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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Sep 12. 2020

잊히고 싶은 말.

친구에게


15살 때 인연을 시작한 23년 지기 친구가 있다.


친구는 조증과 우울증을 넘나드는 뒤죽박죽인 나와는 많이 다른 결을 가진 사람이다. 조곤조곤하며 웃을 때는 언제나 입을 가리고 웃었다. 밝으면서도 차분하고 단정하다. 딸이 셋인 집의 맡딸인 그녀는 나와는 많이 달랐다. 그때에도 지금도 이렇게 다른 우리가 어떻게 친구가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곤 했다. 그럼에도 큰 위기 없이 20년을 단단히 이어져 온 관계에 3년 전,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

우리는 나란히 난임이었다. 친구는 오래도록 임신이 잘 되지 않아 고생 중이었고, 나는 습관성 유산으로 난임이었다. 서로 다른 이유이기는 했으나 그 맘 때, 아이가 간절했던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난임의 시간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 던 중세 번째 임신을 하고 또다시 세 번째 아이를 유산했다. 임신 중기에 찾아온 유산이었기에 그 충격은 나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모든 인간관계를 끊었다. 하지만 언제나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20년 지기의 친구였고, 6개월 간의 긴긴 시간을 뚫고 친구를 다시 만났다. 우리는 함께 울었고 함께 슬퍼했다.

그렇게 다시 관계를 이어 오던 중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건넸다.
"나 말이야. 유산을 하고 너무 힘들어서 남편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오빠, 임신이 안돼서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잖아. 그런데 유산을 해서 힘든 것보다 임신이 안돼서 힘든 게 낫지 않을까? 임신이 되지 않아서 힘들겠지만 그래도 '임신이 어서 되면 좋겠어'라고 간절히 바라 볼 수라도 있잖아. 유산하는 건 몸도 다 망가져버리고 게다가 간절히 기도 하기 조차 무서워지잖아. 또 아이를 잃을지도 모르니까. "라고. 그런데 남편이 그러더라? "그건 알 수 없는 거지, 우리도 정말 힘들지만 임신이 안돼 고생하는 사람들 보니 그것도 정말 힘든가 보더라. 우리가 겪어보지 않았잖아. 그러니 어느 게 더 낫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아"라고. 그래서 내가 " 그래, 맞네. 안 겪어 봤으니 그렇게 말하면 안 되겠다."라고 했어. 오빠 말을 들으니까 내가 생각이 짧았더라고. "

친구에게 '너도 많이 힘들지. 얼마나 힘들까 '하고 위로해 주려는 의도의 말이었다.

그 무렵 난임 병원 다닌 이야기, 수술한 이야기, 검사 결과 등 별별 이야기를 다 늘어놓은 나와 달리 묻지 않으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친구에게 마음을 조금 터 놔도 된다고 말해 주고 싶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친구는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이유를 묻자 "너에게 상처 받았어, 다신 보고 싶지 않아"라는 투의 말만 돌아왔다. 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나를 그리 대하는 친구에게 오히려 내가 상처 받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렇게 20년 동안 이어온 시간의 밧줄을 끊어버렸다. 친구가 나를 끊어 내 버린 것이다. 괴로웠다. 나중에 편지를 통해 그날의 그 말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된 후에도 내내 괴로웠다. 어째서 그 말이 그리 상처가 되었는지를 눈치 채지 못했다.

2년여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의 생일날 축하하러 가도 되겠냐는 메시지였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 잘 못 행동한 것 같다며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내 생일을 기념한 자리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날, 나는 다시 괴로움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내가 많이 경솔했던 것 같아. 그때 나는 몰랐는데 네게 열등감 같은 걸 느끼고 있었나 봐. 나는 임신이 안되는데 어쨌든 너는 계속 임신이 되었으니까. 그래서 그 말이 더 크게 다가왔었나 봐."라고 말했다.
"그 말의 의도는 그게 아닌 거 알잖아. 나는 그냥 '너를 이해해'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야."
그러자 친구는 말했다. "그때 그 말을 들었을 때, 얘가 나를 자기 행복의 비교대상으로 쓰고 있구나 라고 생각했어. 그냥 나는 그런 존재구나 라고." 친구가 돌아간 뒤, 사과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 생각하는지는 몰랐다고. 그렇게 들렸다면 정말 상처가 되었겠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정성스레 메시지를 적었어 보냈다. 담담한 척 써 내려간 메시지지만 그 메시지를 쓰는 손은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리 생각했다면, 그렇게 받아들였다면 그건 정말 내가 상처를 준 것이다. 친구에게 나는 '네가 나보다 더 불쌍해."라고 말해 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다. '너보단 내가 나아'라고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 후로 우리는 예전처럼 좋은 관계를 다시 이어가고 있다. 여전히 생일에 함께하고 또래 아이를 낳아 기르며 육아 동지로 고초를 나누고, 시시한 옛날이야기에 깔깔거리고, 첫사랑이 애를 낳았니 마니, 그 아이가 딸이니 아들이니 하는 이야기를 심각하게 하고, 서로의 집을 드나들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는다. 그러면서 우리는 관계의 이음새를 조금 더 단단히 묶었다.


우리는 때때로 말을 내뱉을 때 생각이란 걸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생각도 하기 전에 말은 나를 앞지른다.

우리는 때때로 상대방이 내 의도대로 받아들여 줄 거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타인은 내가 아니기에 '타인'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아무리 잘 통하는 사이라 해도 오해는 순식간에 우리가 쌓아온 소중한 것들을 집어삼킨다. 놓치고 싶지 않은 사이라면 언제나 내 인생에 두고 싶은 사람이라면 말은 더욱 무겁게 뱉어져야 한다. '오해'라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녀석은 언제든 소중한 관계에  끼어들 틈을 엿보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오해'에게 끼어들 틈을 내어 준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였다.


 종종 그 날일을 떠올린다. 예전처럼 친구를 원망하는 마음에서가 아닌, 친구에게 한 말들을 곱씹는다. 따뜻한 말 한마디는 사람을 살리기도 치유하기도 한다지만 생각 없이 내 입을 떠난 말 한마디가 사람을 아프게도, 다치게도 또 죽게도 한다. 의도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저 그 말이 상대방의 마음에서 어떤 형태의 자국을 남겼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내내 미안할 것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다는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그리도 간절하게 이 두 개의 기적을 모두 이루고 싶었던 적은 여태 없었다. 너무 미안해서 그리고 그런 말을 들어 놓고도 자신의 마음이 열등감으로 가득 차 그랬다고 말해주는 친구가 고마워서 나는 내가 친구에게 준 ‘말의 상처’를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래야 지만 비슷한 실수를 다시 하지 않을 수 있기에. 그래야 지만 더 건강한 관계로 오래 만날 수 있다고 믿기에. 오래오래 곁에 두고 싶은 그녀이기에. 나는 나를 조금 더 탓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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