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길

by 문학교사 체

만 오십이 되면 그만두어야지 했다. 결국 그만두지 못했고 만 오십하나가 되었다. 그만두어야지를 처음 떠올린 게 언제였나? 곰곰 생각을 해보는데... 특정할 수가 없다. 당황스럽다. 퇴직을 심심풀이로 꿈꾸는 경박한 인간 같으니라고.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책 제목도 있던데 항상 나에게 학교는 ‘이런 데’이면서 방학, 성과급, 명절휴가비, 복지포인트, 교사엄마, 교사며느리, 교사아내라는 사회적 인정 등 달콤한 미끼의 유혹을 던져대는 ‘그런 곳’이었다. 처음, 그만두어야지를 꿈꾸었을 땐 아마 시한부 여주인공을 떠올리며 감정이입해대던 여고생의 낭만 같은 마음이었겠지. 희뿌연, 햇살이 비치면 후다닥 달아나버릴 안개 같은, 교실 문을 열고 “얘들아, 안녕” 하는 순간 증발해버릴, 퇴직은 올 것 같지 않던 미래였겠지.


나름 인생의 희노애락을 겪고 흰머리가 늘고 주름과 기미를 보며 내 얼굴이 아닌 것만 같은 내 얼굴을 받아들이는 날들이다. 얼굴로 먹고사는 연예인들은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며 화무십일홍이라고 젊을 때는 젊어서 다 예쁘니까 늙어서 예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날들이다. 레이스, 시스루, 보헤미안스타일, 빈티지, 좋아하는 옷이 어울리지 않아 현타가 오는 날들이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제1의 과업을 어느정도 해내고 잠깐의 휴지기 속에서 인생에도 막이 있다면 2막의 시간을 준비해야 하는 날들이다. 인생 2막과 퇴직의 상관관계를 따지며 중요변수로 등장한 돈과의 관계를 정립해 나가야 할 날들이다.


그렇다고 내가 워라벨족이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반대다. 일과 삶의 균형, 워라벨을 추구하는 동료들에게 삶은 대개 부동산, 주식, 자식교육, 골프, 리조트 같은 것이었다. 문제는 워라벨을 추구하는 이들의 일이 대개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떠넘겨진다는 것이다. 이해타산에 어두운 사람들은 처음에는 선의에서 나중에는 살기 위해 워라벨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 중간쯤 있다. 살기 위해 워라벨을 해야 하는 상황까지 가기 전에 일과 나의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 그냥 쉽게 말해, 내 인생에서 이 일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인가 생각해보는 것이다.


박노해의 언어는 당신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켰나요?


발제자 지원님의 질문이 기억에 남는다. 박노해 사진에세이집 『다른 길』을 읽는 동안 나는 내내 설레고 좋았다. 맑은 호숫가에 앉아 있는 것처럼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 속에 있었다. 누군가 이 책이 너무 밋밋하다고 하여 발제자가 미리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를 같이 읽어오라고 하여 시리즈물을 다 빌렸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송 과장, 정 대리, 권 사원. 정말 재미가 없다. 확실히 다른 두 갈래 길을 보며 나는 박노해의 다른 길이 맞는 사람임을 더 잘 알게 되었다.


인생 2막에 꼭 함께하고 싶은 것을 생각해본다. 책과 여행. 이 둘은 꼭 함께하고 싶다. 너무 풍족하게 누리지 않고(누리고 싶어도 불가능하긴 하다), 지구별 여행자로,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나온 것처럼, 권정생 선생님처럼 너무 슬프게는 말고, 소소하게 즐기고 선한 영향력도 행사하고(욕심이 과한가). 그리고 빠질 수 없는 돈. 인생 2막에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할지, 그것이 문제로다.


우리 인생에는 각자가 진짜로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 나에게는 분명 나만의 다른 길이 있다.그것을 잠시 잊어버렸을지언정 아주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지금 이대로 괜찮지 않을 때, 지금 이 길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질 때, 바로 그때, 다른 길이 나를 찾아온다. 길을 찾아 나선 자에게만 그 길은 나를 향해 마주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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