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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Sep 17. 2020

그래서 나무가구를 좋아합니다.

소란하지 않은 삶.


집에서 마사지를 받았다. 출산 후 허리와 골반 통증을 달고 사는데 지난번에 받은 마사지가 효과가 좋아 다시 신청했다. 마사지를 받는 도중 마사지사께서 "이 집에는 가구가 다 나무네요."라고 하신다. "아이 물건도 다 나무네요. 신기해요"라고.


우리 집에 낯선 사람이 오면 항상 그리 묻는다. "다 원목가구네요, 원목가구 좋아하나 봐요."


남편은 가구를 만든다. 그리고 가구점을 한다. 덕분에 원하는 가구가 있으면 남편에게 주문서를 넣는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하나 원하는 디자인 원하는 크기로 뚝딱 만들어 와 준다. 그러나 나무가구가 집을 채우게 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남편을 만나기 전부터 나무가구를 좋아했다. 어쩌다 가구 만드는 사람을 만났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집은 성실히 나무가구로 채워졌다. 우리 사이에 아이가 태어났고, 아이의 물건을 채울 때마다 모두 남편이 제작을 도맡았다. 아기침대라든지 책상, 책장, 교구장, 아기용 싱크대 같은 것을 부지런히 만들어다 주었다.


나무가구의 좋은 점은 수도 없이 많지만 무엇보다 자연의 것이기에 어느 하나 미운 구석을 발견할 수 없는 점 이리라. 언제나 안온하게 모든 공간에 스며든다. 누구나 나무의 색감을 가장 편안하게 받아들이며, 그 질감은 말할 것도 없다. 거칠게 다듬어진 것은 거친 대로 곱게 다듬어진 것은 고운대로 나무의 보송보송하고 선한 매력을 우리는 잘 안다. 나무의 색으로 말하자면 자연에서 나고 자연에서 자라고 자연에서 온 그 색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익숙하며 가장 싱그러운 빛깔. 우리를 가장 느슨하게, 선하게 만드는 색이 있다면 나무의 색일 것이다.


물론 따뜻한 온기도 좋다. 고급스럽지만 차가운 대리석 소재의 가구나, 트렌디한 철제 스타일의 가구 또는 플라스틱 소품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온기가 나무가구에는 존재한다. 그건 아마도 살아 있던, 생명이 있던 것만이 가질 수 있는 숭고한 무엇일 것이다. 햇볕을 흡수하고, 비를 맞고, 바람을 삼키며 살아 숨 쉬던 한 생명의 생명력이 오래도록 남아 나무를 감싸고 있는 것이리라.


집안으로 햇살이 슬그머니 들어오는 시간은 하루 중 거실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다. 햇살에 나무가구가 반짝이는 것을 바라보다 보면 나무의 온기뿐 아니라 숲의 온기마저 느껴지곤 한다. 햇살과 나무가구의 만남이라니 그건 마치 옛 친구와의 조우 같은 것이려나. 그렇게 긴긴 시간 나무는 온기를 받으며 살았고, 또 오랫동안 그것을 품고 산다. 나무는 언제까지고 따뜻할 것이다.


그러나 '왜 나무가구를 좋아하는가'에 대해 묻는다면, 나무의 따뜻한 색감과 선한 질감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소리'라고 말하고 싶다. 나무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 말이다. 부딪히는 것이 무엇이든 그 소리를 좋아한다.


남편이 내게 왜 나무 수저를 쓰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불편하지 않느냐고. 그때에도 나는 '소리' 때문이라고 했다. 쇠숟가락으로 도자기 그릇을 긁는 소리는 뾰족하지만 나무 숟가락으로 도자기 그릇에 붙은 밥 알을 떼기 위해 달각 거리는 소리는 동그랗다. 그래서 나무 수저를 쓴다. 원목식탁도 같은 맥락이다. 언제나 그릇들이 옮겨지고 옮겨가고, 부딪히고 마주치는 분주한 식탁에 무엇인가가 놓일 때 생기는 소리가 너무도 좋다. '달각달각'하는 것도 같고 '또 곡 또 곡'하는 것도 같은 그 소리 말이다. 아니 '도동 도동'이 더 가까우려나. 어쨌든 그 모나지 않은 동그란 소리가 못 견디게 좋다.


나무 가구와의 부딪힘에서 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의 인생도 그리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너무 달그락 거리지 않게 살고 싶다고. 너무 소란하지 않은 삶을 살고 싶다고 말이다.


주변을 망가뜨리지 않는 소리를 내고 싶다. 너무 강하지도 않고, 너무 뾰족하지도 않게, 그저 고요하고 안전한 소리의 삶을 살고 싶다. 무엇이 부딪혀 오든 동그란 소리가 나는 그런 삶. 나무의 소리에는 탐욕이 없다. 이게 내가 내는 소리네 하는 잘난 체가 없다. 묵직하지만 날카롭지 않다. 그 소리는 누구도 어긋나게 두지 않는다.


너무 달그락 대지 않아서 너무 소란하지 않아서 좋았던 나무가구처럼 거창하지도 대단하지도 않게 그저 고요함으로 반짝이는, 별 볼일 없어 보여도 내면이 단단하며 자기와의 농밀한 시간을 보낼 줄 알고, 삶을 울창하게 가꾸어 가는 사람. 뜨겁지 않아도 따뜻한 삶. 그리고 사람.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나무의 소리 같은 삶을 살아 내고 싶다. 결국엔 그런 사람이 되어 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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