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닮아가는 시.
나는 어릴 적,
엄마가 싫었다.
늘 맛있는 반찬은 우리에게, 아빠에게 주시고 엄마는 괜찮다고 하는 것이 싫었다. 그러면서도 남은 걸 맛있게 먹는 것이 싫었다. 아빠 밥은 제일 좋은 그릇에 떠야 하는 그런 가부장적임이 싫었다. 부부싸움을 한 후에도 먼저 다가가 화해하는 모습이 싫었고, 자고 있을 때 들어와 손을 잡고 기도하시는 것이 싫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는 것이, 자신의 주장이 없는 것이 싫었다.
왜 엄마는 그렇게 살까. 자식 눈치, 남편 눈치를 보며 불행하게 살기를 선택한 걸까.
내가 지켜본 엄마 모습이 엄마의 인생 전체라면, 너무나 굴곡이 많아 책 한 권을 쓰라 해도 쓸 텐데 어째서 엄마는 그리도 밝게 웃으며 나누고 감사하며 살아오신 걸까.
그런 엄마를 닮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엄마처럼은 살고 싶지 않아’라고 생각 해왔던 내가 어느덧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니 나에게서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식탁을 차리며 남편 앞에 좋은 것을 두려 할 때, 남편이 맛있게 먹어주는 반찬에는 나도 모르게 손이 덜 갈 때, 내 아이의 손을 잡고 기도하게 될 때, 나누는 것이 행복하고 즐거울 때, 어느 날엔가 문득 엄마를 닮아가고 있는 나 자신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엄마에게 이것은 불행이나 희생이 아닌 기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내 생각만큼 불행하지 않았던 것 일지도 모른다. 그저, 작은 것에서도 행복을 찾아내는 사람, 큰 불행이 있을 때에도 주변에 떠다니는 행복의 조각들을 발견해 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금세 툭툭 떨쳐내고 일어나는 사람이다. 기복이 많지 않고, 불행을 잘 흘려보내는 엄마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리라.
엄마의 많은 부분과 닮아버렸으면서도 불행을 잘 흘려보내고 새롭게 나아가는 삶의 보석 같은 그 기조는 닮지 못했던가. 아직도 나는 내 안에서 자랐던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무겁게 아프고 그래서 불안정하다. 아이를 건강하게 낳았고,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시시때때로 불안의 싹이 움튼다. 아이를 키우는 건 행복한 만큼의 불안이 늘 함께 있다는 그래서 ‘행복에 집중하는 연습’이 필요하다던 형님의 말씀을 떠올려본다.
‘이런 나도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 보면 어김없이 친정엄마가 떠오른다.
‘나는 엄마처럼 되려면 멀었구나. 엄마는 참 좋은 엄마였구나.'하고 거듭 깨닫게 된다.
엄마를 싫어했던, 미워하던 마음을 부끄러워하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
이제야 깨닫게 되어 미안하지만,
새삼 엄마가 존경스러운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