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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pleLee Oct 05. 2017

몬스터 콜

열여덟 번째 이야기

+이 글에는 영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영화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최근 인간의 내면을 신선한 방법으로 그려내는 영화들이 꽤 자주 나오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인간의 무의식에 대해서 이처럼 정신분석적 메타포를 철저하게 잘 사용한 영화가 있었을까 싶은 작품을 접했다.

바로 '몬스터 콜'이다.

 







“두려운 게 당연하지. 하지만 넌 이겨낼 거야”

기댈 곳 없이 빛을 잃어가던 소년 ‘코너’.

어느 날 밤, ‘코너’의 방으로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거대한 ‘몬스터’가 찾아온다.

‘코너’는 매일 밤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외면했던 마음속 상처들을 마주하게 되는데…


단 넉 줄의 시놉시스.

유독 '두려운', '마음속 상처'라는 단어에 마음이 끌렸다.


  영화의 시작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열다섯의 코너로 시작된다. 악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공동묘지가 무너져 내린다. 이내 거대한 싱크홀의 벼랑 끝 매달려 있는 엄마의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 간신히 버티고 있는 코너. 거친 숨을 몰아쉬며 깨어난다.


다 자랐다고 하기엔 아직 어린,
그렇다고 아직 자라지 않았다고 하기엔 커버린 아이.



  이 내레이션을 바탕으로 아침에 일어나 익숙한 듯 자신의 할 일들을 해 나가는 코너. 우리의 일상 속 흔한 중학교 2학년 학생의 모습과는 다르다. 코너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해 미국에 살고 있고, 어머니는 불치병으로 투병 중이다. 학교에서 코너는 또래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별다를 것 없던 코너의 일상 속 어느 날 자정. 2층에 자리 잡고 있는 코너의 방 창문 너머로 저 멀리 공동묘지가 보인다. 공동묘지 한 켠에는 한 그루 고목이 우두커니 자리 잡고 있다.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던 코너 앞에 시계는 00:07을 지나고 있다.


  그때였다. 공동묘지 고목은 뿌리부터 툭툭 뽑히더니 사람의 형태로 변형되어 온 마을을 집어삼킬 듯한 발걸음으로 2층 방 창문을 부수고 들어와 코너를 집 밖으로 끄집어 데려간다. 고목의 이름은 몬스터. 몬스터는 세 가지의 이야기를 세 번에 걸쳐 들려주고 난 뒤, 네 번째 코너의 이야기를 듣겠다고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몬스터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코너 자신의 이야기를 몬스터에게 들려주어야 하는 것도 선택이 아닌 의무라는 점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3회에 걸쳐 들려주는 몬스터는 코너가 후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 때에는 죽음에 맞먹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반면 몬스터가 자신 앞에 나타날 때마다 코너는 몬스터가 엄마를 치료해 줄 것이라고 희망한다. 그러나 늘 그렇듯 영화는 관객의 기대와 희망을 앗아가는 것으로서 명작이 되는 비운의 운명을 타고났다. 엄마의 건강은 악화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순간으로 빠르게 전개된다. 코너의 심리적 상태 또한 더욱 나빠진다.


  엄마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코너는 그동안 희망하며 애써 참아왔던 울분을 온몸에 실어 잠들어 있는  몬스터를 깨운다.


왜 우리 엄마를 치료해 주지 않는 거야! 왜?!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온 건 널 치료하기 위해서였어!!!


    따져 묻는 코너 뒤로 엄마가 서 있다. 바로 그때 공동묘지는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거대한 싱크홀 앞 추락하는 엄마의 손을 자신의 온몸을 던져 잡는 코너. 매일 밤 코너를 괴롭히던 악몽 속 깨어나는 장면이었다. 잠깐의 정지화면을 끝으로 코너는 손을 놓는다.


이제 네 얘기를 해!!
싫어! 나는 할 수 없어!
네 얘기를 해야만 해!!
싫어!!
해!!
싫다고!!!
해! 코너!!

엄마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엄마의 손을 놓아버렸다는 자책감에 괴로워하는 코너에게 몬스터는 잠깐의 겨를도 허락하지 않고 코너 자신의 이야기를 하라고 몰아붙인다. 타협의 여지없는 몬스터의 강압적인 태도에 결국 진심을 토해버리는 코너. 그런 코너를 바라보며 이제껏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미소로 반응하는 몬스터. 끝내, 엄마는 죽고 코너는 새로운 삶을 맞이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뭐 눈에 뭐만 보인다'는 속담이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상징과 은유가 가지는 의미들이 이토록 쉬이 이해되었던 적이 있었을까 싶었다.  몇 가지 뇌리 속에 강하게 남아 있던 것에 대해 적어 보고자 한다.


  왜 공동묘지였을까? 

  몬스터는 공동묘지에 있다. 왜 공동묘지였을까? 프로이트에 의하면 우리 인간의 마음은 무의식-의식-전의식이라는 지형학적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한다. 보통 우리가 스스로 안다고 하는 의식과 전의식은 1%에 속한다. 99%는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의식이다. 우리는 마음에 감당하기 어려운 기억이나 사건 혹은 충동을 무의식에 구겨 넣는다고 한다. 한 마디로 무의식은 기억되고 싶지 않은 사건들의 공동묘지인 셈이다.


왜 사람 형태의 나무였을까?

  사람과 같은 형태로 변하는 몬스터는 우리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상징한다. 나아가 몬스터의 첫 등장은 뿌리가 뽑히면서 시작된다. 코너를 향해 걸어오는 몬스터의 발걸음에 모든 세계가 흔들거린다. 99%나 저장되어 있는 무의식은 우리의 근원이다. 그 근원을 상징하는 것이 나무뿌리이며 흔들거림은 무의식의 저항이 갖는 위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몬스터는 우리 자신이자 마음의 근원인 무의식의 상징이다.


 왜 코너는 무의식의 상징인 몬스터의 등장에 두려워했던 걸까?

  이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밀어내고 버리기만 하는 우리에게 무의식은 인생 속 어딘가에서 꼭 한 번은 저항한다. 일상 속 전에 없었던 변화들로써 무의식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코너에게 그것은 악몽이었다. 하나 분명한 점은 무의식이 이런 식으로 우리 삶에 뛰어드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도와달라는 것이다.


계속 이런 식으로 너의 진심을 억누르면 너한테 큰일이 생길까 걱정돼.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무의식이 보내는 이 경고 앞에 의연하고 태연할 사람은 없다. 영화는 이 부분에 대해서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영화에서 코너는 킹콩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며 엄마에게 사람들이 참 나쁘다고 이야기한다. 그때 엄마가 코너에게 해 주는 말이 무의식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하면 없애려고 해. 두렵기 때문이야.

 


  왜 몬스터는 코너에게 이야기할 것을 강요했을까.

  한 번도 자신의 감정에 대해 상징화시켜보지 못한 코너는 밤마다 악몽으로 보내오는 무의식의 편지를 알아보지도 듣지도 못한다. 결국, 몬스터는 코너가 알아들을 수 있는 눈높이에서 시작한다. 코너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 결정적 연관이 있는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끝난 뒤에는 코너가 보다 쉽게 자신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기를 빌어준다.

  감정은 우리에게 에너지를 요구한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사람마다 편차가 있지만 두배, 세배의 에너지를 요구한다. 이야기로 표현되지 못하는 감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값 지불은 생각만큼 간단치가 않다. 공동묘지에 버리면 끝이 아니다. 상징화되지 못하는 감정은 우리 내면 곳곳을 떠돌아다니다 후에는 신체적인 손실까지 요구하는 데 이른다. 스트레스로 인한 건강악화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얘기일 것이다.

  한 번은 자신이 처했던 상황 속 감정을 잘 모르겠다던 한 내담자를 상담한 적이 있다. 내담자에게 60장짜리 감정카드를 읽어 주고 본인이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카드에 '예스'라고 해 달라고 했다. 총 36개의 감정카드를 뽑았고, 그 카드를 내담자 앞에 펼쳐주었다. 1분 남짓하는 그 상황에 이렇게 많은 감정을 느꼈을 줄 몰랐다며 놀라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 한 동안 자신이 뽑은 감정카드를 바라보던 내담자는 자신이 그 상황 속 원했던 것(욕구)은 '존중'이었다고 했다.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이 자신의 좌절되었던 욕구까지도 알게 해 준 것이다. 이 내담자는 이 말로 그 회기 상담 시간을 끝마쳤다.


아까보다 좀 후련하네요.

  

  코너의 무의식을 상징하는 몬스터는 코너가 이야기를 함으로써 마음 안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있는 그대로 즉 날 것 그대로 표현하고 자유로워지길 바랬다. 이야기를 통하지 않고는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끝까지 포기하지도 양보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끝내 진심을 뱉어버린 코너, 그제야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어떻게 엄마의 그림책 속 몬스터와 코너가 만난 몬스터가 같을 수 있었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코너가 만났던 몬스터는 엄마의 노트에 있던 그림과 동일했다. 나아가 몬스터가 들려주었던 세 가지 이야기 속 캐릭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이야기'를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죽하면 '이야기는 그 사람이 사는 집이다'라는 표현이 있을까. 코너는 어렸을 적 엄마와 함께 지냈다.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엄마의 가르침으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다. 엄마와 자식은 따로이면서 또 함께하는 존재이자 근원이다. 그렇기에 엄마와 코너의 몬스터가 같은 모습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나 또한 얼마 전 강원도 동해 바다 파도의 매서움 앞에서 이 영화의 몬스터를 떠올렸으니 우리의 상상력이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의 이야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엄마는 꼭 죽어야만 했을까?

  내가 이 영화가 좋았다고 느꼈던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엄마의 죽음 그것은 코너에게 '자유와 독립'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성장은 이별을 의미한다. 이별하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지구 상에 없다. 특별히 부모와의 관계에서 개별화와 분리는 우리에게 절대적인 숙제이다. 이 과제를 잘 풀어야만 우리는 건강한 성인이 되고 그래야 또 우리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 있다.


왜 몬스터 콜이라고 지었을까?

  무언가의 이름은 그것의 존재 목적과 이유를 나타내 주기에 아주 중요하다. 특별히 영화나 소설의 제목은 그 작품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몇 가지 단어로 표현하기에 공동묘지와 같은 버려진 감정의 저장소, 무의식 그것이 코너의 삶으로 끼어드는 것. 코너에게 그것은 보고 싶지도 만나고 싶지도 않은 괴물과 같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의 제목은 몬스터 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몬스터 콜, 그것은 무의식의 부름이다.









  상담실 의자에 앉는 우리 모두는 몬스터 콜에 응답한 사람이다. 무의식이 보내온 초대장에 응했다고나 할까. 이 초대장을 받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초대장을 받고 오지 않는 사람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신의 사랑 안에 있다면 우리는 인생 중 한 번은 꼭 이 초대장을 받는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분명하게 깨달은 한 가지는 이것이다. 무의식의 초대, 그것은 축복이다.



깊어가는 가을, 당신에게도 이러한 축복이 깃들길 나의 신께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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