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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pleLee Nov 30. 2017

반복한다. 고로 존재한다.

스무번째 이야기

'제 얘기 지겹죠?'


'무슨 뜻이신지요?'


'말 그대로예요. 지겹지 않냐고요.'


'구체적으로 얘기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물러서지 않는 내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다. 그런데 나로선 별다른 반응을 할 수 없다. 내담자가 말로써 표현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는 길은 전무하다. 만약 그것을 안다면 어딘가에서 용한 신내림을 받은 처자로 소문이 나 떼돈을 벌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신은 내게 그 능력을 주지 않으셨다. 터져 나오는 한숨이 그의 답답함을 대변하고 있었다.


  '여기 와서 거의 매일 힘든 얘기만 해요. 마치 제가 여기에 길들여지는 것 같아요. 힘든 얘기가 아니면 여기 오면 안 될 것 같은.. 그리고 선생님은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들어주시죠. 오늘 이런 제 모습이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네버엔딩 같아요. 어린 시절 아프지 않았던 사람은 없잖아요. 안 그래요? 근데 왜 저는 맨날 똑같은 얘기를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아 진짜 짜증 나요. 이제 더는 못 해 처먹겠어요.'






'왜 말이 없으세요?'


'생각 좀 하느라요. 뭐라도 지겨운 거리를 찾아야 하나 싶어서요.'


  어이가 없다는 듯한 웃음이 그의 입가에 번졌다. 나의 진솔함이 뜻밖에 그에게 웃음을 주었고 무겁던 공기는 가벼워졌다.


'오늘은 선생님 말씀을 듣기로 작정하고 왔어요.'


  역시나 내 내담자답다. 상담에 있어서 아집에 가까워 웬만해선 포기를 모르는 나의 성향과 잘 맞는 내담자. 하긴 그러니 5년 넘게 만나오고 있겠지만 말이다.


반 눕다시피 앉아있던 그의 몸이 내 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겨진다. 내 이야기를 기다리는 그를 위해 입술을 뗀다.


'지겹지 않아요. 언젠가 한번 00 씨가, 어떻게 잊겠냐고..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거라고.. 그날이 아마 아버지께서 의도적으로 00 씨를 길에 버려두고 혼자 갔던 것에 대해 얘기하셨을 거예요. 기억하시나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그였다.


'들어보셨을 거예요. 한이 많은 사람은 죽어서도 눈을 제대로 못 감고 귀신이 된다고.. 전 그 말이 한 편으로 일리 있다고 생각해요. 00 씨가 더 잘 아시겠지만 회복 불가능에 가까운 상처를 경험한 사람은 이미 그때 죽음에 맞먹는 경험을 하죠. 귀신도 구천을 떠도는데.. 살아있는 사람은 오죽할까요. 아무도 안 들어주었잖아요. 정작 들어줘야 할 사람은 어렵게 용기 내면 그 마저도 철저하게 복수했잖아요.  그러니까 했던 말을 계속 다시, 또다시 하는 거죠. 그리고 뭐 어때요. 말인데. 말도 못 하면 어째요. 말이라도 해야죠. 안 그런가요?'


생각에 잠긴 듯 한참 동안 말이 없는 그의 앙다문 입과 달리 눈은 벌게져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겨우내 받치고 있었다.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내용은 같을지 몰라도 저에겐 매번 다르게 들려요.'


툭하고 휴지를 뽑아 애써 참아온 눈물을 닦아낸 그는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상담이 끝날 무렵 이 한마디를 남기며 돌아갔다.  


'지겹지 않으시면 그걸로 됐어요.'







지겨워 그만하고 싶다던 그는 그다음 주에도 상담실 의자에 앉았다.


저 쫌 그렇죠? 결국 또 이렇게 올 거면서..


그래서 대단하신 거죠.


무슨 얘기세요?


반복을 이겨내고 계시니까요.


제가 지는 거 아니고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선생님도 참 대단하세요. 어떻게 맨날 똑같은 얘기를 듣고 또 듣고..


뭘요. 꾸준히 찾아오셔서 이야기해 주시는 00 씨가 대단하신 거죠.









  50분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 내담자들은 자신이 아팠던 에피소드를 털어놓는다. 에피소드는 바뀌지만 마음속 내담자의 깊은 무의식적 동기 즉, 내면 지도는 동일하다. 보통 이러한 내담자의 내면 지도 속 무의식적 동기와 욕구가 갈등을 만들어 낸다. 그러한 내담자의 역동을 이해하는 능력이 유능한 상담사를 가르는 기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복을 반복 자체로 이해하면 그 상담은 비극이 된다. 반복에도 맥락이 있고 변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반복이냐는 것이다. 또한 치료에 있어 반복은 반드시 필요하다. 때로 내담자가 자신의 반복하는 행동을 묵묵히 바라보는 상담사의 자세를 통해 치료되기도 한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떤면에서 반복은 엄청난 용기의 표현이다.


  해결되지 않는 타인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내느라 거의 모든 상담시간을 사용했던 적이 있다. 일주일에 1회, 2년 가까이. 내 기준에 비난받아 마땅하다 생각되는 그 사람을 향해 퍼붓는 비난은 한번 시작되고 나니 멈출 줄 몰랐다. 마치 그 사람을 증오하기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 같다는 착각에까지 빠질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20년 가까이 한 번도 원하는 만큼 제대로 비난하지 못했었으니 그 억눌린 감정의 힘은 얼마나 컸겠는가.


  당시 나의 슈퍼바이저(상담사를 상담해주는 상담사)의 그 인내가 오늘날 나를 있게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슈퍼바이저)는 어떠한 비난과 비판 없이 들어주셨다. 심지어 때로는 그 비난이 불처럼 번져 슈퍼바이저를 태우려고 할 때에도 마땅히 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앉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듣고 있는 그(슈퍼바이저)가 얼마나 꼴미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밉다고 말했다. 그럴 때면 그(슈퍼바이저)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미소를 보이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미워하는 내 마음을 담아주었다. 한 마디로 "네가 뭐라고 느끼든 그게 정답이야" 이 태도였다. 그렇게 2년을 지나던 즈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 지겨워요.

  내가 한 말이다. 여기에 덧붙여 비난과 원망하기 위해 태어난 듯한 나 자신과도 헤어지고 싶다고 했다. 진심이었다. 지긋지긋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반복에도 끝은 있다. 어떠한 반복이냐가 중요하다. 날 향한 따스한 시선과 어떠한 경우에도 나의 행복을 바라고 기꺼이 자신을 내어주는 상담사*앞에서 마음껏 반복해 본 결과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충분한 반복이 지긋지긋함을 주었고 그 지긋지긋함으로 타인을 향한 원망과 분노와 이별할 수 있었다. 반복이 준 위대한 선물이었다.

  사실 적지 않은 부분에서 마음의 아픔은 충분히 반복하지 못한 데서 온다. 우리 모두는 아이였을 때 반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놀이했다. 그러고 보면 같은 말과 표정을 수없이 반복하는 텔레토비가 영유아들에게 그토록 인기 있었던 것도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또 한편으로 반복에 대한 이러한 이해 속에서 마음이 아픈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을 마주하면 조금 더 잘 버텨낼 수 있다. 나아가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혹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반복에 갇혀 마음 아파하는 당신이라면 부디 그 반복이 당신에게 더 나은 삶을 가져다주는 밑거름이 되길 나의 신께 간절함 담아 빈다.








* 혹 오해하는 독자들을 위해 상담사에게 전문적 지식은 기본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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