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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두 Dec 30. 2020

비상시를 대비한 크리스마스

72시간 서바이벌 키트


    온 세계를 휩쓴 전염병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흘렀고, 어느덧 메리 크리스마스! 하는 경쾌한 인사가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연말이 됐다. 화려하게 꾸민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온 식구가 저마다 준비한 선물을 이리저리 포장해 가져다 둔 걸 크리스마스 아침에 모여 주고받으니 담긴 다정한 마음에 기운이 났다.


    올해 오간 크리스마스 선물은 대체로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집에 모인 전원이 성인이라 아기자기한 장난감 따위가 보일 구석은 없었고 개개인의 취미와 직업에 맞춰 필요할 것 같은 물품과 의류가 주를 이뤘다. 그런데 한 가지, 와, 이게 뭐야? 싶은 선물이 있었다. 다름 아니라 시엄마가 준비한 서바이벌 키트다.


    다른 선물을 모두 주고받고 나서였다. 시엄마가 트리 아래 줄을 지어 남아있던 세 개의 커다란 쇼핑백을 자리에 함께한 자식 셋에게 하나씩 건넸다. 하나 둘 셋을 세면 한 번에 열어봐야 한다는 말에 자식 셋이 주르륵 앉아 구호에 맞춰 개봉했다.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건 커다란 황갈색, 검은색, 카키색 군용 배낭이었다.


    이게 뭐야? 남편 옆에 앉아있던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이었다. 서류가방도 책가방도 아닌, 이 무시무시하게 생긴 가방은 뭐지? 남편의 미혼 형제 둘의 가방에는 원통형의 무언가가 하나씩 붙어있었는데, 남편의 가방에는 두 개가 달려있었다. 나는 얇고 투명한 플라스틱에 쌓인 원통을 눌러보고야 그게 압축해 둔 침낭인 걸 깨달았다.


    “서프라이즈! 이게 뭘까?”


    시엄마의 경쾌한 목소리에 남편 동생이 대답했다. 다소 당황이 묻어있었다.


    “72시간 키트?”

    “빙고!”


    시엄마는 각 자식에게 안에 든 새 제품들을 전부 꺼내 개봉하고 각자의 손에 맞게 가방에  다시 넣어 정리하게 했다. 정리를 다 끝나면 간단한 게임과 포상이 있을 예정이니 서둘러달란 말과 함께였다. 자리한 형제 중 유일하게 기혼인 남편의 가방은 침낭이 두 개인 데서 짐작한 것처럼 내 몫의 물건까지 들어있어 다른 둘의 것보다 조금 더 묵직했다.


    72시간 키트는 지진, 홍수 등의 자연재해는 물론이고 화재나 폭동 등의 위급상황에서 미리 준비해 둔 것만 가지고 탈출하면 최소 3일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생존 필수품 꾸러미다. 왜 72시간, 그러니까 삼일이 기한이냐 하면 상황 발생 후 3일 안에 제대로 된 피난처를 구할 수 있으리라 상정하는 때문이다. 그 안에 제대로 된 피난처를 찾지 못하면 이런저런 이유로 생존 확률이 급격히 떨어진단다.


    대학 교양으로 자연재해 관련 수업을 들을 때 비상시를 위해 각 가정에서 인당 하나씩 구비해두는 게 좋다고 듣긴 했지만, 실제로 꾸려진 걸 보기는 처음이었다. 수업을 듣던 때 생각하기로는 비상시 침구와 손전등, 맥가이버 칼, 비스킷 등의 유통기한이 긴 식품과 식수 조금이 든 것이면 되겠거니 했는데 시엄마가 꾸린 가방은 그 이상이었다.

서바이벌 키트의 모습. 의류와 식품은 가방에서 꺼내지 않았다.


    튼튼한 군용 가방 안에 든 물품을 나열하면 이렇다: 개별 침낭, 내의, 여분의 양말, 커다란 손수건, 아주 튼튼한 맥가이버 칼, 줄톱으로 활용 가능한 날카로운 와이어, 비상약품, 냉동건조식품, 2시간 반 동안 불을 피울 수 있는 메탄올 연료 한 캔, 방수 성냥, 휴대용 컵과 컵만 한 냄비, 포크와 스푼 겸용 캠핑 식기, 머리에 장착 가능한 손전등, 얇지만 보온성이 좋은 담요, 방수포, 로프, 방수 주머니, 물을 담을 수 있는 플라스틱 용기, 라이프 스트로와 여분 필터 여러 개.


    꼼꼼함에 감탄하는데 시엄마는 아직 마무리된 게 아니라고 그랬다. 호신용 무기도 있어야 하니 개인 총기도-한국인인 내게는 여전히 낯설지만, 있기는 있다. 쏘는 법도 배워 익혔고- 넣고, 내 몫으로 덜 큰 가방을 준비해 보온을 위한 의류와 추가 물품을 넣도록 조언하는 건 물론, 지난번 글에 소개한 식료품 저장고를 둘러보고 맘에 드는 비축품이 있으면 얼마든지 더 챙기도록 했다.

    

    가방 정리가 끝나자 시엄마로부터 새 숙제가 떨어졌다. 3분간 인터넷 검색 없이 방수포를 활용할 방도를 다양하게 적어보라고 그랬는데, 승자를 위해 준비된 상이 있다고 해서 다들 열심히 했다. 남편 형과 그 여자 친구, 나와 남편 팀이 각각 15개씩 적어 공동 우승했다. 반으로 나뉜 상은 이백 불(이십만 원 상당)이었다. 액수에서 시엄마의 진심이 느껴졌다.


    이후 신발끈을 활용한 시아빠의 다양한 매듭 시연이 뒤따를 뻔했으나 남편 형이 다음날 출근을 위해 떠나야 해서 무산됐다. 사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매듭 강의도 궁금했는데 한편으로는 그쯤 끝나서 다행이다 싶었다. 남편 형이 떠나고 나서는 평범한 크리스마스 일과로 돌아가서 맛있는 걸 먹고 놀았다.


    요즈음 시어른 두 분이 부쩍 자식의 비상시 안위를 걱정하는 건 2020년이 그만큼 특이했기 때문인 것 같다. 영화 속 상황 정도로만 여긴 전 세계적 전염병 창궐에, 미국 내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층위의 갈등이 폭력 사태로 이어지기도 했으며,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농축산업마저 삐그덕거렸다.


    대선 전후로 몇몇 대도시 사업체는 창문에 방탄 판을 대는 등 있을지도 모르는 소요에 대비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고, 당장 크리스마스 아침에도 뉴올리언스 번화가에서 폭탄 테러가 있었다는 뉴스가 나왔으니 2021년에는 2020년보다 더 큰일이 있을지도 모른단 염려로 속이 수런수런 하는 경우도 드물지는 않은 것 같다.


    당장 나와 남편도 다음 달부터는 시가를 떠나 다른 지역에 있을 예정인데, 혹 무슨 일이 나거든 뒤도 돌아보지 말고 집으로 오란 당부를 반복해서 듣는다. 나와 사고방식이 많이 달라 가끔 낯설기는 하지만, 위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인 게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정성 들여 구비한 72시간 키트는 크리스마스에 걸맞은 선물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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