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충남도지사의 정무비서 김지은 씨가 지금 제 옆에 나와 계십니다. 어서 오십시오. 이건 정말 쉽지 않은 자리여서 저희들도 모셔도 되는가 하는 걱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김지은 씨께서 직접 나오셔서 밝히겠다는 의지도 분명하게 표현을 해주셨고 그래서 이렇게 모시게 됐는데요.…”
2018년. JTBC 뉴스룸에서 안희정 비서의 성폭행 미투가 실시간으로 중계됐다. 뭐? 안희정? 팬까지는 아니어도 진보적이고 의리 있고 잘 생기기까지 한 괜찮은 정치인으로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충격이었다. 숨죽이고 인터뷰를 지켜봤다. 피해자라는 여자 비서가 하는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 지사님은 하늘이라느니, 너는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라느니, 모두가 NO라고 말할 때 너는 YES라고 해야 한다느니, 잊으라느니… 뭔 조선왕조실록도 아니고 21세기에 왠 하늘 타령!
“저 여자 좀 이상하지 않아?”
“왜 갑자기 JTBC 나와서 인터뷰를?”
“정무비서로 승진했는데 왜 이제 와서?”
안희정은 다음날 바로 사과했다. 모든 걸 내려놓겠다고 했다.
“안희정 부인이랑 아들 너무 안됐다. 제일 피해자잖아.”
3년이 지났다.
나는 김지은을 잊었고 『김지은입니다』가 여기저기 소개될 때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지난해 독서토론모임에서 『내 술상 위의 자산어보』를 읽었다. 개그 프로 보면서 웃을 수는 있어도 책 읽으며 웃는 건 참 어려운 일인데 그 어려운 걸 해내는 놀라운 필력을 보여주는 책이었다. 모임 진행자가 소감을 물었다. 다들 재밌었고 밑줄을 긋다가 포기했다고 했다. 아름다운 문장이 너무 많아서. 마지막 차례에서 J가 말했다.
“기분이 나쁘고 불쾌했어요. 전복 사진까지 보여주면서 여성을 전복에 비유할 수 있어요?”
문제의 부분은 이렇다.
‘전복이란 게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비밀스러운 곳을 일부러 보여주는 것 같았다. 제기랄, 보이는 것 모두 움찔거리고 있는 전복 같았다.’
여기에 만개한 전복 사진을 곁들여 놓았는데 다시보니 민망했다. 예술과 외설의 차이. 이미 예술이라는 판단을 내린 나는 이 정도의 외설은 허용할 수 있다며 나의 민망함을 예민함이라 여기고 그 부분을 슬쩍 넘겨버렸는데(타인으로부터 예민하다는 평가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J의 발언은 용감했고 나는 쾅-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래, 그거. 불쾌함. 같은 여성이 전복 취급받는 데 나는 왜 불쾌하다고 느끼지 못하는가’
성감수성이 떨어져도 한참 떨어지는구나.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2020년 가장 잘 한 일이 『김지은입니다』를 읽고 토론한 것이라는 지인의 페북 글을 보고 책을 주문했다.
하루만에 다 읽을 걸 아껴가며 읽었다. ‘지은 씨, 미안했어요.’ ‘지은 씨, 미안해요.’를 몇 번이고 되뇌였다. 저 여자 이상하지 않아? 안희정 부인이 제일 불쌍해.라고 말한 내 입을 쥐어박고 싶었다. 진실을 보고 싶어하지 않고 질투심에 눈이 멀어 뉴스에까지 나와서 미투를 하는 여자라고 생각했던 내가 괴물처럼 느껴졌다.
안희정의 참모진들은 나를 ‘순장조’라고 불렀다. 왕이 죽으면 왕과 함께 그대로 무덤에 묻히는 왕의 물건처럼, 수행비서는 왕과 운명을 함께하는 것이라고 했다. 15p
계약 연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일밖에 모른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6년을 버텼고 학교도 어렵게 졸업했다. 나는 금융채무이자, 병환 있는 가족을 부양하는 실질적 가장이자, 성과로 평가받는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안희정 측 변횐이 나를 가리켜 말한 ‘고학력 엘리트 여성’은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친 결과일 뿐이었다. 내 또래의 많은 이가 나와 비슷하게, 제각기 노력하며 살고 있다. 75p
“아가씨가 비서냐?” “수행비서가 여자라고?” “남자 상사를 모시는데 여자 수행비서라니, 야, 스캔들 나겠다.” 그런 말들을 하며 혀를 끌끌 찼다. 더 조심하려 노력했다. 혹시나 사람들에게 조그만 오해라도 받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조심했다. 여성이라는 편견 때문에 쫓겨나지 않고, 내게 주어진 업무를 성실하게 해내고 싶었다. 85p
미투 이후 나는 “왜 네 번이나 지사의 방에 갔느냐”는 말을 수없이 들어야 했지만, 그날들은 사적 심부름 때문에 불려 갔던 수백 번 중 아주 일부에 불과했다. 늦은 밤, 새벽, 퇴근 후, 휴일에도 몇 번이고 불려 가 심부름을 했다. 담배나 라이터가 떨어지면 준비해두지 않았다고 질책을 받았다. 100p
안희정도 마찬가지였다. 출근을 하면 내 얼굴부터 발끝까지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내 속눈썹을 살피기도 했고, 화장과 옷에 대해 평했다. 다른 직원들이 말하는 건 불쾌한 수준이었지만 안희정의 말과 행동은 공포였다. 눈빛이 너무나 무서웠다. 온몸에 닭살이 쭈뼛 섰고, 불안한 심경을 티내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이 상황이 반복되자 누군가 먼저 이런 일을 알아주고 막아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혹시 지사님 눈빛 알아?” “지사님 눈빛 무섭지 않아?”라며 주변의 여성 동료들에게 은근히 물은 적도 있다. 123p
또래보다 체구가 작고 겁이 많고 눈물이 많고 조용히 책 읽는 시간을 좋아했던 어린아이,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것이 꿈이었다는 지은 씨.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지은 씨, 미안했어요. 그녀에게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를 아프게 했을 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서 뒤늦은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