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한 번째 이야기
최근 상담이나 코칭 등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특강들을 듣고 있으면 주제는 ‘듣기’인데 상대에게 내 말을 잘 전달하기 위한 ‘듣기’인 것을 적지 않게 발견합니다. 강의자 중 일부는 탁월한 말하기 기술(Technique)을 가르쳐 줍니다. 말하기 기술의 목적은 분명해 보입니다. 목적한 바를 최소의 투입으로 최대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저는 묻고 싶어 집니다. 듣기가 과연 기술 즉 기법(Technique)의 문제일까요? 적어도 제가 경험한 듣기는 기법이나 기술의 측면이 아닌 태도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오랜 시간 수련이 필요합니다.
오늘 나는 잘 들었는가? 앞으로 어떻게 들을 것인가?
상담의 시작과 끝 늘 저 자신을 괴롭히는 질문입니다. 반면 늘 내담자를 향해 초점을 맞추게 해주는 좋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상담일을 하면서 듣기에 대해 고민해 온 두 가지를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듣는 것은 주도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온갖 듣기 기술을 동원하여 상대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어떠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 보겠다는 통제 의지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주도권을 말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넘겨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상담사인 저나 상담을 받으러 온 친구 둘 모두 자유를 가진 인격체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을 만날 때였습니다. ‘뭘 하면 되나요? 질문해주세요.’ 주도권을 넘겨받은 친구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합니다. 가정과 학교에서 자유를 가져본 적 없어 자신의 자유를 활용할 기회를 가지면 두려워하고 낯설어합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저의 그런 태도를 폭력의 경험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어른들과 다르게 자신을 대해주는 것에 대해 분노합니다.
인생의 가슴 아픈 사연은 주도권을 박탈당했던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 주도권 박탈 경험은 결핍을 만들어 냅니다. 통제하려는 부모님, 더 이상은 그 통제가 부담스러운 자녀들. 이 둘의 갈등은 한 마디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 그 자체입니다.
지난달 한 어머님은 찾아오셔서 자기 손안에 들어오지 않는 자식으로 인해 눈물을 펑펑 쏟으셨습니다. 욕구는 하나였습니다. 자신의 통제 안에 두고 싶은데 아이가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아이를 더 통제할 수 있는지 전문가의 기술적인 방법을 배우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이럴 때면 저는 참 난감합니다. 사실 저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 교과서적 방법, 뱉어버리면 책임지지 못할 말들은 해 드릴 수 있죠. 그렇지만 그 기법들은 태도가 바뀌지 않는 부모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공감 기법인 ‘그렇구나’를 배워서 사용하는 학교 상담 선생님들은 학생들로부터 ‘구나쌤’이라며 조롱받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앞서 기법을 알려달라는 부모님께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자녀가 그 문제를 갖고 오기까지 17년이 걸렸는데, 한 순간에 어떠한 기법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어머님은 불가능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상담에서 듣기의 목적은 주도권을 상대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주도권을 갖기 위한 듣기는 실패하고 맙니다. 어쩌면 그 어머니가 불가능하다고 한 것은 자신의 주도권을 자녀에게 넘겨주기 어렵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둘째, 듣는 것은 배우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규칙과 질서를 가진 소행성과 같습니다. 타인의 말을 통해 우리는 그 사람만이 가진 규칙과 특성 한 마디로 그 사람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할지 매뉴얼을 익히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그 매뉴얼이 신묘막측하기 때문에 10년을 알았다 싶다가도 10초라는 찰나의 순간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고 느끼게 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저 또한 상담실에서 2년 이상 장기간 만나오던 친구가 제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난폭해지는 걸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 친구를 그동안 꽤 잘 파악하였다는 저의 나르시시즘에 치명상을 입기도 합니다. 반면 그 순간이 그 친구를 다시 한번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또 배운 것이죠. 아마 상담만큼 배움의 끝이 없는 직업도 없지 싶습니다.
주말마다 클럽에 가느라 밤을 새우는 자녀 때문에 속을 앓는 아버님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하다며 찾아오신 적 있습니다. 아이에게 왜 그렇게 클럽에 가는 것이 재미있는지 물어본 적 있는지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흔들리는 눈빛과 함께 묻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묻지 않는다는 것은 배울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너는 잘 듣고 지혜를 얻어서(잠언 23:19)”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는 들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담 사례를 대할 때마다 그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곱씹어 봅니다. 아마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상담사들은 이런 작업을 반복할 것입니다. 그 속에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단 상담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누군가와 관계 속에 풀리지 않는 답답함이 있다면 그와 대화를 반추해 보면 비교적 쉽게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앞서 주말마다 클럽에 가는 자녀 때문에 힘들었던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자녀에게 묻지 않으셨던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뻔하지 않나요? 그냥 재미있어서겠죠.' 저는 그 면담을 통해 지레짐작의 무서움을 새로이 알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그 아버지 또한 누구도 그 자신에게 되물어 준 적이 없었다는 또 다른 비극을 마주했습니다.
부상을 당한 야구선수가 재활을 마치고 가장 먼저 하는 훈련은 야구를 처음 배울 때 익혔던 기본적인 훈련들이라고 합니다. 상담에서 기본은 '듣기'입니다. 학식과 경력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상담사는 매 시간 그 기본인 '듣기'의 자리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 어떠한 편견 없이 철저하게 내담자(상담받으러 온 사람)의 관점에서 들으며 동시에 전문가로서 나의 관점을 놓지 않으며 듣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공식이나 도식으로 보여드릴 수도 없고 어떤 단순한 기술(Technique)이나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내담자(상담받으러 온 사람) 모두는 각자의 관점을 갖고 있는 존재입니다. 공통된 기술(Technique)이 각 내담자마다 모두 다른 반응과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가르쳐 주세요.
상담일을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매 순간 내담자 앞에 설 때마다 이런 생각을 참 많이 합니다. 이제 막 자기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 보기 위해 간절하게 다가오는 그분들께 상담사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 태도뿐 아닐까요?
p.s. 부디 당신의 삶은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이 포기하고 배우게 되길 멀리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