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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미수 김 Oct 08. 2022

돌아오다

돌아오다.

돌아왔습니다.

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 우리 가족은 사과 섬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이렇게까지 걸릴지 몰랐습니다.  공항에 도착한 순간 반가웠습니다. 숨이 너무나 편하게 쉬어집니다.  소음이 들리고•복잡한 사람들•도시의 해를 가리는 듯한 높은 빌딩과  콘크리트 정글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웠습니다.  우리에게 소중하고 의미 있는 기억도 같이 돌아왔습니다.  나와 나의 딸아이가 그 수많은 시간과 세월을 보낸 반 앤 책방의 흔적입니다. 나의 세 살의 딸아이가 그때부터 스스로 고르고 모은 책의 양이 30 상자가 되어있었습니다.  그 책상자들은 이삿짐과 함께 운송차에 실려서 3주 후에 딸아이에게 우리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이 책상자 안에는 운전을 못하는 운전을 무서워하는 엄마와 함께한 나의 딸아이의 수없이 6년을 걸은 발자국의 흔적과 추억이 담아있는 소장품 같은 것입니다.


우리 가족은 짐이 운송되는 날짜에 맞춰서 딸아이의 학교를 등록하고 미리 계약한 새로운 콘도에서 하나씩 하나씩 짐정리 준비를 시작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전과 같은  도시의 삶 •사과 섬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늘의 구름을 껴안고 있는 듯한 푹신하고 포근한 행복함입니다.  여전히 나와 나의 딸아이의 걷는 삶은 계속될 것입니다.


딸아이 아빠에 관여된 일로서 저희 가족은 20**년의 시작으로 사과 섬 뉴욕 시장의 관저에서 연례적으로 치르는 재향군인의 (Veterans Day) 조찬 행사에 초청되었습니다. 재향군인의 날은 국가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서 싸우신 참전 용사들의 노고와 희생정신 그리고 감사와 위로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영광스러움과 함께 그들의 애국심과 숭고함에 감사함을 표현하고 전하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매년 초청을 받았을 때마다 초입에서 각 개인의 신원 조사 그리고 2번의 통과를 지나는 시큐리티 점검 후에 뉴욕 시장 관저로 들어갑니다.  사방에 배치된 수많은 경호원들이 보입니다. 영화에서가 아닌 현실에서 더한 실감을 느낍니다. 조찬이기에 음식을 준비하는 셰프도 직원들도 모두 귀에 투명한 이어폰을 꽂고 있습니다. 다다른 복장에 모든 이들은 한쪽 귀에 투명한 이어폰을 꽂고 뱃지도 보이고 총집에 내장된 권총도 보입니다. 그들은 각자 배치된 자리에 서있습니다.


딸아이는 경호원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어떤 경호원은 하이 파이브 손뼉도 마주쳐 줍니다.  딸아이에게 친절하게 불편하지 않게 다정히 말도 걸어주고 건네줍니다. 그 조찬에 동양인 군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초청된 관계자 들과 사람들 중에 동양인은 우리 가족뿐인 것 같습니다. 글쎄 그래서일까? 한 기자가 저희한테 다가와서 몇 가지 요청을 합니다.  남편은 어린 딸아이를 생각해서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고 명함을 건넸습니다.  우리 가족은 조찬이 끝난 후에 다음 순서인 뉴욕 시장의 연설을 듣기 위해 안내에 따라서 옆장소로 옮겼습니다.


그 장소 안에는 신문 방송 기자 카메라와 미디어들이 자리 한 곳에 대기 중에 있습니다.  해군 공군 육군 해병 대외에도 다른 소속의 군인들이 있습니다.  우리 가족은 소개받은 장군들의 시작으로 각 계의 군인들 참석하신 노병들께도 초청받으신 분들과도 천천히 인사를 나눴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함과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분들 중에 한국 베트남전에 참전하신 노병들도 계셨습니다. 그 노병들 중에 한 분이 우리 가족에게 어느 나라 사람인지 물으셨습니다. 갑자기 딸아이가 “한국 사람”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 노병께서는 잠깐 동안 한국 베트남 참전에 대해 회상을 말씀하셨습니다.


남편은 전합니다.

“Thank you for your service! It’s an honor sir!”

-당신의 공로에 대해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선생님


그분들을 보니 한국인으로서 대한민국 국군과 참전 용사분들의 감사함을•대한민국의 국군의 날 10월 1일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순간을 갖게 했습니다.


행사의 모든 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가족은 작은 보탬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양귀비 꽃브로치를 내년을 위해서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전장에서 전사하신 군인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상징인 양귀비 꽃(poppy) 재향군인의 날에 추모하는 마음으로 양귀비 꽃을 가슴에 다는 전통이 현재까지도 세계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은 1000개의 양귀비꽃 브로치를  하나하나로 된 부분들을 조립하듯 맞혀서 일주일에 시간을 보내고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재초청을 받은 20**년 재향군인의 날에 뉴욕 시장의 관저에서 조찬을 마치고 퍼레이드 행렬이 시작하는 장소로 갔습니다. 1000개의 양귀비 꽃 브로치를 부족할 수 있지만 퍼레이드에 관여하고 참가하는 이 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했드렸습니다.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나 뿌듯하고 울컥한 순간이었습니다.


이때까지도 앞으로 어떤 순간이 우리 가족에게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전혀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재향군인의 날 뉴욕 시장과 함께하는 조찬 참석




어느 주말 남편과 딸아이의 에어 라이플 사격연습을 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섬으로 남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향했습니다.  롱아이랜드 잇스프레스 로드에서 갑자기 앞에 앞에 차가 멈추면서 그 뒤차가 멈추고 앞에 차와 우리 차는 거리가 충분히 있어서 간격을 두고 멈추었습니다.


그런데 몇 초이었을까? 정지되어 있는 우리 차가 추돌사고가 났습니다.  뒤에서 속력을 줄이지 않고 그 속력 그대로 우리의 차를 들이받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뒷좌석 오른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바로 그 뒤를 그 받치는 순간 나는 잠깐 숨이 멈췄던 한 순간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브레이크를 받는 소리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 뒤차 운전자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부딪치는 그 순간 안전벨트가 타이트하게 더 조여졌습니다. 숨을 쉬는 것조차도 조여지는 것 같았습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남편은 정신을 잠깐 잃고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앞 좌석에 앉아 있는 나의  딸아이에게 계속 말을 시키고 있었습니다. 차 안에 로드서비스 SOS 시그널이 자동으로 켜지면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우리 차는 독일 SUV 새 차입니다.

이 순간 우리가 승차하고 있는 이 차는 그대로 폐차 모양으로 한순간에 바뀌었습니다.


몇 분 후에 바로 이 도로에는 소방차 3대 경찰차 4대가 도로를 장악하고 모레가 뿌려집니다. 앰뷸런스 7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도착했습니다. 큰 사고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사이렌 소리와 함께 앰뷸런스에 실려 응급실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다가온 이 현실의 순간으로부터 뜻밖에 삶이 시작되는 신호음이 울리는 것 같습니다.


응급실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검사를 받기 위해서 각 간호사에 의해서 흩어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나는 딸아이와 같이 있기를 바랬습니다. 간호사는 종이 두장을 가져와서 나의 사인을 요청했습니다. 나는 나의 검사를 후로 늦추는 것에 나의 결정•책임에 동의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나의 딸아이가 검사를 하는 동안 같이 머물러 옆에서 지켰습니다.

그 뒤로 10시간이 지난 후에 우리는 응급실을 나와서 우버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에도 응급실 의사의 처방으로 우리 가족은 병원을 다시 찾아 더 자세히 검사를 받았습니다.  


몇 개월 후에 갑자기 나에게 고통의 증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 자신이 나의 몸과 정신이 고통•통증으로 온몸이 덮이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저절로 떨리고 뼈가 서로 긁기는 것 같은 세포에 전기가 흐르는 같은 느낌입니다. 강한 진통 약을 먹습니다. 강한 진통제를 맞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나마 누워서 있으면 그나마 편해집니다.

누워서 숨을 천천히 가누는 동안에 시작된 모든 고통 때문에 눈물만 흘려 나옵니다.  너무나 심한 통증에 병원에서 강한 진통제를  맞았지만 통증은 가시지 않았습니다. 얼음팩을 올리고 1시간이 지난 후에 다른 진통제를 맞았습니다. 여전히 통증은 나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집으로 부축을 받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새로 조재해 준 약만 8가지 종류입니다.  죽을 거 같은 느낌이 듭니다. 너무 억울한 마음도 듭니다. 정신이 밖으로 나갈 거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냥 힘이 없어지고 그냥 포기하고 싶어 집니다.

하루가 너무나도 하염없이 길게 느껴집니다. 배변도 누워서•먹는 것도 누워서•물도 누워서•딸아이를 안는 것도 누워서•누워서 이것밖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고통과 통증만 나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보다 나를 가까이서 지켜주는 남편과 딸아이의 보살핌도 나에게 둘러싸인 통증•짜증•분노•괴로움으로 다가오지 못했습니다. 고마움을 나는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절벽 끝 코너에 갇힌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두려움을 벗어나려고 피하고 싶어서 몸서리를 쳤습니다.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고 싶은 감정뿐이었습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강하게 마음을 가지려고 안간힘을 써보려고 했습니다.  냉정하게 공평하게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견뎌야 할 수밖에 없다는 이 감정의 기복은 반복되었습니다.  나는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현재의 되새김을 계속 반복했습니다.


뼈가 깎이듯이 뼈가 서로 긋어내는 것 같은 고통을 겪기에•아픔을 느끼고 괴로움을 겪을 때 소리를 지르고 눈물과 땀으로 젖고 범벅해서 흘릴 때…

나를 보는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에게•나를 숨 쉬게 하는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안타까웠습니다. 마음이 아리고 쓰렸습니다.


인생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다는 글귀를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는 기쁨이 올 수도 있을 거라는 잠시나마 꿈도 가져보았습니다.  그러나 정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고 인정하려고 다짐하고 다짐하고 다짐했습니다.  

너무나 괴로운 순간의 연속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을 것입니다.  결과를 예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과 섬에서 엄마 빠삐욘의 치료가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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