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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pleLee Jul 13. 2016

좋은 상담(사)에 대하여..

마음 여행 이야기 05



깨진 그릇은 칼날이 된다. 무엇이나 깨진 것은 칼이 된다.

  오세영의 그릇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마음이 다쳐 아파하는 사람들을 대면하다 보면, 깨진 그릇이라는 그의 비유가 내 눈앞에서 재현되는 것을 경험한다. 나를 포함한 마음이 아픈 사람들 대부분은 과거의 상처들을 여과 없이 타인을 향한 분노(수동적, 적극적)로 표현한다. 깨진 마음이 누군가를 혹 자기를 상처 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다른 방법은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다른 방법을 배워볼 만큼의 마음의 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 그들이, 내가 처한 현실이다.


  우리의 마음은 상처가 들어오면 방어하고 자가 치유를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 인간만큼 상처받기를 온몸으로 저항하는 존재도 없으리라. 어찌 되었건 어린 시절엔 보통 본인의 전부와도 같은 부모가 치유책 자체이다. 안타깝게도 세상 모든 부모가 그런 치유책 자체가 되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만의 이유로 자녀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품을 제공하지 못한다. 나의 부모도 그랬다. 내 평생 그들은 나의 비빌 언덕이 되어 주지 못했다. 그것은 현재까지도 나에게 치명적인 아픔이 되고 있다.


  그릇된 그들의 양육태도가 내 마음 그릇을 깨뜨린 것이다. 한 번 깨어진 나의 마음은 웬만한 강력본드로도 붙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깨어진 마음의 조각들은 나도 모르는 어딘가에 고이고이 묻어 둔 채. 자라면서 단 한 번도 깨어진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어느덧 깨어진 내 마음 중 일부는 칼이 되어 나를 헤쳤고, 가까이 옆에서 사랑해주는 사람을 겨누고 있었다.


  좋은 상담은 궁극적으로 깨어진 마음을 붙여 주는 강력본드가 되어준다. 바꿔 이야기하면 좋지 않은 상담은 깨진 마음을 붙여주지 못한다. 깨어진 마음을 붙이는 것의 마침표는 치유이다. 반면 과정은 고통이다. 상담을 받기 전과 차이점이 있다면 과거의 나는 혼자였지만 이젠 상담 선생님(슈퍼바이저)과 함께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충분히 해 볼만 하다.


  그렇다면 좋은 상담은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좋은 상담이라는 말은 좋은 상담사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상담이라는 한정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줄 수 있는 것은 상담사 자신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결국 내담자(상담을 받는 사람)에게 치료책이 되어 줄 존재는 상담사 자체이다. 상담을 공부하고, 해보고, 받아보면서 알게 된 좋은 상담에 대한 중요한 세 가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첫째, 좋은 상담(사)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 색깔로 당신을 덧칠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개인적으로 오염시키지 않는다라고 정의하고 싶다. 상담은 다양하고 상당히 많은 양의 이론 공부를 요구한다. 하나의 이론만 공부하는 데도 10-20년이 걸린다고 한다. 하지만, 프로이트(심리학의 창시자)가 말한 것처럼 이론이 실재를 앞서지 못한다. 인간은 신묘막측한 존재이다. 책에서 배운 대로 반응하지 않는 내담자들이 허다하다. 그렇다 해서 이론 공부가 의미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좋은 상담사는 모든 이론에 통달하면서 동시에 무지한 채로 내담자 앞에 선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다년간의 자기분석 훈련(상담사가 받는 상담)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고 믿는다.


  한 번은 이런 적이 있다. 고 3 아이가 학교에서 자기 반항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토로했다. 누가 봐도 아이가 잘못했고, 나도 동의했다. 그 날 상담은 망쳤다. 나는 아이를 가르쳤다. 내가 갖고 있는 내 가치관을 아이에게 강제로 끼워 넣었다. 평소 그 아이 주변 모든 어른들이 행동 너머 근본적인 욕구를 보지 못한 채 꾸짖듯이. 다행스럽게도 다음 주에 아이는 와주었고, 어렵게 용기 내어 사과의 말을 전했다. 아이는 내가 자기 마음을 이해해 주지 않는 것 같아 한 주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초보는 확신하고, 프로는 경우의 수를 염두한 색다른 질문을 한다'는 말이 있다. 훈련되지 못한 상담사는 확신하고 그로 인해 그 안에 내담자를 가둔다. 반면 훈련된 상담사는 내담자에게 질문한다. 수정 가능한 확신을 가지고, 내담자의 말에 질문을 던진다. 내담자를 하나의 존중받을 만한 인격체로 대한다. 매 상담 시간이 새롭다. 이러한 새로움은 내담자에게도 전해져 활기를 갖게 한다.


  반면, 오염시키지 않는 상담사로 인한 답답함을 넘어 분노를 경험한 적이 있다. 그저 나 혼자 솰라 솰라 하며 50분 시간을 다 보내고 있었다. 내 이야기에 상담 선생님(슈퍼바이저)은 그저 공감과 이해로 반응했고, 나는 지루했다. 후에 상담받으면서 지루함의 원인은 나 자신이었음을 알았다. 상담 선생님(슈퍼바이저)이 내 삶에 간섭해서 지시하고 책임까지 져 주길 바랬다. 이런 원초적인 나의 욕구좌절에서 기인하는 답답함과 분노였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우리의 삶은 온갖 간섭으로 가득하다. 그게 과거의 치명적 상처이건, 현재의 스트레스 상황이건, 언론 매체의 강요 등 무엇이건 간에. 간섭으로부터 저항할 힘이 있는 사람은 투사가 된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신을 탓한다. 둘 모두 지나치면 일상생활에 어려움이 된다.


  나는 간섭에 저항하는 투사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익숙함에 빠져있었다. 인간 중 어느 누가 익숙함을 손쉽게 버릴 수 있을까?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익숙한 무엇인가를 버리기로 마음먹는다는 것은 나의 존재가 사라질 것 같은 공포를 견뎌내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서 건 간섭 탓을 하고 나면 내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신은 상담 초반 과정(6개월-1년:개인차 있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같은 상담사 때문에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꽤 괜찮은 상담사를 만난 것이다. 그건 그만큼 상담사가 본인의 색깔을 당신에게 덧입히지 않기 위해 꽤 많은 시간 훈련받아왔다는 증거이기에. 또한 참을 수 없다면 물어보는 것이 좋다. 가감 없이. 좋은 상담사는 기꺼이 질문을 넘어 당신의 근원적인 욕구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두 번째, 진솔하다.

  모르면 모른다고 이야기할 줄 안다. 그로 인해 나도 진솔해질 수 있는 용기를 갖는다. 한두 번은 속일 수 있다. 만남의 횟수가 길어질수록 나를 속이는 상담사의 반응은 마음의 문을 두드리지 못한다.

  

  상담 6개월을 넘어가던 시기에 이런 적이 있다.


상(슈): 제가 00 씨 이야기를 잘 공감해주는 것 같나요?

나: (짧은 침묵) 아니요. 공감 못하시는 것 같아요.


 당시 선생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부정적인 표현은 최대한 자제하던 시기였다. 그렇기에 나의 솔직한 표현은 대단한 용기를 낸 것이었다. 내 대답에 잠시 망설이던 선생님은 나처럼 어렵게 말씀을 이어가시는 것 같았다.


상(슈): 네. 솔직히 00 씨 이야기에 공감되지 않을 때가 있어요. 미안해요. 제가 00 씨 마음을 충분히 공감해 주지 못해서. 하지만, 저 최선을 다해 00 씨 마음을 이해해 보려 애쓰고 있어요.


  순간적으로 터져나온 눈물은 한 동안 멈출 줄을 몰랐다.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10분은 울었던 것 같다. 그제야 그동안 상담시간에 공감받지 못한다고 느꼈던 불편한 마음들을 이전보다 편안하게 쏟아놓았다.


  진솔함은 자신감에서 나온다. 진솔함은 자기를 위대하거나 존중받을 만한 사람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자기를 드러낸다. 치유되기 위해 찾아온 당신 또한 용기 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참된 진솔함은 상담사와 내담자 사이에 긍정적인 순환작용을 이끌어 낸다.


좋은 상담(사)의 마지막은 당신을 자유로 이끌어 준다.

  이때의 자유는 부당한 책임감이 주는 버거운 짐이 아닌 기꺼이 선택하고 책임질 수 있는 힘을 담고 있는 것이다. 과거 내 선택과 상관없는 고통 속에서 많은 일들을 부당하게 짊어져야 했다. 그 경험은 여전한 올무가 되어 슬픔과 어둠 속으로 나를 수시로 데려간다. 나아가 현재 삶까지 책임지지 못하도록 그리하여 종국에는 내 부모와 같은 삶을 살도록 한다. 철저하게 자유를 박탈당했다는 경험 속에 나를 가둔다. 과거 아픈 경험의 파괴력은 당사자를 넘어 그 주변 모든 세상을 마비시켜버린다.


  요즘에서야 과거 고통의 짐을 덜기 위해 했던 상담을 포함한 모든 시도들은 결국 그 모든 속박이 담겨 있는 과거로부터 자유를 얻고자 했던 나의 최선이었음을 깨닫는다. 비로소 그토록 처절했던 내 삶을 나는 이제 조금씩 연민으로 마주할 수 있다. 그리 애쓰며 산 내가 사랑스럽고 대견하다.

  또한 자유는 너무 많이 아파 깨닫지 못했던 나의 내면 깊은 곳 '영성'으로도 나아가게 했다. 신 안에서 아팠던 경험은 나만의 고유한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하게 되었다. 영성 안에서 종국에는 깨어진 마음 조각을 기꺼이 스스로 하나하나 주어가며 고통스럽지만 조심스럽게 붙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해 주었다. 내 아픔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수용하는 힘을 서서히 채워가고 있다.


  결론적으로 내게 좋은 상담은 자유를 위한 투쟁 작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자의 모습대로 자유를 추구하는 방법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자유는 당사자는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자유로 이끌어준다는 것을 나는 아주 조금씩 경험해 나가고 있다.


  상담을 꾸준히 받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너무 어려워 그만할까 하던 마음이 들던 어느 날 선생님(슈퍼바이저)에게 물었다. '선생님, 상담하면 뭐가 좋아지나요?' 다소 공격적인 나의 질문에 미소를 띠며 답변하시던 선생님(슈퍼바이저)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자유와 평화가 오지요.


  정확히 저 질문을 하고 2년 후부터 지금까지, 선생님(슈퍼바이저)이 말씀하신 자유와 평화를 아주 조금씩 맛보고 있다. 나는 이제 좋은 상담은 분명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나를 자유롭게 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삶 또한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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