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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Sep 05. 2020

산책의 단 맛.

여름볕을 충분히 머금은 아이가 겨울에 건강하다고 믿는다.



매일 산책을 한다. 아이와 그러기로 약속했다.


아이가 걸음마를 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아이와 함께하는 산책'은 꿈이었다. 아이와 함께 걸을 수 있다니, 손을 잡고 나란히 걷는다니. 정말 꿈만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봄이 오자, 꿈꾸던 대로 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산책을 한다. 매일 다른 길이 아니어도 좋다. 아니 오히려 다른 길이 아니어서 좋을 때가 더 많다. 매일 같은 길을 걷는데도 그 길의 작은 변화를 발견하고, 계절이 바뀜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변주를 알아 챈다.


계절이 봄에서 여름으로 바뀔 즈음, 철쭉꽃으로 만발하던 화단에 꽃이 지고 초록으로 물들었을 때 아이의 눈빛에서 아쉬움, 당황스러움, 놀라움이 깃들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매일 화단으로 나와 “꽃 꽃 꽃”을 외치는 것이 아이의 첫 번째 즐거움이었은데, 하나둘 꽃이 지더니 어느 날엔가 꽃이 사라졌다. 아직도 그곳에서 꽃을 찾는다.

아이의 산책길은 새롭지 않아서, 익숙한 길이어서 두려움 없이 한발 더 나아가고 엄마인 나도 걱정 없이 손을 놓아줄 수 있다. 한걸음 뒤에서 기다려 줄 수 있는 여유, 아이와 나 사이에 작은 여백을 만들어 아이로 하여금 그 시간에 더욱 몰입하게 하는 것. 그 시간은 익숙한 곳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산책길에서의 아이는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웃어준다. 그래서 더욱 힘을 내 산책길에 나선다. 분명 아이가 좋아하는 시간일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다.
어느 날은 돌을 주워 입에 쏙 넣어버리기도 하고, 풀을 뜯어먹기도 한다. 흙바닥에 털석 주저앉기도 하고, 예쁘디 예쁜 꽃을 무자비하게 뜯어버리기도 한다. 비 온 뒤 물웅덩이는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으며, 꼭 반듯하게 닦아놓은 길을 두고 흙길, 숲길로 방향을 정한다. 하지만 산책하는 시간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아이 자신이다. 위험하지 않다면 뭐든 괜찮다.
목적을 가진 걸음은 자꾸 아이를 재촉하게 되고, 아이의 손을 잡아끌게 된다. “이리로 가는 거야” “빨리 가자” “이제 그만 일어나자” 산책은 그런 시간과 달라서 나도 산책이 즐겁다. 아이가 가자는 대로 얼마든지 가볼 수 있다. 아이가 보고 싶은 만큼 보게 둘 수 있고, 앉아 있고 싶으면 앉아 있고 싶은 만큼 기다려 줄 수 있다.

이른 봄에 시작한 산책은 봄을 지나 여름의 절정으로 향해가고 있다. 매일 하던 ‘정오의 산책’은 더 이상 엄두가 나질 않았다. 한낮의 해는 점점 뜨거워졌고, 또 자주 비가 왔다. 우리는 우선 뜨거운 태양을 피해 산책시간을 요리조리 바꿔보았다.


어떤 날은 아침을 먹자마자 ‘아침 산책길’에 나선다. 아이가 좋아하는 주스 하나를 챙겨 가볍게 나선다. 어떤 날엔 점심을 먹고 낮잠까지 잔 후, ‘오후의 산책’을 한다. 그 시간의 매력은 아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엄마에게는 고요한 산책길이 훨씬 수월하지만 아이에게는 그 또한 소소한 즐거움이 된다. 놀이터 가득 울려 퍼지는 언니 오빠들의 목소리, 왔다 갔다 하는 자전거며 씽씽이 또한 얼마나 신기할 거며, 어린이집을 마치고 돌아오는 또래 친구들의 모습까지. 아이에게는 또 다른 매력의 생동감 넘치는 산책길이다. 꽃이나 풀을 가리키던 작은 손은 “언니” “아기”하며 지나다니는 사람 구경에 꾀나 흥분한다. 또 어떤 날은 이른 저녁을 먹고 느지막이 ‘저녁 산책’을 한다. 아직 해가 지기 전이지만 저녁녘은 공기의 빛깔이, 기운이, 온도가 다르다. 조금은 어두운 빛을 받으며 나른함을 느낀다. 한 여름의 저녁과 밤은 그 어떤 계절보다도 매력적이다.


그렇게 우리는 태양을 피해 가며 여전히 산책길을 걷는다. 아이의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콧잔등에도 송송 맺힌다. 얼굴이 분홍빛으로 달아오른다. 괜찮다. 여름은 원래 더운 것이다. 그것을 아는 것도 산책길의 배움인 것. 더우면 에어컨 아래, 추우면 빵빵한 보일러 위에서 계절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라게 하고 싶지 않다. 땀을 흘리면 닦아주고, 지치면 그늘 아래에서 쉬어가고, 더우면 시원한 물 한 모금의 참맛을 알게 될 테다. 여름은 더운 것이고 겨울은 추운 것이다. 덥다고 춥다고 불평하는 것이 아닌, 계절의 참 맛을 알아갈 것. 그것이 계절의 가르침이다.


나는 여름 볕을 충분히 머금은 아이가 겨울에 건강하다고 믿는다.


비가 오는 날에도 산책을 한다. 폭풍우가 쏟아지고 비바람을 동반하지 않는 이상 우비를 입히고, 양말을 벗겨 크록스를 신긴다. 그런 날은 멀리까지 가지는 못하지만 코앞까지라도 비를 만나러 나선다.
빗길에 몇 번이고 주저앉아도 물웅덩이에 몇 번이고 발을 굴려도 괜찮다 괜찮다. 그러려고 나온 거니까.
비를 향해 입을 벌리는 아이를 보며, ‘윽’하고 생각했다가 나도 그랬었지 하고 금세 미소룰 짓게 된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내게, 비 오는 날의 산책길은 나를 위한 시간이기도 하다. 우산을 들고 아이의 산책에 동참하다 보면 그렇게 터덜터덜 걷다 보면 어느새 비 냄새와 빗소리에 취해 달큰한 기분이 된다. 마음이 한결 상쾌해진다. 비를 맞은 아이와 나는 뜨끈한 욕조에 앉아 2차 물놀이를 시작한다. 조금은 싸늘한 기운에 추웠을지 모를 아이의 몸을 따뜻한 욕조에 앉힌다. 거품을 풀어 거품 놀이도 한다. 몸을 다 녹인 후에도 한참을 놀다 밖으로 나온 후, 맛있는 과일을 잘라서 나눠 먹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 같은 날이 완성된다.


산책이란,
걸음으로 느리게 보는 풍경을 감상하는 것,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는 것, 변화하는 계절을 따라가는 자연의 슬기로운 변주를 감상하는 것, 매일 비슷비슷한 길을 걸으며 똑같은 것에서도 감탄하는 것, 똑같은 것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 그래서 사소한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는 것, 자연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것, 그렇게 자연을 사랑하게 되는 것.
산책의 힘, 산책의 단 맛.

오늘도 우리는 산책을 갑니다. 매일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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