, 수 만 번 넘어졌던 청춘들에게 이 영화는, 절대 포기하지 말고, 좋아하는 일을 자신의 방식으로 이뤄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새롭지 않아도 괜찮아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며, 앞서가던 고등학생 몇 명의 이야기가 귀에 들려왔다. 이들은 이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들과 직접 이야기를 나눈 게 아니라 확실치 않지만, 아마도 그렇게 느낀 이유의 이면에는 굉장히 느린 이 영화의 템포가 있었을 거라 생각된다.
약간은 늘어져 있는 이 영화의 템포는 진득하게 감정선을 이어나가지 못하게 했으며, 전반적인 영화의 텐션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분명 이 부분은 필자에게도 아쉽게 느껴졌었던지라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부분을 제외한다면 영화는 생각보다 꽤 괜찮았다. 애틋한 감정이 남은 첫사랑의 추억, 때 묻지 않았던 순수했던 그때로의 시간 여행. 그리고 이를 도와주는 그때 그 시절의 음악과 라디오.
다소 촌스러울지도, 다소 답답한 전개일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러한 부분이 복고 감성의 이 영화와 잘 어울렸고, 더 애틋하게 와 닿았다.
너무 새롭지 않아도, 너무 세련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 영화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