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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두 Dec 13. 2020

뜨개질 이야기

다정함을 기억하며

    스물두 살 겨울이었다. 가까이 살다 멀리 간 친구와 오랜만에 만났다. 늦은 생일선물이라고 포장지에 잘 싼 뭔가를 받았다. 헤어지기 전까지 풀어보지 말라고 해서 겉만 열심히 눌러봤다. 푹신푹신했다. 옷을 샀나? 했다. 내 사이즈 모를 건데.


    집에 와서 룸메이트가 보는 앞에서 포장지를 풀었다. 거기에는 잘 짜인 넥 워머가 들어있었다. “직접 했는데, 조금 맘에 들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만 노력했어요. 생일 축하해요!” 서툰 한글이 비뚤비뚤 적힌 카드와 함께였다.


맨 오른쪽이 친구에게 선물받은 것. 왼쪽 둘은 내가 나중에 뜬 것.


    나는 큰 감동과 문화충격에 휩싸였다. 친구는 키가 190cm에 가깝고 옆으로도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거구의 미국인 남성이었다. 내 안에 동화책을 통해 박혀있던 긴치마를 입고 뜨개질하는 할머니 그림이 와장창 부서졌다. 할머니들이 추운 밤 기력 없지만 심심해서 하는 일 아니었어?


    나중에 친구를 다시 만나 뜨개질을 어떻게 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겨울이고 심심해서’ 룸메이트 세 명이랑 시간이 맞을 때마다 다 같이 뜨개질을 했다고 했다. 친구의 룸메이트는 전원 친구보다 우람한 운동선수였다. 그만한 손으로도 가느다란 실이 다뤄지는 게 좀 놀라웠다.

   

    거기에, 개중 내게 목도리를 떠준 친구 외 한 명은 섬세한 편이 맞았지만 다른 둘은 아니었다. 나랑 비슷하게 뭘 하든 대충 흉내 내고 나면 잘한 것 같다고 생색을 내는 타입이지. 갑자기 오래전 포기한 뜨개질을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일상이 바빠 그 일은 금세 잊혔다. 나는 이듬해 대학을 바꾸고 전공을 바꾸고 거주 국가를 바꾸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후에도 한참 해본 적 없는 일들을 하느라고 바빴다.


    다시 뜨개질 생각을 하게 된 건 그때로부터 오 년이 지난 겨울이었다. 한참 내 졸업을 가늠해보던 때인데 만성 우울증이 다시 한번 힘을 냈다. 일상이 축축 쳐지고 아무것도 할 엄두가 안 났다. 그 해 말에 결혼일자를 잡아뒀는데 그냥 취소하면 편하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면 적어도 결혼식을 건너뛰거나….


    그때 같이 살고 있던 친구 V가 자기 남은 실이 있다고 코바늘을 쥐어줬다. V 역시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아왔는데, 자기는 그럴 때면 굵은 실로 손을 움직여서 방석 같은 걸 만든다고 했다. 성취감 느낄 일을 조금씩 해주면 우울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는 게 더 쉽다고.


    손댈 생각이 들지 않는 과제를 해치우는 대신 거실에 드라마를 틀어둔 V 옆에 앉았다. 금방 무릎담요 하나가 나왔다. 힘 조절을 잘 못해 보기 미웠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며칠 후 나는 처음 만들었던 담요를 풀어 다른 걸 짜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훨씬 더 큰 담요를 만들어보겠다고 나섰다. 크리스마스 전에 완성해서 내가 나랑 약혼자 주는 선물로 할 요량이었다. V가 준 실이 금방 동나서 늘 과제를 위한 미술용품을 사러 다니던 가게에 가서 실을 몇 타래 더 샀다. 시월 일이었다.


    내가 담요 만들기를 끝낸 건 이듬해 삼월이었다. 본래 만들려 했던 것의 반만 한 크기로 그쳤다. 하지만 무릎담요 만들었던 데서 기운을 얻어 가을학기도 무사히 마치고, 이사도 하고 크리스마스를 맞아 오래 함께 산 룸메이트와 그 가족도 방문하고, 결혼도 예정대로 했다.


    그 후 나는 때때로 코바늘을 들었다. 굵은 실로 멋 부린 유아 담요를 떠 출산한 친구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다양한 색을 섞어 더블 침대를 다 덮는 커다란 담요를 떠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썼고, 그다음에는 좀 더 얇은 실로 두 종류의 목도리를 만들었다.


    하나 시작할 때마다 정신없이 매달려 작업하는 대신 일상을 살다 한 번씩 생각나면 손을 대는 수준이라 완성까지 걸리는 시간은 천차만별이다. 짧으면 몇 주, 길면 몇 달. 하나 끝내고 다음 것을 시작하기까지 손 놓고 지내는 기간도 길다.


    만든 작품은 매번 스물두 살 때 받은 친구의 솜씨를 따라가지 못하고 어설프다. 시작한 부분과 마무리 지은 부분에 준 힘이 달라 영 웃기게 생긴 것도 있고, 슬쩍 보기에는 괜찮지만 유심히 살피면 한두 땀 잘못 꿰어버린 구석이 있기도 하다. 뜨는 자세가 웃기다는 말도 들었다.



    그래도 나는 코바늘을 놀리며 시간 보내는 게 즐겁다. 피곤한데 속이 허한 날 실을 들면 손이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잡생각을 막아주는 게 좋고, 그럴듯하게 나온 결과를 선물로 건네는 것도 재미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친구들이 떠올라 힘이 난다.


    지금껏 잘 쓰고 있는 목도리를 떠 준 친구의 따뜻함과, 아주 지쳐있던 내게 코바늘을 쥐어준 V의 다정함은 앞으로도 오래 든든할 것 같다.


    다음은 가방을 만들까 스웨터를 만들까? 머리띠나 마스크 걸이도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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