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by 독서일기


2025년이 꼭 나흘 남았다.

마침내, 한 해를 돌아볼 때가 되었다. 마침 어젯밤 건강검진 결과통지서를 받았다. 앞장 그득히 타이핑이 되어 있었다. 나쁜 콜레스테롤 수치가 약 복용의 경계선까지 올라가 있었고, 대다수는 지난해와 큰 변동이 없으니 추적 관찰하라는 말이었다. 콜레스테롤은 정직하게도 나이나이먹는 만큼 수치가 올라갔고, 식습관 챙기고 운동해야 한다는 압박을 남기고 내년을 기약한다. 식습관과 운동으로 콜레스테롤을 잡기 어려움을 알지만 생활습관을 개선해서 나쁠 건 없으니 2026년은 꼭 건강한 먹거리와 규칙적 운동을 실천하고 싶다. 생활습관도 성격이나 기질을 닮아선지 한 우물을 파지 못하고 하다 말고 하다 말고를 반복해서는 안될 일이다. 무언가 하나를 진득히 실천하는 사람은 얼마나 듬직한가. 습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들인 시간보다 횟수가 중요하다니 12월에 와장창 무너진 생활습관 복구에 나서야겠다.


독서생활도 돌아본다. 2월부터 시작한 책도깨비 덕분에 처음 접하는 책 세상에 발을 들여놓았다. 리베카 솔닛, 오드리 로드, 클로디아 랭킨, 비비언 고닉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여성 사상가들의 예민한 통찰, 치밀한 감성, 문장. 페미니즘의 세계에 한참 늦었지만 스스로 걸어들어온 나를 칭찬하고 싶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래라 저래라 훈계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시공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있는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독자는 관, 찰함으로써 문제를 인, 식하게 된다. 비비언 고닉의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를 읽는 동안 나는 직장에서 지뢰 같은 동료를 건드리지 않고 피해갈 수 있었다.


대학에서의 시간을 헤쳐나가는 여정은 내게 마치 순례길과도 같았다. ... 때로는 환영받았고, 때로는 무시당했으며, 또 때로는 동등한 사람을 대하는 정중한 태도로 받아들여졌다. 만남마다 제각기 다른 결과가 뒤따랐다. 나는 받아들여지면서 무언가를 배웠고, 무시당하면서 또 다른 무언가를 배웠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어떤 경우든 나는 매일의 대화가 굴러떨어지는 텅 빈 공간에, 열렬한 수다를 둘러싼 그 윙윙거리는 침묵에 충격을 받는다. 내가 학교에서 알게 된 것이 있다면 그 침묵의 역사다.(‘영혼을 죽이는 사소한 일들’ 중)


깜짝 놀랐다. 뉴욕 대학교수들의 모습과 지금 학교에서 나의 모습이 너무 닮았다. 그래서 뒤에 어떻게 되는데? 고닉은 ‘사실은 정말로 혼자 있는 게 더 쉽다’며 마무리한다. 아마 혼자 맨발걷기를 하러 나갔을지 모른다. 열렬한 수다를 둘러싼 그 윙윙거리는 침묵에 맞서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뢰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을까 폭발로 많은 사람들이 다쳤을까? 거기까지 나아가보지는 못했다. 비슷한 상황을 맞닥뜨린다면 그때는 나아갈 수 있을까. 나아가야 하는 걸까. 아무튼,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여성 사상가들의 책세상에서 나는 유럽 어느 골목길에서 만난 독창적이고 사랑스러운 플리마켓을 구경하듯 이곳저곳을 샅샅이 쏘다니며 흥미로운 하루를 보냈다.

돌아보니 2025년은 역사적으로 기록될 만한 한 해다. 내란이 일어났고 일으킨 자는 갇혀서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고, 변한 것보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이 많은 일상을 살며 그래도 한 발 나아가보겠다고 애쓴다. 올해 읽은 책들도 어쩌면 그 애씀의 흔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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