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결건조기까지 동원한 비축
시엄마에게는 신기한 취미가 있다. 당신 어머니, 그러니까 남편의 외할머니께 물려받은 것으로, 비축식량을 잔뜩 쟁인 식료품 저장고를 가꾸는 일이다. 한국에서 비축이라고 하면 재난이 발생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72시간 서바이벌 키트 정도를 떠올릴 것 같은데, 시엄마의 저장고는 여섯 식구가 최소 반년은 족히 버틸 수 있을 규모다.
그 뿌리가 어떻게 되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미 동부에서는 비슷한 양상의 가내 비축이 드물지만 서부 및 중서부, 남부 시골에서는 비교적 쉽게 접할 수 있단 점을 고려할 때 이동 및 겨울나기를 위한 비축이 일상이던 서부개척시대의 흔적과 개인의 안위는 정부에 맡길 게 아니라 개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믿음에 기반한 보수적 정치 관념 및 종종 예수 재림이 언급되는 기독교 신앙이 뒤섞여 근간이 된 게 아닐까 한다.
시엄마의 저장고는 집 안 깊이 위치해있다. 언덕에 선 집 특성을 살려 낸 지하실로, 여름에도 서늘하다. 면적은 일반적인 고등학교 교실 절반보다 조금 크지 싶다. 하얗게 페인트칠된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냉기와 사느란 박하향이 풍긴다. 쥐와 벌레를 쫓기 위해 찬장 어딘가 둔 뚜껑 없는 박하 기름병에서 나는 향이다.
네 벽에는 시아빠가 직접 짜 만든 튼튼하고 키 큰 선반이 주르륵 붙어 섰다. 보관하기로 한 물품에 따라 선반 높이를 다르게 해 둔 게 눈에 띈다. 선반에는 시엄마가 채운 식료품이 종류별로 가득하다. 직접 만든 각종 병조림으로 시작해 요리에 쓸 기름, 소금, 설탕은 물론이고 후추나 카레가루 등의 향신료에 달걀흰자 건조 가루 따위의 희한한 것도 잔뜩 있다.
주 보관 품목은 식재료지만, 칫솔치약이며 양초, 화장실 휴지와 세탁세제 등도 구비되어있다. 그중 뭔가를 터서 쓰게 되면 금방 새로 사서 채운다. 식료품이 주 품목이긴 하지만 생필품 창고 역할도 해서, 칫솔이며 치약, 휴지 등도 쟁여져 있다. 그 양이 적지 않아 2020년 초 미국서 코로나로 인한 휴지 대란이 일어났을 때 아무도 동요하지(?) 않았다.
시가에 지내는 동안 나와 남편이 쓰는 방에 가깝기도 하고, 뭐가 있나 구경하면 재밌는 데다 내가 알짱거리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시엄마가 나 먹으라고 한국 컵라면, 초코파이를 비롯해 야금야금 잘 빼먹는 각종 과자를 꼬박꼬박 챙겨주시는 덕분에 나는 시엄마의 식료품 저장고를 꽤 잘 안다. 그래서 지난 8월, 새 선반이 들어섰을 때 이번에는 또 뭐가 더 쌓일까 많이 궁금했다.
이번에는 또 뭘 더 넣으려는 걸까? 있을 건 다 있는 것 같아 예측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이틀 후 밝혀진 정답은 ‘동결 건조한 음식’이었다. 길 건너인지 언덕 아래인지 사는 이웃이 동결건조기를 들였는데, 각종 야채와 과일은 물론이고 조리한 고기도 훌륭하게 보존 가능한 상태로 만들어준단 말에 시엄마도 동결건조기를 집에 들이기로 했던 것이다.
동결건조기는 진공상태에서 건조물을 영하의 온도로 얼리고, 고체가 된 얼음을 곧장 기체 상태로 승화시켜 음식물에서 수분을 제거하는 기계다. 전에 애들 건강 간식으로 판매되는 동결건조 과일칩을 먹어본 적 있어 보존식 만드는 방법 중에 그런 게 있는 건 알았지만, 집에 도착한 기기를 보기 전까지 나는 그게 가정집에서 들여놓고 쓸 수 있는 물건인지 몰랐다.
사용 시 꽤 많은 소음과 열기가 발생하는 관계로 안 쓰는 짐가방이며 매트리스 따위를 두던 작은 창고방이 비워졌다. 커다란 선풍기도 설치됐다. 동결건조기의 한계를 파악하기 위해 시엄마는 정말 온갖 것을 다 넣어봤다. 집에서 요리한 고기는 물론이고 각종 수프에 피자, 빵부터 스키틀즈 따위의 시판 사탕까지 오만가지가 줄줄이 실험대에 올랐다.
치즈나 버터 따위의 너무 기름져서 얼릴 수 없는 걸 제외하고는 대부분 넣은 모양 그대로 수분이 빠져 쪼그라든 채 바싹 말라 밖에 나왔다. 수분이 빠진 탓인지 본래보다 맛이 진해져서 짠 건 더 짜지고 단 건 더 달아졌다. 온갖 종류의 아이스크림마저 그랬다. 버석버석해진 아이스크림을 과자처럼 베어 무니 희한했다.
마른 그대로를 간식으로 입에 물고 있으면 금방 녹아 사라지는데, 위장에서 물에 불어 본래 질량으로 돌아오는지 조금만 먹어도 배가 찼다. 입에 넣기 전에 물을 부어두면 어느 정도 흡수해서 부드럽게 부푸는데 파스타는 본래 식감을 거의 되찾지만 이유식같이 뭉그러지는 음식이 더 많았다. 와중에 맛은 본래와 비슷하게 되어 먹는 내내 혼란했다.
어느덧 동결건조기가 집에 온 지 시간이 꽤 흘렀다. 그간 다양한 동결건조 음식이 저장고에 잔뜩 들어섰다. 일부는 평범한 지퍼백이나 유리병에 들어있어 누구든 원하면 간식처럼 집어먹을 수 있게 되어있고, 나머지는 소형 제습제와 진공포장의 힘까지 빌려 유통기한을 늘인 후 비상식품이 되어 선반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지난 추수감사절 만찬도 일부 동결 건조됐다.
연말연초가 다가오자 시엄마는 그간 저장고에 모아둔 물품 목록을 점검하고 보충,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래된 것은 가려다가 유통기한이 끝나기 전에 꺼내어 먹거나 버려야 하기에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고 복잡한 작업으로 시아빠와 두 분이 어딘가 신이 나 매달리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자꾸 동면 준비하는 곰이나 다람쥐 같은 것이 떠오른다.
남편과 연애하던 때 처음 시가를 방문해 시엄마의 저장고를 보고는 마냥 낯설고 신기한 가운데 왜 이렇게까지 할까? 이게 무슨 쓸모가 있지? 하는 생각을 했다. 최근 들어 코로나와 감염 차단을 위한 봉쇄조치 등 예기치 못한 사태로 비축의 유용성을 체감한 후로는 시가를 떠나 생활하게 되면 나와 남편도 작은 규모로 비상시에 쓸 수 있는 물품을 쟁여둬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시엄마처럼 열심히 매달릴 엄두는……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