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여름 Jun 10. 2021

육아의 숲에서 만난 낯선 나.

육아를 하면서 발견한 또 다른 나를, 그 낯선 이를 도려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이와의 고된 하루를 보내고 눈물로 쓴 반성의 글을 보고 혹자는 '정인이 부모 납셨네'라는 댓글로 나를 조롱했다. 그의 말에 또다시 그날이 떠올라 눈물이 차올랐지만 결국 그런 말을 들을 짓을 하고야 말았다는 것이 그것이 나라는 것이 그저 나를 아프게 했다. 나를 조롱한 사람이 아닌 '내가' '나를' 무너뜨린 것이다. 반성의 마음으로 글을 써 두고두고 보려고 했지만, '절대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곤 했지만 간혹 아이에게 '폭발'이라는 것을 하고야 말았고, 어쩌면 내 마음 한구석에는 '다들 이러고 살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이 결국엔 싹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일 거라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우울증으로 치부해 버리면 차라리 속이 편했다.  그런 말들에서 도망칠 수 있는 '우울증'이라는 도피처를 만난  같아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그들의 말처럼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우울증이라서 그래요.'라고 나도 말하고 싶었으나 도무지 우울증 같지가 않았다. 그냥  내면에 숨겨진 나를 만난  같았고 그래서 나는 더욱 부끄럽고 괴로웠다.


나를 변화시키고 싶어 안간힘을 썼지만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아이에게 못볼꼴을 보이기 일쑤였으며, 한 달 동안 나름 괜찮은 엄마였다가도 하루는 도무지 누군지 모를 사람이 되곤 했다. 그리 바뀌려 해도 바꿀 수 없었던 나를 바꾼 것은 다름 아닌 '정인'이었다.


육아란 그리 간단한 업무가 아니다. 일이라고 하면    같지만 '', '노동'  이상의 무엇이다. '출산'만큼이나 낯설고 경이롭고 행복하며, 고통스럽고 무서우나 충만하다.

아이를 길러내는 일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며, 머리보다 빠르게 몸을 움직여야 하고, 서툰 아이의 요구를 서툴지  파악해야 하고,   요구를 적절히 들어줘야 하며,  먹이고, 불편하지 않게 입히고, 종종 씻기고,  재워야 함과 동시에 아이의 성장과 발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아이는 날마다 성장하며 나는 그런 아이의 성장을 따라가기 바쁘고, 아이가 현재 어떤 성장기를 지나고 있는지 파악하지 않으면 아이를 이해하기가 어려워 마음이 고된 날들이  이어진다. 밤마다  깨서 우는지, 싫어 싫어는  반복하는지,  엄마의 머리끈을 풀어서 달라고 저리도 우는지,  모든 일들이  매일 반복되는지. 아이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그저 스트레스가  뿐이니 아이의 성장을 부지런히 배우고 따라가야 한다.


이런 일련의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나의 마음의 평정심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저 깊은 곳까지 곤두박질쳐갔고 아이를 재우고 나면 보람된 날보다 반성하거나 자괴감에 빠지는 날들이 빈번해져 갔다. 그런 내게 '정인'이의 아픈 죽음은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다.


한동안은 놀고 있는 아이의 등만 보아도 눈물이 났다. 맑은 웃음을 잃어버린 작은 아이가 자꾸만  아이와 겹쳐져 보였다.  작은 몸으로 받았을 고통과 좌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겨 나갈  같아 하루에도  번을 눈물을 훔쳤다. 그런 감정을 머금고 아이와 함께 있으면  아이의 모든 찰나를 애틋하게 바라보게 된다. 매시 매때 가르쳐야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닌,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 그저 지금  순간 '아이가 행복한가' 나의 마음의 초점을 맞추게 된다.  '아이들은 행복해야지, 그래 그저 오늘이 행복하기만 하면 되지.'라는 생각만 나를 채운다. 마냥 행복했으면, 오늘 하루가 즐거웠으면, 조금도 속상하지 않았으면 하는 소망으로 마음이 가득 찬다. 아이가 조금 속상한 표정을 지어도,   처진 등을 보여도 서운한지 입꼬리를 내리며 실룩대기만 해도 마음이 금세 눈물이 올랐. "미안해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라고 말할 수밖에.


 내가 타인에 의해 느끼는 섭섭한 감정이나 민망함 또는 속상함 따위의 대수롭지 않게 매일 스쳐가는 감정들이 잔잔하게 부서지는 파도라면 아이의 마음에 닿는 이러한 감정은  땅이 꺼지고 빛이 사라지는 정도의 크나큰 '마음의 해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엄마의 꾸지람, 엄마의 화가  표정, 실망한 말투  모든 것이 모여 아이의 마음에 커다란 구멍을 뚫는다.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구멍을 넓혀간다. 아직은 무르디 무른 말랑말랑한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지금은 금세 아물게   있으나 시간이 지나 견고해진 후에는 아마, 아마도 돌이킬  없으리라. 결국에 나고야만 그 구멍이 먼 훗날 아이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는 노력들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웃음이 예뻤던 그 아이의 죽음은  나라를 흔들고  작은 가정에도 찾아와 나를 바꾼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했던가, 말로도 아프게 하지 말라고 했던가. 표정으로도 눈빛으로도 분위기로도  무엇으로도 아이에게 위협적이거나 공포스러우면, 두려움이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부모가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결단코 주어서는  되는 것이라는  또한  알고 있다. 아이에게 부모는 '전부'이자  '세상 전체'이며 가장 '안전한 '이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흔들리고 마는 나의 감정 하나를 주체하지 못해 아이의 세상 전체를  흔들었던 나는 '정인'이의 '아픈 ' 앞에서 나를 움켜쥐었다.  그러쥐었다. 단호히 붙들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이 행복하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나는 내 아이의 행복부터 지켜 주어야 한다.

 이상 마냥 흔들리던  인간의 모습으로 아이 앞에서 정당성을 찾으려 하면 안 된다.


내가 엄마가 되었음을 엄마가 되기를 원했고 엄마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제대로 마주 해야 한다는 것.

아무리 힘들어도 나의 문제를 아이의 문제로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

엄마가 아이의 위협이 되면 안 된다는 것.

나 또한 아이였다는 것.

내가 아이의 전부라는 것.

아이는 이런 나를 어떤 순간에도 사랑한다는 것.

내가 아이에게   있는 것은 오로지 사랑뿐이라는 .

그 어떤 것도 아이 때문이 아니라는 것.


나는 '괜찮은 엄마'가 되기 위해 '어른'이 되기로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품이 너의 숲이 되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