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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학교사 체 Jun 05. 2020

라면이 멋있는 줄 모르고

공선옥, <라면은 멋있다>

“엄마, 반이 안 되는데.”

“그럼 본문 인용해봐.”

“인용해도 안 돼. 한번 봐봐.”

하나, 둘, 셋, 넷...열하나, 열둘. 열두 줄. 

“음...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재미없다는 거네.”

“넌 멋있다 카고 라면 먹어서 카니까 다아 카는데 엄마는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러니까 생각을 좀 해야지. 왜 라면은 멋있다 캤는지.”

“생각해도 모르겠다니까.”

“야, 모르겠는 거 중에 그래도 제일 말이 되는 거라도 써봐야지. 결론이 모르겠다가 되면 안 되잖아.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니까 이것저것 생각해보고 끼워맞춰는 봐야지. 근데...니 왜 또 우는데?”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카는데 자꾸 생각해보라 카니까.”    


아들은 또 화장실로 간다. 아들은 눈물 콧물 풀고, 나는 한숨 쉬고. 한달에 한번씩은 반복하다 보니 이제 이 패턴도 익숙해져서 서로 흥분하지도 않는다. 베란다로 가 빨래를 걷으며 음소거로 아들 욕을 한 마디 하고 나니 기분이 좀 낫다. 결국 아들은 <라면은 멋있다>를 싹 Delete 해버렸다. ‘그래, 얼마나 재미없는지 한번 보자.’    


역시,

공선옥이 그렇게 재미없을 리가 없지.     


“넌 멋있어.”

“라면 먹어서?”

“다아.”  77p    


가난한 고등학생 민수와 연주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다. 연주는 임대아파트에 살고 민수는 다세대주택에 산다. 누나가 대학에 입학해 돈이 많이 드는 학원은 못 가고 한 달 독서실을 끊으면서 연주를 만난다. 독서실은 물론 여학생을 만날 수 있는 장소이며, 한 달 전 실연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끊은 것이다. 라면을 먹을 돈밖에 없는 민수는 연주와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고 나면 집까지 걸어간다. 팔다 남은 햄버거와 따뜻한 편의점 캔 커피로 손을 녹이며 추운 공원에 앉아 세상사는 이야기도 나눈다.     


민수가 부잣집 아들인 척 하는 걸 연주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여드름 난 얼굴에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는 민수보다 연주는 성실하고 착하고 귀여우며 시근도 있다. 어딜보나 민수보다 나아보이는 연주는 왜 시공일관 민수를 멋있다고 하는 거지? 아들이 모르겠다고 할 만도 하다. 연주에게 부잣집 아들인 척 거짓말이나 하고 부모에게 독서실비를 받아 공부도 안 하는 민수는 멋진 구석이 없다.   

   

“세상이 갈수록 잘사는 사람은 더 잘살게 되고 못사는 사람은 더 못살게 되는 게 문제야.”

“너희 집은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 집은 아빠가 작년과 올해 똑같이 일해서 똑같이 버는데도 작년보다 더 살기 힘들대. 그게 문제야.” 56-57p    


아르바이트까지 해가며 공부하는 여고생 연주에게 어른인 척 세상 이야기를 해주는 민수를 연주는 멋있다, 어른스럽다고 표현한다. 비슷한 처지의 남자친구가 말없이 기다려주는 것만으로도 연주에게는 위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 같으면 여드름 투성이 남자아이가  거짓말 하는 걸 멋있게 봐주지는 못했겠지만, 연주는 어른스럽고 착하니까. 연주를 만나면서 민수는 성실한 데도 가난한 부모님을 다시 보게 되고 아무것도 열심히 하지 않은 자신을 반성하기도 한다. 연주 때문에 진짜로 멋있어질 수도 있다. ‘라면’이 ‘멋있다’는 연주에게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가난해본 적이 없는 아들이, 가난한 누나와 형의 인생이야기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겠다. 다만

   

“넌 집에 가면 뭐 해?”

“밥 먹고 책 좀 보고 컴도 좀 하다가 음악도 듣고 그러다가 자는 거지 뭐.”

말해 놓고 나서 캬아, 어떤 자식인지는 몰라도 자식이 신세 늘어졌구나, 소리가 절로 나오려고 했다. 29p    


신세 늘어진 그 자식이, 아들, 너인 줄은 알아주면 좋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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