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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튼애플 Sep 30. 2019

<벌새> 약자의 눈에 비친 세상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영화 벌새가 전하는 담담한 위로와 덤덤한 위로

여름의 끝자락에 개봉한 독립 영화 하나가, 극장가에 작은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아니, 이제 단순히 이 바람을 작다고 평가할 수 없을 만큼 그 파급력은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해야겠다. 9월 27일 자로 관객 10만 명을 돌파할 정도의 거대한 위력의 태풍으로 발전했으니 말이다.


이 태풍을 만들어 낸 건 단편 독립 영화를 제작해오던 김보라 감독. 그녀는 첫 장편 영화 <벌새>로 수많은 관객들과 평론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미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를 통해 25관왕이라는 업적을 달성한 영화. 1994년이라는 시대 상을 잘 녹여내었다고 평가받는 영화.


영화에 대한 평가들은 넘치게 훌륭했었고, 필자 역시 이 영화를 보며, 왜 이 영화가 이토록 좋은 평가를 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여전히 비슷한 형태지만, 좋은 학교에 가기 위한 경쟁. 그리고 그 경쟁의 최중심지인 강남. 그 속으로 들어간 한 가족 은희네에서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 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은 듯 은희의 오빠는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며, 은희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은희는 저항을 해보기도 하지만, 오빠가 가해오는 폭력을 이내 받아들이게 된다. 뻔한 과거를 그려내는 영화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수많은 상징물들을 통해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럼 이 영화 속 여러 상징을 담은 장면은 어떤 장면이고, 어떤 의미를 담고 있었을까?


굳게 닫힌 문과 헷갈렸던 문의 의미


영화의 시작을 알렸던 건 문을 두드리는 은희의 모습이다. 모든 게 비슷한 현대식 아파트에서 그녀는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문을 힘껏 두드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문을 두드리던 은희는, 그제야 자신이 한 층 아래의 902호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문은 기본적으로 안과 밖의 구분을 짓는 역할이자, 차단해 둔 바깥 세계로의 출구가 된다. 즉,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야, 그녀는 비로소 집에 도착해, 바깥과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


하지만 그녀는 바깥세상에서 내부로 들어가기 위한 문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집을 제대로 찾아가지 못한 건 필연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춘기를 겪고 있던 은희에게, 집이라는 공간은 머무르기 껄끄러운 장소가 되어가고 있으며, 그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방어기제가 표출되어 다른 집을 찾았던 건 아니었을까?


오빠의 폭력과 아버지의 무관심 속에 상처 받던 은희에게 집이라는 공간은 더 이상 위로받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보금자리가 아니라, 고통이 더 심화되고, 우울함 속으로 침전하는 곳이었을지도 모른다.

좀 더 시대상을 담아낸 다른 해석을 해보자면,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던 이 시기.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이 생긴 아파트에 거주하던 현대인들의 당연한 착각이었을 것.


다 똑같은 네모난 건물에 다 똑같이 생긴 네모난 문. 그저 문 앞에 달린 호수만이 우리 집과 이웃집의 구분을 만들어주는 유일한 단서다.


더 다양한 지붕, 더 다양한 대문 색깔로 집을 구분했던 이들에게, 같은 지붕을 공유하고, 같은 대문 색깔의 아파트는, 태생적으로 헷갈릴 수밖에 없던 존재였다.


급격한 도시화로 주거 공간이 바뀌는 과도기에 놓인 1994년의 강남. 그들은 그렇게 변화에 직면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격동의 1994년을 살아내던 은희 역시, 이러한 이유로 단순히 집을 헷갈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깨져버린 전등 파편의 의미


영화에서 여자 캐릭터들은 항상 수동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버지의 외도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저 침묵을 지키는 은희의 어머니의 모습이 그랬었고, 오빠의 폭력 앞에서도 저항하지 않는 은희의 모습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단 한순간, 영화에서 이 관계가 무너져 버린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은희의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전등을 집어던진 순간이다.


남자 친구와의 교제 문제로, 은희의 언니를 혼내던 아버지를 말리다, 언제나처럼 내동댕이쳐졌던 은희의 어머니. 그녀는 욱하는 마음에 전등을 던져 아버지에게 상처를 입힌다.


생각지도 못했던 어머니의 반란에 아버지는 크게 놀란 눈치. 어머니를 언제나 자기 발밑에 두던 존재라 생각했던 아버지에게는, 어머니의 당연한 저항이 당황스럽게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렇게 깨져 버린 전등 조각은 한참 뒤 은희의 의해 발견된다.


원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던 전등 파편은, 약자인 어머니가 억눌러 두던 감정을 표출하는 배출 행위의 상징. 그리고 견고한 연대가 무너져버린 이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날의 다툼은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은희네 가족은 묘한 불균형 속에서 간신히 가족의 형태를 유지해 나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Back to the 1994


영화는 현재가 아닌 1994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은희가 다니는 학원이 요즘은 잘 보이지 않는 한문 학원인 점, 스마트폰이 아닌 삐삐로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점, 방과 후 친구들과 방방을 이용한다는 점 등을 통해 시대적 배경이 현재가 아님을 알게 해 주었다.


또한 노래방, 이성친구와의 교제를 불량스러운 양아치의 행동 정도로 인식하는 어른들의 모습에서도, 지금 세상과 많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던 부분.


하지만 영화를 보며 꽤 오랜 시간, 시대적 배경이 왜 굳이 1994년이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겼다.


물론, 영화가 이 시대를 배경으로 삼은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만연했던 남아선호사상,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의 모습 등을 담아내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배경이 1994년이어야 할 이유는 찾지 못했다. 적어도 성수대교 붕괴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말이다.


영화는 역사적 사실인 이 사건을 통해, 작품의 배경을 왜 1994년으로 골랐는지 설명하는 것 같았다.


다만, 아쉬웠던 건, 은희의 성장과 성수대교 붕괴 사건은 아주 큰 상관관계를 가지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분명 은희는 그 비극적인 사건과 마주함으로써,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 사건이 아니더라도 은희는 충분히 성장하고 있었기에,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엮여진 매듭은 유난히도 헐겁게만 느껴졌다.


마치 성수대교 붕괴 사건을 위해 시기를 1994년으로 설정하고, 나머지 이야기들을 억지로 구겨 넣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아쉬움을 가진 부분이었는데, 좀 더 그 시대로 돌아가야 할 당위성을 만들어주었다면 더 완벽한 영화이지 않았을까?


왼손잡이인 두 주인공


우연의 일치인지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인공 두 명 은희와 영지는 모두 왼손잡이다.


왼손잡이가 아주 드문 것은 아니지만, 오른손잡이의 비해 소수라는 건 명백한 사실.


그리고 은희와 영지 모두, 당시 관념상으로는 소수의, 아니 약자로 대표되는 인물들이었다.


은희는 남아선호사상이 지배적이었던 집에서, 오빠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고, 아버지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 살아간다.


그런 아버지의 시선을 빼앗아 오기 위해서였는지, 혹은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반발이었는지, 그녀는 비행을 저지르기도 하지만, 집안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이런 힘의 관계는 남자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으며, 항상 그녀와 데이트를 할지 말지 결정하는 건 남자 친구의 몫.


심지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고도 뻔뻔하게 행동하는 그녀의 남자 친구는, 바람피던 상대와 잘 되지 않자 다시 은희를 찾는다.


그리고 은희는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외도'를 저지른 남자 친구를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마찬가지로 왼손잡이였던 영지 역시 소수의 속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당시만 해도 많지 않았던 여성 흡연자, 그리고 노래를 불러준다며 ‘잘린 손가락’이라는 노동가요를 부르는 그녀. 이런 점에서만 봐도 영지는 결코 평탄한 삶을 살아온 것 같지 않았다.


정확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지만, 영지의 휴학, 그리고 입에서 흘러나온 노동가요. 이 두 가지를 고려해 볼 때, 그녀는 아마도 운동권 출신일 거라 추정된다.


은희가 오빠에게 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털어놓자 영지는 이러한 모습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데, 그녀는 이유 없는 폭력에 굴복하지 말고 맞서 싸우라는 조언을 건넨다.


불합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긍하는 게 아니라 맞서 싸우는 것. 왼손잡이의 영지는 오랜 시간,

'오른손잡이로 대표되는 다수의 기득권 집단'과 싸워왔던 것이다.


비슷한 약자 포지션의 놓인 두 사람의 차이는, 강자가 행하는 폭력적인 수단에 대해 얼마나 저항하고 있는가 정도였다.


은희가 영지에게 끌렸던 이유도, 비슷한 상황임에도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그녀의 깨어있는 정신 때문이었던 게 아니었을까?


이 세상 모든 '은희'를 위한 영화


기본적으로 벌새는 아주 작은 크기의 새라는 특징이 있다. 그 특징을 반영하듯, 작품 속 은희 역시 아주 작고 위태로웠던 중학교 소녀였다.


하지만 벌새는 뛰어난 비행 능력을 가진 조류이다. 비록 작은 몸집을 가지고 있을지 몰라도, 비행 능력만큼은 거대한 새들에게 밀리지 않는 벌새.


그리고 영화는 벌새로 대표되는 은희의 잠재력을 믿어주고 있었다. 아직 작고 미완의 생명체 일지 모르지만, 그녀가 언제든 날아오를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듯했으니 말이다.


특히나 영화는 우리네 삶과 아주 동떨어지지 않은 이야기를 차용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내었다.


이 세상에서 차별받고, 고통받았던,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성장한 벌새, 아니 세상의 수많은 은희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 시절을 살아낸 은희들에게는 공감과 안타까움의 위로를, 그 시절을 살아내지 않았던 은희들에게는 극복의 힘이라는 응원 메시지를, 영화는 긴 러닝타임 내내 소리치고 있었다.


https://youtu.be/FjlsNtJuM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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