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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pleLee Aug 25. 2018

조금 덜 불행하길...

스물 두번째 이야기



뭘 하든 행복할 수 있을까요?






  일전에 그는 나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이 행복이라 했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세상은 그런 곳이 아니다. 곳곳의 수많은 한계와 장애물들은 우리를 단련시키는 연습장과도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망가지는 것을 막아준다. 마음대로 다 할 수 있는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어찌나 추하고 더러운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신의 특별한 보호를 받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뭘 하든 행복할 수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그였다. 아니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만 싶단다. 그런 그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노는 것에 만족이 있을까요?




아니요..





  이따금 만나는 내담자들의 뿌리 깊은 무기력은 높은 차원의 행복과 만족의 기준에 근원을 두고 있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면 그 기준은 평범한 인간은 감히 도달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정말 잘 살고 싶다.
미치도록 행복하고 싶다.




도달할 수 없는 기준점 뒤에 숨어 포기와 새로운 시도를 멈추는 것을 합리화한다. 안타깝게도 대부분 그 기준점은 처음에 타인에 의해 주어진 것들이다. 어찌 되었든 한번 들어온 그 기준점은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 어쩌면 찾지 않는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바로 그 곳에서 온갖 비극의 사이클이 만들어진다.



'무얼 하든 행복할 수 없다'는 명제는 세상 어느 곳에도 희망은 없으며, 제 아무리 발버둥친들 이 비극을 끝낼 길은 보이지 않는다. 점점 익숙해지고 익숙함은 새로운 곳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고 나아가 혹시나 옆에 누군가 새로움을 시도하는 것을 발견하면 시기심의 눈으로 바라본다.






놀이이건, 부모의 애정이건, 자신의 꿈이건 어떤 영역에서든 충분히 가져보지 못했던 그는 환상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환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과 주변 환경에 대한 원망과 자책으로 일상을 뒤 덮었다. 심지어 이혼으로 인해 혼자서 생계를 오롯이 감당해 내는 어머님을 향해 원망조차 마음껏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원망도 마음껏 못하는 처지, 거기서 오는 그의 비참함을 그 누가 알까.


애정과 미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상대와 20년 가까이 산다는 것은 평생을 양가감정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와도 같다고 하겠다. 어떤 날은 분노가 일어 철창을 잡고 쥐어 뜯다가 어떤 날은 너무 슬퍼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저 멍하니 공허함으로 천장을 바라보는 그런 죄수 말이다.


상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 '차라리 학대를 하거나 방치를 해서 아이를 돌보기를 포기한 부모들이 낫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부모는 적어도 마음껏 미워할 빌미라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미워해 본 적 있는 사람만이 다시 사랑할 힘을 채울 수 있다.


우리의 마음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내 화에 끝이 없으면 어쩌지, 이러다 정말 파국을 맞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으로 원망을 마음껏 하지 못한다. 물론 단서는 있다. 안전한 곳, 받아줄 만한 능력이 되는 사람 앞에서 마음껏 쏟아 놓을 것. 이전에도 이야기 했지만 듣기는 고도의 전문적 기술을 요구한다.


다시 내 내담자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그는 부모의 이혼을 겪으며 감당할 수 없는 상실과 고통을 겪었다. 그 고통 앞 그는 자신을 구원해 줄 무언가를 고대했다. 그것이 사람인지, 물건인지, 행위인지는 명확지 않다. 분명한 것은 그 자신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자신을 구해 줄 존재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런 그는 환상을 만든다.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왜 그래야만 할까? 그래야만 자신이 처한 이 현실을 충분히 만족하지 못하는 합리화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나는 어느 날 물었다.


"저는 ㅇㅇ씨를 만족 하게 하나요?"


"어느 정도.."


"저도 ㅇㅇ씨를 100% 만족하게 못 하는 군요.."



"........"



"일전에 ㅇㅇ씨가 그러셨죠? 뭘 하든 만족함이 없다고.. 그리고 뭘 하든 행복하긴 어려울 것 같다고.. 그 때 답하지 못한 걸 지금 해도 될까요?"


"네...."


"그 후로 뭘 하든 행복하다.. 그 표현에 대해 고민해 봤어요.. 근데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구요.. 어느 정도가 되야 완전한 행복이라고 말 할 수 있는지... 그러다 이런 마음이 들더군요..  전 ㅇㅇ씨가 오늘보다 내일, 조금 덜 불행하길 바래요.."


한 동안 침묵으로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의 손등으로 툭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그 눈물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가 곱씹고 있을 그만의 흐름을 끊고 싶지 않았다.


나의 그런 의도를 알아챈걸까. 그 후로부터 지금까지도 만나오고 있다. 누구도 그 무엇도 만족 시키지 못하는 그를 만나는 일이란 끊임없이 만족 시켜야만 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내 속 짚어 남의 속'이라는 조정래 작가의 표현처럼 나의 그 압박감 또한 내 내담자의 것이라 여기며 그를 바라본다. 그러고나면 이내 한결 가벼워져 그를 편안히 대할 수 있다.


부디, 그의 내일은 좀 더 자유로워져 마음껏 울고 분노하고 미워하고 증오할 수 있게 되길... 그리고 그 자유로움 속에서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나갈 수 있게 되길 간절함 담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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