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번째 이야기.
오전 9:55, 내담자의 부모님 도착 5분 전이다.
내담자와 합의한 내용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 어떻게 면담할지 방향을 잡는다.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상담실로 말쑥한 정장 차림의 중년 신사가 한 분 들어온다.
전반적으로 깔끔한 이미지, 잘 정돈된 머리, 먼지 한 톨 앉으면 금세 미끄러질 것 같은 정장 차림이었다. 옷차림에서부터 분명하고 단호한 태도가 엿보이는 것 같아 순간적으로 내담자가 평소 이야기해오던 아버지의 답답함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오늘 면담의 목적은 내담자가 좀 더 전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은 강박감으로 일상생활이 무너져 극심하게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청소년 내담자였다. 내담자는 누구보다 간절히 정신과 치료를 받기 원했고, 나 또한 동의했다. 미성년자인 내담자는 부모의 동의가 누구보다 필요한 상황이었다.
아니, 그걸 이겨내야지, 그걸 못 이겨내고 언제까지 도망만 다닐 거랍니까?!
"그리고 남의 시선 의식되는 애가 그렇게 화장을 짙게 하고 다닙니까? 오히려 모자에 마스크까지 쓰고 다 가리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하세요."
"네, 아버님.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죠. 실제로 그런 사례들도 많고요. 다만, 반대로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게 과도하게 의식되기 때문에 짙은 화장을 할 수도 있거든요."
"도대체 뭐가 문젠지 모르겠어요. 돈 달라면 돈 줘, 친구들이랑 나가서 논다고 하면 나가 놀아라. 근데 왜 학교를 안 가는 거냐고요."
"그러게요, 이해가 안 되니 아버지 마음은 얼마나 어려우시겠어요."
괜히 내 내담자의 입장을 더 설명하려다 아버지의 마음을 다치게 할까 싶어 조심스러웠다. 더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이후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를 포기하겠다 했고, 자신을 망친 것은 자녀라는 투사의 끝판왕을 시연했다. 이쯤 되면, 치료받아야 할 대상은 내 내담자가 아닌 아버지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끝내, 아버지는 이야기하다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급히 다잡고는 이 한마디로 정리했다.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은 우리 아이가 꼭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을 만나봐야 한다는 거죠?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할게요. "
청소년 상담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부모면담이다. 그중에도 특별히 어려운 점은, 부모 자신들의 고통이 너무 커 정작 쉽지 않은 자녀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겨워한다는 것이다. 그런 부모들에게 아이들이 처한 상황과 마음의 고통에 대해 Step by Step으로 설명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내담자를 위해선 꼭 해내야 하는 일이기에 어쩌면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하지만 늘 마음 한편에 맴도는 한마디가 있다.
차라리 다리나 허리가 부러져서 걷지 못하는 게 낫겠다. 이건 뭐 X-ray를 찍어서 보여 줄 수도 없고...
그렇다. 우리 중 누구도 다리나 허리가 부러진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넌 왜 걷지 못하니?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왜 걷지를 못하는 건데?! 노력을 해야지! 걷도록! 걸어!"
만약 우리 중 누군가 저런 말을 한다면 우린 그의 지능을 의심할 것이다. 신체적 장애를 입은 사람은 눈에 보인다. 하다못해 열이라도 펄펄 끓으면 우리는 곧장 병원으로 직행하고, 처방된 진통제와 해열제를 빠지지 않고 먹어야 한다고 상식적으로 안다. 그런데 마음이 아파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우린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거나 심리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그러면서 이렇게 묻기도 한다.
정신과 약 오래 먹으면 부작용 있지 않나요? 그것 때문에 꺼려져요.
"네, 물론 부작용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어느 약이 부작용에서 자유롭나요. 우리가 먹는 진통제, 해열제는 부작용이 전무한가요? 현재 마주하는 극심한 고통을 경감할 수 있기 때문에 부작용을 감안하고라도 우린 그 약들을 먹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약물에 대해 그렇게 걱정이 되시면 상담심리치료라도 받을 수 있게 도와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득을 하면 내 내담자가 조금은 더 전문적인 치료를 빨리 받을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을까. 그 고민을 한 지 10년.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기성세대들(4-50대 이상)에게 이걸 설명하기란 참 쉽지 않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고통 속에 있는 그 마음을 열어 보여줄 수만 있다면.. 그랬다면, 좀 나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