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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Sep 05. 2020

코로나 시대, 코로나 세대. 우리는 산책을 멈췄다.

당분간은 머무름.




근 4개월이 넘도록 매일 하던 산책을 멈췄다.


양산에서 광화문 집회를 다녀온 확진자가 생긴 후부터였다. 광화문 집회 인원이 워낙 많다 보니 한 명으로 확진자가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게다가 양산 확진자는 이 넓은 양산 안에서 꾀 가까이 살고 있었다. 확진자가 나온 후로도 하루 걸러 한 번은 산책을 갔다. 산책을 완전히 멈출 수는 없었던 이유는 매일 집에서 엄마와 단둘이 보내야 하는 아이에게 '산책'은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로 양산 확진자가 2명이 더 나왔고, 뒤이어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가 실시되었으며, 마스크 착용도 의무화가 되었다. 우리는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산책을 포기했다.


아직 마스크 쓰기가 익숙하지 않은 우리 아이는 간혹 마스크를 벗어던진다. 이젠 그런 행동을 귀엽게 또는 안쓰럽게 바라봐 줄 수가 없다. "잠시 벗을래?"하고 배려해 줄 수가 없다. 아이의 안전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마스크를 쓰지 않는 행위가 다른 사람을 위협하고 타인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행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최근 4일 동안 산책 없는 날을 보냈다. 매일 30분이든 한 시간이든 산책을 하던 일상이 멈추자 좀이 쑤신 건 아이보다 나였다.  수시로 창밖을 바라보았고, 나갈까 말까를 고민했다. 아이는 환기를 위해 창이 열라면 "짹짹?" 하며 짹짹이를 보러 나가고 싶다는 신호를 주기도 하고, 선크림을 들고 나에게 바르라는 손짓을 하기도 했다.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오후 산책을 나갔다. 현관에서부터 마스크를 들고 실랑이가 벌어졌다. 잘 씌워 둔 마스크를 나가기 직전 벗어던진 것이다. "안돼, 마스크 써야 나갈 수 있어"하며 마스크를 다시 씌웠다. 얌전히 쓰기에 이젠 쓰려나 했는데 곧장 벗어버린다. 그렇게 쓰고 벗고를 반복하느라 현관에서 10여분을 보냈다. 그래도 내가 전에 없이 강하게 나가자 이번엔 아이가 져주었다. 그렇게 실랑이 끝에 둘이 나란히 마스크를 쓰고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에 손도 못 대게 하고서 오랜만에 맞이하는 바깥. ‘갇혀서는 사람이 살 수 없구나.’라는 걸 느낀다. 나오기만 했는데 이리도 좋다니. 고작 아파트 단지 안이면서도 막상 땅을 밟는 것만으로도 '자유'를 느낀다.


아이와 가볍게 산책을 하며, 개미도 보고 아파트 분수대에서 물이 솟구치는 것을 한참 서서 구경했다. 아이는 오후 산책인 덕에 볼 수 있는 언니 오빠들의 자전거 타는 모습, 킥보드 타는 모습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눈길을 받는 언니 오빠들이 부담스러울 만큼 집요하다. 그리곤 평소 산책마다 하는 '짹짹이 찾아 나서기"를 시작한다. 이제는 제법 익숙해져서 나름 새들을 잘 볼 수 있는 '새 스폿'으로 곧장 데려가면 된다. 오늘도 그곳으로 발길을 옮기던 중 작은 놀이터 앞에서 아이의 발걸음이 멈췄다.


오늘은 놀이터에서 놀고 싶은가 보다 했다. 놀이터로 성큼성큼 들어간 아이는 한 곳에서 또다시 멈춰 섰다. 우리 아이와 개월 수가 비슷해 보이는 남자아기였다. 잠시 그러고 말겠지 했는데 그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이다. 너무 오래 멀뚱히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아이의 등을 재촉했다. "우리 미끄럼틀 타러 가볼까?" 아이는 엄마 손길에 발걸음을 떼는 듯하더니 한두 걸음 뒤 다시 멈춰 한참을 아이를 보고 섰다. 다시 아이를 재촉했다. "계단 올라 가볼까? 우리 아기 계단 좋아하지?" 그렇게 관심을 돌려 겨우 미끄럼틀을 한번 태웠다. 이번엔 남자아이가 우리 아이 가까이에 섰다. 그리곤 가지 않는 것이다. 누가 보면 밤톨만 한 녀석 둘이서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멀뚱히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마주 보고 있다. 귀여운 두 녀석의 발길은 돌아 설 줄을 모르고, 괜스레 엄마들만 머쓱하고 어색해서 멀찌감시 서 있었다.


누군가 이 장면을 보았다면 그저 귀엽다고 사랑스럽게 보았을 장면 하나. 그런데 나는 왜인지 녀석들이 불쌍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이들은 왜 그리도 서로를 신기해했을까?

18개월, 곧 19개월의 아이.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아니었다면 한창 문화센터를 다니며 또래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놀이를 접하는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돌이 될 무렵부터 퍼지기 시작한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해 다니던 문화센터를 취소하고 집에 있은 지 5개월이 넘어간다. 그러니 이 아이들이 어디에서 또래를 만날까. 새로운 놀이야 집에서 엄마가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여 준비해 줄 수도 있을 테지만, 친구를 만들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직 ‘진짜 친구’는 될 수 없는 연령이기는 해도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만나며 서로 보고, 모방하고, 다투고, 울고, 하는 모든 것이 아이에게는 더없이 좋은 경험이고 배움이 된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의 그 장면이 슬프게 다가왔다.

낯설어서 멈춘 건 아닐까. 신기해서 멈춘 건 아닐까. 나와 비슷한 또래를 만난 다는 것이 아이에게는 정말 신비로운 경험이었을 수 있겠다 싶어서 마음이 아팠다.


코로나 시대, 코로나 세대. 요즘을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불리 울 세대가 되었다. 우리가 그동안 누려왔던 것을 내 아이에게 주지 못한다는 것에 내내 아팠다.


집을 나서며 마스크를 씌울 때마다, 바깥활동을 하며 아무거나 만지지 못하게 해야 할 때마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마스크를 벗는 아이를 혼내야 할 때마다, 모르는 누군가에게 가까이 가려고 할 때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싶어 하는 아이를 저지해야 할 때마다 나는 눈물이 날 만큼 미안했고 그래서 아팠다.


어쩌다 이런 시간을 살게 되었는지, 다음 세대가 누려야 할 풍요를 우리가 모두 써버린 건 아닌지, 어떻게 해야 이 시간을 끝 낼 수 있는 것인지. 답을 알지 못했기에 답답했고 끝이 보이지 않았기에 슬펐다. 이제 조금씩 익숙한 듯 마스크를 쓰고, 손소독제를 손에 문지르며 이 모든 걸 담담히 받아들여 가는 아이를 보면 역시나 기특하기보단 괴롭다.




코로나 19에도 매일 산책을 하던 우리는 당분간 산책을 멈춘다. 오늘처럼 도저히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는 날이 간혹 있기는 하겠으나, 당분간은 멈추어 머물기로 한다.


한 사람이라도 더 집에 머물러있는 것이 이 사태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을 죽이고 내일을 꿈꾸면서, 오늘 하루 ‘머무름’이 내 아이의 미래를 바꿀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사무치게 그리운 일상의 숲으로 돌아가는 그날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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