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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여름 May 13. 2021

내 품이 너의 숲이 되길

애씀으로 만들어가는 숲.


아이가 밤잠을  자지 못하는 날이 많다. 어떤 날은 소화가 안되는지 방귀를  울곤 하고, 어떤 날은 이앓이인지 성장통인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구르기도 하고, 어떤 날은 변비로 인해 배가 아파 깨서 변을 보기도 한다.  어떤 날은 이유를   없이 그저 지칠 때까지 울다 잠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울음에 책임이 있으며 그로 인해 마음이 고된 나는 어떻게든 아이를 달래 보려, 아이를 다시 재워보려, 그것도 안되면 아이를 진정시켜보려 나름대로 노력해 보지만 수포로 돌아가는 날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의 날은 아이가 자신이 울고 싶은 만큼 울고 괜찮아져야만 잠이 들든 울음을 그치든 진정이 되든 한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나는 엄마라서 엄마여서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한다. 싫다며 발버둥 치는 아이를 억지로 당겨  껴안아보기도 하고, 소리치며 우는 아이에게 말을 걸며  우는지를 알아내려 애를 쓰고, 불을 켜서 아이의 잠을 깨우려 하거나 물을  오기도 한다. 때때로  것들 중에 하나가 먹혀들기도 하니 뭐라도 해보자는 심산이다.


오늘도 그런 날들 중 하루였다. 아이가 깨서 잠 못 드는 밤은 방에서 잠드는 그 누구라도 결단코 굿잠은 포기해야 하는 날. 그런 날이다.

우렁찬 울음소리로 깼음을 알린 아이는 한동안 울음을 멈추지를 못하고 반복해서 울고 멈추고를 이어간다. 육아서에서 보면 아이가 잠에서 깨었을 때 굳이 아이를 안거나 어르고 달래지 않고 스스로 다시 잠이 들 수 있도록 기다려 주라고 하는 글을 자주 보았기에 잠자코 기다려 보았지만 육아서 속에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닐지니. 내 생각대로 된다면 육아가 아닐지니. 결국 나는 배게에 묻은 머리를 떼고 일어난다.


아이의 등을 쓰다듬어도 보고, 기저귀도 확인해보고, 어디가 아픈  아닌지 물어도 보고, 다리도 주물러보고, 안아도 봤지만 돌아오는    울음소리와 나의 손을 거부하는 몸짓이다. 나는 이때가 가장 힘들다. 아이가  손을 밀어낼 , 아이가  품을 거절   그때가 가장 힘이 든다. 좌절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도 같다.   아기라면 응당 엄마의 품을 가장 편안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기라면 울다가도 엄마의 품에서 안정을 찾고 안식을 얻는 것이 맞지 않은가. 어째서 거부하는 걸까. 어째서 이토록 발버둥을 치고야 마는 걸까. 나는  순간 나의 역할을 상실하고 만다. 나는 어쩌면  존재가 아이에게 그런 쓰임이라고 어렴풋이 규정지어 놓았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쓰임이  던져져 상실되는 순간 좌절하고야 만다. 하지만 그런 상실의 밤은 반복된다. 엄마이기 이전에 그저 나약한 인간인 나는 그리 작은 상실에도 마음이 헝클어지곤 한다.


나를 밀어내는 아이를 엄마의 품을 거절하는 아이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린다. 그저 지척에 앉아 아이의 등을 쓰다듬다 그마저도 싫다 하면 그저 가까이 앉아서 가만히 이름을 불러준다. 다정히 최대한 다정히 불러 본다. 그러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 또다시 거절의 기색이 느껴지면 그마저도 멈춘다. 그럼에도 엄마여서 엄마라서 그만둘 수 없어서 드문 드문 아이에게 스킨십을 시도한다. 발을 만져보고, 손을 잠깐 잡아도 보고, 볼에 손을 가져다 대 보기도 하고, 엉덩이를 토닥여도 보고. 조금 진정된 아이가 거부하지 않으면 그제야 아이를 품에 안을 수 있다. 지친 채로 내 품으로 폭 안겨오는 아이의 몸을 힘껏 안아주었다. 불안하지 않게 조금이라도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토닥여주었다.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하루 동안  품으로 아이를 얼마나 안아주었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제대로 마주 안아준 기억이 었다. 아이의 "엄마 안아주세요."라는 말에 "그래 엄마 이것만 하고 안아줄게."라고 대답한 순간스친다.


하루 종일 아이를 제대로 안아주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내 품이 아이의 숲이 되기를 아이의 쉼이되기를 바랐던 걸까. 아이를 품고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당연히 아이는 내 품에서 안식을 얻으리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내 품을 과대평가해온 것은 아닐까


내 품이 아이의 숲이 되는 것. 내 품이 아이의 쉴 곳이 되는 것은 일상의 시시 때때에서 아이의 위로가 아이의 기쁨이 아이의 안전이 되어주었을 때라야 가능하리라.


아이가 잠에서 깨어 울면서 불편해할 때, '왜 내게 안기지 않는 거야'라고 생각하며 거부하는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날들이 있었다. 아니 조금은 미웠던 것도 같다. 내게 이런 좌절을 안기는 내게 이토록 큰 상실감을 주는 아이가 미웠던 것도 같다. 그런데 어쩌면 아이에게 내 품이 그다지 위안이 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창피하게도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지친 몸을 기대오며 살풋 잠이  아이를 본다. 어째 안겨있는 모양새가  심장에 귀를 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울음이 잦아들고 숨소리가 느슨해진 건가 싶기도 하다. 가만히  심장에 귀를 대고 있는 사람.  소리를 이토록 편안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정말 너뿐이지.


지금, 오늘,  순간. 아이가  품에서 늦게나마 고요하다는 것이 감사하다. 아이에게  품이 숲이기를 꿈꾼다. 울창한 아름드리 숲은 못되어도, 녹음이 짙게 우거진 근사한 숲이 아니어도 아이의 조각조각의 일상의 숲에 어쩌다 만난 초록이나, 떠다니는 부서진 햇살쯤이어도 좋다. 그저 대가 없는 쉼이 곱다.

그러기 위해 매일 매시 매때, 내 품이 아이의 기쁨이 되고 내 품이 아이의 안전이 되고 그렇게 내 품이 아이의 안락함이 되기 위해 애쓰려 한다. 그렇게 애쓰다 보면 어느 날엔 내 품에 안기는 것만으로 아이의 뾰족하게 쏟아 난 감정의 모서리가 둥글어지는 마법을 부리는 날도오리라. 내 품이 아이의 생에 작은 숲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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