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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pleLee Oct 31. 2017

사랑은...

열아홉 번째 이야기

  여자 친구가 단 한 번도 남에게 하지 못했던 자신의 아픈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그날 밤 우린 함께 했죠. 다음 날, 학교를 가는 다른 친구들의 발걸음이 저를 깨웠지만 못 들은 척 아니 듣고 싶지 않았어요. 그저 여자 친구 옆에 함께 해 주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어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만끽한 다음날의 대가는 분명했어요. 19년 가까이 제 인생에 스스로 엑스트라로 전락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주연급이 되셔서 등장하셨죠. 저의 뺨을 때리시고 멱살을 잡으셨죠.
  새벽녘 여자 친구의 급작스런 이별통보에 이미 제 마음은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 상태였거든요. "우리 그만 만나. 나 때문에 안 좋게 변하는 네 모습 지켜보는 거 너무 힘들어." 이 한 마디로 우리는 헤어졌어요.  근데 저는 지금도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사랑은 뭘까요..?”


"사소한 것 하나라도 함께하고, 상대방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그날도 여자 친구 옆에 있어 준 거였어요. 그런데 왜 저한테 헤어지자고 하는 거예요?"


"여자 친구에게 구체적인 이유를 물어보셨나요?"


"네, 제가 학교를 안 가고 부모님과 갈등이 생기는 게 자기 때문인 것 같아서 싫다고 하더라고요."



  나도 내담자도 잠시 침묵 속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선생님, 저는 여자 친구와 다시 만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여자 친구가 방법을 알려준 것 같은데요?"


"네? 무슨요?"


"학교를 성실히 다니고, 부모님과 갈등이 없었으면 한다고.."


  다음 회기 내담자의 표정은 한층 밝아졌다. 지난주 여자 친구에게 다시는 학교를 빠지지 않고 그런 문제로 부모님과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둘의 관계 또한 계속하기로 했다.







늘 나보다 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희생하는 것.



  연애와 사랑 때문에 힘들어하는 10대 내담자들을 만나다 보면 그들이 생각하는 '사랑'에 대해 들을 기회가 종종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이다. 이 말을 기준으로 지금도 꽤 많은 10대 청소년들은 서로의 시간을 희생하고 자신의 몸을 내어준다. 사랑에 대한 정의가 '희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자기희생'을 사랑의 전부이고 심지어 무엇도 대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인 것처럼 찬양하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물론 충분히 납득될 만한 맥락과 이야기 속에서 그려내는 이야기의 힘에 나 또한 매료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의문이 든다. '과연 희생이 사랑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것일까?' 직업적 특성상 '희생'을 강요당하거나 혹은 타인에게 강요함으로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이 들려주는 아픔의 메아리가 내 마음에 와 닿을 때 울림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자발적 희생은 아름답다. 눈부시다. 그러나 상대가 원하지 않는 시점 속 등장하는 희생이라는 이름은 또 하나의 강요이자 부담이고 나아가 이기심의 표현이다. 사랑은 우리 인간만큼 복잡하고 오묘하다. 한 가지 단어로 정리되기엔 수많은 의미들이 그 속에 담겨있다. 어쩌면 그러한 특성 때문에 우리 인간은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평생 고군분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맥락에서 내 내담자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의 부모는 그를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한 것이 별로 없다. 좀 더 솔직히 표현하면 그에게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만족에 가까운 희생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행복을 위해 그가 미처 준비되지 않았던 4세가 되던 해 이혼을 선택했다. 이러한 결핍은 가져보지 못한 희생을 거대하게 이상화시키게 만든다. 이상화된 바람은 반드시 이루어내겠다는 강력한 갈망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과정 속, 그가 만난 여자 친구는 이상화된 사랑을 실현하기에 충분한 기회의 땅이다.


  내 내담자가 포기하는 것들이 많아지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낀 여자친구는 헤어짐을 선택했다. 도망간 것이다. 도망간 여자친구를 어떻게 다시 되돌릴 수 있는지 묻는 내담자에게 나는 그녀가 해 주었던 말을 반복해 주었다. 하지만 내 내담자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기 세계에 빠져 듣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이 정의 내린 포기하고 희생하는 사랑이 옳기 때문이다.


  본인이 옳다는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멈춤이자 기다림이다. 내담자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혹은 진심으로 답을 얻기 위해 나에게 용기 내서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내담자를 이해하는 것과 그 이해한 것을 들려주는 시점에는 큰 차이가 있으며, 그때를 잘 아는 것이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 짓는 날카로운 잣대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내담자가 부디 내 마음속 말들을 이해할 수 있는 그때가 오기를..


  희생이 사랑의 전부인 것처럼 찬양하는 내 내담자에게 때가 되면 이 말을 해 주고 싶다. 자신의 성장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내고 삶을 지켜내는 것, 그 또한 상대를 위한 숭고한 사랑이라고. 부디, 우리의 오늘과 내일이 어제보다 더 삶에 충실하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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