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빨간 봉투 시절을 추억하며...
1.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Once Upon a Time in America> (1984,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
영화 역사상 최고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이 영화는 1920~1930년대의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워낙 방대하게긴 영화를 (1984년 깐느 영화제 개봉 버전은 229분, 2015년 감독 확장판은 무려 4시간이 넘는 251분에 달한다.) 100분으로 짧게 편집한 국내 버전으로 봤기 때문에 필자가 봤던 영화는 스토리를 파악하기조차도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멋있었다”. 갱스터, 금주법, 이민자의 뒷골목을 그리는 특유의 암울한 분위기. 그리고 여기에 더해진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 스토리 파악 여부와 무관하게 영화는 압도적으로 매혹적이었다.
어린 시절의 제니퍼 코넬리가 연기하는, 소녀 데보라가 무용을 하고, 그 장면을 소년 누들스가 몰래 쳐다보던 장면은 나에게 두고두고 기억되던 명장면이었다. (여성의 신체를 훔쳐보는 남성의 관음증적 시선을 대놓고 예술로 만드는거냐고 비판받을지언정, 이 장면은 여성인 나에게 무척 매혹적이었다.)
이 영화의 포스터는 아마 영화 그 자체보다 더 유명한 듯하다. 뉴욕의 맨해튼 브릿지를 배경으로 안개가 자욱한 거리를 5명의 인물이 가로질러 가는 그 포스터 말이다.
금주법이 한창이던 그 시절의 아메리칸드림을 상징하듯, 쓸쓸함과 희망이 공존하는 뉴욕의 감성이 그 한 장의 영화 스틸로 표현되어서일까. 뉴욕에 있는, 실제로 “덤보”로 불리는 이 거리는 영화가 개봉된 지 벌써 40년이 되었지만, 포스터 속 인물들의 모습처럼 맨해튼 브릿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언제나 분주하다.
2.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Once Upon a Time... in Hollywood> (2019,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이후 약 35년이 지난 2019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라는 비슷한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졌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과 브래드 피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만남으로 제작 단계부터 화제가 되었고,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영화광으로 유명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답게 이 영화는 영화에 대해, 할리우드에 대해 따뜻하고 유쾌한 헌사를 보낸다.
영화는 1960년대 후반,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그 시절 실존했던 배우들과 실제 있었던 사건들을 허구적으로 변형시켜 캐릭터와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예를 들면 전설적인 배우 이소룡 캐릭터나 조디 포스터의 어린 시절로 추정되는 (어른보다 더 어른스러운) 아역 배우가 등장하는 식이다.
영화의 백미는 영화 초반부터 쌓아온 사소해 보였던 여러 에피소드들이 후반부로, 내러티브 전개상 절정 부분으로 촘촘하게 다다른다는 점이다. 내러티브 전개상 절정이 곧 결말에 해당하고 영화의 마지막인 후반부에 나오는 독특한 구조의 영화이다.
이 후반부는 내러티브 전개상 놀라우면서 동시에 스토리 측면에서 통쾌하다. 미국에서 연쇄 살인마로 악명을 떨친 찰리 맨슨을 추종했던 일당이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집에서 벌였던 실제 있었던 사건을 재구성한 것이다. 실제로 있었던 비극적인 가정사를 통쾌하게 변형시킨 후반부로 향해 나아가는 영화의 서사.
할리우드를 향해 보내는 영화광의 러브레터가 아닐까.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생략한다.)
3. 옛날 옛적 미국에서: 세상의 변화를 목도하다 (2000년대 중반, 필자의 경험)
필자에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이자 “원스 어폰어 타임 인 할리우드”는 약 20년 전인 2000년대 중반의 미국이다.
당시 필자는 영화 예술과 영화 산업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LA에서, 그것도 할리우드와 아주 가까운 지역에서 실제로 살면서, 대학원에서 영화와 문화 이론을 공부하던 때였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그날의 충격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무심히 집에서 TV를 보고 있었는데, 한 광고가 나왔다. 광고 자체는 아주 단순했다.
화면 가득 핸드폰 화면이 보였다. 그리고 단지 핸드폰을 들고 있는 손과 손가락이 보여지고, 그 손가락이 핸드폰의 여러 아이콘들을 터치하고, 화면을 움직이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인터넷 검색을 하고, 그러다가 물론 당연히 (그때까지 나 자신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었던) 핸드폰 본연의 기능대로, 전화를 거는 것으로 끝맺는 광고였다.
그렇다. 현대인의 삶에서 이것 없는 일상은 상상할 수도 없는, 최초의 터치스크린 스마트폰, 아이폰의 TV 광고였다. 지금 회고해 보면 그 시절은 아이폰뿐만 아니라, 지난 20년간 현대인의 라이프 스타일을 바꾼 미디어 기업들이 대거 탄생했던 시기였다.
바로 유튜브, 페이스북, 그리고 넷플릭스.
유튜브가 처음 생겨나서 같은 분야를 공부하던 선배가 “You Tube” 스펠링까지 가르쳐줘 가면서 그 사이트에 한번 들어가 보라고 알려줬던 일, 너도나도 주변 지인들이 페이스북에 가입하기 시작했던 일들이 새록새록하다. 게다가 넷플릭스는 또 어땠나.
현재 OTT의 첨병을 달리는 넷플릭스는 그 당시만 해도 우편으로 배달해 주는 DVD 대여 업체였다. (심지어 이 서비스도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인, 시대를 이끌어가는 서비스로 평가받던 시절이었다.)
넷플릭스 웹사이트에서 보고 싶은 DVD를 신청하면, 우편배달부가 DVD를 집으로 배달해 준다. 그 DVD를 다 보고 나면, 넷플릭스를 상징하는 그 빨간색 봉투에 DVD를 넣고 길거리에 있는 우체통에 넣어서 반납하는 방식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원시적인가.
영화광이자 영화 이론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었던 필자는 넷플릭스 DVD가 배달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그 빨간 봉투가 우편함에 도착해 있으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더 이상 이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없어서일까. 넷플릭스의 DVD 대여 서비스가 작년 9월을 마지막으로 미국에서 종료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넷플릭스 빨간 우편 봉투.
그 때는 몰랐지만, 돌이켜보니 찬란했던 젊은 시절, “옛날 옛적 미국에서”의 아름답고 아련한 노스탤지어의 한 부분이 되었다.
굿바이 to 넷플릭스 빨간 봉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